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27화 (27/530)

< 청나라의 침공 >

협상장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서역 오랑캐들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적다 보니 일단 뭔가 알고 있는 듯했던 내가 협상을 주도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대신들도, 청나라에서 쳐 들어왔다는 소식에는 입을 열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뭐라, 북적들이 쳐들어 와!"

"규모는? 지휘봉을 잡은 것은 누구라고 하느냐? 아는 대로 낱낱이 고하거라!"

'우라질, 하필이면 엘랑스 놈들 듣는 앞에서 이 사달이 나냐.'

타이밍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절로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이미 협정에 비준한 다음 들이닥친 것이 다행이었다. 이미 협정에 비준한 다음인 지금이야 그냥 창피하고 못 볼 꼴 보여주고 끝이지만, 협정에 비준하기 전이였다면 어떤 식으로건 악영향이 있었을 터였다.

프랑스 사신단의 표정을 필사적으로 살피니 뭔가 현실감이 없어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지금 조선에서 그들에게 또 새로 뭔가 요구하거나 준비하려고 연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있는 거겠지. 나도 차라리 그편이었으면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건 현실이었고, 운도 나쁘게도 프랑스 사신단이 창덕궁에 들어온 와중에 벌어진 실제 상황이었다. 지금 조선은 프랑스 사신단과 막 교섭을 끝마치자마자 뭔가 일을 해보기도 전에 교전 상황에 돌입한 것이었다.

"그, 그것이 소인도 지금 봉화를 보고서 급히 달려온 것뿐인지라…."

그나마 무관의 대답은 고무적이었다. 정말로 드물게도, 봉화가 정상작동한 모양이었다. 그럼 침공이 이뤄지고 그것을 한양의 조정에서 알게 되기까지 그리 긴 시차가 있지는 않을 터였다. 이론상 최고속력이라면 12시간 정도일 테고, 중간에 늦어졌어도 하루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럼 침공에 대처할 시간은 충분했다.

문제가 있다면….

"벌써 북적들이 군세를 일으켰다는 말인가? 이것이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올해 안에는 침공이 없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병조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아니, 이것이 어찌 병조의 업이란 말인가? 예조의 업이지! 그리고, 북적들이 군세를 일으키기 어려울 것이라 했던 건 금년도에 북경에 다녀온 이들 모두가 입을 맞춰 이야기하지 않았소이까. 그렇다면 이번 일은 그들의 잘못이지 어찌 병조의 업이란 말이오!"

'하, 진짜. 이놈의 족속들은 어떻게 된 게 한 번도 예상을 벗어나는 적이 없어요.'

절로 머리가 지끈지끈해왔다. 저것들은 이미 지금이 외국의 사신이 보는 앞이라는 자각조차 까먹은 모양이었다. 서로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면서 네가 잘못했다, 아니다 네가 잘못했다 삿대질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암이 암에 걸려 나을 지경이었다. 청나라에서 군세를 몰아서 쳐 들어왔다는 것보다도, 저들은 당장 정략 질이 더 급한 듯했다. 저 꼴을 보고 있자면 이놈의 왕 노릇을 계속해갈 자신이 싹 가셨다.

팔자에도 없던 왕 노릇, 진짜로 계속해야 하나?

쾅쾅쾅.

"어전이요! 모두 체통을 지키지 못하시겠소!"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주먹으로 어좌를 내리쳐가며 간신히 진정시켰다. 물론 제대로 된 진정이라기보다는, 그냥 일단 입을 틀어막는 쪽에 가까웠다. 당연히 불만 어린 시선들이 일제히 이쪽으로 쏟아졌지만, 그러면 뭐 어쩌란 말인가? 외국의 외교관들이 보는 앞에서 언제까지 말싸움이나 할 수는 없지 않던가. 자기들이 알아서 자제하던가, 그것도 아니면서 매번 내게 투덜투덜 대기만 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들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일이 꼬이는 바람에 예정이 틀어지기는 했지만, 아무튼, 내가 초대한 손님들이 아니던가. 배웅이라도 제대로 끝마쳐야 뒷말이 없을 터였다.

"오늘의 만남은 즐거웠소. 그러나, 보시는 바와 같이 이제 우리 조선은 전시상황에 돌입했소. 그러니, 앞으로 우리 조선에서 그대들의 신변을 보호해주기란 어려울 것이오. 아마 청의 군세가 이곳 한양까지 오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릴 테니, 그전에 떠나도록 하시오."

"전하의 배려에는 감사드립니다만, 이제부터 이 땅에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될 저희 기독교 동지들이 남아있거늘 어찌 저희만 살겠다고 도망칠 수 있겠습니까? 부디 청컨대, 저희 동지들을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해주소서."

"귀국에서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실로 천군만마를 얻은 듯할 것입니다. 전하, 저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소서. 저들이 함께해준다면 그까짓 북적의 군세 따위가 별거이겠습니까? 저들과 우리 조선의 힘을 합친다면 능히 북경도 노려봄 직할 것입니다."

나로서는 청나라와 전쟁 중에 프랑스군이 계속해서 김포에 주둔 중이라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무슨 일을 꾸밀지 모르니 일단 조선을 떠나도록 만들 작정이었지만, 벨로네 공사 휘하의 프랑스 사신단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조선에 있는 천주교도들을 돕는다는 명분이었다. 나로서는 실로 떨떠름한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군이 이 조선 땅에 상시주둔하게 된다면, 보나 마나 프랑스에게 이리저리 휘둘릴 것일 뻔하지 않은가.

그리고 김포 앞바다에 댄 배의 크기가 얼마나 될지는 몰랐지만, 병인양요 때 7척을 끌고 와 600여 명의 병사로 깽판을 쳤으니 3척이면 200명에서 300명 정도일 터. 그 정도면 저들 말 따나 조선의 천주교 동지들을 지키는 일조차 힘들었다. 청나라에서 미쳤다고 조선을 치는 도중에 프랑스인들까지 공격할 리도 없으니, 이번 기회에 조선에 합법적으로 주둔하여 얼마나 잘 싸우는지 구경이나 해볼 작정이었겠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역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청나라에 대항하여 함께 공투하는 우군이라는 인식 정도만 있는 흥선대원군 휘하의 신진 관료들은 프랑스의 호의에 감동한 듯 보였다. 저 호의가 말이 좋아서 호의지 그대로 빚이 될 것이라는 건 두말할 것 없는 사실일 텐데 말이다.

"…좋을 대로 하시오."

"감사합니다. 귀국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곧 본국에서 지원이 도착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어차피 조만간 보불전쟁으로 쫄딱 망할 프랑스 제국이다. 제까짓 것들이 조선 땅에 주둔한다고 해봤자 10년이나 버틸까?'

그러나 애초에 서역의 힘을 빌려 청을 치고 명의 복수를 하자는 주장을 한 건 나였다. 저들이 먼저 힘을 빌려주겠다는데 반대할 명분은 없었다. 결국, 나는 선선히 프랑스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보불전쟁이 1870년에 시작하여 1871년에 끝났으니, 고작 해봤자 6년에서 7년 정도만 눈 딱 감으면 될 터였다.

나의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신단 일행은 허리를 숙여 내게 예를 표하고서는 궁인들의 안내에 따라 궁을 떠났다. 뒷모습을 얼핏 보니, 어깨를 떨고 있었다. 분노한 기척이었다. 하기야, 저들도 일이 여기까지 술술 풀리고 있었는데 청의 방해로 뜻하지 않게 조선의 우선순위에서 밀린 격이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그럼 되놈들이 어쩌다가 벌써 쳐 들어왔는지야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데…우라질, 이거야 원, 일이 완전히 꼬였군. 이제 진짜로 어쩌지?'

청이 벌써 쳐들어온 이유야 뻔했다. 조선이 프랑스와 접촉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조선이 양이들과 동맹하여 청으로 쳐들어온다는 악몽을 떠올린 것일 터였다. 조선 하나와 싸운다면 청도 많이 아픈 정도로 끝나지만, 일전에 북경을 점령하기도 했던 서역의 힘을 빌려 조선이 청에게 전쟁을 건다면 청도 멸국의 위기를 각오해야 한다. 그러니,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서역과 우호 관계를 구축하기 전에 아예 후환을 자른다는 작정으로 급하게 군세를 일으킨 거겠지.

그럼 청도 제대로 된 준비가 되어있을 리가 없다. 이홍장이 이끄는 의용군이 아직 태평천국 토벌이 한창인 와중에 벌써부터 요하를 건너 압록강을 넘었을 리도 없고, 일단 되는대로 북경과 만주의 병력들 전부를 이끌고 쳐들어오는 상황일 터. 그럼 병력의 양적 수준이라면 몰라도 질적 수준은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지난 1년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전쟁에 대비해온 조선군과 대등하거나 그보다 열등한 수준일까.

보급체계도 엉망진창일 테고, 전략도 일단 조선에 쳐들어가서 최대한 빨리 한양을 점령하고 조선의 항복을 받아낸다 수준이겠지. 그럼 해볼 만했다. 다만-.

"전하, 지금이라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상국과 화친하소서. 종묘와 사직을 위함이옵니다. 주제넘게 항전을 외치는 불순한 무리들을 벌하고 민초들을 구하소서!"

"그게 무슨 소리요? 전하, 아니 될 말입니다. 불란서에서도 우리 조선을 돕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우선 강화로 파천하소서. 그리고 굳건히 지켜내다 보면 저들도 더는 견디지 못하고 돌아갈 것입니다!"

"파천은 아니 될 말씀입니다. 반청복명의 목소리만 높이며 흑심을 품고 있는 역도들이 이 조선 땅에 몇이나 되는지 알 수 없거늘, 어찌 한양을 비울 수 있겠습니까? 전하, 한양을 굳건히 지키소서. 예로부터 이런 변란에 가장 두려운 것은 외적이 아니라 역모를 꾸미는 역도들이었습니다. 통촉하여 주소서!"

'…아오, 진짜 개판이네.'

그래, 이거였다. 이게 문제였다. 대신이라는 놈들이 하나같이 목소리만 높일 뿐, 누구 하나 책임지려 들지를 않는다. 화친을 외치는 놈 중에서도 자신이 사절로 가겠다고 나서는 놈들이 없고, 항전을 외치는 놈 중에서도 자신이 육도삼략에 능하다던가 주절거리면서 자신을 보내 달라고 하는 놈들이 없었다. 그나마 역도들을 조심하라는 이하응 정도가 정상범주였다. 그나마 고마웠다.

아무튼, 그럼 결국 누가 나서야겠는가? 나다. 대신이라는 놈들이 입으로는 직접 말하지 않아도 나보고 책임지라고 등을 떠밀고 있는 것이다. 화친을 외치는 놈들은 내가 청나라 카칸 앞에서 삼배고두례라도 하라고 등을 떠미는 것이고, 파천하자는 놈들은 지금 당장 피난 짐을 꾸릴 테니 왕인 내가 앞장서서 한양백성들을 버리고 떠나라고 등을 떠미는 것이다.

이제 고작 해봤자 13살 된 꼬마에게 말이다. 참으로 개자식들이 아닐 수 없었다.

"영상, 지금 오군영의 병졸들은 몇이나 되오?"

"지난 반년간의 노고의 성과로, 1만의 정병이 모였사옵니다, 전하. 하오나 도성의 백성들은 많고 성벽은 길고 늘어져 있으니, 북적들의 대군에 맞서 도성을 지키기에는 역부족일 것이 옵니다."

'개자식, 네가 그럴 줄 알았다.'

김좌근은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은연중에 이하응이 주장한 한양성 결사사수는 어려울 것이라며 한양을 포기하고 강화도로 파천할 것을 권유했다. 지금 경기도에 모인 의병들을 한양에 끌어들인다면 족히 4만 명은 모일 테고, 그러면 한양성 결사사수도 불가능은 아닐 텐데도 말이다.

아마 보나 마나 제 사병이나 다름없는 오군영 병졸들과 경기도 의병들 전부를 이끌고 강화도에 처박혀서 백성들은 죽어 나가건 말건 시간이나 끌면서 청나라에서 제풀에 지쳐 돌아갈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겠지. 기대도 안 했다. 역시나 그동안 순순히 협조해주느라 까먹고 있었지만, 김좌근의 제1 목표는 자신의 부귀영화였지 승전이나 조선의 부흥이 아니었다.

"전하,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어서 화친하셔야 합니다! 저 간신 모리배들의 감언이설에 속으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상국과의 전쟁은 곧 파멸이고, 멸국이옵니다. 종묘와 사직을 생각하소서!"

"한시가 급합니다. 어서 강화로 파천하시고 강화부사에 명하여 방비를 굳히도록 하소서! 인조대왕께서는 북적야인들의 침공에도 주저하시다가 미처 강화로 파천하실 기회를 놓치시고 남한산성에서 오욕을 당하셨사옵니다. 그때의 전철을 밟아서는 아니 되옵니다!"

"""전하!"""

'야, 너희들 진짜 안 닥치냐?'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이놈의 나라, 진짜로 누구 한 사람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놈들이 없었다. 그 나름대로 측근이라고 키워둔 민치상이 놈은 슬슬 내 시선을 피하고 있고, 김좌근은 그냥 시치미 뚝 떼고서 빨리 강화도로 파천하라고 떠밀고 있다. 이하응은 당초에는 한양성을 결사사수할 것을 주장했지만, 김좌근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고서 그것도 어려울 거라 직감했는지 이미 한걸음 뒤로 물러나서 한숨이나 푹푹 내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나의 현실이라는 걸 직감했다. 결국, 나는 아직 본격적인 친정도 시작되지 않은 애송이였고,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조선의 왕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를 왕답게 대우해주는 놈도 드물었고 조선을 지키겠다 나서는 우국충정 넘치는 애국지사들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애국지사들은 조정에 출사하지 못하고 어디 시골에 처박혀서 글이나 읽다가 나라에 변고가 일어나면 전 재산을 털어 무기를 들고 떨쳐 일어나는 게 현실이었다.

권위도, 권력도 바닥을 치는 나라였고 왕이었다. 이걸로 무슨 얼어 죽을 근대화란 말인가? 저들 말대로 강화도에 파천한다면 아마 전쟁에서 쉽게 이길 수도 있을 것이고, 서역과의 통상도 순풍대로이겠지. 그러나 그뿐이다. 근본적인 개혁이 안 된다. 뭔가 일을 밀어붙이려면 친위세력도 친위세력이지만 일단 왕에게 권위와 권력이 있어야 하는데, 나에게는 둘 다 없었다. 그러니까 친위세력도 모이지 않고 모이더라도 모래알이나 다름없다.

'파천하는 건 좋아. 그래, 파천 좋지. 그런데 국왕이 적전 도주하자고? 이번 전쟁은 내가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제기랄, 웃기고 있네. 왕이 도망쳐서 전쟁에 이겨봤자 어느 미친놈이 그런 왕을 위해 목숨을 바쳐?'

"전하, 어서 결단을 내려주소서! 한시가 급하옵니다! 전하!"

울컥.

무언가 당구공 같은 게 목으로 넘어가는 착각이 들었다. 머리에 열이 오르고,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슬슬 한계였다. 이놈의 빌어먹을 나라. 직업윤리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도 없는 무책임한 위정자 놈들. 전부 다 질렸다.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역시나 나는 왕의 재목은 아닌 모양이었다. 사람 좋은 흉내를 내거나 아니면 능숙하게 이견을 조율하는 일 따위는 내 천성이 따라주지를 않았다.

결국, 내게 어울리는 역은 이런 것이었다.

"여봐라! 의금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감히 화친을 입에 담는 저 역도들을 잡아 가두지 않고서!"

"전하! 종묘와 사직을 생각하소서! 전하―!"

있는 힘껏 어좌를 내려치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목에 핏줄이 설 때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그 즉시 화친을 주장하고 있던 풍양 조씨 일파들은 그 자리에서 포박되어 줄줄이 끌려나갔다. 그와 동시에, 파천을 외치고 있던 안동 김씨 일파들에게는 회심의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승리를 직감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은 아주 틀리지만도 않았다. 나 또한, 한양을 버리고서 파천할 생각이었다.

다만―.

"지금 오군영의 1만 정병들 중에서 기병이 몇이나 되오?"

"4천이 조금 넘는 것으로 알고 있으시옵니다, 전하."

"그거 마침 잘되었구려. 과인이 몸소 4천 기병을 이끌고서 평양으로 가리다. 그대들은 굳이 따라올 것 없소. 한양에 남아 백성들을 잘 다독여주시오.

한양성을 버리고서, 평양성으로 도망칠 작정이었다는 게 조금 달랐다.

"…네? 전하, 그것이 무슨 말씀이시온지…."

"섭정공, 한양은 잘 부탁드립니다. 만에 하나 과인에게 변고가 생긴다면 섭정공과 대비마마께 뒷일은 맡기겠습니다. 내 한양의 일은 섭정공만 믿고 있겠습니다."

"…진심이십니까?"

하나같이 못 믿겠다는 반응들이었다. 미처 말릴 생각도 못 하고, 진담인지 허세인지 분간도 안 된다는 얼굴들이었다. 왕인 내가 잡히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인데, 왜 강화도로 파천하지 않고서 평양으로 가는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내 대답은 간단했다. 강화도에 파천하고 버틴 끝에 이긴다고 하더라도, 그건 조선의 승리가 아니었다. 서구열강들이 청나라를 윽박지른 끝에 승리해봤자 그건 결국 서구열강들의 승리일 뿐이고, 조선은 이후 서구열강들에게 아무 소리도 못 하고 끌려다니기만 할 뿐이다. 그건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서구열강들의 도움을 받았기는 해도, 승전은 오롯이 조선의 것이어야만 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의병들이 10만을 넘는 점도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왕이 강화도에 틀어박혀서 시간만 질질 끌면 과연 그들이 적극적으로 싸우려고 할까? 그럴 리가 없었다. 그 틈을 타서 백성들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군세를 키우고 민심을 장악한 끝에 나라를 뒤엎으려 들 터다. 왕이 직접 나서지 않는다면 의병들은 중앙의 지휘를 따르지 않을 것이고, 또 만에 하나 그들이 활약해서 전공을 세우더라도 드높아지는 건 의병장들의 명성일 뿐이다.

그러니까 내가 직접 가야만 했다. 그 끝에 내가 청나라에게 죽거나 포로로 잡히더라도, 내가 반드시 가야만 했다. 모두가 책임지지 않고 도망칠 궁리만 하는 가운데, 나 한 사람만은 이 모든 일에 책임을 졌다는 걸 세상이 알게 해야만 했다. 그래야지만, 비로소 전쟁에서 승리하건 패배하건 그걸 디딤돌 삼아 개혁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물론입니다. 섭정공, 섭정공이 보기에는 제가 어떤 왕으로 보이십니까?"

나는, 머리에 열이 오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체질이었다.

"전하께서는 이 나라 조선의 왕이십니다."

이하응은 이번만큼은 나에게 걸주같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쓴웃음을 지으며, 내게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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