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38화 (38/530)

< 소년왕의 돌격(2) >

"순순히 말에서 내리고 오라를 받거라! 이 역적 놈아, 감히 상국에 이를 드러내고서도 제 명줄에 죽기를 바랐더냐!"

"몽고 놈들을 막아라! 어떻게든 전하께서는 성안에 돌아가셔야 한다!"

보통문이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거리까지 근접했을 무렵, 저 멀리에서부터 달려온 몽골 팔기군 기병대가 들이닥쳤다. 분명 달리기 시작했을 때는 조선군보다 월등히 많았던 그들도, 지금은 조선군과 비등한 수준까지 크게 줄어있었다. 보병보다 피탄면적이 월등히 커다란 기마대이다 보니, 성벽 위에서 조선군이 퍼부어대는 집중사격에 휩쓸려 8할 가까이가 달리는 도중에 낙마하거나 이승을 하직한 것이었다.

그러나 보병들과 기병들은 근본적으로 저지력이 달랐다. 금위영 기사들과 맞부딪힌 몽골 팔기군은 비록 속력이 부족하여 그들의 앞을 막지는 못하였으나 계속 측면에서 달라붙으며 금위영 기사들을 청군 보병대 쪽으로 되는대로 밀어붙였다. 보병대에 파묻혀 속력을 잃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속력을 잃은 기병은 보병의 먹잇감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금위영 기사들도 명색이 조선 최정예 기병 전력이었다. 아무리 오랜 평화로 기강이 흐트러졌어도, 왕과 함께 전선을 달리는 와중 몽골 팔기군이 측면에서 밀어붙인다고 하여 밀릴 정도로 녹록한 이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금위영 기사들은 보병대 쪽으로 밀리면서도 어떻게든 파묻히지 않을 정도의 입사각을 유지했고, 그러자 죽어 나가는 것은 본의 아니게 금위영의 앞길을 가로막은 꼴이 된 청군 병졸들이었다.

몽골 팔기군과 금위영 기사들이 부딪히는 와중, 정작 죽어 나가는 것은 만주족 보병들이었다.

퍼억-.

"이놈, 내 편곤 맛이 어떻느냐!"

"크윽, 다 죽어가는 조선인 노인네가 어디에서 이런 힘이!"

이제 곧 예순이 가까워지는 노인장 금위대장 허계의 활약은 실로 눈부셨다. 비록 대단한 괴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지난 십 수년간 금위대장으로서 복무하면서 쌓은 연륜이 있었다.

그의 목표는 애초에 적들을 쓰러트리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오랑캐들이 감히 소년왕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편곤과 등패를 최대한 활용하여 어떻게든 소년왕에게 가까워지고자 하는 몽고족 기병들을 저지해냈다.

때로는 등패로 밀치기도 했고, 편곤으로 몽고족 기사의 검격을 막아낸 다음 그대로 다시 자루 부분으로 안면을 후려쳐 낙마 시키기도 했다. 그렇게 달려드는 몽고족 기사들을 모조리 쳐내면서도 조금도 호위대상인 이형에게서 멀어지지 않는 것이 그의 대단한 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를 따르는 금위영의 기사들 또한 대장인 허계의 무용에 감화되어 더더욱 더 힘을 냈고, 점차 몽고족 기사들은 감히 그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다만 그들의 진로를 방해하는 선에서 만족하게 되었다.

"크하하핫! 어디를 노리고 있는 게냐? 과인은 이곳에 있느니라! 좀 더 성의를 보이지 못할-."

타앙-.

"""전하!"""

그렇게 금위영과 몽골 팔기군이 충돌하는 와중 보통문은 점점 더 가까워졌고, 이형은 팔기군을 비웃듯이 소리쳤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조선어는 알아듣지 못하였어도 그 어조만은 알아들은 몽골 팔기군 기병 하나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품 안에서 서역의 상인에게 구매한 기병용 리볼버를 꺼내 들고서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탄환은 정확하게 이형에게 명중하였고, 그 순간 이형의 몸도 크게 휘청였다. 말이 놀라 펄쩍 뛰지 않았던 것은 천운이었다. 반사적으로 온 근육이 고통에 발작을 일으키면서 이형의 손은 강인하게 말 고삐를 움켜 쥐었고, 그것을 주인의 신호라 생각한 말은 더더욱 빠른 속도로 내달려 한순간 대열에서 이탈할 뻔 했다.

그 모습을 본 금위영 기사들은 일제히 귀신이라도 본 듯이 경기를 일으켰고, 방아쇠를 당긴 당사자였던 몽골 팔기군조차 할 말을 잃고서 얼어붙었다. 몽골 팔기군도 목적은 조선왕을 포로로 잡아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던 만큼, 죽이는 것은 본의가 아니었던 것이다.

금위영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에 반응한 조선군과 청군 또한 이는 마찬가지였다. 한순간 전장은 침묵에 잠겼다. 수만 명의 시선이 일제히 말 위에서 축 늘어져 있는 소년 왕에게 집중되었고, 말 달리는 소리만이 잔잔히 울려 퍼질 따름이었다.

그때였다.

"아흐, 아흐흐흑…. 아이고, 이 오랑캐 놈들이! 감히 너희 아비 되시는 이 어르신의 발가락을 맞추었구나!"

기세 좋게 벌떡 하고 몸을 일으켜 세우고서는, 소년 왕 이형은 악을 쓰며 그렇게 소리쳤다. 물론 허세였다. 총알에 관통당한 왼쪽 어깨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고, 그 탓인지 왼쪽 손가락에서는 감각이 흐려지고 있었다. 좌우에서 금위군 기사들이 손으로 바쳐주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낙마했을 터였다.

그런 와중에 용케도 한 고조의 고사를 생각해내서 자신의 부상을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숨긴 것은 위기의 순간 반사적으로 발휘한 그의 기지였다. 그것이 왕의 자질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장수의 자질이라고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는 수만명의 병졸들 앞에서 자신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인 것이다.

이어서 이형은 아픈 기색도 거의 내지 않고서 억지로 팔을 움직여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몽골 팔기군을 향해 주먹 감자를 날렸다. 그제야 모욕당한 것을 눈치챈 몽골 팔기군은 이를 악물고서 그들을 뒤쫓으려 했지만, 이미 활짝 열린 보통문 너머로 도망친 다음이었다. 백 명 남짓한 기병들이 따라 들어가봤자, 헛되이 죽을 것이라는걸 알고 있었던 몽골 팔기군은 그들을 따라 보통문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빈손으로 말머리를 돌려야 했다.

"푸하하핫! 저 오랑캐 놈들 보소. 금위영에는 상대도 안 되는구만!"

"저 어린 나이에 어찌 저리도 의젓하신지. 참으로 조선의 복이야, 아암!"

"""대조선국 천세! 국왕 전하 천세!"""

금위영이 돌아온 그 즉시 보통문은 다시 닫혔고, 곧 함성이 울려 퍼졌다. 말할 것도 없이, 조선군의 함성이었다.

조선군의 함성은 평양성이 떠나가라,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위기의 순간 전장에 몸소 말을 몰고 나타난 그들의 어린 소년 왕이 기어이 청군을 당당하게 엿먹이고 성으로 귀환한 것이다. 조선군은 그동안 힘든 것도 잊고서 웃음을 터뜨렸고, 그럴 때마다 기가 죽는 것은 청군이었다.

물론 사상자는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시각적 청각적 효과는 충격이 대단했던 것이다. 안 그래도 그리 전황이 좋지만은 않던 와중 우군이 일방적으로 유린당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서 사기가 오를 리가 만무했다. 아직 수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은 청군이었음에도, 청군에는 이미 패색이 역력했다.

"…철퇴의 징을 쳐라. 오늘 전투는 졌다. 더 늦기 전에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빠져나간다."

멀리에서 이를 지켜보던 셍게린첸은 이마를 부여잡고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훈련된 정병이라면 모를까, 저런 오합지졸들이 한번 사기가 바닥을 치면 두 번 다시는 오르지 않는다는 걸 제2차 아편전쟁에서의 경험으로서 알고 있던 그였다. 그 때문에 선선히 패배를 인정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후퇴명령이 어느 정도의 파급력을 가질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만주 팔기의 훈련도가 그의 예상보다도 비참했던 것이다.

"히, 히이익! 사, 살려줘! 사람 살려! 죽고 싶지 않아. 집으로 돌아갈래!"

"돌아가고 싶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어무이, 어무이! 어무이이!"

곧 철퇴의 징이 울렸고, 이미 완전히 사기가 무너진 청군은 무질서하게 패주하기 시작했다. 무관들이라고 다를 것도 없었다. 그들 전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그저 살아남기 위하여 달렸다. 멀리에서 화포만 쏘던 총통부대조차 앞에서 패주하는 우군 병졸들의 모습에 사기가 무너져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도망쳤다.

셍게린첸이 내일을 기약하고 후퇴의 징을 울린 것과 달리 눈앞에서 우군이 일방적으로 유린당하는 걸 보고서 완전히 사기가 무너진 만주 팔기가 퇴각명령을 아예 전장에서 이탈하라는 신호로 이해했던 것이다.

"저 오랑캐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 쏴라! 단 한 놈도 도망치게 둬서는 안 된다!"

"내 말을 가져와라! 저 오랑캐 놈들의 등짝에 칼집을 내주겠다!"

물론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조선군이 도망치는 청군을 가만히 놓아줄 리가 없었다. 조선군은 그들이 가진 화력 전부를 청군의 머리 위로 퍼부었고, 성벽 위에서 청군과 다투던 기병들과 의병장들은 제각각 성벽 아래로 내려와 그들의 군마를 타고서 무질서하게 도망치는 청군 병졸들을 유린했다.

"이,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이더냐…! 어째서 우군이 붕괴하고 있느냐? 어째서 전장에서 철퇴하고 있느냔 말이다! 당장 전장으로 돌아오라! 이것은 어명이니라. 어서 전장에 돌아와 조선 놈들과 맞서지 못할까!"

"전하, 이미 모든 것이 늦었습니다. 이만 물러나시지요! 저희들이 앞길을 열겠습니다. 전하,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하께서는 몽골 초원으로 돌아가셔야만 합니다! 부디 결단을 내려주소서!"

"…빌어먹을, 몽골로 돌아간다면 서태후 그 마녀는 필시 모든 일을 과인의 탓으로 돌리겠지. 그러나 이런 곳에서 그 마녀를 위해 이토록 허무하게 과인의 전사들을 잃을 수는 없다. 좋다, 몽골로 돌아간다. 후쥔, 다이곤! 너희 둘이 길을 열거라!"

""존명!""

그것은 이미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그나마 정예에 가까웠던 몽골 팔기군은 전우들이 학살당하는 걸 방관하고서 그들의 몽골친왕 셍게린첸을 살리기 위하여 집결했다. 조선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국왕의 안위였듯이, 몽골인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칭기즈칸의 씨족원이자 몽골친왕인 셍게린첸의 안위였지 전우라고 하기에도 낯부끄러운 만주족들의 생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날 하루 동안만 2만에 달하는 청군이 목숨을 잃었고, 3만에 달하는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으며 살아남은 나머지들은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도 모른 채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셍게린첸의 직속 병력이었던 몽골 팔기군 2만 8천이 겨우 목숨만 건져서 압록강을 향해 후퇴할 뿐이었다.

그에 반하여 조선군은 불과 3천도 안되는 병사들을 잃었을 따름이었다.

기념할만한 대승이었다.

"아이고, 나 죽네! 으아아악, 이런 우라질 제기랄! 지금 내 어깨가 붙어있는 거 맞나? 아아악, 제기랄 젠장!"

"다행히 총알이 관통하여 상흔은 넓지 않습니다. 그러니 냉정함을 되찾아주십시오, 전하!"

"지금 내 어깨에 손가락 몇 개가 들락날락하게 생겼는데 지금 그런 말이 나오는 거요? 으흐흐흑, 빌어먹을 오랑캐 놈들! 내가 다음에 만난다면 반드시 도륙을 내주겠다! 나 죽어!"

한편 소년 왕 이형은 승리의 달콤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내성에서 고통에 몸을 비틀고 있었다. 되지도 않는 허세의 대가였다.

그러나 무가치한 허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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