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성에서 >
"으흐흐흐! 그래, 네깟 놈들이 제아무리 잘났기로서니 화포도 없이 무엇을 어쩌겠느냐? 이 평양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이니라!"
한편, 그런 셍게린첸의 청군을 망루 위에서 깔보고 있던 맹랑한 꼬맹이가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나라 조선의 왕 개명 전 이명복, 개명 후 이형이었다. 거추장스러운 대군을 이끌고 남진하던 청군과는 달리 처음부터 기병들만을 이끌고 강행군을 벌인 끝에, 청군보다 먼저 평양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었다.
몸에 잘 맞지도 않는 커다란 갑주를 걸치고서 우쭐거리는 꼴이 퍽이나 우스웠으나, 그 곁에 있던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창근도 금위대장 허계도 그 누구도 감히 그를 우습게 보지 못했다.
비록 나이는 어려도 몸소 청의 침공을 알게 된 당일에 오군영의 정예기병을 이끌고 평양성까지 한걸음에 달려온 용맹한 소년 왕이었디. 하다못해 어른인 그들조차 저 4만에 이르는 청군의 앞에서는 위축되지 않을 수 없거늘, 망루 위에서 청군을 깔보고 있는 소년 왕에게서는 어떠한 꺼리는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나라 조선에 용감무쌍한 패왕의 재목이 나왔구나!'
그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그런 감동 속에서 부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처음에는 혹여나 옥체에 흠이 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지만, 저 구름같이 몰려든 적병의 앞에서도 조금도 겁먹은 기색이 없는 소년 왕의 모습을 보고서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옥체에 흠이 가는 것을 걱정하기 전에 그들이 소년 왕을 지켜주면 그만인 일 아닌가?
그들은 이미 식어버린 줄만 알았던 패기와 우국충정의 기세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끊임없이 샘솟는 기분이었다. 그동안은 하옥 대감의 노망이라고 냉소하던 요동탈환의 꿈도, 저 나날이 성장할 소년 왕과 함께라면 아주 꿈만은 아닐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흐흐흐, 이거 기분 좋은데…?'
한편 꼬맹이 이형은 그런 장군들의 마음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높다란 망루 위에서의 풍경을 한껏 즐기고 있었다. 물론 전직 현대인으로서 이보다 훨씬 높다란 빌딩 위에서 도시를 내려다본 경험이야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때와 지금은 근본적으로 보이는 풍경이 달랐다. 그의 앞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적병들이 있었고, 그의 뒤로는 왕을 지키려 북방 3도 각지에서 모여든 우군 병사들이 있었다.
실로 사나이의 로망이라고 할만한 광경이었다. 저 병사들 중 한 사람이었다면야 이런 감회를 느낄 여력도 없었겠지만, 그는 일단 이 나라 조선의 왕이었고 곧 이 성안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거기다 평양성은 그 고구려가 당나라의 대군에 맞서서 최후를 맞이한 유서 깊은 성이 아니던가?
비록 민족이니 조국이니 하는 거창한 것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며 반쯤 의도적으로 냉소적인 태도를 견지해온 이형이었으나,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삼한의 백성인 만큼 알 수 없는 고양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성안에 몇이나 되는 병졸들이 있는지 혹시 아시오?"
"이틀 전 의병장 안인수와 김만묵이 이끌고 온 의병들이 합류하면서, 약 3만하고 4천이 조금 넘는 병졸들이 모였사옵니다. 우선 성 내의 백성들에게서도 계속해서 자원자들을 모으고 있으니, 저들의 본 군이 당도하기 전까지는 충분히 성벽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옵니다."
"으음…."
'어라,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이형이 묻자, 평안도 관찰사 홍우길이 앞으로 나서며 답하였다. 이 중에서 4천은 이형이 몸소 이끌고 온 오군영의 기병들이었고, 8천 명은 급히 동원된 지방군, 1만 6천 명은 북방 3도 곳곳에서 모여든 의병들이었다. 나머지 6천여 명은 평양성 내의 성민들을 급히 징집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워낙에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백성들이 많은 북방 3도였다 보니 그들을 무장시킬 조총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 성에 모인 병졸들이 현 조선군의 전력 전부인 것은 아니었다. 이미 오군영에 속한 보병들과 경기권 의병들이 먼저 앞장선 소년 왕 이형을 뒤따라 북상하고 있었고, 삼남도에서도 각각 이를 지원하기 위해 병력들을 차출하여 도합 8만에 이르는 군세가 평양성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4천에 이르는 의병들이 평양성에 합류하는 대신 평안도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유격전을 펼치고 있었으니, 이형이 순간 자신감을 느낀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물론 대부분은 급조된 병력에 정규군이라고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청나라도 피차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이대로라면 요동부윤도 꿈만은 아닐 것만 같은 고양감이 이형을 사로잡았다.
물론, 저 많기만 한 병사들의 실상을 아직 다 파악하지 못했기에 떠올린 망상에 가까웠다.
"뭐, 굳이 성을 나서서 야지에서 저들과 어울려줄 이유는 없소. 어차피 저들도 일단 되는 대로 기세를 몰아 침공해온 것 뿐일 테니, 그리 오래는 버티지 못하겠지. 다만, 그만큼 후속 보병들이 도착하고 나면 난전이 예상되니 철저히 준비해두시오. 그리고 금위대장, 그대는 기병들을 잘 훈련시켜 언제든 저들이 뒤를 보이면 추격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시오. 저들이 철퇴 할 때가 이번 전쟁에서 우리 조선군이 겪는 최후의 야전이 될 터이니."
"""하명하신대로 하겠사옵니다, 전하."""
그러나 잠깐 헛바람이 들었기는 했어도 소년 왕 이형은 현실감각을 아주 상실하지는 않았다. 그는 천성이 격정적이기는 해도 동시에 냉소적인 인물이었고, 그 때문에 굳이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 기병만 4만에 이르는 청군과 정면대결할 생각일랑 추호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수비를 굳히고 수성전에 대비할 것을 명했고, 장수들은 그에 수긍하였다.
어차피 청군이 한양으로 우회하는 가능성은 소년 왕 이형이 평양에 온 시점에서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청군이 한시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조선군에서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조선군에서는 평양성에 이형이 몸소 나선 이상 청군에서는 피해가 아무리 크더라도 평양성부터 함락시키려 들것이라고 판단했고, 그것은 옳았다.
그 증거로서, 평양성 근교에 다다른 청군 기병대는 더는 진격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화포가 닿지 않는 원거리에서부터 평양성을 포위하려고 하고 있었다. 일단은 포위를 유지하다가, 보병대가 도착하고 나면 본격적인 공성전을 시작할 작정인 모양이었다.
이형은 회심의 미소를 띄웠다.
"적장이 앞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적장이? 총사령관 말인가?"
"아니요, 그 정도는 아니고…그래도 제법 직급이 있는 장군인듯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저격합니까?"
그때였다. 평양성을 포위하려 점점 자리를 잡던 청나라군 사이에서, 장수 한 사람이 말을 타고서 터벅터벅 성을 향하여 다가오던 것이었다. 항복을 권하려는 모양이었다. 기병뿐인 그들로서는 당장 성을 공격할 방도가 없었으니, 그나마 항복이라도 권해보려는 듯했다.
저격하느냐는 무관의 말에 뭘 그런 당연할 걸 묻느냐고 시큰둥하게 답하려 한 이형이었지만, 불현듯 떠올린 악동다운 발상에 말을 바꾸었다.
"아니,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기나 하자꾸나. 지금 성안에 역관이 있던가?"
"이 몸은 영광스러운 대청국의 장수! 훌리가이 지그갈랑이니라!"
"…흠, 필요 없었군."
망루 위에서 장수의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고 나서, 청군의 장수는 성이 떠내러 갈듯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듣고 있는 병졸들을 배려하기라도 한 것인지, 유창한 조선어였다. 아마도 저 청군의 장수는 조선인과 피가 섞였거나 어렸을 적부터 유별난 관계를 유지해온 모양이었다. 이형의 표정도 절로 떨떠름해졌다.
"이 갓난아이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전선에 나섰더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살아서 돌아갈 생각일랑은 하지 말거라. 내 네놈의 살가죽을 산 채로 벗기고 살점 하나하나를 포로 떠서 멧돼지에게 먹이로 던져주겠다!"
"저, 저 불경한 놈이 감히…!"
"그러나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몽골친왕 보르지기트 셍게린첸 전하께서 친히 자비를 베풀어 몸만은 무사히 네 어미 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안배해주마. 얼마 남지 않은 생 어미젖이라도 배불리 먹고 싶다면, 당장에 항복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장수의 고함에, 조선군은 장수들도 병졸들도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얼굴이 시뻘겋게 붉혔다. 하필이면 또 조선어로 모욕을 준 탓에, 저 장수가 누구를 모욕하고 있는 것인지 그들의 귀로도 똑똑히 들렸던 것이다. 이 세상에 왕이 모욕당하고서 분노하지 않는 백성들이 과연 있을까. 그들은 당장이라도 자신을 지르갈랑이라 칭한 장수를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저걸 모욕이랍시고 하다니 저놈들이 조선반도의 참맛을 보지 못했구먼.'
반면 모욕당한 당사자인 이형은 여유롭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살아오면서 별의별 참신한 욕을 다 들어오면서 살아온 입장에서, 고작 저 정도를 욕이랍시고 지껄이고 있는 꼴을 보자니 귀엽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형은 잠시 아, 아하고 작게 소리를 내어 목을 푼 다음, 망루 앞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장수를 똑바로 내려보면서,
"거 쥐 음경만 한 떨거지가 잘도 지껄이는구나. 네 애비가 이국의 왕 앞에서 그리 말하라 가르치더냐? 그것참 참신한 가정교육이로고. 내 어디 얼마나 반반한 양반이기에 그런 쌍소리를 입에 담는지 얼굴이나 구경 한번 해보고 싶구나."
하고 대뜸 속사포같이 쏘아붙였다.
"뭐, 뭐…."
"왜 말이 없느냐. 과인이 몸소 묻지 않았더냐? 어서 답하지 못할까. 아니면 네 애미가 말더듬이기라도 했더냐? 그래서 고향 땅의 노모를 그리느라 일부러 말을 더듬고 있는 것이더냐? 오호, 이거 참으로 효자로구나. 여봐라, 저자에게 쌀 여섯 섬과 콩 아홉 말, 그리고 엽전 일흔네 냥을 내주거라"
"저, 전하…?"
말문이 막힌 것은 청군의 장수만이 아니었다. 왕의 독설을 곁에서 듣게 된 조선군 또한 어안이 벙벙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직 약관의 나이도 되지 않은 소년 왕이 앳된 목소리로 카랑카랑하게 욕지거리를 쏟아내는 꼴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가관이었다. 몇몇은 차마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큽큽소리를 내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 왕 이형은 그런 그들의 동요에는 상관하지도 않은 채, 막힘없이 속사포처럼 말을 이어갔다.
"하오나 참으로 무례한 자 인지고. 과인이 이 나라 조선의 왕이거늘, 그 서까래에 문댄듯한 상판은 당최 무엇이더냐? 그래도 어전인데, 조금은 단정히 하고서 나서지 못할까. 아하, 설마하니 그것이 너희 애미애비가 물려준 상판이더냐? 유감이로구나. 과인의 무례를 용서하거라."
"저, 저, 저 맹랑한…!"
"그러나 저런 상판으로 과연 장가나 들었을까 의문이로다. 여봐라, 혹시 집에 자산은 충분히 있느냐? 상판도 인품도 보잘것없다면 예물로라도 여심을 사로잡아야 하지 않겠느냐. 어허, 그조차도 없단 말이더냐? 어찌 말이 없단 말이더냐. 저 친왕이라는 자도 참으로 부덕한 자로다. 제 부하가 예물조차 없어 삭아가고 있거늘.
여봐라, 과인에게 항복하지 않겠느냐? 항복한다면 부귀영화는 비록 보장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장가드는 문제만큼은 해결해주마. 물론 너희 족속에게 대대로 대물림 될 그 서까래에 짓뭉개진 상판만큼은 과인으로서도 어찌 구제할 도리가 없도다. 그것만은 상제께라도 빌어보도록 하거라."
"이 맹랑한 애송이가! 쳐 죽여 버리겠다! 네놈의 간을 씹어 삼켜주겠…!"
순간, 팍-하고 화살이 날아들었다. 조금 전까지 욕지거리를 퍼붓던 소년 왕이 활을 당겨 쏜 화살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번에도 화살은 목표로 했던 청나라 장수의 머리를 맞추지는 못하였다. 연습에서도 한 번도 제대로 표적을 맞힌 적 없는 활 솜씨였는데, 실전이라고 표적을 맞혔겠는가?
조준을 다소 벗어난 화살은 장수가 타고 있던 말의 오른눈에 명중하였고, 난데없이 눈에 화살을 맞은 군마는 괴성을 내지르며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썩어도 과연 팔기군의 무관이라는 것인지 날뛰는 말에서 굴러떨어지는 굴욕만큼은 피했지만, 군마는 주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대로 말머리를 틀어서 청군 본진을 향하여 도망쳤다.
이미 냉정함을 잃고 살기 위해 도망치기 시작한 말 위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청군 장수는 안장에 양다리가 걸린 채로 본진까지 무력하게 질질 끌려갔다. 말이 도약할 때마다 휘청휘청 이는 것이, 마치 사람으로 된 연을 보는 듯했다.
영락없이 도망치는 꼴이 되어버린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소년 왕 이형은 그를 향해 주먹 감자를 탁하고 날리고서는,
"거 별것도 아닌 쥐새끼 때문에 이 몸 어르신께서 괜한 기력만 낭비했구나. 여봐라, 식사를 대령하지 못할까? 과인은 시장하도다."
카악-하고 가래침을 성벽 아래로 뱉고서 물러났다.
"아이고, 전하…."
"주상전하 천세! 천세! 대조선국 천천세!"
그 꼴을 보고서 한숨을 내쉰 것은 무관들이었고, 천세를 내지른 것은 병졸들이었다. 왕으로서 체통이고 뭣도 없이 이쪽의 화를 돋구려 온 적장과 어울려 한바탕 욕지거리를 주고받았으니 그나마 경전 몇 줄이라도 읽은 무관들로서는 한숨이 절로 나왔고, 왕이 몸소 나서서 자신들이 하고 싶었던 말 대부분을 대신 해주었으니 병졸들은 그저 마냥 신이 나서는 천세를 불러댈 따름이었다.
무관들로서는 도대체 궁에서 어떻게 교육을 했길래 저런 터무니없는 소년 왕이 나왔는지 짐작도 가지를 않았다. 물론 속이야 시원했지만 말이다.
"아니, 이게 다 무엇이더냐. 어서 병졸들이 먹는 상을 차려오지 못할까. 과인 또한 지금은 한 사람의 병졸일 뿐이니라. 과인을 차별대우할 생각이더냐?"
"하오나, 전하. 그것은…."
배가 고프다는 말에 서둘러 상을 차려온 아전들은, 소년 왕의 말에 다시 상을 물려야 했다. 그러나 병졸들의 상을 차려오라는 말에는 아전들은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병졸들이 먹는 밥이 어떤 꼴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년 왕은 개의치 않았다. 이미 사서에 나오는 영웅호걸이라도 된듯한 기분에 취해있던 소년 왕은 옛 전국시대의 오기가 그러했듯이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사기를 한껏 끌어 올릴 작정이었다.
물론 그라고 해서 이 무렵 조선에서는 군량미에 장난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왕이 병사들이 먹는 상을 똑같이 차려달라고 했다고 해서 정말로 병사들과 똑같은 상을 차려주지는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뭐, 적어도 최소한 자갈은 좀 걸러서 주지 않겠어? 그래도 왕이 먹는 건데 말이야. 적어도 상식적인 범주에서 어느 정도는 가감해서 내주겠지.'
"어허, 과인의 말이 들리지 않느냐. 어서 병졸들이 먹는 상을 차려오지 못할까!"
그러나 소년 왕이 재차 재촉하는 통에, 차마 아전들은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별수 없이 병졸들이 먹는 상을 차려와야 했다.
양만 터무니없이 많은 보리밥에 산나물, 그리고 된장과 멀건 나물국이 전부인 상이였다. 설마하니 소년 왕이 병사들이 먹던 상을 차려오라고 명할 줄은 미처 몰랐던지라, 정말로 글자 그대로 가감 하나 없이 병사들이 먹던 상 그 자체였다.
그제야 소년 왕은 후회하는 기색을 얼굴에 띄웠으나, 애써 태연한 척 한 숟가락 깊게 떠 입안에 넣었다. 이제 와서 못 먹겠다고 한다면 세상 물정 모르는 애새끼처럼 보일까 두려웠던 것이다.
"으음, 참으로 맛이 좋구…."
으드득 뽀드득 뽀각뽀각.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돌이 씹히는 소리였다. 아니, 돌이 씹히는 소리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저쯤 되면 저게 보리밥인지 아니면 자갈 밥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이형이 배가 고프니 어서 상을 차리라고 보채다 보니, 정말로 병사들이나 먹던 식단을 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소년 왕은 뱉지 않고서 잠자코 보리밥을 씹었고, 상을 차려온 아전들과 장수들은 소년 왕이 돌을 씹는 소리를 듣고만 있어야 했다. 누군가 한 사람은 나서서 이를 말려야 했겠지만, 묵묵히 자갈 밥을 씹는 소년 왕의 흉흉한 기색에 차마 이야기도 꺼내지 못했던 것이다.
얼어붙을 것만 같은 차가운 침묵은 그 뒤로도 한참을 이어졌다. 소년 왕이 턱을 움직일 때마다 돌이 씹히는 소리가 방안 가득히 울려 퍼졌고, 그럴 때마다 아전들은 몸을 움찔움찔 떨어야 했다. 장수들은 아전들을 원망의 시선으로 힐긋힐긋 흘겨보면서도 소년 왕이 뭐라 호통을 칠까 두려워 묵묵히 정자세를 유지했고, 병사들은 조막만 한 입으로 자갈 밥을 으적이며 먹고 있는 소년 왕이 안쓰러워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돌을 씹어 한 상을 말끔히 비운 소년 왕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무덤덤하게 말했다.
"…참으로 맛이 좋구나."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다만, 그날 밤 성안 가득히 곡소리가 울려 퍼진 이후로 병졸들이 먹는 보리밥에 들어가는 자갈의 양이 조금은 줄어들었다는 소문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