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28화 (28/530)

< 이하응과 김좌근 >

그날의 어전회의는 그대로 끝났다. 소년 왕은 조선의 최고 군 통수권자로서 스스로 4천의 기병을 이끌고 북방으로 가 북적 야인들과 맞서겠다는 의지를 천명했고, 대신들이 미처 그를 말릴 새도 없이 갑주를 가져오라며 호통을 치며 대신들의 혼을 쏙 빼놓았다.

뒤늦게나마 영의정 김좌근이 나서서

"북적의 힘이 아직 강성하니, 그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상책이 못됩니다. 또 아직 왕손을 보시지 아니하신 지금, 옥체에 혹여나 변고가 생긴다면 그 얼마나 안될 일이란 말입니까. 엎드려 청컨대 옥체를 생각하소서."

하고 말렸지만, 여전히 소년 왕의 각오는 굳건했다. 소년 왕은 김좌근의 제지에도 굴하지 않고서 병조판서에게 당장 오군영에 명하여 출병할 준비를 끝마치라 지시하였고, 김좌근이 재차 그를 제지하려고 하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내 지난밤에 태조 대왕을 뵈었으니, 태조 대왕께서 보우하사 오랑캐들의 총칼이 감히 과인의 옥체에 상흔을 내지는 못할 것이오. 그러니 아무런 걱정일랑 마시고, 한양성의 방비를 굳건히 하고 병졸들의 여유가 되는 대로 평양으로 올려보내도록 하시오."

라고만 말하고서, 김좌근과 함께 그를 말리는 대신들의 만류를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렇게 되자 다급해진 것은 김좌근을 비롯한 세도가 세력들이었다. 왕이 먼저 앞장서야 그들도 파천하건 뭐를 하건 강화도로 도망칠 터인데, 왕이 먼저 앞장서서 평양으로 떠나고 한양을 잘 부탁한다고 당부까지 했는데 강화도로 도망친다면 그건 적전 도주였다. 일단 당장 얼굴에 먹칠하는 건 물론이고, 전쟁에서 패배하건 승리하건 후세에 두고두고 손가락질 당할 게 뻔했다.

그런데 어느새 그들과 함께 조정의 한 축을 담당하는 세력가로 떠오른 섭정공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소년 왕이 평양으로 향하는 것을 되려 지원할 기색이었으니, 안동 김씨 일가로서는 참으로 답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말로 이대로 보내드릴 겁니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결국, 그날 밤 은밀히 흥선군의 집을 찾아가는 이들이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영의정 김좌근과 그의 몸종들이었다. 본래라면 그가 몸소 흥선군의 집까지 찾아가는 일은 없었겠지만, 한시가 바빴다. 당장 강화도로 파천하지 않으면 언제 청의 대군이 한양까지 밀어닥칠지 모르는데, 괜히 그의 수발을 드는 이들 중 하나를 흥선군에게 보내었다가 흥선군이 자신을 무시한다 여겨 이를 거부한다면 괜히 시간만 버리게 될 수도 있었다.

그동안 무소불위의 권위와 권력을 누려온 김좌근으로서는 더 없는 굴욕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비단 그의 목숨만이 아니라, 안동 김씨 종친 전부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한양성을 결사 사수하는 건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었다. 청의 대군에게 한양성이 함락된다면 가장 먼저 참살당할 것은 청에 의하여 이번 전쟁의 주범으로 지목된 안동 김씨 일파가 아닌가? 지금은 사소한 굴욕은 참아야 할 때였다.

하지만 흥선군은 그런 김좌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디까지나 태연한 기색이었다. 도대체 뭘 가지고 그러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고 시치미를 떼는 것 같기도 했다. 김좌근은 그것이 흥선군의 도발이라는 걸 눈치챘지만, 일단 당장 그의 협력이 필요한 상황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전하 말씀입니다. 정녕 전하께서 평양성으로 가신다고 한들 무언가 바뀔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전하께서는 아직 어리십니다. 제 한 몸 하나 간수하시기 어려우실 분께서 무슨 전장에 나서신단 말입니까."

"그렇겠지요. 그러나, 전하께서는 이 나라 조선의 왕이십니다. 어찌 전하께서 몸소 평양에 나서신다고 무엇 하나 바뀌지 않을 것이라 단언하십니까."

"허, 정녕 이 나라 조선이 불과 1년도 안 되어 두 분의 전하를 떠나보내야 만족하시겠습니까?"

김좌근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툭 내뱉었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그까짓 소년 왕이 죽건 말건 알 바 아녔다. 그가 흥선군의 세력을 짓밟으려 꺼낸 밑밥을 덜컥 물어서는 지금 그와 그의 씨족들을 지옥 밑바닥으로 떨어트린 시건방진 애송이였다.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고, 더는 참지 말고 지금이라도 죽여버릴까 고민한 것이 몇 번째인지 모두 헤아릴 수도 없다.

하지만 그런 김좌근의 속내와는 별개로, 이하응의 태도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저 소년 왕의 친부가 아니던가? 그리고 설령 소년 왕이 죽어도 여전히 영의정일 그와는 다르게, 소년 왕이 죽는다면 그 즉시 섭정역도 잃고 나자빠질 작자였다. 그런데 어째서 저리 매정할 수 있단 말인가? 또 어찌 저렇게 냉정할 수 있단 말인가? 김좌근으로서는 도통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그러나 이하응은 여전히 태연했다. 연기인지, 진심인지 그로서도 미처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성상께서는 이런 곳에서 뜻이 다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니 그저 신하 된 몸으로서 그분께서 뜻을 이루시는 그날까지 곁에서 보위해드릴 뿐이지요."

"합하께서 이토록 충심이 깊으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김좌근은 굳이 숨길 것도 없이 빈정거렸다.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하고 있었다. 청나라에서도 시간이 없는 건 자각하고 있을 테니 어떻게든 최단기간 내에 조선과 결판을 지으려 할 터였고, 그럼 무지막지한 강행군을 시도하고 있을 것은 군에 있어서는 문외한인 김좌근조차도 훤히 보이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자는 자신이 무슨 연유로 이곳에 왔는지 뻔히 알면서도 번드르르한 말만 하면서 계속 말을 돌리고 있지 않은가.

괜히 일부러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후회만이 들 따름이었다.

"충심이라…글쎄요, 어떨는지요. 그보다는 아비로서의 친정이 옳지 않겠습니까. 아비 된 자로서 자식을 믿어주지 못한다면 누가 그 핏덩이를 믿어주겠습니까?"

한편, 이하응은 그런 김좌근이 자신을 어이가 없다는 듯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걸 즐기고 있었다. 네가 그럴 놈이 아닐 텐데 무슨 헛소리를 그렇게 번드르르하게 하고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이하응은 굳이 김좌근의 추궁에 부정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수긍했다.

'왕이 되겠다는 꿈만으로 살아온 반평생이었다. 그리고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내 자식이나마 왕으로 만들고 섭정으로 권세를 휘두를 작정으로 달려온 또 다른 반평생이었지. 솔직히, 그 개똥이 녀석에게 아비다운 아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준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아. 그러나-.'

그러나-뭘까. 이하응은 스스로도 대답하기 어려운 자문의 벽에 부딪혔다.

철이 들 무렵까지, 그가 소년 왕을 아들로 봐온 기억은 없었다. 이하응에게 있어서 그의 소년 왕은 어디까지나 그가 집권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다. 소년 왕은 장식일 뿐이고, 이 나라의 실질적인 왕은 그의 아버지인 이하응일터였다.

하지만 최근 뭔가 달라졌다. 스스로 왕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난 이후부터, 소년 왕의 행동거지도 한순간 변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흔히 그 사람의 본성을 알고 싶다면 권력을 쥐어보라고 하지만, 아직 권력이 무엇인지도 모를 어린아이에게까지 들어맞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도 못 했다.

"그럼 이대로 전하를 보내드릴 작정이십니까? 요즈음 크게 흔들리고 있다고 하나, 북적은 여전히 강건합니다. 그에 조선과 같은 소국이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전하께서도 저희들을 한양에 남기려 하신 거 아니겠습니까? 아직 전하께서는 미숙하시니 세세한 조정에서는 저희의 힘을 빌리시려 하시는 것이겠지요. 함께 힘을 합쳐 전하의 빈자리가 미처 느껴지지 않을 만큼 분조를 이끌어봅시다."

정확히 무엇이 달라진 것인지는 이하응도 몰랐다. 그러나, 그의 행동거지가 어딘가 모르게 자신과 닮게 되었다는 것만은 자각했다. 아직 미숙하고, 제 화를 참을 줄도 모르며, 제가 알고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 양 방약무인하게 행동하지만, 명백한 야심이 엿보였고 일을 꾸릴 행동력과 강단이 있었다.

그 모습에 꽤나 흥미가 동했다. 생전 도구로밖에 생각한 적 없는 어린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아직 미숙하고 제멋대로인 어린 시절의 저 자신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 평양 건만 해도 그러했다. 만일 자신이 조금만 더 젊었고, 또 자신이 왕이였다면, 그 또한 그렇게 행동했을 터였다. 물론, 지금 소년 왕이 보여준 것보다는 조금 더 섬세한 조율을 거친 다음에 일을 벌였겠지만.

이제는 방약무인한 어린 자신이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어떤 야심을 품고 있는지, 그 끝에 어디로 도착할지 조금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일이 좋지 않게 풀린다면 어떤 파국에 달하게 될지 모르시는 것도 아니시잖습니까. 그것만은 결코 안 될 말씀입니다. 전하께서 아직 어리시니, 세상 물정을 모르시고 옥체를 상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장소에 발을 디디려 하신다면 마땅히 멈추는 것이 신하 된 자로서 해야 할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 또한 신하 된 자로서 해야 할 도리 중 하나겠지요. 그러니, 대감께서는 대감의 도리를 다하십시오. 본인은 본인이 생각하는 신하 된 자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하겠습니다."

물론 그건 김좌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였다. 한때 강한 왕을 꿈꾸었던 이하응이야 평양으로 떠나는 소년 왕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김좌근은 일평생 자신과 일가족들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살아온 자였다. 뜻하지 않게 청에게는 천명을 노리는 위험분자로 분류되어버렸지만, 그건 그 스스로 의도한 바도 아니었을뿐더러 오히려 그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서 최우선 사항은 어떻게든 강화도로 도망치고 서역에서 청을 압박해 제풀에 물러나게 하는 일이었지, 전쟁에서 이기는 일이 아니었다. 그로서는 서역의 지원을 약속받고도 굳이 사지에 들어가려 하는 소년 왕의 심리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그런 소년 왕을 말리지 않는 이하응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는 명석한 두뇌도 있었고 연륜도 야심도 있었지만, 굳이 이만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전쟁에서 이겨야 할 필요도 그만한 배짱도 없었다.

'아비고 애고 하나같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애송이들이나 다름 없구나. 그래, 전쟁에서 이겨 영웅호걸 기분이라도 내 볼 작정인가? 허, 애는 그렇다 치고 아비까지 저 모양이라니. 저래서야 빨리 죽기 십상이지. 그러나, 이 몸은 그럴 생각이 없다.'

결국, 더는 이야기를 계속해봤자 결론이 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김좌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애초에 이하응을 설득하려는 시도 자체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를 찾아갈 바에야, 처음부터 그의 방식대로 일이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밑 공작을 해두는 편이 좋았을 터였다.

"아니, 벌써 일어나려 하십니까?"

"아이고, 나이가 드니 영 기력이 소싯적과 같지 않습니다. 나날이 나잇살만 늘어가고 밤잠만 늘어나니, 이래서 나이는 먹을 것이 못 된다 하는 모양입니다."

"허허허, 너무 그렇게 자조하지 마십시오. 무수한 복 중에서도 무병장수야말로 으뜸가는 지복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 영상께서 덕이 있으시니 상제께서도 복을 내리신 게 아닐까 합니다."

"합하께서 참으로 이 늙은이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다 늙어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이 비루한 노인네에게 무슨 덕이 있다고 하십니까? 이제는 그저 하루라도 빨리 염라께서 적절한 시일에 거둬가시기만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상투적인 대화를 나누고서 헤어졌다. 이하응은 굳이 김좌근을 붙잡으려 하지 않았고, 김좌근도 굳이 이하응을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볼 이유도 없었다.

'오군영에서 기병을 차출하겠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이 나라 조선은 이 몸의 것이다. 네깟 놈들이 스스로 죽으려 한다고 해도 죽을 수 있을 것 같더냐? 너희 부자는 이 몸이 허락해주신 다음에야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김좌근은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그는 곧장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4천이나 되는 기병들이 하루아침에 군장을 꾸리고 출병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아무리 빨리 준비해도 하루에서 이틀은 소요될 터.

그럼 방법은 쉬웠다. 군관들에게 준비를 일부러 늦추면서 시간을 끌라고 하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을 끌다 보면 평양까지 구원하러 갈 수 있을 시간은 금방 지날 테고, 그럼 별수 없이 강화도로 파천하는 수밖에 없을 터였다.

어차피 오군영은 그의 사병들이나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그가 시간을 끌라고 명한다면 어련히 알아서 시간을 끌어줄 터였다. 그들 또한 평양까지 가서 죽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창의문이 대낮같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게 웬 변고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즉각 알아보고 오거라!"

"네, 나으리-."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무언가 변고가 일어났다는 증거였다. 김좌근은 시종을 시켜 먼저 앞서 달려가도록 한 뒤 그도 서둘러서 창의문으로 다가갔다. 창의문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빛은 더 환해졌고 웅성웅성 소란스러운 구경꾼들도 늘어갔다.

그리고,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창의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이 늦은 시각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요?"

"아니, 그것도 못 들으셨소? 아, 글쎄 전하께서 몸소 병졸들을 이끌고 북으로 가신다고 하시지 않소? 어린 나이에 기특하기도 하시지…."

"뭐라?"

얼굴도 모르는 구경꾼들에게 상황을 확인한 김좌근은 경악했다. 소년 왕이 벌써 한양을 빠져나갔다고? 그도 모르는 사이에 말인가? 도대체 무슨 수로?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로서는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후줄근한 차림새의 구경꾼은 김좌근이 어떤 신분의 사람인지 돌아보지도 않고 제 말만 이어갔다.

"그러나, 하옥 대감 그 사람 다시 봤소.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어찌 알고 병졸들에게 일찍부터 언제라도 떠날 채비를 해두라고 조처해두셨다는 건지. 허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참으로 대단하신 양반이오."

"아니, 하옥 대감이?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이 사람이 산에서 내려오셨나. 아, 그것도 모르시오? 요즈음 오군영 놈들이 하옥 대감 명이랍시고 얼마나 열심히 훈련하던지, 정말인지 몰라봤소이다.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었으면서 그동안은 왜들 그랬는지. 쯧쯧쯧."

김좌근은 어안이 벙벙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로서는 처음 듣는 일이었다. 물론 오군영에게 훈련을 시켜두기는 했다. 여차하면 강화도로 도망쳐서 그를 지켜줘야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훈련에 힘쓰라고 교시하기도 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언제든지 떠날 채비를 해두라고 조처해두었다고? 그게 무슨 생뚱맞은 소리란 말인가?

'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 요즈음 이하응 그 작자가 상놈들을 끌어들여서는…!'

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조금 전 만나고 온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요즈음 보부상들을 끌어들여 소년 왕 몰래 왕실 내탕금까지 끌어써 가면서 일을 꾸미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김좌근도 그가 무슨 꿍꿍이인지 한번 사람들을 풀어 알아보기도 했지만, 이하응이 보부상들을 시켜 지방 유생들을 두들겨 패며 나날이 악명이 쌓이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난 다음에는 경계를 늦추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악명을 쌓으면 쌓을수록, 후일 탄핵하기에도 쉬워질 테니 말이다. 애도 아비도 권력을 잡은 적이 없다 보니 무슨 일을 꾸며도 미숙하기만 하다면서 비웃었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정략에 미숙해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공포를 쌓기 위함이었다 한다면…?

"이, 이 상갓집 개새끼가 감히…!"

김좌근은 더는 분을 참지 못하고, 노호성을 터뜨렸다. 한순간 주변 구경꾼들의 시선이 그에게 일제히 집중되었지만, 지금의 그는 그들의 시선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저 멀리에서, 족히 수천이 넘는 말발굽 소리가 아지랑이처럼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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