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좌근의 야망 >
평양성에서 사력을 다한 전투가 한창일 무렵.
한양에서는 한양대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제대로 된 움직임은 아니었다. 언제나 대로의 음모였다.
처음에는 청나라가 쳐 들어왔다는 소식만 듣고서 강화도에 도망쳐야 한다느니 남한산성에 식량부터 채워 넣어야 한다느니 말만 많던 신료들이었지만, 파발들이 도착하면서 청군의 침공 규모와 전황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게 되자 여론이 뒤집혔다. 요동 정벌이야 꿈속의 꿈이겠지만, 적어도 저 정도 전력이라면 버텨볼 만하다-라는 확신이 섰던 것이다.
거기까지 확신이 서자 김좌근을 비롯한 세도가 세력들은 역시나 마찬가지로 그들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두고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것은 말로서 형언하기 어려운 어두컴컴하고 음습한 욕망이었다.
"그것이 무슨 소리요. 지금 당장에라도 성상을 도우러 가야 할 지금 같은 시기에 기다려보자니! 지금 그대들이 제정신이오?"
노호성을 터뜨리는 것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였다. 그동안 최대한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지 않고서 냉정함을 유지해온 그였지만, 그런 그도 지금과 같은 전시에도 변함없이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김좌근과 그 일파들의 모습에는 차마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다. 이미 소년 왕이 오군영 기병 4천 명과 함께 평양에 선행한 이상, 지금 한양에서 시간을 끌자는 건 왕을 버리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김좌근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날치기나 다름없이 개전이 결정되고서 줄곧 우거지상이었던 김좌근은 오늘에야말로 그의 평소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마치 능구렁이를 보는 듯한 음침하고 익살스러운 미소였다.
"아니, 어찌 그리 입이 험하십니까. 체통을 지키시지요. 전하께서 명령을 내리시기 전까지 기다려보자는 게 무엇이 그토록 이상합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전하께서 평양성에 갇히셨소. 지금쯤이면 이미 북적들과 전투가 한창일 것이란 말이오! 그런데 이 대군으로 한양성을 방비하자니, 전하를 포기하자는 거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합하. 저는 그저 전하께서 한양성을 떠나 실적 한양을 잘 부탁드린다 하셨으니, 왕명에 따라 한양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아닐는지 여쭈는 것뿐입니다."
어울리지도 않는 존대까지 섞어가며, 김좌근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이하응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물론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한양을 사수하라는 왕명이 있었다고 해도 달리 비가 있는 것도 아니요, 왕자가 있는 것도 아닌 소년 왕이였다. 그가 죽는다면 또다시 방계에서 족보를 뒤져봐야 할 판국이었던 것이다.
군주국가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왕도의 수호가 아니라 군주의 안위 그 자체였다. 군주가 죽거나 사로잡힌다면 그것만으로 그 나라는 망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왕명에 따라 한양을 우선시해야 하는가, 아니면 소년 왕을 구하려 가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대답은 당연히 소년 왕을 구하러 가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김좌근은 왕명이 있었으니 한양을 지켜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출병을 질질 끌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평양성이 함락되고서 청군이 남하할 경우에 한양에서 농성을 벌이기 위함이었다. 심지어는 자진하여 북진하려는 근왕군조차 엄포를 내려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군주국가의 신하가 내놓을 발상이 아니었다.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거나, 이미 스스로 왕이라고 생각하는 자만이 가능한 발상이었다.
"지금 평양성에 얼마나 되는 병사들이 있는 줄 아시오? 고작 해봤자 4만이요. 북적들은 16만에 이르고! 지금 당장 전하를 구하러 가지 않는다면 언제 함락될지 모르오. 어서 출병하여야 하오!"
"그러니 조금만 더 상황을 보자 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평양성에서 구원을 청하는 파발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왕명을 우선해야 하지 않을는지요. 어명도 없이 함부로 군사를 움직인다면 역모가 아닙니까?"
"전하께서는 내게 분조를 이끌라 말씀하셨고, 지금 이 한양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바로 나요! 그러니 내 명에 따르시오. 지금 당장!"
"섭정공 합하시라 할지라도 왕명보다 우선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합하께서는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십니까?"
대화는 헛돌았다. 흥분한 이하응은 섭정공으로서의 권위로 김좌근을 찍어누르려 했고, 김좌근은 이에 무턱대고 버텼다. 이하응은 제아무리 평양성이라고 할지라도 지원군 하나 없이 버티는 것은 힘들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김좌근은 지원군 없이 버티다 평양성이 함락되기를 기대했다. 평소의 김좌근이라면 떠올리지 않았을 극단적인 발상이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절박했다.
'역모죄라면 제아무리 이 몸이라도 성치 않을 거다. 그러나 이 몸에는 지금 8만에 이르는 대군이 있도다. 8만 대군이라면 제아무리 야인 놈들의 16만 대군이라도 성을 끼고서 싸우면 그리 간단히는 당하지 않을 테지. 어차피 북적 놈들에게 잡히더라도 3대가 멸해질 판국이라면, 차라리…!'
왕이 된다. 그것은 참으로 달콤한 상상이었다. 소년 왕은 영웅적으로 평양성에서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목숨을 잃고, 김좌근 자신은 본의 아니 게도 한양에서 8만 대군을 몸소 이끌고 북적과 맞서 영웅적 승전을 거둔 다음 주변인들의 추대에 따라 왕좌에 오른다. 이미 김좌근은 자신이 왕이 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야말로 자가 실현된 예언이었다. 청과 조선에서 김좌근이 스스로 왕이 되고자 이번 전쟁을 꾸몄다고 계속해서 의심한 끝에, 김좌근은 정말로 이번 전쟁을 계기로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고 있었다.
그 속내를 뻔히 알고 있는 이하응이였다. 화가 나지 않을 리가 만무했다. 젊은 시절 왕이 되고자 꿈꿔 본 적 있는 이하응이었던 만큼 그 마음 자체는 이해했지만, 애초에 이하응은 명색이 왕족인 전주 이씨였고 김좌근은 아니었다. 이하응이 꿈꿨던 것이 반정 또는 상속이라면, 김좌근이 지금 꿈꾸는 것은 역성혁명이었다.
그렇다. 역성혁명. 이 나라 조선을 한번 부수고서 다시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기생충이나 다름없는 안동 김씨 세력이 주도한 역성혁명 결과 탄생할 나라가 제대로 된 국가일 리가 만무했다.
'이 노괴가 기어이 노망이 났구나. 제 한 몸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이제는 이 나라 조선의 500년 역사를 끝내려 하느냐? 그렇게는 못 한다. 절대로 그렇게는 안 될 거다! 그러나….'
이하응은 있는 힘껏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었다. 일단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다짐했지만, 현실적으로 이하응에게 김좌근과 맞대적할 수단은 없었다. 이미 도성 근처에 모인 병사들만 8만 명이었고, 그중 2만은 세도가의 사병들이었으며 또 1만은 세도가와 직간접적으로 연이 있는 무관들로 가득 찬 오군영 병졸들이었다. 이래서야 역모죄로 숙청하려고 해도 여의치 않았다.
이미 세도가의 사병들이 도성을 빙 둘러 포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의 수족들이나 다름없는 보부상들과 연락을 취하려고 해도 도성을 포위한 세도가의 사병들에 의하여 도중에 차단되어 이하응은 지금 손발이 잘려나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다 보니 성 밖의 구름같이 몰려든 근왕군에게 궁내의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기도 힘들었다.
사실, 그 이전에 막상 알린다고 해도 무엇이 달라질까 싶었다. 최선이라도 5만에 이르는 근왕군과 3만에 이르는 세도군이 한양성을 배경으로 시가전을 치르게 될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근왕군이 그동안 지방세력을 보부상들을 앞세워 무력으로 짓밟던 이하응의 구원요청을 들은 체도 하지 않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이하응으로서는 손을 쓸 도리가 없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1만이라도 차출해주십시오. 하다못해 평양의 상황만이라도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먼저 저자세로 굽힌 것은 이하응 쪽이었다. 이미 사병들을 앞세워 한양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굳히기에 들어간 김좌근이었다. 이제 와서 그 어떤 명분으로 그를 독촉해도 김좌근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스스로 왕이 되어 새 나라를 세우고자 작심한 그를 조선의 법도와 이치로서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 결국 간청하는 수밖에 없던 것이다.
김좌근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미 승리를 직감한 얼굴이었다.
"3천이오. 내 날랜 기병 3천을 붙여주겠소. 본인이 심혈을 기울여 모아온 정병이니만큼, 단 한 명도 헛되이 잃어서는 안 될 것이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미 위아래가 뒤집힌 대화였다. 섭정공이 존대를 하고 영의정이 하대를 하고 있었다. 그뿐이랴. 섭정공이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영의정을 목을 뻣뻣이 세우고서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기록하던 사관이 무심코 붓을 놓칠 정도로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그러나 김좌근은 사관을 탓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턱 끝으로 붓을 가리키며, 어서 계속하여 기록하기나 하라는 듯이 조롱하였을 뿐이었다.
젊은 사관은 손을 덜덜 떨면서도 어떻게든 붓을 주워 이날의 대화를 마저 기록했다. 손의 떨림이 멈추지를 않았다. 이건 두말할 것도 없는 역모였다. 막아야만 했지만, 대비가 일선에서 물러난 지금 전주 이씨 종친 중 가장 높은 어른인 흥선군조차 차마 정면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수그리는 판국이었다. 일개 사관 따위가 대응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처지의 이들이 그 젊은 사관 한 사람 뿐일 리는 만무했다. 이미 도성 내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하옥 대감이 역모를 꾸민다는 소문이었다.
"저기, 그거 들었나? 하옥 대감이 글쎄…."
"아니, 그런…잠깐, 그럼 전하께서는 어떻게 되시는 거지? 설마, 평양성에서 두 번 다시 돌아오시지 못하는 건가?"
"아이고, 말세야 말세. 쯧쯧, 하옥 대감. 그 노괴가 기어이 노망이 들어서는…."
당연히 민간여론은 부정적이었다. 명색이 500여 년을 이어져 온 조선왕실이었다. 500년이라는 역사에서 나오는 권위는 결코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직접적으로 김좌근과 안동 김씨 세력에 대항할 수는 없어도, 한양 민초들의 적의는 부풀어 올랐다.
그동안 왕을 꼭두각시처럼 가지고 놀며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은 것만으로도 그리 좋은 여론이 나오기는 어려웠는데, 민심은 생각지도 않고서 우선 군공을 세워 새 왕조를 세울 궁리만 하고 있었으니 좋은 반응이 나올 리가 만무했다.
이에 안동 김씨 안에서도 김좌근의 폭주에 대하여 우려하는 여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조판서 김병학이 그 대표 격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영상. 이만 뜻을 물리시지요! 도성 내의 민초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대업을 이루신다고 하신들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겁니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천심을 등지고서 도대체 무엇을 꾸미고자 하십니까!"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도성은 이미 본인의 군세로 포위된 지 오래다. 오군영이 본인의 것이고, 이 경기지방의 의병들이 모두 본인의 것이니라! 이 몸이 대관절 무엇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단 말이더냐!"
"안동 김씨 종친 전부를 죽음으로 몰고 가려 하십니까? 어째서 되지도 않는 오욕으로 스스로의 명예를 더럽히려 하십니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평양으로 갑시다. 영상께서 친히 대군을 이끌고 종군하신다면 도성의 백성들도 진정할 것이고 흉흉한 소문들도 사라질 것입니다. 저와 함께 평양으로 갑시다, 대감!"
"아니, 이놈이 그래도!"
뻐억-.
김좌근은 손에 들고 있던 담뱃대로 김병학을 후려쳤다. 그 충격에 김병학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그 이상으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서글픔이 복 받아치는 것을 느꼈다. 한줄기 뜨거운 물줄기가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제 다 틀렸다! 지난 1년간 마음고생이 지독하시던 대감께서 마침내 노망이 드시고 말았구나! 풍양 조씨도 살아남기 어렵겠지만, 우리 안동 김씨 종친도 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누군가는 살아남아서 선조들께 제사는 지내야 하지 않겠는가?'
김병학은 소리 없이 울부짖고서, 김좌근의 집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그 길로 은밀히 그의 오랜 친구 이하응을 만나 그에게 엎드려 절을 하며 청했다.
"소인을 보내주십시오, 합하. 일생일대의 청이옵니다. 청컨대, 저를 평양으로 보내주십시오!"
"기꺼이 그렇게 하겠소. 고맙소. 정말로 고맙소! 그대가 그렇게 말해주니 천군만마를 얻은듯하구려!"
이하응은 반색하며 김병학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안동 김씨 내에서도 김좌근의 뒤를 이어 세도 정치를 이어갈 인물로 주목받던 김병학이었다. 그런 김병학이 이하응과 뜻을 함께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이하응은 김병학에게 도원수의 직위를 임시로 내렸고, 김병학은 도성에 모여든 8만 명 중 절반에 가까운 4만의 대군을 이끌고서 평양으로 북진하였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김좌근은 방방 뛰며 분노를 터뜨렸지만, 이미 때는 늦어 김병학은 도성을 빠져나간 다음이었다.
"이제 다 틀렸다! 전부 다 저놈의 탓이다. 저 어리석은 애송이의 객기로 우리 가문은 멸문을 면치 못하리라!"
김좌근은 절규하듯이 한탄했다. 물론, 그의 절규에 동조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새 나라의 개국공신이 될 꿈에 들뜬 몇몇 얼빠진 이들만이 여전히 김좌근의 곁에서 그의 노기를 잠재우려 애쓸 따름이었다.
"한시라도 서둘러라! 이미 보름이 지났다. 이미 성이 함락되었을지도 모른다! 모두 행군을 서둘러야 한다!"
한편, 도성을 빠져나간 김병학은 급히 군세를 몰았다. 자는 시간도 거의 주지 않았고, 취사시간도 줄였다. 당연히 병졸들로부터는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그래도 김병학은 병졸들의 불만을 도외시한 채로 평양성으로 향했다. 한시가 급했다. 만일 정말로 평양성이 함락된다면, 안동 김씨는 고의적으로 소년 왕이 죽도록 방임했다는 비난을 피하지 못할 터였다.
그럼 진짜로 김좌근의 생각대로 새 나라를 열건 아니면 조선이 그대로 유지되건 간에 안동 김씨 종친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 뻔했다. 민심은 곧 천심이라고 했다. 성난 백성들의 칼날은 실로 무시무시하기 때문이다. 김병학은 성난 민초들의 죽창에 찔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생각일랑 추호도 없었다.
'견뎌 냈어야만 한다. 어떻게 해서든 견뎌 냈어야만 한다! 천지신명이시여, 제발…!'
김병학의 강행군은 사흘 밤낮을 이어졌다. 그 결과로서, 김병학과 4만의 대군은 불과 나흘 만에 평양성에 도착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평양성에 도착한 그들은 절망했다. 성을 포위하는 병사들은 없이, 그 주위로 수만에 이르는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아아, 역시 너무 늦었구나! 내가 너무 늦었…?"
이미 성이 함락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절망한 김병학은 뭔가 이상함을 발견했다. 성벽 위로 펄럭이는 깃발이 황금색 배경 위로 푸른 청룡이 그려진 다이칭구룬의 어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성벽 위로 펄럭이고 있는 붉디붉은 깃발은, 의심할 여지 없이 조선의 어기였다.
"…허?"
김병학과 무관들은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혹시 이것이 함정은 아닐까, 혹은 이미 성이 함락되고 청에서 소년 왕을 납치하여 돌아간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그러나 일단 성벽 위로 조선의 어기가 휘날리는 이상 그냥 지나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병학은 조심스럽게 병사들을 성벽 가까이 몰았고, 곧 성벽 안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다지 지원군에 반가워하는 기색들은 아니었다.
도리어 왜 인제야 나타났냐는 듯한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께서 내성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전하께서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렇다면 성은 무사하다는 말입니까?"
"예에, 물론입니다. 북적들은 이미 도망친 지 오래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그를 마중하러 나온 병마절도사 유창근의 말에 김병학은 더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슬슬 이것이 마음을 놓게 한 뒤 그와 병사들을 단번에 쓸어내려는 북적의 모략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솟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성벽 안으로 들어선 김병학은 그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넋이 나간 표정의 청군 수만 명이 줄줄이 손발이 묶인 채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목재감옥에 갇혀있던 것이다. 그것만으로 이미 김병학의 정신은 한계였다. 그러나, 내성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늦으셨구려. 왜 인제야 오셨소?"
"아, 아니. 그, 그것이…."
퉁명스럽게 그를 맞이한 것은 왼쪽 어깨에 붕대를 둘둘 말고 있는 채로 어좌에 걸터앉아 오른팔을 괴고 있는 소년 왕이였다.
김병학은 절로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