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21화 (21/530)

< 궁지에 몰리다(1) >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단호한 즉답이었다.

"싫소이다."

"흠, 이유를 여쭐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아라사에 대하여 뭘 안다고 그러시오? 됐소이다. 협상에 관하여는 본인이 전담할 것이오."

기분이 상한 탓에 말투가 조금 거칠게 되기는 했지만, 사실 틀릴 것도 없었다. 김병국이 아라사에 대하여 뭘 안단 말인가? 아니, 기실 이 조선 땅에서 아라사에 대하여 비교적 잘 알고 있는 자들은 함경도에서 모피 사냥하면서 먹고사는 사냥꾼들일 것이다. 박규수조차도 러시아에 대하여는 반쯤 문외한이다. 그냥 막연하게 청나라에서 더 북쪽에서 온 북쪽 오랑캐들-정도가 공통된 인식일터.

그러나 그 정도의 인식만으로는 부족하다. 러시아가 얼마나 거대한 나라이며, 또 얼마나 강력한 나라인지를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은 지난 백여 년간 러시아와 마찰을 빚어온 청나라 정도일 것이다. 아직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성되지 않은 지금도 러시아가 마음만 먹으면 만주까지는 무리 없이 집어삼킬 수 있을 터. 그렇게 하지 않는 건 다른 열강들의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이고 또 아직 극동은 러시아의 핵심이권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프랑스나 미국은 통상이 틀어져서 전쟁이 벌어진다고 해도 조선의 국권이 흔들릴 수준의 위기가 되기는 어렵다. 프랑스는 당장 유럽대륙에서도 적들이 많고, 미국은 아직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과 러시아는 다르다. 그 둘과 통상이 틀어져 무력충돌로 화하게 된다면, 일단 제주도와 함경도는 상실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 만큼, 이들 두 나라의 통상만큼은 서구열강들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이 시대의 조선 관료들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조금 더 체통을 지키시는 게 어떠시려는 지요. 전하, 그와 같은 언행은 이 나라의 어버이로서 적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잠재적인 적들을 늘릴 위험이 있사옵니다."

"그래서 그대도 그들 중 하나라는 거요? 충성을 맹세한 것이 바로 직전일 텐데?"

"전하께서도 믿어주시지 않으셨지요. 물론 거짓말이었습니다."

김병국은 기분 나쁘게 싱글싱글 웃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과 같은 얼굴이었다. 이 경우 먹이는 나겠지. 달리 그와 대화하고 있는 사람도 없으니 말이다. 기분이 한결 더 언짢아졌다.

도대체 이 능구렁이 같은 족속이 무슨 연유로 내 신경을 이렇게 벅벅 긁어대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우선 아라사인들과도 가까운 시일 내에 통상하실 것은 사실이시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렇소만."

"그럼 소신을 보내주십시오. 저들과 통상을 한다면 결국 누군가는 저 북녘땅에 가서 그들과 담판을 짓고 한성까지 끌어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신에게 맡겨주신다면 최선을 다하여 성사시켜 보이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서, 김병국은 꾸벅하고 허리를 굽혀 나에게 예를 표했다. 나의 태도를 보고서 곧장 불손한 모습을 보인 박규수나, 별 생각 없이 나를 고분고분 따르는 민치상, 아예 나를 같잖게 여기는 이하응과 김좌근과는 또 다른 태도였다. 겉으로는 공손하기 그지없었으나, 속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마음에 들지 않아.'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나로서는 차라리 박규수처럼 상대가 받아줄 것 같으면 있는 대로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쪽이 취향이었다. 김좌근과 이하응도 다른 이들의 앞에서라면 모를까 내 앞에서는 내가 같잖아서라도 솔직하게 속내를 보여주는데, 이 자는 달랐다.

여기까지 말하면서도 속내는 단 한 차례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못 미더웠다. 그러나 일을 아예 안 맡길 수도 없었다. 김좌근도 얼마 남지 않은 판국에 김병학-김병국 형제를 등지게 되면 김좌근의 사후 세도가를 통제할 수가 없게 된다. 기분이 더러운 건 더러운 거라도, 지금은 똥이 더러워서라도 물러나 줘야 했다.

"그대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요?"

그런데도 참지 못하고 한마디 내뱉었다. 내가 내뱉고서도 그다지 현명한 발언은 아니었다고 직감할 수 있었다. 인내심 대결에서 패하고 이쪽이 더 궁한 처지라는 걸 보여준 것이다. 역시나 나는 정치인 체질은 아닌 모양이었다. 구질구질하게 말을 돌리고 화를 참으면서 속내를 숨기는 건 내 성미에 안 맞았다.

그러자 김병국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하였다.

"전하께서는 아직 미숙하십니다만, 저희에게는 미처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시는 듯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반드시 저희에게 해가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때에 따라 저희에게 이득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전하의 성은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먹으려 경쟁하려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전부일 리는 없었다. 능구렁이 같은 족속들이고 또 능구렁이 같은 작자이니 필시 또 다른 숨겨둔 속내가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걸 캐묻는다고 해봤자 그가 순순히 대답해 줄 리도 없었다. 알고자 한다면 내가 직접 뒤를 캐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별수 없이, 나는 대충 알겠다고 둘러댄 다음 그날은 이만 헤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다음 날 김병국은 아라사에 다녀오겠다고 어전회의에서 말을 꺼내고서는 수행원들과 함께 러시아로 떠났다.

그리고 나흘 후, 섭정공 특별명으로 보부청이 설립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보부상들의 활동을 나라에서 직접 관리·감독하기 위함이라고 했지만-뭐, 실상은 알고 있다시피 정치깡패 집단에 가까웠다. 당장 경상 담당에 천희연, 송상 담당에 하정일, 유상 담당에 장순규, 내상 담당에 안필주 등 대놓고 이하응이 사적으로 부리던 호신용 주먹패들이 배치된 것만으로 설명은 충분했다.

물론 보는 눈이 있어 대놓고 그들에게 관직을 내주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보부상들로부터 천거를 받았다는 형식으로 민간대표 자리에 저 천하장안 패거리들이 한 자리씩 꿰차고 앉은 것만 봐도 누가 실세인지야 뻔한 것이 아닌가.

"우리 턱 터놓고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제가 말씀을 드렸을 적부터 이미 이럴 작정이셨던 거 아닙니까?"

"아무렴 성상께서도 하신 생각을 제가 하지 못했겠습니까? 주상께서 궁인들이 보는 앞에서 입을 가벼이 놀리신 덕분에 조금 예정보다는 빨라지기는 했어도 대체로 계획대로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행동이 너무 빨랐던 거 아닌가 싶어서 또 사사로이 처소에 불러 속내를 캐니, 예상한 그대로의 대답이 나왔다. 내가 보부상들에 관하여 이야기할 무렵에는 이미 진작부터 그런 비슷한 구상을 해왔다는 것이었다.

그 대답에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져 되물었다.

"아니, 그러면 그때는 왜 모른 척하셨습니까? 이미 그럴 작정이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듣는 귀가 많고 보는 눈이 많지 않습니까. 제가 장차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저들에게 모두 보여줄 필요는 없지요. 흠, 이건 주상께서 듣는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울컥.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사람들 보는 앞에서라 조심했다-라는 것이었다. 너는 세상 사람들 보는 앞에서도 조심성 없이 되는대로 떠들고 다녀서 좋겠다는 비아냥은 덤이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딱히 부정할 수도 없었다. 나 자신도 내가 얼마나 되는대로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막 보여주고 살고 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나 자신이 그런 줄은 알고 있었던지라, 화는 나면서도 미처 터뜨리지는 못했다.

"언제 어디서나 듣는 귀가 있다고 생각하시고,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전하께서는 장차 이 나라를 다스리셔야 하는 분이십니다. 조금은 세간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주상께는 적이 많습니다. 지금보다 더 늘릴 필요는 없겠지요."

"적이 많다, 라. 흠, 남 말처럼 하실 말씀은 아니시구려. 적이 많은 건 피차 마찬가지 아니었소?"

"그러니 저는 제 명에 죽으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돌아가시면 저도 섭정공 노릇은 더는 못하게 되니, 잔소리 한번 해보았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서 이하응은 시간이 이미 늦었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내 처소를 떠났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이하응에게 말려들어 잔소리만 듣고 보내준 셈이 되었다. 당연히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김병국 그 작자와 만날 때보다는 덜했다.

그 작자가 비꼬는 것이었다면, 이하응은 일단 자신의 권력에 필요해서라고는 하지만 최소한 내 신변을 우려해주는 기척은 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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