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25화 (25/530)

< 일본에서(3) >

"만나 뵙게 되어 참으로 반갑습니다. 로버트 프라인이라고 합니다."

"조선통신사 정사 박규수라고 합니다. 저야말로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참으로 반갑습니다."

먼저 손을 내민 로버트 프라인의 악수요청에, 박규수는 다소 얼떨떨해하면서도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의 어린 소년 왕에게 서역의 인사 예법에 대하여는 전해 듣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색목인을 가까운 거리에서 만나 손을 마주 잡자니 참으로 어색했다.

한편 다소 어색해 사면서도 선선히 손을 잡는 박규수의 모습에서 요시노부는 눈빛을 빛냈다. 박규수가 당황하지 않고서 손을 마주 잡는 모습에서, 조선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서역인들과 마주치는 건 처음일지라도 서역에 대한 정보는 어느 정도 수집하고서 일본으로 건너왔음을 눈치챈 것이다.

그와 함께 따라온 일본인 신사는 따로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아마도 이 자리에 동행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통역을 위해서일 뿐, 그다지 직책이 있거나 이름이 있는 인물은 아닌 모양이었다.

통역은 일본인 신사가 영어를 일본어로 통역하면, 다시 시종이 일본어를 조선어로 통역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역순으로 진행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조선인 중에서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고, 마찬가지로 미국인 중에서도 조선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이런 식으로 일본어를 중간매개 삼아 통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것은 내일의 만남에서는 솔직한 속내를 주고받기 어려울 거라 짐작했기 때문이오."

박규수와 로버트 프라인이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나자, 요시노부는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로버트 공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지만, 박규수는 알고 있었다. 정이대장군은 그 짧은 새에 통신사 내부의 알력을 눈치채고서 김병기를 비롯한 세도가의 끄나풀들이 듣지 못하는 곳에서 박규수가 직접 서역인들과 교섭할 기회를 준 것이었다.

"대군 전하의 성은이 하해와도 같으니 이를 어찌 갚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신경 쓰지 마시오. 정 불편하면 과인은 이만 물러나 드리리다. 자, 좋을 대로 이야기를 나누시오. 허허, 서로 하고 싶은 말이 많지 않소?"

박규수가 허리를 굽히며 예를 표하자, 요시노부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손을 가로저으며 두 사람에게 대화를 나눌 것을 권하고는 열 걸음 뒤로 물러나 두 사람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 곳까지 물러났다. 자신은 일단 구체적인 내용은 듣지 않겠다는 의사의 표현이었다. 박규수는 저 왜국의 대군이 어째서 이렇게 호의를 베푸는 것인지 의아해하면서도, 그 호의를 차마 거절하지는 않았다.

박규수는 로버트 공사가 뭐라 입을 열기에 앞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

"저희 조선국은 청과의 전쟁에 앞서 귀국과 우호적 관계를 수립하고 싶습니다."

조선의 약점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발언이었다. 회담에 앞서 지금 수교에 보다 목마른 건 서역의 열강들이 아니라 조선임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악수라고 하기만은 어려웠다. 아무튼, 조선은 실제로 서구열강들과의 수교가 급했다. 지금은 다소 약점을 보이더라도, 우선 조선이 지금 현재 처한 상황을 솔직히 밝힘으로써 수교를 앞당길 필요가 있었다.

로버트 공사는 박규수의 말에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박규수는 그 미소를 잘 알고 있었다. 세도 가문의 끄나풀들이 자주 하던 물어뜯기 좋은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의 얼굴이었다.

"그렇습니까?"

로버트 공사는 그렇게만 말하고서 더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쪽이 사정이 급한 건 알았으니, 이제 스스로 속사정을 있는 대로 털어놓으라는 신호였다. 박규수라고 그것을 모를 리는 없었다. 그의 표정도 단번에 일그러졌다.

하지만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해서 꽁해 있을 수만도 없었다. 아무튼, 다시 말하지만 지금 당장 사정이 급한 건 조선 쪽이었지 미국이 아니었다.

결국, 박규수는 노기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면서 설명을 이어 가야만 했다.

"청은 본래 조선에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속의 후예로, 조선이 일본과의 전쟁으로 혼란한 틈을 타 급히 세력을 키운 은혜를 모르는 족속들입니다. 이제 청이 쇠하였으니, 현 조선 국왕 전하께서는 마땅히 이를 바로잡고 은혜를 모르는 족속들에게 천벌을 내리시고자 합니다. 하나 조선에게는 10만에 달하는 정병들이 있으나, 그런데도 여전히 청과 홀몸으로 다투기에는 더없이 버겁습니다. 부디 서역의 나라들이 우리 조선의 정당함을 알고, 조선에 힘을 보태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박규수가 속사포같이 설명을 쏟아내자, 로버트 공사는 눈알을 연신 데굴데굴 굴려댔다. 그 또한 지금 중원을 차지하고 있는 만주족은 청의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과는 별개의 족속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만주족의 선조라는 여진족이 본래 조선의 속국이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조선에게 10만의 정병이 있다는 이야기 또한 그러했다. 물론 2차례의 아편전쟁으로 동아시아의 군대가 서구열강들의 군대에 비하면 얼마나 취약한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10만은 10만이었고 숫자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물론 어느 정도 허세는 섞였을 테지만, 그 청에게 정면으로 전쟁을 걸고 있는 나라였다. 적어도 나름대로는 상당한 국력을 비축해두었다고 짐작하는 편이 옳았다.

물론 현실의 조선은 로버트 공사의 예측과 달리 비축된 국력은 개뿔이오, 10만의 정병 대부분은 지방의 세력가들이 고을의 포수들과 노비들을 끌어들여 만든 사병들이고, 청과 전쟁을 하게 된 이유는 그저 '어쩌다 보니'였었지만 조선에 대하여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던 로버트 공사에게는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은 청과의 전쟁에서 저희들이 함께 싸워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선은 그렇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번 전쟁으로 청의 간섭을 끝내고, 가능하다면 더 나아가 요동 땅과 만주를 수복하여 옛 고구려의 고토를 수복하시고자 하는 장대한 포부를 가지고 계십니다. 만일 귀국에서 이를 지원해주신다면, 기꺼이 귀국에서 중원으로 진출하는 것을 돕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꿀꺽.

'월척이다!'

박규수의 대답에, 로버트 공사는 내심 군침이 절로 꼴깍꼴깍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만주와 요동은 어느 정도 타협의 여지가 있는 강남이나 화북과는 달리 만주족들의 고향이자 성역으로서 감히 침범하기 어렵다고 여겼다. 거기에 러시아에서도 워낙 만주는 자신들의 이권 지대라고 주장하다 보니 함부로 건드리기도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 알고 보니 요동과 만주는 청과 조선의 영토분쟁지대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만일 조선이 정말로 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요동과 만주를 빼앗아 온다면, 그동안 감히 손대기 어려웠던 만주에도 직접 세력 투사가 가능할 뿐 아니라 조선을 통하여 청에 대한 침투를 보다 심화하는 것 또한 가능했다. 조선은 어차피 영토가 크게 늘어나도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한 성과가 아니라 미국의 힘을 빌린 것이니, 미국의 부탁을 함부로 거절할 수도 없을 터였다.

그렇기에 로버트 공사는 안타까웠다. 남부 딕시 꼴통 반역자 놈들과의 내전으로 현 미국은 해외까지 세력 투사를 할 여력이 없었다. 그를 주일공사로 파견한 링컨 대통령 또한 당분간은 극동에서의 간섭은 자제하라고 했고, 그래서 얼마 전 막부의 주문으로 건조 중이던 군함의 인도가 취소되기도 했다.

이걸 받아들인다면 얻을 수 있을 이익은 뻔히 보이는데, 그걸 받아들일 여력이 없었다. 로버트 공사로서는 입맛을 쩝쩝 다시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지. 우리 미국이 직접 움직일 수 없다면 다른 놈들을 끌어들이면 그만이다. 존 불 그 재수 없는 배불뚝이들은 논외고, 바게트는 요즘 방방곡곡 안 쑤시고 다니는 곳이 없으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오렌지 놈들은 슬슬 힘이 달리고…그럼 불곰들인가.'

그때 로버트 공사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이들이 있었다. 후일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팽창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지만, 이때만 해도 미국과 러시아 제국의 관계는 양호한 편이었다. 오히려 아직 독립전쟁 시절의 악감정이 남아있던 미국에서는 영국의 견제를 위하여 일부러 러시아 제국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로버트 공사는 러시아와의 협력은 꽤 매력적으로 보였고, 또 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현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해방령 등 자유주의적 개혁에 힘쓰며 미국인들에게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었다. 물론 러시아인들이 욕심을 부려서 태평양까지 뻗어 나오려 든다면 반드시 막아야겠지만, 그거야 어련히 영국에서 질겁을 하면서 막아 내줄 터였다.

로버트 공사의 머릿속으로는 이미 미국의 주도로 러시아가 국력을 투사하여 청에게서 양보를 얻어내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저희 미국이 처음이라고 생각해도 좋겠습니까?"

그렇기에 그 전에 한가지 확인절차가 필요했다. 만일 이번 전쟁의 내막을 또 다른 열강들이 알게 된다면, 그들 또한 어떤 식으로 건 반응을 보여줄 터였다. 미국이 앞서기 위해서는, 저들이 자세한 사정을 알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박규수의 대답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것은…잘 모르겠습니다. 우선 현 전하께서 워낙 서역과의 통상에 적극적이신지라…. 저도 조선을 떠나고서 벌써 1달이 족히 지났으니, 그간에 또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을지 저로서도 알기 어렵습니다."

'안된다. 그것만은 안돼! 요동, 만주, 조선반도! 무엇하나 놓칠 수 없는 미답의 이권 지대인데…!'

박규수로서는 그저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은 것이었지만, 그것이 로버트 공사의 애간장을 타게 했다. 만일 이번 전쟁기에 타국의 간섭을 배제하고서 철저히 미국의 주도로 일을 진행할 수만 있다면 미국은 단번에 프랑스와 영국을 합친 크기의 광활한 이권 지대를 새로이 손에 넣게 될 터였다. 비록 저곳에 무엇이 나는지야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적어도 돈 될 만한 상품 하나쯤은 나오지 않겠는가?

만일 박규수의 말이 사실이라면 로버트는 우선 하루빨리 본국에 이 사실을 알리고 본국에서 러시아와 물밑으로 접촉할 여지를 만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아직 누구의 손때도 타지 않은(?) 저 광활한 처녀지를 미국이 가장 먼저 독점하는 것이 가능했다.

"귀국의 뜻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희들이 먼저 찾아가 드려야 했는데, 미처 그러지 못하여 여기까지 어려운 발걸음을 하게 해드려서 얼마나 유감인지 모르겠습니다. 좋습니다. 협력하겠습니다. 저희 미국은 이번 전쟁에서 귀국과 뜻을 함께할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이십니까?"

"네.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하께도 잘 전해주십시오. 저 또한 본국에 이 사실을 어서 알려야겠습니다."

로버트 공사는 다급히 박규수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가 다른 마음을 품기 전에,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이 일을 공언해두기 위함이었다. 박규수는 눈앞의 색목인이 뭔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것은 짐작하였지만, 그런 세세한 속사정까지 캐내기에는 조선의 현실부터가 엉망진창이었다. 결국, 박규수는 일단 자세한 사정을 캐내는 일은 뒤로 미뤄두고서, 로버트 공사와 손을 마주 잡았다.

한편 열 걸음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요시노부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가만 보자니 이번 전쟁으로 미리견에서 뭔가 두둑이 챙길 꿍꿍이를 품은 모양인데….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이 일이 커지면 커질수록 서역인들이 일본에 관심을 기울일 새도 줄어든다. 영길리인들은 역도 놈들과 붙어먹고 있으니 일단 미뤄두고, 화란과 불란서에게는 슬쩍 찔러두는 편이 좋을까.'

그러나 그 무렵, 베르뇌 주교를 통하여 통상을 바라는 조선의 뜻을 대강 전해 들은 프랑스 제국에서는 이미 주청 프랑스 공사 벨로네를 필두로 한 사신단을 출발시켜 조선으로 향하고 있었다.

로버트 공사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리고 요시노부에게는 다행이게도, 이미 전쟁은 조선과 청 양국의 의사는 뒤로 미뤄진 채 열강들의 이권침탈 경쟁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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