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년왕의 돌격(1) >
전장은 한순간에 금위영 기사들의 등장으로 얼어붙었다. 청군은 저 한 줌도 안 되는 기병들이 자신들에게 달려들고 있는 모습 그 자체가 현실감이 없었고, 조선군은 그 달려드는 기병 중에 자신들의 왕이 있다는 사실이 현실감이 없었다.
양군은 전투마저 잊은 채 한참을 멍하니 금위영 기사들을 바라봤다. 이는 무관들 또한 별반 차이가 없었다. 무관들이 우수했다면 병사들이 얼이 빠지더라도 그 즉시 병사들을 두들겨 깨워 현실로 끌고 와 금위영 기사들을 포위하건 구하건 하려 했겠지만, 정작 병사들을 보듬어 줄 무관들도 놀란 나머지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끼야하핫! 이거 기분 죽이는데!"
정작 그 돌격을 주도한 소년 왕 이형은 한껏 들뜬 모습이었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 위에서 그 반동으로 몇 번이고 튕기면서도, 소년 왕은 가까스로 고삐를 놓지 않고 그 위에서 버텨냈다. 지난 1년여간의 기마궁술 훈련에서 궁술은 거의 나아진 것이 없었지만, 마술 하나만큼은 일취월장한 소년 왕이었다.
이형은 그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후방에서 손 놓고 지켜만 보고 있다가, 몸소 말을 타고 전장에 나왔다는 사실 그 자체에 기분이 들뜬 모습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직접 청군 병졸들과 싸우는 일은 없었다. 그에게 다른 청군 병졸들이 달려들기 전에 좌우의 금위영 기사들이 쳐냈기 때문이었다.
이형의 전술은 단순했다. 성벽을 기어오르려 한 번에 수만여 명의 청군 병졸들이 밀집되어 있는 상황이니, 그 후방으로 스치듯이 얕게 돌격하고 다시 이탈하기를 반복하면서 한 방향으로 이동해 반대편 문으로 다시 성안에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성벽 아래의 청군은 등패와 환도 따위로 무장하였으니 기병의 돌격을 막기 어렵고, 성벽에 과밀집되어 있었으니 후방의 공격에 대응하려 함부로 방향을 바꾸기도 어렵다는 판단하에서 시도한 전술이었다.
결과만 두고 말한다면 전술은 성공한 듯 보였다. 금위영 기병들은 청 궁병대와 공성병단 사이의 틈으로 파고들어 갔고, 속도를 잃지 않도록 후방에 홀로 튀어나온 병졸들만 편곤으로 두들기며 보병대에 파묻히지 않도록 하면서 돌격을 계속했다. 다만 이는 이형의 지휘가 훌륭했다기보다는, 난데없이 등장한 금위영 기사들의 모습에 모두가 넋을 놓아버리면서 방치된 결과에 가까웠다.
"전하, 지금 웃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성으로…!"
"음, 바깥 공기도 쐬었으니 이제 다시 들어가기는 해야겠지. 다경문에서 나왔으니까 보통문으로 다시 들어가시게나!"
"…선요문으로 모시겠습니다. 전하, 소신이 무슨 일이 있어도 성안으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금위대장 허계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멋대로 갑주를 차려입고 출진준비를 하는 소년 왕을 막지 못한 자신의 책임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옥체에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 안된다면 혼자서라도 돌격하겠다는 소년 왕의 객기를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그가 아무리 사정사정을 해도 들은 체도 하지 않는 왕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가 직접 보필하여 안전하게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정작 이형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선요문은 다경문에서 800m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문이었고, 보통문은 4km 조금 넘는 거리에 위치한 문이었다. 말의 속력으로는 선요문까지는 길어야 1분 조금 걸리면 닿았고, 보통문까 지라면 길어도 6분이면 닿았다. 기마대가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위험도 늘어나게 될 테니 허계로서는 당연한 판단이었지만, 이형으로서는 그 경우 잠깐 나갔다 들어오는 수준밖에 안 되니만큼 떨떠름했던 것이다.
"이런…! 보통문으로 간다. 전하를 목숨 걸고서 지켜내라!"
""국왕 전하 천세!""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형이 바라는 대로 되었다. 비교적 여유가 있어 기마대가 뛰쳐나올 수 있었던 다경문과 달리, 선요문에서는 너무나도 많은 청 보병대가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족히 천명 가까이 되는 보병대에게 정면으로 돌격한다면 후면에서 살짝 스치기만 하면서 지나치는 것과 같을 리가 없었다. 필시 속력을 잃게 될 테고, 속력을 잃은 기마대는 보병대의 손쉬운 사냥감이었다.
금위대장인 허계의 명에 금위영 기사들을 일제히 말머리를 틀었다. 청군과 조선군은 그때까지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의 돌격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덕분에 기사들은 사실상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서 돌격을 계속할 수 있었고, 기마대가 코앞까지 다가온 다음에야 정신을 차린 몇몇 청군 병졸들은 그들을 막으려 하면 편곤에 맞아 나가떨어졌고 도망치려 해도 편곤에 맞아 쓰러졌다.
"조선 국왕이 저기에 있다! 사로잡아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로잡아라! 결코 죽여서는 안 된다! 전군 돌격! 조선 국왕만 사로잡는다면 우리 다이칭구룬의 승리다!"
하지만 다경문에서 선요문까지의 짧은 돌격이었다면 모를까, 그보다 5배 이상 멀리 떨어진 보통문까지 돌격하는 동안 양군 중 아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건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뒤늦게 전황을 파악한 셍게린첸의 불호성이 떨어지고, 셍게린첸의 명령이 전령들을 통해 전달되면서 정신이 번쩍 든 청군은 그제야 금위영 기사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물론 큰 의미는 없는 돌격이었다. 다급하게 일단 몸으로라도 막으려 달려든 탓에 진형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고, 진형도 갖추지 못하고 무턱대고 기병의 진로에 달려든 보병대가 무슨 꼴을 당할지야 뻔한 것이었다.
"비켜라, 이 가소로운 북적 놈들아! 어전이니라! 무엄하도다!"
뻐억-.
"무, 물러나지 마라! 우리들은 다이칭구룬의 자랑스러운 팔기군이니라! 후퇴는 용납할 수 없다. 죽을힘을 다하여 막아라! 조선 국왕을 이곳에서 사로잡기만 하면 우리들의 승리다!"
"으흐흑, 어무이…!"
청군은 기사들에게 달려드는 족족 편곤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몇몇 운 나쁜 병졸들은 아예 말발굽에 짓밟혀 뭉개지기도 했다. 등패와 환도 따위를 들고서 성벽을 기어오르려 하고 있던 청군 보병들은 애당초 전속력으로 돌진하고 있는 기사들을 저지할 수단이 전혀 없다시피 했다. 기사들이 한 번 편곤을 휘두를 때마다 수십 명의 청군이 나가떨어졌고, 무관들도 함부로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다만 뒤에서 고래고래 보병들에게 막으라 외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용감하게 앞장선 전우들이 달려드는 족족 두개골이 으깨져 이승을 떠나는 꼴을 본 청군 보병들은 함부로 기사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들로서는 뒤에서 뭐라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만 있는 무관들이 직접 나서서 막아보라고 항변하고 싶은 심경이었다. 기사들의 진로 상에 방진을 구축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오합지졸인 그들이 도대체 무슨 수로 환도와 등패만으로 금위영 기사들의 돌격을 막아낼 수 있었겠는가?
"야쿠, 수고 좀 해다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선 국왕을 이곳에서 사로잡아야 한다!"
"존명!"
그러자 뒤에서 전황을 관전하고 있던 몽골 팔기군 기병들이 돌격하기 시작했다. 이미 공성전 따위는 덤이었다. 혹여나 조선 국왕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위험에 청군 화포부대들은 포격을 멈춘 상황이었고, 총병들과 궁병들도 이는 다르지 않았다. 성을 포위한 청군들은 물론, 이미 성벽 위에 있던 청군조차 조선 국왕을 사로잡으려 가세하고 있었다.
그제야 조선군에서도 정신이 번뜩 들었다. 금위영 기사들의 용감무쌍한 모습에 감탄만 하고 있다가 뒤늦게나마 그들의 왕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쏴라, 쏴라. 쏴! 어떻게 해서든 북적 놈들이 전하의 옥체에 상흔 하나 남길 수 없도록 만들어라! 저 몽고 놈들부터 모조리 쏴 죽여라!"
"방포! 방포하라! 어떻게든 전하께서 성안으로 돌아오실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드려야 한다! 문에 가까이 들러붙은 북적 놈들부터 모조리 죽여라!"
퍼퍼펑-.
이미 조선군에게 중요한 것은 성벽 위에 청군이 아니었다. 포수들, 궁사들, 화포군, 누구 하나 다를 것 없이 성벽 가까이 달라붙어 되는대로 모든 화력을 퍼부었다. 하다못해 석전꾼들까지 남김없이 성벽에 달라붙어 돌을 집어 던졌다. 국왕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몇몇 열정이 지나쳤던 이들은 너무 멀리까지 얼굴을 내밀었다가 무게중심이 무너지면서 성벽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효과는 확실했다. 국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눈이 돌아간 조선군은 조준조차 내팽개친 채 일단 되는대로 총과 화살과 돌을 퍼부었고, 포수들이 분당 3발, 궁사들이 분당 16발, 석전꾼들은 집계 불가능한 숫자의 돌을 손에 집히는 대로 집어던졌다. 성을 기어오르려 잔뜩 밀집해있던 청군에게 이러한 무지막지한 화력이 그대로 죽음으로 이어졌음은 물론이었다.
"비, 빌어먹을! 지르갈랑 님, 어떻게 할까요? 진격합니까? 아니면 우군을 지원합니까? 지르갈랑 님!"
"끄으응…! 아니, 우선 눈앞의 조선군에게 집중한다! 조선 국왕은 성 아래의 우군에게 일임한다. 전군 돌격!"
"저 야인 놈들이 전하를 방해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제군, 우리들은 이 성벽 위에서 죽는다! 대조선국 천세!"
그렇다고 성벽 위에 있던 청군이 방치된 것은 아니었다. 원거리에 화력을 투사할 여력이 있는 병력들은 전부 성벽에 달라붙었고, 의병장들과 기병들은 그대로 무기를 빼 들고서 성벽 위의 청군이 더는 진군할 수 없도록 사력을 다하여 막았다. 전장에 등장한 국왕의 존재에 의하여, 그들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평소라면 허리 펴는 것조차 어려워했던 노인네가 환도로 단칼에 목을 베어내는 등 괴력을 발휘하는가 하면, 벌레 하나 죽일 줄 모르던 댕기 머리 처녀가 급한 대로 청군의 손을 깨물기도 했다. 성벽 위 조선군은 글자 그대로 눈이 까뒤집혀 죽을 각오로 청군의 돌격을 저지했고, 청군은 수적으로 우위에 놓이게 되었음에도 기세에서 눌려 조선군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전선은 고착되었고, 그 고착된 틈을 타 성벽 가까이 달라붙은 조선군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모든 화력을 성벽 아래로 퍼부었다.
"으으음, 막상 밖으로 나오니까 생각나지를 않는구만. 이 보게나 금위대장. 이때 과인이 뭐라 소리쳐야 사기를 좀 더 끌어올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안 됩니다! 북적들의 이목을 사게 됩니다! 청컨대, 정숙을 지켜주십시오. 전하!"
한편 그들을 둘러싼 모두가 사력을 다하여 왕을 지키려 하는 동안, 사지를 달리고 있는 소년 왕은 정작 태연한 기색이었다. 그를 보위하는 허계로서는 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물론 좋게 표현한다면 그릇이 큰 거겠지만, 이 경우는 그 정도가 지나쳤다. 당장 청군의 손에 잡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사기를 끌어 올릴 수 있을지나 고민한다니, 그게 어디 사람의 신경 줄이던가?
물론 소년 왕 이형이라고 겉이 태연하다고 해서 속까지 태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서워서라기보다는 기분이 좋아서였다. 그간 궁에서 겉으로는 마음껏 뽐내고 다녔어도 실상은 대원군과 김좌근 틈바구니에서 손도 발도 못 쓰고 '잘하시고 계시오-.'하고 도장만 찍어주던 신세이던 그였다. 궁에서 나와 자신을 죽이려 달려드는 십 수만의 군세를 앞에 두고 반대로 자신을 지키려 하는 수만의 군세를 뒤에 두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제가 왕인 줄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