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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고종대왕 일대기-23화 (23/530)

< 일본에서(1) >

'참으로 장관이로구나.'

조선이 비루한 현실 속에서 의심과 분열로 자가당착에 빠져 있을 무렵.

일본 통신사 박규수는 이 무렵 에도에 들어서고 있었다. 본래 한양에서 에도까지 8개월에서 1년으로 길고 긴 시간이 필요한 조선통신사의 행렬이었으나, 이번 방문의 경우 일단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의 전쟁에 필요한 원군을 청하러 가는 것이었던 만큼 최대한 행차 도중에 행사는 간결히 하고서 에도까지 강행군을 감행한 탓이었다.

이에 이번 조선통신사의 방문으로 권위를 드높이려 했던 에도 막부에서는 아쉬움을 보였지만, 쿄의 조정에서는 반색했다. 그 결과로서 박규수가 시모노세키에 상륙하여 쿄토를 걸쳐 에도까지 가는 기나긴 여정 중 환영행사는 상륙 때를 마지막으로 한 번도 없었다가, 에도에 막 들어서던 무렵 한 번에 모아서 진행되었다.

다 꺼져가는 막부 정권의 생명을 불태워 피워낸 조선통신사 환영행사는 실로 휘황찬란했다. 박규수가 한눈에 보기에도 족히 수만은 될법한 환영인파에, 그가 탄 가마의 앞뒤로 영차영차 하고 흥을 돋우고 있는 광대들과 악사들만도 1천여 명은 족히 넘었다.

여기에 엄중한 군기를 과시하고 있는 친 도쿠가와 다이묘들의 사병들과 막부의 신식군까지 합하면 숨이 절로 막히는 듯했다. 그 때문에 박규수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지난 반백 년간 세도 가문들이 나라를 좀먹으며 되려 퇴화해버린 조선과 달리, 이들은 쇠했다고 하나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위세를 뽐내고 있지 않은가.

"저들 중 백여 명이라도 조선에 있었더라면…."

그 무엇보다도 박규수를 애태운 것은 에도 막부에서 과시한 서역 군사고문단으로부터 훈련받아 어설프게나마 열강군 흉내를 내고 있던 신식군이었다. 그는 비록 저들이 실전에서 어느 정도의 위력을 보여줄 줄 몰랐지만, 적어도 구식 조총조차 넉넉히 보급받지 못한 조선군에 비하면 월등히 강하리라는 것만은 알았다.

물론 막부의 신식군이라고 속사정까지 편치는 못했다 일단 서방에서 파는 대로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병사들부터 무장한 탓에 보급도 일원화되지 못했고, 후일 무진전쟁기에 증명되듯이 병사들의 조련에만 힘쓰고 그들을 지휘할 지휘관의 질적 수준은 여전히 형편없던 탓에 5배에 달하는 수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신정부군에게 패배하고 만다. 결국, 겉만 번드르르했던 셈이다.

그러나 그 겉만 번드르르했던 신식군조차 없는 조선의 현실에 비하면 이는 엄청난 격차였다. 박규수는 동경과 두려움의 시선으로 사열에 나온 막부군 전열보병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저들이 바로 그 소문의 색목인들인 것 같습니다."

상념에 잠겨있던 그를 깨운 것은 그와 함께 통신사에 따라온 역관 김계윤이었다. 그가 손끝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니, 과연 일본인들과는 한눈에 봐도 전혀 다르게 생긴 이들이 생전 처음 보는 복식을 하고서 그들의 행렬을 구경하고 있었다. 조선과 달리 일본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역과 통상하고 있었으니, 아마도 그들은 이 에도에 머무는 외교관들과 그 가족들인 듯했다.

'세로 청백적 문양에 가운데 독수리 문양이 있으면 불란서, 희고 붉은 가로줄들과 좌측 상단에 청색 배경 위로 하얀 별 문양들이 있으면 미리견, 청색 바탕에 적색 십자 무늬가 정자로 한번 기울여서 한번 겹쳐있으면 영길리라고 하셨다.'

박규수는 머릿속으로 그의 어린 소년 왕이 일러준 서역 열강들의 국기를 떠올렸다. 다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저 극동의 신기한 문물을 구경하러 나온 것뿐인 저들이 휴대하기도 번거로운 국기를 들고 나왔을 리도 없었다. 그나마 사열하는 막부의 병졸들과는 별개로 구경나온 공사 일가족을 호위하던 병사들의 옷 색깔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빛이 감도는 어두운 청색의 군복이었다. 박규수는 그들이 과연 어느 나라의 병졸들일까 고민하다가, 결국 판단을 포기했다. 불란서고 영길리고 미리견이고 국기에 푸른색이 안 들어가는 나라가 없었다. 겨우 군복의 색깔만으로 맞추기란 사전지식이 부족한 박규수로서는 너무나도 어려웠다.

"우리 조선이 너무 그동안 안일하게 지내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암울하게 말문을 연 건 역관 김계윤이었다. 그 또한 그동안 말로는 지난 세월 동안 일본에서 무언가 변란이 연달아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짐작했지만, 여기까지 별세계가 되어있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시모노세키 근해를 제집처럼 들락거리던 거대한 양이들의 함선들과 나날이 훈련에 전념하며 어떻게든 서구열강들의 병사 조련법을 흉내 내던 각지의 영주들. 그리고 이미 기천에 달하는 신식군을 육성하는 데 성공한 에도 막부의 모습까지.

무엇 하나 충격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고, 무엇 하나 두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간 조선이 세도가들의 전횡 속에서 곪아가고 있는 중, 일본은 현실을 받아들이고서 살아남기 위하여 힘차게 발버둥 치고 있었다.

박규수를 감시하려 김좌근이 붙여둔 김좌근의 양아들이자 이번 조선통신사의 부사 김병기는 첫날 시모노세키에서 남산만 한 크기의 양이들의 전함을 목도하고 혼비백산한 이래로 말이 없었다. 얼핏 시선을 돌려 박규수의 뒤로 따라오고 있는 김병기의 가마를 보니, 막부 신식군의 위용에 영락없이 혼이 빠진 모양새였다.

박규수는 그저 한숨을 푹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안일하게 지내왔었지. 그러나 아직 손도 쓸 수 없을 만큼 늦지는 않았을걸세.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면 되는 거 아닌가? 전하께서는 생각이 깊으신 분이시라네. 우리는 그저 그분을 믿고 최선을 다하세나."

'정말로 늦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입으로는 다독이고 있어도, 박규수의 속내는 어두웠다. 그는 머릿속의 한양과 지금 그의 눈앞에 보이는 에도를 대비시켰고, 막부의 신식군과 조선의 오군영을 대비시켰다. 이미 결론은 나와 있는 듯 보였지만, 차마 조선의 녹을 받아먹으며 살아온 관료로서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박규수는 그저 그가 기대하는 대로 그의 어린 소년 왕이 모든 것을 바꿔주리라 믿는 수밖에는 없었다.

"하오나…."

무언가 말하려 한 김계윤이었으나, 그의 말은 도중에 멈췄다. 행렬이 멈췄기 때문이었다. 정이대장군, 조선에서 부르기로는 대군이 기다리고 있는 에도성에 도착한 것이다. 드넓은 해자와 성벽 너머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는 천수각이 보였다. 이제 초저녁으로 해는 저물었는데도 성안은 여전히 낮과 다를 바 없이 빛나고 있었다. 있는 대로 횃불을 밝혀 오랜만에 막부의 위엄을 뽐내려 하는 모양이었다.

저들의 정치적 도구로써 이용되고 있다는 생각에 박규수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어차피 조선 또한 일본을 단지 서구열강들과 만남을 주선하기 위한 장소로써 이용하려는 상황이었다. 피차 이용하려 드는 건 마찬가지였으니, 지금은 짐짓 모른 체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성안에 들어서고는 또 다른 별천지가 펼쳐졌다. 성 밖 시가지에서부터 따라온 막부의 신식군이 에도성의 드높은 천수각을 등지고 본격적으로 진을 갖추고 오와 열을 맞추자, 천하에 감히 저들을 당해낼 군세가 없어 보였다. 예포 소리는 천둥과 같았고, 성벽 곳곳에 배치된 생전 처음 보는 서역의 화포들은 한눈에 봐도 엄중히 관리되고 있는 듯했다.

성안의 시종들과 문무백관들의 복식 또한 쿄토에서 자세히 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간 이들과는 크게 차이가 났다. 영락없이 에도가 쿄토를 압도하는 모양새였다. 만일 쿄토에 도읍하고 있는 자들과 에도에 도읍하고 있는 자들이 맞붙게 된다면, 십중팔구는 에도에 도읍한 자가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박규수는 생각했다.

'전하의 말씀대로라면 왜국의 대군은 지금 권력을 되찾으려는 왜국의 왕과 다투는 중이라고 하였는데…그 위세가 여전히 대단하구나. 이래서야 머지않아 왜국의 대군이 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는 건 아닌가?'

"하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이대장군 전하께서는 이번 방문에 크게 기뻐하고 계십니다. 필시 귀국에서는 바라시는 모든 것을 얻어 돌아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런 박규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쿄토에서부터 그를 따라온 곤도 이사미라는 이름의 왜인은 호방하게 웃으며 그렇게 설명했다. 물론 그가 조선어를 할 줄 알리도 없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에 대하여 알려준 건 박규수를 따라온 역관 김계윤이었다.

듣자 하니, 그는 쿄토의 치안을 관리하는 신센구미라는 조직의 장이며 또한 그들의 주인인 마츠다이라 가타모리라는 왜인은 도쿠가와의 중신이라고 했다. 그런 자가 과연 쿄토를 비우고 에도까지 그를 수행하러 따라와도 되는가 박규수로서는 의문이었지만, 곤도 이사미라는 왜인의 설명은 이러했다.

"지금 이 일본 땅에 귀하들을 살해하려 드는 폭도들이 몇이나 되는 줄 아십니까? 당장 귀국에서 일본국을 방문해주시지 않으셨다면 진작에 조슈 놈들이 사달을 일으켰을 겁니다. 쓰시마로 돌아가실 때까지는 마음을 놓지 마십시오. 언제 어디에서 폭도들이 덮쳐올 줄 모릅니다."

즉, 현재 에도 막부에게는 일본의 명목상 수도 쿄토의 치안을 지키는 것보다도 조선통신사 일행의 목숨줄을 지켜주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조선통신사는 등불이고, 그들을 노리는 정한론자 존황양이파 폭도들은 날벌레들이라는 해석도 가능했다. 온 나라의 폭도들이 조선통신사를 죽이려 달려들다 보니, 쿄토 수호직인 신센구미마저 동원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박규수는 에도성까지 올 때까지 한 번도 저들이 말하는 폭도들과 마주친 적은 없었다. 다만, 이따금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를 호위하던 호위무사들이 숫자가 줄어있거나 어딘가 편치 않은 기색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는 것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일본도 현재 상황이 여의치만은 않다는 증거였다. 박규수는 새삼 한줄기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부터는 가마에서 내려서 가시지요.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곤도 이사미의 안내에 따라 가마에서 내린 박규수는, 궁인들의 안내를 받으며 본성으로 들어섰다. 박규수는 그를 바라보는 막부의 고관들에게서 기대의 시선과 함께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긴장감을 전해 받을 수 있었다. 몇몇은 필사적으로 그의 팔다리를 살피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단순한 연기가 아니었다. 박규수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역시나 그가 보지 않는 어딘가에서는 조선통신사 일행의 신변을 지키려는 에도 막부와 조선통신사 일행에게 해를 가하려는 존황양이 무사들의 충돌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 왕에게서 일본국의 속사정을 전해 듣지 못했던 여타 통신사 일행들도 고관들이 하나같이 그들의 팔다리가 멀쩡한지 먼발치에서나마 필사적으로 살피는 기척을 느꼈는지, 점점 표정이 딱딱히 굳어갔다. 부사 김병기의 경우에는 아예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권력과 가까운 그였던 만큼 막부의 고관들의 반응에서부터 자신들이 스스로 의식하지는 못한 사이에 무수한 생명의 위협을 넘겼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일본의 위태로운 사정을 알게 되었다고 해봤자 무의미한 일이었다. 문이 열렸고, 그들의 앞으로 권좌에 앉은 이제 갓 서른도 되지 않았을 젊은 정이대장군과 그의 좌우로 무릎을 꿇고 있는 도쿠가와의 가로들이 나타났다.

도망치려는 기척을 보일 새도 없이, 통신사 일행은 우선 왜국의 정이대장군에게 고개 숙여 예를 표해야 했다.

"먼저, 본디 병인년에 있어야 했을 방문을 앞당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관용에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전하께서는 왜국에는 큰 기대는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박규수였다. 본래 조선통신사의 방문은 2년 후인 병인년으로 이야기되고 있었으니, 기존의 일정을 깨고서 집주인의 사정을 헤아리지도 않고 다짜고짜 방문한 격이 되어버린 조선이었다. 번드르르한 말뿐이라고 해도, 사과해서 인상이 나쁘게 박힐 이유는 없었다.

"그런 말씀 마시오. 이웃이 어려운데 어찌 돕지 않을 수 있겠소? 본인은 귀국에서 먼저 기별을 주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르오."

동행한 역관으로부터 박규수의 말을 전해 들은 정이대장군은, 인자한 미소를 만면 가득히 띄우며 그렇게 답했다. 박규수가 자주 보아왔던 안동 김씨 일가의 능구렁이 미소와 꼭 닮은 미소였다. 박규수는 눈앞의 정이대장군이 아직 젊을지언정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러나 정이대장군의 인자한 얼굴은, 박규수에게서 건네받은 소년 왕의 친서를 건네받은 직후 일그러졌다. 불쾌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황한 기색에 가까웠다. 소년 왕으로부터 왜국은 덤이고 서구열강들과의 통상이 진짜라고 전해 듣고 있던 박규수는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그대들은 이 친서의 내용을 알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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