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화되는 전투(1) >
평양 전투의 첫날은 서로가 서로에게 승리를 미루는 양상으로 바보짓을 주고받으며 끝이 났다. 각각 피해는 성을 끼고서 싸웠던 조선군이 천여 명이 조금 안 되는 병사들을 손실하고 청군이 하루 만에 5천여 명을 손실하며 조선의 우세였다. 조선군은 그들의 미숙함으로 바보짓을 해도 평양성의 성벽이 그것을 메꿔주었지만, 청군은 미숙함으로 바보짓을 반복할 때마다 병사들의 인명으로 덮어야 했던 탓이었다.
"비참하군."
그리고 이러한 전황은 청군의 지휘봉을 잡은 몽골친왕 셍게린첸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그날 밤 셍게린첸의 막사에 모인 청군 무관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안 그래도 보급도 그리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와 같은 손실이 반복되면서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수록 시간 내에 평양성을 함락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건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병졸들의 질에서는 비등하거나 우군의 우위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수성의 입장이고 우리들은 공성의 입장이지. …이를 어찌하면 좋겠나?"
셍게린첸의 되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오늘의 졸전에 치욕으로 몸 둘 바를 모르는 비교적 양심적인 무관들도 물론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셍게린첸을 지난 2차 아편전쟁 시절부터 보위해온 이들이었다. 그 외 무관들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수준 이하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나마 나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무관들은 양반이고, 몇몇은 벌써부터 겁에 질려서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었으며 또 몇몇은 대담하게도 그건 당신이 생각해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듯이 고깝게 셍게린첸을 노려다 보고 있었다. 그들은 만주족이고, 셍게린첸은 몽골족이었으므로 직접적으로는 말할 수 없어도 양자 간의 알력관계나 차별도 엄연히 존재했던 것이다.
'이런 군대로 어떻게든 조선의 항복을 받아내라니 애당초 그 여자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 모습에 셍게린첸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물론, 고작 만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명색이 몽골친왕인 셍게린첸을 무시하는 건 불가능하다. 저들은 또한 서태후가 이번 원정에 억지로 참전시킨 그녀의 끄나풀들이기도 했다. 당연히 그런 끄나풀들이 유능할 리도 없었고, 오늘 있었던 전투에서도 저들은 한참 뒤에서 병사들을 계속 앞으로 돌격하라 몰아붙일 뿐 자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결국, 셍게린첸은 저들에 대한 건 일단 모른척해 두기로 했다. 안 그래도 갈 길이 바쁜데, 저런 내부의 방해꾼들까지 신경 썼다가는 끝이 없었다.
"병졸들을 2부류로 나누어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성을 공격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조선군은 민병들이 주축이 된 듯하니, 이런 변칙적인 전략에는 대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먼저 의견을 제시한 것은 그를 따라온 몽골족 무관 보오르추였다. 얼핏 이치에 맞아 보이는 전략이었다. 실제로 그래도 정규군이 주축이 된 청군과는 달리 조선군은 민병들이 주축이 된 만큼, 이런 변칙적인 상황에서의 대응은 훈련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셍게린첸은 한숨을 내쉬며 이를 거절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확실히, 그대의 말은 이치에 맞는다. 그러나, 그대도 보지 않았던가. 시위를 당겨도 성벽까지 닿지 못하는 나약한 육신을 가진 우군의 병졸들이다. 그대는 과연 그들이 내일 낮 내내 놀려둔다고 해도 내일 밤을 새워 싸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결국, 훈련도의 문제였다. 조선군이 물론 민병들이 주축이 되어 훈련도가 보잘것없는 것이 사실이었으나, 이는 정규군이 중심이 된 청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명색이 궁기병이라는 자들이 시위를 당기는 힘이 부족하여 성벽 너머까지 화살을 날려 보내지도 못하던 것이 지금 청군의 현실이었다.
그런 허약한 체력으로 낮 내내 후방에서 쉬도록 배려한다고 해도 밤새워 싸울 수 있는 병졸들이 몇이나 될까. 1만이나 채울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보오르추 또한, 거기에 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소신의 생각이 얕아 미처 거기까지는 염두에 두지 못하였습니다."
"아니, 그대는 최선을 다하고 있도다. 또 다른 안을 가진 이는 없는가?"
그러나 막상 보오르추의 안을 물리고 나자 돌아온 것은 또다시 침묵이었다. 딱히 셍게린첸이 무관들을 강압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님에도, 누구 한 사람 나서서 안을 내려는 자가 없었다.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가 낸 안으로 전과를 낸다면 출세할 수 있겠지만, 그만한 패기를 가진 장수들이 없었다.
젊은 무관들은 어서 빨리 전쟁이 끝나고 그의 첩들과 놀아날 궁리뿐이었고, 나이든 무관들은 그저 그들의 마지막 원정이 될 이번 전쟁에서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울 수는 없더라도 하다못해 책잡힐 건수만이라도 만들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다들 그저 우물쭈물하며 셍게린첸의 눈치만 살피거나, 아예 시선을 회피하는 이들뿐이었다.
결국, 셍게린첸은 그 스스로 모든 걸 결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나마 겨울이라 강들이 얼어붙기는 했지만, 아직 밑바닥까지 완전히 얼어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북쪽으로는 산이 있고 동쪽과 남쪽은 대동강이, 서쪽으로는 보통강이 흐른다. 어쩌면 좋은가?'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였다. 북쪽에 봉화산이 툭 튀어나온 탓에 성 서쪽과 동쪽의 병졸들이 유기적으로 연계하기 어려웠고, 동쪽과 남쪽으로 흐르는 대동강은 아직 강 위로 얼음 조각이 둥둥 떠다닐지언정 완전히 얼어붙지 않았다. 그 탓에 동쪽과 남쪽에 병사들을 배치하여 성의 보급선을 끊을 수는 있어도 동쪽과 남쪽에서부터 성을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대동강을 건너려면 일단 뗏목이라도 필요할 텐데, 강 건너의 조선군 포병들이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공격 경로는 서쪽과 북쪽으로 제한되게 되는데, 그걸 조선군이라고 모를 리도 없었다. 한눈에 보아도 성벽 위를 빼곡히 채운 것이 조선군이었다. 무턱대고 힘으로 뚫으려 한다면 얼마나 큰 희생이 필요할지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그러나 달리 방도가 없다. 활조차 제대로 쏘지 못하는 병졸들을 데리고서 무슨 군략을 펼친단 말이더냐?'
"내일, 동이 트는 대로 대동강 너머에는 1만의 병력만을 남겨 계속하여 성을 포위케 시키고, 모든 병졸들을 모아 이곳 서쪽의 다경문과 선요문을 친다. 화포들 전부 다경문과 선요문을 조준하라 명하도록."
결국, 셍게린첸은 각오를 다졌다. 끝내 병졸들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힘으로 밀어붙이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었다. 당장 병졸들의 전략이해도가 바닥을 치는 가운데 그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이는 청군 무관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 그날 셍게린첸의 막사에서 열린 군략회의는 그렇게 끝이 나게 되었다.
물론 청군에서 힘으로 밀어붙일 것이라는 걸 모를 조선군도 아니었다.
"북적은 필시 서쪽 방면에서부터 힘으로 몰아붙이려 들 것입니다."
"오호, 자신만만하시구려.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어째서요?"
"간단합니다. 저희 조선과 북적 모두 병졸들의 질이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창근의 씁쓸한 대답에, 이형은 입을 다물었다. 참으로 냉정한 평가가 아닐 수 없었다. 이형은 어쩐지 가슴팍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실로 과도한 충언은 누군가에게는 폭력이었다.
"북적도 급히 이곳 평양성까지 남진하였으니 보급이 넉넉하지 않을 것입니다. 필시 짧은 시일 내에 끝장을 보려 하겠지요. 그러나 저런 형편없는 병졸들로 함부로 군략을 펼칠 수도 없으니, 우선 다소의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성을 함락시키려 할 것입니다."
"흐음, 그거 끔찍한 일이구려. 그래서, 뭔가 대안은 있소?"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군략을 펼치기에는 우군도 북적도 모두 병졸의 질이 형편없습니다. 그러니, 굳이 말씀드리자면 저희 조선도 모든 힘을 다경문과 선요문 근방에 모아 힘으로서 견뎌내는 수밖에 없겠지요."
유창근의 담담한 대답에 이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결론은 강대강 대결이라는 이야기였다. 힘과 힘이 맞부딪혀 힘에서 밀린 쪽이 패한다. 참으로 알기 쉬운 이야기였지만, 또 어려운 이야기이기도 했다.
비록 성을 끼고 있으나, 조선군과 청군의 숫자는 단순 계산으로도 4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그나마 화포의 숫자에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여차하면 모든 포병전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청군과 달리 조선군은 대동강을 넘어 도하해 올 적군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포병전력 일부는 전투가 없는 대동강 방면에 남겨둬야 했다. 전체적인 화포의 숫자에서는 엇비슷해도, 당장 내일부터 전투가 심화할 서쪽에서는 2배 가까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쩔 수 없구려. 성민들을 독려하여 아직도 사적으로 총을 가진 자가 있으면 총을 들고서 적과 맞서라 하고, 없다면 없는 대로 돌이라도 던지도록 하시오. 명일부터는 그마저도 부족하게 될 테니."
"하명하신대로 하겠사옵니다, 전하."
그럼 조선에서도 내놓을 수 있는 대응전략이 마땅히 없었다. 그날 저녁부터 성내에서 시작된 추가 모병은 다음 날 수탉이 울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만으로 자그마치 4천여 명에 달하는 자원자들을 모아왔다. 본래라면 전선에 나오지 않아도 될 노약자, 아녀자, 어린아이들 같은 이들이었다. 모두 소년 왕의 친정에 큰 감명을 받아 그를 지키려 스스로 일어난 이들이었다.
"어째서 과인은 안된단 말이더냐!"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전하. 혹여나 상흔이라도 입게 되신다면 어찌하시려고 그러신단 말씀이십니까!"
"치이잇, 정말이지 성가시도다! 좋다, 이번만큼은 경의 얼굴을 봐서라도 이만 물러나겠노라."
그 모습에 감명을 받아서는 아예 성벽 위에서 직접 활을 들고서 적들과 맞서겠다 나선 소년 왕은 거의 오열하듯이 다급히 이마를 박아댄 금위대장 허계의 간곡한 청을 못 이겨 뚱한 얼굴로 내성에 남게 되었다. 그 모습에 성내의 무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한편으로는 용감무쌍한 소년 왕 이형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
설마하니 북적이 쳐들어 와 이곳 평양성에서 농성을 하게 되는 것까지는 예상했어도, 그 평양성에 소년 왕이 몸소 오군영의 정예기병대를 이끌고서 그들과 함께해줄 것이란 생각은 미처 못했던 것이다.
'이분만큼은 우리들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무사히 한양으로 돌려보내 드리자!'
그런 공감대가 성내의 무관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스스로의 실력으로 무관이 된 이건, 안동 김씨에 연줄을 대어 관직을 산 인물이건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일치했다. 비록 아직 약관도 되지 않아 철이 없기는 했어도, 다 큰 어른인 무관들보다도 용감한 어린 소년 왕의 모습에 무인으로서 느끼는 것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소년 왕에게 감화되어가고 있었다.
정작 그 어린 소년 왕 안에 든 건 나잇값 못하는 낼 모래 마흔 아저씨였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