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지에 몰리다(2) >
"꼴에 자식새끼는 귀하다는 건가. 허, 참. 그래, 오래 살아야지. 앞으로 할 일도 많은데."
뭐, 그게 진짜 부정이었는지 아니면 제 권력 기반이 조금이라도 오래 살기를 바라는 권력욕이었는지야 나도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전생에서도 부정이라는걸 경험해본 적 없는 내가 어떻게 판단할 소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 만큼 나는 일단 그날의 일은 묻어두기로 했다.
이하응이 보부상들을 동원하여 개혁에 저항하는 지방의 유림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한 이후, 조선은 일단 최소한 자신이 아직 목숨 줄이 붙어있다는 것만큼은 전국 각지에 널리 알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폭력을 동반한 만큼 고운 소리만 나온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본격적으로 지방에 행정력이 투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덕분에 그동안 지방에서 각자 알아서 잘 키우고 있습니다! 라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던 지방군의 규모나 군수들이 적당히 적어서 올리던 지금까지 모집된 의병들의 숫자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중앙이 8천 명, 지방이 다 합해서 5천여 명 정도로 합하면 1만 3천여 명. 그에 반하여 지금까지 모여든 의병들의 숫자가 경기도 2만에 삼남도 6만여 명에 북방 3도가 3만여 명, 합하여 11만 명이라고…."
어전회의에 모여든 관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딱딱히 굳어있었다. 물론 나라고 해서 편할 리도 없다.
불과 반년하고 조금 더 되는 기간 밖에 안되는 그 짧은 새에 조선 8도를 모두 합하면 자그마치 12만 3천여 명에 달하는 대군세가 모여들었다. 이 자체는 고무적이다. 문제가 있다면, 관군이 모두 합하여 1만 3천여 명이고 지방군은 그 와중에 뿔뿔이 흩어져 있으니 실질적으로 당장 동원할 수 있는 건 세도가에서 필사적으로 지난 반년간 충원한 오군영 8천여 명이 고작인데 조선 8도에 모여든 의병들은 다 합하여 11만 명이란다.
이들 모두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활약해준다면야 그야 더 바랄 것도 없다. 그러나, 과연 정말로 이들 모두가 청나라와의 전쟁을 위하여 스스로 군세를 모아준 이들일까? 그럴 리가 없다. 이 조선 8도에 역모 그 두 글자 한번 생각해본 적 없는 충심 깊은 지방세력가가 과연 있기는 할까? 조선이 대충 망하고서 그 껍데기만 남아있는 상태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도 말이다.
즉, 어전회의에 모여든 관료들 모두가 이러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의병들이 여차하면 청나라와 싸워주는 게 아니라 한양으로 진격하려고 드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방 향림들의 여론은 어떻소?"
"우선은 고무적입니다. 반청복명이라는 알기 쉬운 명분 덕분인지, 저들의 전의는 하늘을 찌를듯합니다. 다만…."
도승지 민치상은 보고를 하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그가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는지는 나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과연 그게 진짜로 반청복명의 대의에 열광 중인 것인지, 아니면 반청복명이라는 명분을 핑계 삼아 사병들을 모아서 장차 역성혁명을 꿈꾸는 것인지 판단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하응과 김좌근의 안색 또한 어두웠다. 일단 청나라와 사실상의 전시상황에 돌입하면서 당장 병졸들이 모자라다 보니 사병 육성까지 허용해가면서 병졸들을 끌어모으려 했지만 정작 그동안 과팽창한 세도 가문의 전횡에 지방향림들의 분노가 얼마나 드높게 누적되었는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모두 없었던 일로 하고 해산시킬 수도 없다. 아무튼, 의병보유를 허락해 준건 조정이고, 또 그들을 격려한 것도 조정이었다. 그리고 아직 청나라와의 전쟁조차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은 지금, 진짜로 있는 것인지 알 수도 없는 역모를 이유로 이미 모여든 병졸들까지 해산한다면 조정도 더는 지방을 믿을 수 없고 사비를 털어서 의병을 조직한 지방은 더는 조정에게 협력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결국, 자가당착이다. 적어도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우선 지방의 역모 따위는 없다고 전제한 다음에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경기권만으로 2만이라….'
나는 흘긋 김좌근과 세도가를 흘겨보았다. 하나같이 나와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고 피하려 들 뿐이었다. 뭐, 그럴 만도 했다. 세도가는 기본적으로 경기권의 명문가문들이었다. 그럼 경기도 의병만 2만이라는 건 결국 세도가에서 직접 육성한 사병집단이라는 이야기였다.
오군영은 그나마 명령권이나마 나에게 있지, 저들은 어떻게 통제할 여지가 없다. 어쩌면, 아니 아마도 틀림없이 중앙군보다도 지금 저 경기도 의병 2만 명이 잘 먹고 잘 무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냥 조선의 실질적인 중앙군은 저들 경기도 2만 명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이거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안동 김씨 조선이 새로 들어서는 거 아닌가 싶은데.'
"왜관을 통해서 들여오라 시켰던 서역의 화기들은 어떻게 되었소?"
나는 애써 불길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고서, 예조판서 홍종응에게 일전에 예조에 시켜두었던 신식화기 도입에 관하여 물었다. 본격적인 물량확보는 물론 서역 열강들과의 통상 이후에나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일부라면 지금이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홍종응의 낯빛은 어두웠다.
"…왜국도 최근 전운이 감도는지라 당장 그들이 소비할 물량만으로 벅찬 듯합니다. 특히나 우리 조선과 가까운 구주 등지의 영주들이 전란의 대비에 가장 적극적인 모양인지라, 온 영지의 백성들을 무장시키느라 죽창마저 모자란 실정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몇 정이나 모아두었소?"
"총기는 10정, 화약과 탄환은 60여 발 정도로…송구하옵니다."
허,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저걸로는 소대는커녕 분대 하나 다 무장시키기도 어렵다. 그리고 고작 총탄 60여 발로 무엇을 하겠는가? 한 사람당 6발씩 쏘면 끝인데 말이다. 저 정도 물량으로는 궁이나 지키게 해야지 전쟁에서 쓸 게 못 되었다.
하다못해 소대 정도는 되어야 특수전 용도라도 써먹을 거 아니겠는가?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상국과 타협하고 우선 저 역도들부터 쓸어내야 하옵니다. 전하! 겉으로는 반청복명을 외치고 있으나, 저들이 실상 무슨 꿍꿍이일지 어찌 안단 말입니까!"
"그게 무슨 소리요? 전하, 안 될 말씀이옵니다. 감히 주제넘은 망발을 입에 담은 형조판서 임태영을 벌하소서! 지금 조선에게는 10만에 달하는 정병이 있는데, 어찌 감히 항복을 입에 담는단 말입니까! 엎드려 청컨대 항복을 논하는 간신들을 치고 삼봉과 태조 대왕의 대업을 이루소서!"
"전하, 서역의 군세는 실로 강력하여 한때나마 북경을 정복하였습니다. 그들과 손을 잡으소서. 옛 조무령왕은 대업을 위하여 호복을 입어 북적 오랑캐들의 마음을 얻어 조나라를 중흥시켰습니다. 작금의 정세가 어찌 그때와 다르겠습니까! 전하, 서역의 군세로서 청을 멸하소서! 그리하여 주명의 복수를 다 하소서!"
'젠장, 이거 진짜로 되는 게 없어.'
한순간 어전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타협을 논하는 쪽은 아예 빠져나갈 구석도 없이 꽁꽁 묶인 안동 김씨와 달리 빠져나갈 구석이 남아있던 풍양 조씨의 일파였고, 여전히 해봄 직하다고 주장하는 건 당연히 빠져나갈 구석이 없던 안동 김씨의 일파였다.
그렇게 세도가끼리 서로 내분으로 다투는 와중에 흥선군 이하응이 끌어온 신진세력들은 진심으로 반청복명의 대의명분에 감화된 듯 오랑캐들과 화친하여 청나라를 치자는 내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간악한 작자들인지도 모르고서 말이다.
슬쩍 김좌근을 돌아보니 그도 대책이 없는 듯 세도가의 내분 속에서 한발 물러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반대로 이하응을 돌아보니 별생각 없이 서역의 군세를 끌어들이자는 의견을 내놓고 있는 신진 관료들을 질린듯한 시선으로 흘겨보고 있었다. 결국, 저 두 사람도 점점 자신들의 지지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난세였고, 난장판이었다. 어떻게 수습할 여지도 없었다.
'우라질, 이제 더는 안 돼. 일단 당장 지금의 조선으로 준비할 수 있는 건 모두 준비했고 저지를 수 있는 건 모두 저질렀다. 이 앞으로는 열강 놈들과 어떤 식으로 건 담판을 짓고 난 다음에야 뭐라도…!'
그러나 한양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로서는 그저 막막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베르뇌 주교, 김병국, 박규수.
이 세 사람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하루라도 빨리 서역의 공사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와 주기를 기다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