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32화 (32/530)

< 각국의 사정 >

청과 조선이 평양성에서 누가 그나마 덜 엉망진창인가를 가리고 있을 무렵.

열강 각국은 그들 나름대로 계산에 따라 주판을 튕겨대고 있었다. 미지의 나라 조선과, 이미 두 차례에 걸친 아편전쟁에서 취약함을 들어낸 늙은 호랑이 청. 이 두 나라의 전쟁은 향후 극동에서의 판도를 좌우하게 될 터였고 그만큼 유럽 열강들로서도 놓쳐서는 안 되는 전쟁이었다. 산업혁명이 한창인 유럽 못지않은 인구 대국들이 집결해있는 동북아시아는 그 자체만으로 거대한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것은 서구열강들로서도 불우한 사태였다. 그것도, 그들은 전부 그들 각각의 이유로 개입할 수 없었다.

"프로이센 그 썩은 양배추 놈들이 기어이 사단을…!"

조선국 김포항.

임시로 마련된 공사관에서 벨로네 공사는 본국에서부터 도착한 전보를 쥐고서 손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전보에는 덴마크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패배하여 빈에서 종전조약이 체결되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는 벨로네 공사의 조국 프랑스에게 있어서도 끔찍한 사태였다. 프로이센의 북독일 지배권이 더더욱 공고해지면서, 프랑스에게 있어서 악몽이나 다름없는 독일 통일이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것이다.

당연히 이런 판국에 당초 벨로네 공사가 본국에 요청했던 참전요청이 받아들여질 리가 만무했다. 안 그래도 연이은 확장 전쟁으로 유럽에서 고립되어버린 본국 프랑스 제국이었다. 이번 조청전쟁에서 주도적인 입장에서 개입하려고 들면 그 즉시 영국을 위시한 여타 유럽 열강들로부터 견제가 들어올 터였고, 그렇게 프랑스 제국의 고립이 심화하면 심화할수록 프로이센의 독일 통일 가능성 또한 크게 올랐다.

프랑스로서는 행동거지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군수물자의 판매, 혹은 양도만이라도 좋습니다. 군사고문단의 준비는 어떻게 되었지요? 지금 조선에서 확실하게 저희들의 입지를 다져놓지 않는다면 또 어떤 승냥이들에게 빼앗길지 모른단 말입니다!"

"그것만은 안심하십시오, 벨로네 공사. 그 정도 선의 개입이라면 저희 극동 식민지 총독부에서도 얼마든지 해결 가능합니다. 곧 월남에 주둔 중인 무관들 중에서 적절한 인물들을 골라 파견하기로 하였습니다. 또한, 군수물자의 준비라면 저희 극동함대에 여유물자가 있으니 문제없습니다."

"그렇습니까? 그건 다행이로군요. 우선 당장 조선에게 제공할 수 있는 소총의 여유량이 얼마나 되지요?"

"즉시 양도 가능한 물량이라면 중고를 포함하여 150정이 조금 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나마 벨로네 공사에게 다행이었던 사실은 그렇다고는 해도 프랑스가 아예 손도 발도 쓰지 못할 만큼 궁지에 몰린 상태는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연락 담당 올리비에 주재무관의 답변에, 벨로네 공사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것은 아니었다. 만일 프로이센의 존재만 없었더라도, 그의 조국 프랑스는 지금 당장에라도 극동함대를 앞세워 청을 압박할 수 있었다.

그럼 당연히 종전 협상에서도 프랑스의 주도로 종전이 이뤄질 터였고, 거기까지 달성되면 조선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친프랑스 국가가 된다. 그런 원대한 야심을 품고 있던 벨로네 공사로서는 조국 프랑스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도록 족쇄를 채운 프로이센인들이 원망스럽고 또 증오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렇다면 우선 즉시 양도 가능한 150정만이라도 무상으로 지원하도록 합시다. 폐하께서도 그 정도는 눈감아주시겠지요. 군사고문단 파견은 피에르 로즈 제독만 믿고 있겠다 전해주십시오. 명심하십시오. 저희 신앙의 형제들을 돕기 위함입니다. 결코, 허술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무슈."

벨로네 공사가 겉으로는 무상으로 지원하겠다 하였지만, 당연히 무상일 리는 없었다. 적어도 그가 알기로 조선은 이제 막 개항을 시작하려는 비문명국가였고, 그렇다면 앞으로 근대화를 완수하려면 우선 군의 근대화부터 선행되어야 할 터였다.

그럼 조선의 정확한 국력은 알지 못해도 적어도 10만 정 이상의 최신식 소총이 필요할 터인데, 이렇게 프랑스에서 군의 근대화 과정에 개입하면 장차 그 10만 정 이상의 소총 물량을 프랑스가 독점할 수 있었다.

150정을 무료로 제공하고 또 그 사용법을 전수하는 대신 10만 정의 소총을 독점할 수 있다면 그의 조국 프랑스로서는 두말할 것 없이 남는 장사였던 것이다.

'의회의 허락이라면 사후에라도 받으면 그만이다. 받지 못한다면 사비를 털어서라도 성사시키고야 말겠다. 영광스러운 조국 프랑스를 위한 일에, 어찌 노력을 아낄 수 있으리오?'

벨로네 공사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그런 그의 각오를 알고 있었기에, 주재무관 올리비에 대령은 망설임 없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물론 조국으로부터 만족스러운 지원은 받을 수 없겠지만, 그들은 지금 당장 손안에 있는 것만으로 조국을 향한 책임을 다할 굳은 의지에 가득 차 있었다.

한편, 본국에서부터 지원을 받아내지 못하여 곤욕을 겪고 있는 것은 벨로네 공사와 프랑스 극동식민 총독부만이 아니었다. 이 무렵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었던 김병국과 러시아 제국 극동관구 또한 그러했다.

"아니, 어째서 참전하시지 못하시겠다는 겁니까? 만일 이번 전쟁에서 저희 조선이 승리하게 된다면 귀국에게 저 드넓은 만주를 개발할 권리를 드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안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말씀이야 참으로 감사드리지만, 지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차르께서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신 터라…."

'찢어 죽일 폴스키 개자식들. 찢어 죽일 이교도 산악인 놈들!'

조선에서 온 손님과 밀회를 하고 있던 러시아 공사 이그나티예프는 겉으로는 웃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얼마 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로부터의 어명으로 손과 발이 꽁꽁 묶여버린 탓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는 겁 많은

차르를 탓할 수도 없었다.

알렉산드르 1세 시절부터 약 50여 년간 계속되어온 캅카스 전쟁이 1856년 바랴틴스키 공작의 주도로 대대적인 공세 끝에 간신히 마무리되어가고 있던 차였다. 캅카스의 산악인들을 지원하던 튀르크와 영국의 도움도 무색하게도 산악인들은 타락한 이맘과 캅카스 이맘국을 외면하고 점차 러시아의 지배를 용인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었고, 연이은 팽창 전쟁으로 외톨이가 된 프랑스 제국에서는 러시아 제국과 손을 잡으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는 크림전쟁 이후로 외교적 고립과 끊임없는 내우외환에 시달려온 러시아 제국에게 있어서도 한 줌의 여유가 되어줄 터였다. 빛의 도시 파리는 유럽에서도 두 손가락 안에 드는 금융 중심지였던 데다가 현 차르는 산업화에 열심이니만큼, 이대로 프랑스와의 밀월관계가 성립했다면 러시아 제국은 단번에 날아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캅카스 전쟁 와중에 작년에는 폴란드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봉기가 일어나 모든 것이 뒤집혔다. 러시아 제국은 독립을 요구하는 폴란드인들의 목소리를 무력으로 짓밟았고, 프랑스인들은 그런 폴란드인들에게 동정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다시 프랑스와 러시아의 관계는 냉각화되었다.

이 와중 프로이센의 새로운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나서 폴란드 독립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러시아는 그 보답으로서 프로이센의 2차 슐레스비히 전쟁을 지지하게 되었고 그 결과 프랑스와는 완전히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다행히 캅카스 전쟁은 무사히 러시아 제국의 승리로 끝나고 프로이센 또한 덴마크를 패배시키고 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안 그래도 위태롭던 러시아의 재정은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애초에 프로이센은 폴란드의 반발을 짓누르는 데에 동지가 되어줄 수는 있어도 러시아에게 당장 부족한 재정을 보충해줄 만한 부국은 아니었다. 여기에 대외적으로는 쉬쉬하고 있으나 주먹구구식의 농노해방령의 부작용으로 농민쟁의가 연달아 터져 나오고 있었다.

만약 러시아 제국 극동관구가 중앙아시아 총독부처럼 무시할 수 없는 재량권을 가지고 있다면 또 모를까, 러시아 제국 극동관구는 최근에야 연해주를 통하여 개척민들이 모이면서 간신히 걸음마를 떼는 와중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도 아직 논의만 되고 있던 판국에 충분한 병사들이 모여있을 리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정부로부터 독단적으로 움직일 재량권을 부여받았을 리도 만무했다.

결국, 중앙정부의 허락도 지원도 받아낼 수 없는 이상, 러시아 제국 극동관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두 나라 중 어느 나라가 승리할 것인가를 점쳐보고 전후 어느 나라와 손을 잡는 것이 향후 러시아에 이익이 될지를 정보를 모아 계산해보는 정도였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이번 전쟁에서 저희 조선의 입장을 지지해주시는 것만이라도 안 되겠습니까? 귀국의 지지만으로도 저희 조선은 큰 은혜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으음, 그렇다면야…우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차르께 이야기해드려 보겠습니다. 그러나, 큰 기대는 하시지 않는 편이 좋으실 것 같군요."

'무엇하나 뜻대로 풀리는 게 없어, 빌어먹을! 이번 기회에 조선으로 뻗어 나갈 수만 있다면 비원의 부동항을 이 극동에 마련할 수 있었을 텐데…!'

이그나티예프는 내심 입맛을 쩝쩝 다셨다.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면서 일약 출세한 그였다. 만일 이번 기회에 조선에 대한 지배적인 이권마저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그는 새로이 설치될 극동총독부의 초대 총독에 등극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현실은 비정했다. 러시아 제국은 내적으로는 개혁을 외치는 차르와 현실의 괴리 속에서 불협화음을 일으키면서 외적으로는 유럽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현 차르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바라는 것은 부하라, 히바, 코칸드 3개 칸국을 정벌하고 중앙아시아를 평정하는 것이었지 극동은 부차적인 덤이었다. 결국, 이그나티예프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로, 우선 그런 겉치레뿐인 말로 조선에서 온 손님을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전하의 안목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한눈에 보아도 저들은 우리 조선보다도 궁핍해 보이고, 함부로 움직일 수 있을 만한 힘도 없어 보인다. 이 전쟁은 애초에 무모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편 그런 이그나티예프의 태도에 김병국은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러시아가 북방의 강국이라고 하여 잔뜩 기대하고서 연해주까지 찾아왔는데, 정작 블라디보스토크는 모든 것이 눈에 뒤덮인 춥기만 한 개척촌에 지나지 않았고 얼핏 보기에도 그리 많은 병사들이 주둔 중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나마 병기들만큼은 조선의 것보다는 한눈에 보아도 훨씬 질이 좋아 보였지만, 명색이 이 근방에서 가장 커다란 러시아 도시라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 중인 병사들도 한 줌에 지나지 않는데 무슨 힘을 쓸 수 있을까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는 이대로 터덜터덜 조선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대로 빈손으로 조선에 돌아가봤자, 그를 기다리고 있을 건 탄핵뿐인 것이다. 안 그래도 청과의 협상에 실패하면서 입지가 위태로워진 김병국이었다. 이번 러시아와의 협상마저 실패한다면 그때야말로 정말로 모든 책임을 지고 초야로 물러나야 할지도 몰랐다.

'무언가 방법이…응?'

그때였다. 어딘가 낯익은 이가 방안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복식도 생긴 모습도 러시아의 색목인들과는 달랐다. 한눈에 보아도 그의 고국 조선에서 온 인물이었다. 그를 어디에서 보았을까 한참을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병국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누구인지를 눈치챘다.

그는 조선통신사 박규수였다.

"아니, 왜국으로 가셨던 분이 왜 노국에 계시오?"

"음? 오오, 대감이야 어쩌다 노국에 계십니까? 역시나 제가 없는 동안 조선도 바빴던 모양이로군요."

눈이 절로 동그래진 김병국과는 달리, 박규수는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김병국으로서는 태연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일본으로 떠났던 박규수가 이런 곳에 있단 말인가? 그로서는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박규수는 그에게 자세한 사유를 설명하는 대신, 그의 뒤로 따라 들어온 또 다른 색목인을 소개하였다.

"인사드리십시오. 로버트 공사, 이쪽은 김병국 대감이십니다. 대감, 이쪽은 로버트 프라인 공사이십니다. 태평양 건너 미리견에서 오셨지요. 이분이 저희들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반갑습니다, 로버트라고 합니다."

떠듬떠듬 어눌한 어투로, 로버트 공사라 소개받은 인물은 김병국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신호라는 것은 이곳 러시아에 건너온 뒤로 알 수 있게 되었지만, 김병국으로서는 박규수가 어쩌다가 이런 색목인과 안면을 트게 되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박규수는 답하지 않고서 그저 그에게 어서 악수를 할 것을 재촉하였다. 김병국은 떨떠름하게 로버트 공사라고 소개받은 미리견 출신 색목인과 손을 마주 잡았다.

"반갑소. 김병국이라고 하오."

그제야 로버트 공사라 소개받은 색목인은 빙긋이 웃어 보였다. 김병국은 미처 몰랐지만, 그는 당장 손도 발도 쓰지 못하고 잠자코 구경만 하고 있던 러시아 제국 극동관구의 구원투수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김병국 또한 지금은 몰라도, 머지않아 이를 알게 될 터였다.

"이런 맙소사…."

한편, 그들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움직일 수 없었던 인물이 있었다. 바로 주청 영국 공사 토마스 그로스 베너였다. 다른 여타 열강들과 달리, 영국은 크림전쟁 이후 제법 피해가 누적된 상황이기는 했으나 이후 2차 아편전쟁에서 맹위를 떨쳤듯이 자체적인 피해는 크지 않았다. 심지어 2차 아편전쟁 당시에는 동시에 세포이들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했었다.

그런 영국에게 중부 유럽에서 독일 통일 전쟁의 전운이 무르익었다고 해도 고작 그런 이유로 조선과 청의 전쟁에 개입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 손도 발도 쓸 수 없었다. 토마스 공사는 그가 설령 조청전쟁에 개입할 것을 주장하여도 의회에서 이에 난색을 표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설령 의회에서 이를 용인한다고 하더라도 이 사안이 더욱 윗선까지 전달되는 것은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한 것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부군께서 돌아가신 이래 벌써 3년째 칩거하시고만 계시니, 도대체 어찌하면 좋을지…!"

영국은 입헌군주국이었고, 기본적으로 내각에서 무언가 일을 꾸미고자 한다면 국왕의 인가를 받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그리고 현재 영국의 여왕 빅토리아 1세는, 그녀의 남편 앨버트공이 세상을 떠난 이래 슬픔에 잠겨 벌써 3년째 의회개원에도 출석하지도 않고서 완전히 국정을 포기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과부 여왕에게 동정적이었던 여론도, 여왕이 국정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영국이 반쯤 뇌사상태가 되자 궁전 앞에서 시위를 벌일 정도로 적대적으로 돌변했다.

그 결과가 공화주의의 득세였고 그것은 곧 혁명의 기운이었다. 물론 토마스 공사에게는 고작 이 정도 시련으로 그레이트 브리튼 연합왕국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 확신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벌써 3년째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여왕이 슬픔을 떨쳐내고 다시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의 영국은, 그들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하나둘씩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영국은 지금 단순히 조청전쟁에 개입할 수 없는 처지인 게 아니었다. 사실상 내각이 알아서 가장 중요한 일들만 직권남용이 되지 않는 선에서 해결 해야 하는 뇌사상태라는 것이 더욱 정확했다. 이 탓에 평소라면 진작에 개입하여 무언가 계략을 벌였을 세기의 대해적 영국은, 프랑스와 미국과 러시아가 제각각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청전쟁에 손을 대는 와중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손가락만 빨고 있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여왕이여, 장수하소서. 오직 하나뿐이신 주여, 여왕께 슬픔을 떨쳐내고 이 나라를 다시금 이끌어갈 용기를 주소서…."

여왕의 충성스러운 신하였던 토마스 공사로서는 그저 하루라도 빨리 여왕이 슬픔을 떨쳐내고 내각과 협력하여 식민지 전쟁을 재개해주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조선에게는 천운이게도, 서구 유럽의 각 열강들은 제각각의 이유로 미처 극동까지 그 마수를 마음껏 휘두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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