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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고종대왕 일대기-24화 (24/530)

< 일본에서(2) >

"전혀 전해 듣지 못했사옵니다."

"흠, 조선 국왕 전하께서는 상당히 우리 왜국의 사정을 꿰뚫고 계신 모양이시구려. 미처 짐작하지도 못했소."

한참을 침묵하다가, 정이대장군은 그렇게 입을 열었다. 당연히 친서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통신사 일행으로서는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그와 대동한 막부의 고관들 또한 이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통신사 일행의 반응이 의문이었다면, 그들의 반응은 경계였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달랐다.

일동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정이대장군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조선국왕께 전하시오. 귀국의 근심은 잘 알겠으니, 감히 정한(征韓)을 입에 담는 폭도들은 이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이름으로 감히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오. 그리고 조슈의 역도들을 벌하는 일을 돕겠다는 뜻은 감사하나 귀국 조선 또한 청과의 분쟁으로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것으로 알고 있소.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친히 군사를 몰아서라도 귀국을 돕고 싶으나, 지금의 과인에게는 그만한 힘은 유감스럽게도 없소이다. 그러니, 행운을 빌 따름이라오."

한동안 역관으로부터 통역을 듣지 못하여 어리둥절해야 했던 통신사 일행들과는 달리, 정이대장군의 교시를 전해 들은 막부 고관들의 얼굴은 시시각각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이후 냉정함을 되찾은 역관 김계윤의 통역으로 내용을 전해 들은 통신사 일행 또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정한(征韓). 글자 그대로 조선을 치자는 주장이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 그런 주장이 퍼져나가는지도 몰랐던 통신사 일행으로서는 그 뒤에 조슈가 어떻고 지원군이 어떻고 하는 부분은 귀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임진년의 악몽은 여전히 조선인들의 머릿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청을 척진 오늘날, 만에 하나라도 일본이 또다시 침공해온다면 도대체 무슨 수로 그것을 막는단 말인가? 박규수를 비롯한 통신사 일행은 그들의 어린 군주가 도대체 무슨 수로 왜인들이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걸 알아챘는지 의문스러워하면서도 감탄했다.

그와는 반대로 막부 고관들의 경악은 조슈에 관한 부분이었다. 불과 2달 전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4개국의 연합군이 조슈를 공격하여 나흘 만에 항복시켰고, 이로 인해 대표적인 반 막부파였던 조슈번이 쇠약해지면서 막부에서도 때마침 조슈 정벌을 위한 토벌군을 모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조선 국왕이 그 사실을 알고서 조슈 토벌을 지원하겠다 나선 것이다. 당연히 청나라와 대치하는 와중 군대를 파병하는 것이 가능할 리도 없으니 말뿐이었지만, 이는 조선에서도 일본의 사정에 대하여 깊이 탐색 중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한가지 말하지 않은 것이 더 있었다.

'정략결혼이라….'

조선과 일본의 정략결혼이 아니었다. 막부와 조정의 정략결혼이었다. 도쿠가와 가문과 천황가의 피를 섞어서, 권위를 가진 천황가와 실권을 쥔 도쿠가와 가문을 합치라는 조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막부에서 공무합체를 통하여 추진 중인 정책이기도 했다. 현실적으로는, 막부의 권위가 회복될 새도 없이 나날이 깎여나가기만 하고 있었던지라 꿈속의 꿈이었지만 말이다.

'거기에 조선과의 교류를 이용해보라 이건가.'

흔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환생이라 불렸던 너구리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비릿한 미소를 띄웠다. 물론 본격적으로 조선과의 교류를 재개하자면 우선 그 전에 조정의 형식적인 인가가 필요하겠지만, 조정도 떨떠름해 할지언정 차마 반대할 수도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조선에 더 큰 관심을 보여온 것은 정한론의 총본산 조슈와 사쓰마가 속해있는 쿄토의 조정 쪽이었다. 그들이라고 막부에서 권위를 세우려 한다는 걸 모를 리도 없겠지만, 막부에서 먼저 조선과 교류를 재개하자고 나서면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조선과의 본격적인 교류가 재개되고 다시금 조선통신사 일본국왕사가 활발히 오가게 되면, 자연히 에도 막부는 다시금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된다. 아무튼, 조선이 인정하는 일본의 정통 정부는 에도 막부이니까 말이다.

'물론 공짜는 아니겠지.'

그렇기에 요시노부는 동시에 조선에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도 깨달았다. 여기까지 일본의 국내 사정에 꿰뚫고 있으면서 원군을 청한다는 건 겉치레임이 틀림없었다. 틀림없이 본심은 서구열강들과의 통상일 것이다. 당장 청과의 갈등을 빚고 있는 조선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서역과의 교류가 절실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에게 있어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서구열강들이 강성해도, 청과 일본과 조선을 동시에 침탈하자면 힘이 달릴 것이다. 요컨대, 조선이 수탈 당하는 만큼 일본은 조금이나마 덜 수탈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 이 기회에 아예 우리 일본국을 통하여 조선을 구라파인들에게 소개한다면 구라파인들은 조선이 우리 일본에게 의지하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요시노부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결심이 섰다.

"그러나, 조선국과 일본국은 지난 200년간 오랜 우방으로 지내왔소. 그런데 오늘날 조선국에 닥친 위기를 오랜 우방으로써 어찌 보고도 못 본 척 할 수 있겠소? 비록 과인이 부덕하여 직접 조선국을 도울 수는 없겠으나, 조선국을 돕고자 하는 서역의 의인들은 소개해드릴 수 있소이다. 그들은 또한 반청의 기치에 있어서는 뜻을 함께하고 있으니, 필시 조선국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오."

"그것이 진정 사실입니까?"

뜻하지 않게 일본의 정이대장군이 직접 서역인들과의 통상을 주선해주겠다고 먼저 나서자, 박규수는 반색하여 눈을 반짝거렸다. 그의 소년 왕이 본래 그에게 명했던 것 또한 일본국과의 국교회복이 아니라 서역인들과의 통상 쪽이었으니만큼, 뜻하지 않게 일거양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모습에, 요시노부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저 조선인들도 직접 경험해보고 난 다음에야, 서역인들이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실감할 수 있을 터였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가벼운 인사치레였다. 조선은 뭐 어떠한가. 청과 대치하느라 참 고생이 많겠다. 충신들이 이렇게 많으니 조선의 앞날도 밝을 것 같다. 일본국이야말로 이토록 대군이 어지니 앞날이 창창할 것이다. 조정에서도 머지않아 대군의 충심을 알아줄 것이다. 뭐 그런 식의. 별 의미 없어 보이면서도, 양국의 우호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주고받음이었다.

각자 빠듯한 살림이나마 준비해온 공물까지 주고받고 나자, 분위기는 한층 화기애애 해졌다. 그날 밤 에도성에서는 화려한 축하연회가 열렸다. 정이대장군의 명령으로 막부에서 보관 중이던 서역의 진귀한 술들과 생전 보지 못한 진귀한 열대과일들이 상을 가득 메워 연회의 흥을 돋웠다.

"흐흐흐, 예쁜아. 어디 이 조선 남아의 참맛을 보자꾸나-."

"아잉, 왜 이러십니까 나으리~."

그러나 단연 그중에서 으뜸이었던 것은 장군 명령으로 오늘을 위하여 수배되었던 요시와라 유곽 제일의 기녀들이었다. 하반신의 정욕 앞에서는 언어의 장벽 따위 아무래도 좋았던 모양이었다. 이미 술에 얼큰하게 취하여 제 버릇이 그대로 드러나기 시작한 김병기는, 이곳이 조선 땅이 아니라 왜국 땅이라는 사실조차 잇고서 말도 통하지 않는 기녀들을 품 안에 끼고서 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탓하기도 뭣했다. 연회가 한창 이어지고 술이 한병 두병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통신사 일행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흐트러진 모양새였다. 지난 반백 년간 세도가의 전횡 속에서 도덕적 타락을 거듭해온 조선의 관료들에게, 정이대장군이 온 힘을 다하여 준비한 에도의 향락은 너무나도 자극이 강했다.

물론 조선통신사의 부사를 맡은 김병기의 책임과 의무를 생각하면, 그리 좋은 평가가 나올 수도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지만.

"아잉, 나으리. 그렇게 점잔 빼지만 마시고 한잔 더 드시어요-."

"그만. 본관은 이미 충분히 취하였고 대군 전하의 배려에는 감사드리는 바요. 그러나, 그렇기에 대군 전하께서 보시는 앞에서 실례를 드릴 수는 없소이다."

"너무 그렇게 빼시지 마시고-."

"어허, 이 년이 그래도!"

하나둘씩 어딘가로 사라져 들썩들썩 이는 와중 유일하게 이성을 지킨 사람은 박규수뿐이었다. 조선의 사신들이 일본 땅에 오기 전부터 작정하고 막부에서 조선어라도 가르쳤는지, 기녀들은 다소 발음이 어색하기는 해도 제법 능숙한 조선어로 그를 졸라대고 있었다. 물론 그라고 해서 유혹을 견디지 쉬웠을 리는 없었다. 예로부터 뇌보다 강한 것이 이 배꼽 아래의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는 조선통신사의 정사였고, 곧 총책임자였다. 설령 부사 김병기를 필두로 통신사 일행이 전부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도, 그만은 조선의 선비로서 정자세를 보여야 했다. 그리고 이런 생판 모르는 이국땅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건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노골적인 거절에도 기녀는 꺼리는 기색도 없이, 까르르하고 웃었다. 술에 얼큰하게 취한 듯, 볼에는 홍조가 떠 있고 눈빛은 게슴츠레했다. 이윽고 기녀는 그의 귓구멍으로 혓바닥을 집어넣으려는 듯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것을 피하려 고개를 틀려 한 박규수였으나, 뜻밖의 말이 귓가로 들려왔다.

"장군 전하께서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정원으로 가시지요."

"그것이 무슨…!"

"이잉, 섭섭해라. 나으리, 제가 그렇게 여자로서 매력이 없나요오? 자꾸 피하기만 하시네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박규수였으나, 조금 전 그에게 장군의 밀명을 전한 기녀는 여전히 술에 취한 듯 까르르하고 웃으며 영락없는 취객의 행세를 하고 있었다. 연회장에서는 여전히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그가 제법 큰소리를 내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음에도 그에게 향하는 시선이라고는 없었다.

"에잉, 나리 벌써 많이 취하셨네. 호호호, 저랑 같이 가요. 걸으실 수는 있지요?"

"아니, 나는-."

"자꾸 빼지 말고 저와 함께 가요-. 정말로 눈치 없으신 분이시네에."

그래도 그가 여전히 상황을 읽지 못하고 헤매고 있자, 술상을 나르던 기녀 하나가 다가와 그를 부축하여 걷기 시작했다. 말이 좋아서 부축이지, 실상 연행이었다. 보기와 달리 근력도 상당하여, 힘으로 뿌리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어어, 하고 끌려나가고 있으니, 기녀 옆으로 또 시종 하나가 다가와 그의 반대쪽 팔까지 잡고 부축하였다. 그쯤 되니 더는 버티고 서있을 수도 없어, 박규수는 꼼짝없이 연회장 밖으로 끌려나갔다.

그 끝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정원에서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고 있던 정이대장군이 서 있었다. 그를 이곳까지 데려온 기녀는 장군을 향하여 꾸벅하고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시종만큼은 떠나지 않았다. 그의 호위무사, 혹은 역관일 터였다.

그제야 이 모든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은 박규수는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박규수를 향하여 정이대장군은 빙긋이 웃어 보였다.

"늦었구려. 충심은 제법 깊으신 듯하나,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원. 기다리느라 심심해서 혼났소이다."

"…그것은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한직만 돌다가 이렇게 중용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인지라, 미처 헤아림이 늦었습니다."

"허허, 그거 유감이구려. 그대와 같은 충신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다니, 참으로 조선에게는 유감인 일이오."

보아하니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남은 시종은 역관인 모양이었다. 역관은 자세를 굽힌 채 실시간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통역해주었다.

그러나 시종일관 태연한 모습인 정이대장군 요시노부와 다르게, 박규수는 이 자리가 영 불편했다. 이 자리를 마련한 요시노부는 무언가 볼일이 있어서 박규수를 불러낸 것이었겠지만, 박규수는 그에게 큰 볼일이 없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서역의 공사들에게 더 볼일이 많았다.

요시노부는 그것 정도는 헤아리고 있다는 듯 씨익 웃더니, 짝짝하고 두 번 손을 마주쳐 신호를 주었다. 그리고 얼마 뒤, 말끔한 양복을 차려입고 상투를 자른 일본인 신사의 뒤를 따라 한 사람의 색목인이 나타났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색목인을 보는 것이 처음이었던 박규수는 눈이 동그래졌다.

"인사하시오. 주일미국공사 로버트 프라인공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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