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기일발(1) >
"갑주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틀째의 전투가 끝나고 난 후, 평안도 관찰사 홍우길이 한탄하듯이 내뱉은 말이었다. 이에 소년 왕 이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갑주라고 해봐야 총탄에는 뚫리는 것 아닌가. 그것이 그리도 큰일인가?"
"큰일이지요. 갑주를 입으면 때에 따라서는 총탄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만, 면옷은 확실하게 관통당합니다. 또, 갑주가 있다면 눈먼 화살이나 파편들로부터 능히 몸을 지켜줄 수 있지요. 북적은 누구나 갑주를 입고 있으나 우군은 면옷이 대다수이니, 북적들이 성벽을 타는 데 능숙해질수록 우군의 피해도 점점 더 커지게 될 것입니다."
금위대장 허계의 보충설명에, 이형은 그제야 신음을 삼켰다. 사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청군은 비록 이름 뿐이기는 하나 명색이 대청국 최정예 팔기군이었다. 지배계층 만주족이 중심이 된 팔기군은 전투력은 바닥을 쳤어도 병장기만큼은 언제나 최우선적으로 최선의 품질을 보급받았다. 팔기군이 타락하면서 실기능보다는 겉 외양을 더 중시하는 등 나사 빠진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팔기군은 팔기군이었고 갑주는 갑주였다. 조선군의 짱돌이나 화살 정도는 타격점에 따라서 한두 번은 견딜 정도의 내구도는 있었다.
그 반면 조선군은 의병이 중심이었고, 그러다 보니 거의 대부분이 면옷이나 끽해야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오군영에서 차출된 기병들은 누구나 두정갑을 입고 있었으니만큼 피해손실도 적었지만, 면옷 차림의 의병들은 청군의 칼날이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이었고 화살이라도 맞으면 타격점과 무관하게 무력화되었다.
물론 총탄에 맞으면 갑주를 입었건 면옷을 입었건 평등하게 한방이었지만, 전장에서 상처를 입는 방법이 총상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투가 격화되면 격화될수록,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방법으로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호송되는 숫자가 늘어나는 건 조선군 쪽이었다.
"그럼 뭔가 방도가 있는가? 혹, 성내의 여유 갑주가 남아있다든가?"
"송구하옵니다. 성내의 갑주에는 더는 여유가 없습니다. 급한 대로 목판이라도 뜯어내 방패로 사용하도록 해야겠습니다."
"목판? 지금 성내의 병사들이 4만이 훌쩍 넘는데, 그들 모두에게 보급할 목판을 어디에서 난단 말인가?"
"민가에서 차출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들 전부에 보급할 필요 없이, 최전열에서 북적과 검격을 주고받을 병종들에게만 우선적으로 보급하는 정도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럼 적어도 눈먼 화살에 당할 위험은 조금이라도 줄어들겠지요."
'다만….'
홍우길은 뒷말을 삼켰다. 고의로 소년 왕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건 말해봤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갑주가 부족한 건 임시변통이나마 목판으로 방패를 만들어 보급하면 그럭저럭 해결되겠지만, 평양성의 내구상 한계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육안으로 식별된 화포만 100여 문이다. 필시 그 이상의 화포가 저 뒤로 있을 터이고, 그 모든 화포가 전부 한곳에 집중된다면 제아무리 난공불락의 평양성이라 할지라도 그리 오래는….'
삼국시대의 고구려 도읍으로서 처음 건설된 평양성이었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로도 평양성은 꾸준한 재보수와 중건을 거쳐왔고, 그런 만큼 비록 성은 낡았어도 그 설계까지 낡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석재, 자갈, 흙으로 3단계에 겹쳐 세운 두께만 13m에 달하는 두터움과 9.5m가량의 성벽을 기어오르는 병졸들을 견제하는 데에도 원거리에서 성벽을 부수려 하는 화포부대의 포격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성벽. 그것이 평양성이 난공불락이라고 불리는 이유였다.
그러나, 난공불락이라는 것이 곧 어떤 상황에서도 끄떡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단단하다고 해봤자 인간이 만든 성인 이상, 화포를 끌고 와서 화약의 소모도 아쉬워하지 않고 되는대로 쏘다 보면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있었다. 지금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16만에 이르는 대군과 수백에 달하는 포대. 어느 쪽도 쉬운 부분이 없었다. 비록 외성이 무너진다고 해도 그 뒤로 중성과 내성이 남아있었지만, 외성이 무너지게 되면 성의 면적도 확 줄어들뿐더러 당장 성안의 백성들과 함께 비좁은 중성으로 후퇴하거나 백성들을 버리고서 후퇴하거나 1택을 해야 한다. 어느 쪽이건 길게 버틸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조금만 더 버텨다오. 저들도 이만한 화력을 며칠이고 퍼부을 수 있을 만큼 화약이 넉넉하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 이틀간만 더…!'
어차피 청군이 저만한 화력을 동원한 이상 언젠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일단 균열이 보이는 족족 모래주머니 따위를 쌓아 덧대는 수밖에는 없었다. 홍우길은 그저 노력이 헛되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도할 따름이었다.
"흐음, 뭐 좋소. 그런데, 듣자 하니 성벽의 상황이 영 좋지 않다던데. 뭔가 뾰족한 수가 있는 거요?"
"심려하지 마십시오. 균열이 보이는 대로 병졸들을 시켜 이를 보수하라 명하였습니다. 비록 낡은 성이지만, 그리 간단히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흐음…."
홍우길의 대답에, 이형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그날의 군략회의를 마쳤다. 소년 왕의 눈동자에는 기이한 각오가 서려 있었다.
다음날 동이 트는 대로 다시 전투는 재개되었다. 시작을 알린 건 이번에는 조선군 화포부대의 일제사격이었다. 대다수는 빗나갔지만 적중한 십수 발의 포탄이 청군 전열을 난자했고, 한차례의 사격 만에 족히 백여 명 가까이 되는 청군이 사지가 갈가리 찢겨 허공에 흩어졌다. 사흘간에 전투를 거치면서 양군의 숙련도는 첫날의 참상이 무색하게도 빠르게 개선되어가고 있었다.
"히, 히이익! 사, 살려줘! 내 다리! 내 다리이!"
"기죽지 마라!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전군 돌격! 오늘에야말로 성을 함락시킨다!"
첫날에는 이것만으로 전열이 무너져 도망쳤겠지만, 청군도 전투가 사흘째에 접어들자 더는 그렇게 간단하게 만은 물러나지 않았다. 무관들의 독려에 청군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성벽을 향하여 진군했고, 그 위로는 쉼 없이 조선군의 포격과 총격이 빗발쳤다. 포탄이 한번 휩쓸고 갈 때마다 족히 십수 명의 병졸들이 쓸려나갔고, 조선군 포수들의 총격은 거의 백발백중으로 총알 한 발이 복수의 청군을 관통하는 경우도 흔히 벌어졌다.
청군의 시체가 삽시간에 전장을 빼곡히 채워나갔다. 지난 이틀간의 전투 중 목숨을 잃은 청군의 숫자보다, 이날 하루 조선군의 요격으로 목숨을 잃은 청군의 숫자가 단연 압도적으로 많았다.
"전하께서 보고 계신다! 기죽지 말고 쏴라! 대조선국 천세!"
슈슈슉-.
그리고 양자 간의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지고 나자 다시 청군으로부터 견제사격이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군이 견제사격을 가하는 족족 몸을 숨겨야 했던 전날과는 달리 이날의 조선군은 청군의 견제사격에도 기죽지 않고 계속해서 사격을 퍼부었다.
전날의 경험으로 성벽이 화살 대부분과 총탄을 막아준다는 것을 알게 된 덕분도 있지만, 설령 성벽을 넘어 청군의 화살이 넘어와도 나무를 깎아 만든 청군의 목제 화살촉은 임시변통으로 만든 조선군의 목제 방패조차 뚫지 못했다. 그렇게 청군의 견제사격에도 기죽지 않고 성 위에 조선군이 총격을 퍼부으면서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화망은 더욱 촘촘해져 갔고, 청군의 시체는 점점 드높아졌다.
전날이었으면 이미 줄을 타고 성벽을 기어올랐을 청군은, 이날은 성벽에 갈고리를 걸어보지도 못하고서 차곡차곡 시체의 산을 쌓아 올렸다.
퍼퍼펑-.
"먼저 간 전우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마라! 오늘에야말로 저 성을 무너뜨린다!"
그제야 청군의 화포부대도 불을 뿜기 시작했다. 전날 화포부대의 포격이 선행되자 조선군의 포격이 일찌감치 화포부대에 집중되었던 경험을 떠올려, 보병대의 더 많은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그동안 포격을 가하지 않고서 후방에 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청군의 본격적인 포격이 시작되면서 수십 발의 포탄이 성벽을 두들겼고, 청군의 화살과 총탄 따위는 전날의 경험으로 무시하던 조선군 포수들도 이 포격에는 당할 도리가 없어 기세가 크게 꺾였다.
무엇보다도 또다시 3차례의 일제사격을 거친 후 침묵한 서역의 후장식 포대의 위력이 결정적이었다. 단순히 소리만 요란했던 청군의 포대와 달리 이 후장식 대포의 포탄들은 한발 한발이 부딪힐 때마다 굉음과 함께 성벽에 크나큰 균열을 만들어 놓았다. 그 요란스러운 소리와 위력에는 차마 조선군 포수들도 당해낼 수가 없어, 감히 성벽 위로 고개를 내밀지도 못한 채 그저 자신들에게 만큼은 저 불벼락이 쏟아지지 않도록 빌고 또 비는 수 밖에 없었다.
그 즉시 조선군 화포부대도 청군 화포부대에게 대응 사격을 가하였지만, 전날과는 달리 각 포대별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멀리 떨어져 있었던 탓에 전날과 같은 효과는 없었다. 오히려, 일시적으로 조선군의 포격이 사라지면서 기세가 오른 청군 보병대가 그 틈에 성벽에 갈고리를 걸고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벌써 몇차례고 성벽을 올라서 인지, 그 속도와 안정성은 감히 전날에 비할 것이 못 되었다. 삽시간에 수천에 달하는 병졸들이 성벽에 매달렸고, 또 수백에 달하는 병졸들이 성벽 위에 올라섰다.
"방포 정지! 정지하라! 북적의 화포는 우선 무시해두고서, 우군을 도와 성벽을 기어오르는 북적 병졸들을 우선적으로 노리고 쏴라!"
"다이칭구룬 만세! 셍게린첸 친왕 전하 만만세-!"
뒤늦게나마 실수를 깨달은 조선군 무관들이 대응 포격을 포기하고서 청군 보병대에게 다시금 화포를 퍼부으려 했지만, 이미 청군 병졸들은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한 다음이었다. 청군 포병대는 우군 병졸들이 포격에 휩쓸리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서 마구 불을 뿜어댔고, 청군 병졸들은 첫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능숙하게 성벽을 기어올라 성벽 위에 조선군과 교전하였다.
이때도 변함없이 성벽 위에 조선군으로부터 짱돌이 날아왔지만, 청군도 학습하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냉병기 하나만큼은 보급이 남아돌던 팔기군 병졸들은 아예 일찌감치 거추장스러운 장병기들은 막사에 두고서 쇠를 덧댄 등패와 환도 두 가지만 장비한 채 성벽을 기어올랐고, 조선군의 짱돌 세례는 청군의 등나무 방패 앞에 튕겨 나갔다.
퍼억-.
"편곤 앞에서 등패라니! 이 북적 놈들이 어지간히도 죽음이 고팠던 모양이로구나!"
물론 고육지책이었다. 등패는 근본적으로 타격기에 취약했고, 청군은 짱돌 한방을 막고서 방패가 까뒤집혀 무력화되거나 성벽 위에서 그들이 기어오르기만을 벼르고 있던 조선군 기병들의 편곤 세례에 맞고서 튕겨 나가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청군으로서는 일단 조선군의 짱돌 세례 한 번에 휩쓸려 나가는 사태를 피했다는 것만으로 고무적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