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기일발(2) >
그날 성벽을 기어오르기까지, 더욱 많은 청군이 목숨을 잃어야 했던 만큼, 그날은 더욱 많은 청군이 성벽 위에 오르는 데에 성공했다. 조선군의 석전 세례는 전날과 같은 성과는 내지 못하였고, 성벽 위에서는 어떻게든 청군을 다시 성벽 아래로 밀어내려는 조선군과 어떻게든 조선군을 뚫고서 성안으로 침범하려 하는 청군의 육박전이 벌어졌다.
다만 이날은 첫날과 같이 조선군도 청군의 날붙이를 보는 족족 뒤로 도망치려 하지는 않았다. 당장 앞장서서 청군과 맞서는 오군영 기병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도 매일같이 실전을 겪으면서 점차 공포에 익숙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의병장들은 각자 환도를 뽑아 들었고, 일반 병졸들은 급한 대로 나무를 깎아 만든 곤봉이나 창을 뽑아 들었다. 그조차 없는 이들은 청군이나 조선군의 시신에서 장비를 탈취해 무장하여 싸웠다.
"죽어라. 이 오랑캐 놈들아! 감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이 개만도 못한 야인 놈들 따위가!"
"하늘을 거스르다니 부끄럽지도 않더냐, 이 조선 놈들아! 감히 상국에 송곳니를 들이댄 그 오만방자함, 이 후쥔 님께서 손수 벌해주겠다!"
퍼억-.
사흘간을 피를 보면서 눈이 까뒤집힌 양군은 거칠 것 없이 서로를 향해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다. 난전이었다.
편곤으로 등패를 들고 있던 손채로 뭉개고 청군이 떨어트린 환도로 목을 베어 넘겼다가 우군의 시체를 방패 삼아 접근해온 청군 병졸에게 목이 꿰뚫려 죽는 조선군 기병이 있는가 하면, 겁도 모르고 나무곤봉 따위를 들고 덤벼든 조선군 의병을 그 즉시 가슴팍에 환도를 찔러넣어 무력화시켰다가 이를 악물고 죽을 힘을 다해 환도를 붙잡은 의병에게 무기를 잃고서 옆에서 나무곤봉을 휘두른 또 다른 의병에게 머리가 터져 죽는 청군이 있었다.
연달아 달려드는 조선군 3명을 삽시간에 베어 넘기고 우쭐거리다가 짱돌을 들고 달려든 댕기 머리 처녀에게 머리가 깨져 죽는 청군도 있었고, 환도에 목을 베이고서도 영거리에서 조총을 쏴서 등패를 꿰뚫고 동귀어진을 성공시키는 조선군도 있었다. 그들 각자가 죽이고 죽임당했고, 또 그렇게 죽은 전우의 틈을 또 다른 누군가가 메꿔 나갔다. 필사적이었다.
"쏴라! 쏴라! 쏴! 한 놈이라도 더 줄여라! 한 놈이라도 더 성벽을 오르지 못하게 만들어라!"
타타탕-.
그리고 모든 성벽이 청군의 침범을 허용한 것도 아니었다. 청군이 힘을 서쪽에 집중시키면서 서쪽에서 멀어질수록 청군의 공세도 약해졌고, 비교적 여유롭게 청군의 공세를 막아낸 성벽 위 포수들은 측면에서 성벽을 기어오르는 청군을 저격하여 꾸준히 그 숫자를 줄여나갔다. 성벽 아래는 이미 수천이 족히 넘는 청군의 시체로 뒤덮여 차곡차곡 작은 언덕이 만들어지고 있었고, 청군은 이제 시체로 이뤄진 언덕을 올라 성벽을 넘으려 했다.
어떻게 해서든 오늘 안에 승부를 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대대적인 공세였다. 이는 필연이었다. 고향을 지켜야 하는 조선군과 달리 청군은 침공하는 입장이었고, 그런 만큼 사기도 높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도망치는 병사들을 베어가며 사기를 꾸역꾸역 유지해도, 포위가 장기화하다 보면 공포에 익숙해지기 마련이었고 그럼 병졸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집단적으로 탈영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이르면 오늘, 늦어도 내일 안에는 외성이나마 함락시키고 중성 공략에 들어서지 않으면 공포로서 가까스로 유지한 군율이 흐트러지면서 함락은 물 건너갈 위험이 컸던 것이다.
"기죽을 것 없다! 우리들은 다이칭구룬의 용감무쌍한 팔기군이니라! 무적의 팔기군에게 적수는 없다! 전군 돌격!"
그런 만큼 이번 공세에는 청군의 고위 무관들도 적지 않은 수가 몸소 환도와 등패를 들고서 성벽을 기어올랐다. 총지휘관인 셍게린첸까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오른팔들인 지르갈랑이나 보오르추 등의 몽골족 무관들은 전원이 성벽을 기어올랐다. 폼으로 제2차 아편전쟁에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는 듯, 그들은 두정갑을 입은 오군영 소속 기병조차 단칼에 베어 넘기며 맹위를 떨쳤다.
그 터무니없는 맹위에 기가 죽은 조선군이 주춤하자, 그들은 더더욱 꺼릴 것 없이 환도를 휘둘러댔다. 그들이 한번 환도를 휘두를 때마다 조선군 한 명씩은 이승을 떠났고, 그들을 막으려 용맹이 달려들었던 무관들도 3합을 채 겨루지 못하고 목이 달아났다.
"으아아아! 괴, 괴물이다! 사람 살려!"
"어전이니라! 전하의 앞에서 추태를 보일 작정이더냐? 어서 일어서 북적과 맞서지 못할까!"
타앙-.
그대로 붕괴할 뻔한 전선을 가까스로 유지시킨 것은 황해도에서 온 의병장 안인수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쉼 없이 움직이는 보오르추를 천보총으로 저격하는 묘기를 보여준 안인수의 총탄은 그대로 보오르추의 미간을 관통하였고, 미처 갑주가 가려주지 못하는 곳에 총탄을 직격당한 보오르추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절명하였다.
눈앞에서 장군이 절명하는 것을 본 청군의 사기는 그 즉시 뒤흔들렸고, 조선군의 사기는 다시금 크게 올랐다. 조선군은 다시 맹렬하게 반격하기 시작했고, 청군은 성벽 위에서 고립되어갔다. 백병전에서 청군이 조선군에게 되레 밀리는 추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밀어붙여라! 저 북적 야인 놈들을 모조리 성벽 아래로 떨어뜨려 버려라! 대조선국 천세!"
"버, 버텨라! 어떻게든 후열의 우군들이 성벽을 오를 때까지 버텨야만 한다! 죽을 힘을 다해서 막아라!"
그러자 전장의 공기도 변했다. 되려 청군이 어떻게든 전열을 지키려 수세적으로 변했고, 청군을 성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려는 조선군이 공세적으로 변했다. 조선군은 청군으로부터의 사격을 막으라 보급한 목제 방패를 내세워 청군을 압박했고, 청군은 어떻게든 버티려 등패를 들고서 성벽 위에서 방진을 짰다.
물론 상책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그렇게 청군이 몇 군데에 모여서 방진을 짜고 버티려 들자 거리가 벌어지면서 다시 포수들로부터 총격이 퍼부어진 것이다. 등패가 짱돌 정도는 막아줄 수 있어도 유효사거리 내에서 발사된 조총의 총탄을 막아줄 정도는 되지 못했고, 곧 청군 병졸들은 퍼부어지는 총격 속에서 차례차례 벌집이 되어 이승을 떠났다.
청군은 점점 뒤로 밀려났고, 몇몇은 더는 갈 곳이 없어서 뒤로 물러나는 우군 방진의 압력에 짓눌려 성벽 뒤로 낙사해갔다. 이따금 그런 방진을 향해 날아오는 눈먼 포탄들도 끔찍했다. 그렇게 한번 눈먼 포탄이 휩쓸고 가면, 청군과 조선군을 합쳐 100명 넘는 인원이 한 번에 이승을 떠나기도 했다.
청군의 사기는 점점 바닥을 쳤고, 조선군의 사기는 점점 하늘을 찔러 갔다.
그때였다.
쿠르릉-.
"돼, 됐다! 길이 열렸다! 전군 돌격!"
"아, 안된다! 이제 정말로 머지 않았었거늘…!"
청군의 포격을 견디다 못한 돌벽이 깨져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평양성은 3중겹으로 된 겹성이었고, 돌벽이 깨져도 그 뒤로 자갈 벽과 흙벽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여장이 없는 자갈 벽은 무너지지 않고 굳건하게 버틸 수는 있어도 청군의 견제사격을 막아줄 수는 없었다. 성벽 위 조선군은 그대로 청군의 화살 세례에 노출되었고, 돌벽이 깨져나가면서 동요하기 시작한 병사들은 화살을 피하여 물러났다.
자연히 조선군이 물러나면서 다시금 공간을 얻은 청군이 그 빈 공간을 가득 메웠고, 돌벽이 무너지면서 한결 기어오르기 쉬워진 성벽으로는 배 이상의 청군이 기어올랐다. 좌우의 성윗담에서 화포로 견제해도, 근본적으로 숫자가 너무 많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성벽 위에는 조선군과 비등한 숫자의 청군이 조선군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정오를 막 지날 무렵, 성벽 아래에는 족히 만 명이 넘는 청군 병졸들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조선군이 조금씩 살인에 익숙해지면서, 조선군의 조준 사격을 한몸에 뒤집어쓴 결과였다.
그러나 연달아 곳곳에서 돌벽이 무너져 내리면서, 성벽 위에서는 또한 1만 명이 넘는 청군 병졸들이 조선군을 밀어붙이면서 조금씩 성벽을 차지해가고 있었다.
"성내의 백성들을 서둘러 중성으로 피난시켜라! 외성을 포기하고 물러난다!"
"하, 하오나 대감, 중성에는 아직 피난민들의 수용 준비가…."
"…어쩔 수 없다. 병졸들의 철퇴를 최우선으로 하라. 어떻게든 저 북적들이 전하께만큼은 날붙이 하나 겨눌 수 없게 해야 한다!"
외성 함락을 직감한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창근은 입술을 깨물고서 철퇴 명령을 내렸다. 물론 외성이 함락된 이상 성내의 백성들 모두가 중성으로 대피할 수는 없었다. 백성들이 주거하는 지역인 외성과 달리 중성은 관료들과 그 가족들이 사는 곳인 만큼 기본적으로 그리 많은 백성들을 수용할 수는 없었다.
결국, 대부분은 낙오하게 될 터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내성에는 소년 왕이 있었다. 그는 중성마저 함락되고 내성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순간까지 어떻게든 소년 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때였다.
"…음? 누, 누구냐! 도대체 어떤 작자가 성문을…!"
병마절도사인 그에게는 아무런 신호도 없이, 돌연 다경문이 개문 되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성벽 위 조선군은 전투마저 잊은 채 넋을 잃고서 성문을 바라보았고, 이는 청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머지않아 열리게 될 문이었지만, 아직은 열릴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직후 성문을 박차고 나가는 이들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유창근은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다른 모든 기병들이 성벽 위로 차출되는 와중에도 내성에 남아있었던 금위영 기사 150명이 말을 타고 성문을 박차고 나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과 함께 달리고 있는 유달리 작은 체구의 기사가 누구인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저, 전하? 전하께서 어찌 이런…!"
"이랴, 이랴! 끼야하핫! 역시나 그 우라질 놈의 활 따위보다 곤봉이 손에 착착 달라붙는구먼!"
유창근의 비명에 답하듯이, 다경문에서는 어린 왕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제야 문밖으로 박차고 나온 기병들의 정체를 알아챈 청군과 조선군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동요가 퍼져나갔다.
"조, 조선 국왕이 도대체 어째서 이곳에 있느냐! 대관절 무슨 생각으로 이런…!"
"저, 전하? 전하시라고…? 이 나라 조선의 성상께서 저곳에 계신단 말인가!"
그러나 누구도 경악할 뿐 움직이지 못했다. 그만큼 상황이 그들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묵묵히 소년 왕과 함께 달리고 있는 금위영 기사 150명만이, 소년 왕의 지휘에 따라 성벽을 기어오르려던 청군을 향해 달려들었을 뿐이었다.
"마, 막아라! 죽여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말 위에서 떨어뜨려 산채로 사로잡아라!"
"대조선국 천세! 국왕 전하 천세!"
뒤늦게 그제야 전열을 정비하려던 청군 무관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금위영 기사들은 이미 그들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성을 기어오르려 등패와 환도만을 들고 있던 청군에게 이미 코앞까지 다가온 금위영 기병들을 막을 방도는 전무했다.
그리고,
우지끈-.
금위영 기사들의 기마 돌격에 걷어차인 청군 병졸 십수 명이 허우적거리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