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40화 (40/530)

< 역모대책 >

"…뭐라?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그러니까, 한양성이 김좌근 그자에게 점령당하였다, 그 말씀이십니까?"

"김가놈 그 작자가 감히 하늘 무서운 줄도 모르고 그런…!"

"으음, 역시나…."

김병학이 전한 한양의 상황에, 평양성은 분노에 잠겼다.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창근도, 평안도 관찰사 홍우길도, 금위대장 허계도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차이가 없었다. 억지로 분노를 삼키고 정보수집을 우선시했는가,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는가, 기어이 이 사달이 났다고 씁쓸해 했는가의 차이 정도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처음 한양에 승전보고를 늦추자고 이야기를 꺼낸 건 허계였다. 선왕 시절부터 금위대장이었던 그로서는, 왕이 한양을 비운 동안 세도가가 어떤 일을 벌일지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도 확신할 수는 없었기에 한번 꾀를 내보니, 그대로 걸려들었던 것이다.

정작 여전히 한쪽 팔을 괴고서 어좌에 앉은 채 잠자코 보고를 듣고만 있던 소년 왕 이형은 그다지 화난 기색도 아니었다. 다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뚱한 얼굴로, 홀로 생각에 잠겨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책망을 하던가 아니면 알고 있었다고 콧방귀라도 뀌어다오. 설마, 이 애송이가 내가 못 보는 새에 제 기분을 숨기는 법마저 익히게 되었단 말인가!'

그 모습이 김병학으로서는 더더욱 소름이 끼쳤다. 차라리 드러내놓고서 분노를 터뜨려 주었으면 마음이 더 편했을 것이다. 그동안 궁에서 시도 때도 없이 제 화를 못 참아 사달을 일으키던 말썽꾸러기 소년 왕이 정작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까 더욱 소름이 끼쳤다.

"전하, 어서 한양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어서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그렇습니다. 한시가 급한 일입니다! 저 노괴가 본색을 보인 이상, 한시가 급합니다. 전하!"

''이곳 평양에서는 9만에 달하는 대군이 있습니다! 역도들의 군세에 밀릴 까닭이 없습니다! 전하, 어서 용단을 내려주십시오!"

'아프구만….'

유창근, 홍우길, 허계의 청에도 이형은 답하지 않고서 계속 팔을 괴고 있었다. 사실, 그의 속내를 말하자면 딱히 그는 화를 참고 있는 것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왼쪽 어깨에 난 총상이 너무나도 아픈지라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입을 열기라도 하면 우선 악소리부터 절로 나올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김좌근이라…노망이 나기는 했나 보군. 그러고 보면 김좌근이 잘은 몰라도 고종이 즉위하고서 얼마 안 돼서 죽었지 아마? 죽을 때가 다가오니 제가 알아서 제 명을 재촉하는구만.'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머릿속으로는 필사적으로 고통을 누르면서 생각하는 중이었다. 워낙에 공부한 지 오래되다 보니 생몰년도라던가 정확한 연대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대강의 시점 같은 건 띄엄띄엄 기억하고 있던 그였다. 덕분에 이형으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안 그래도 수명도 얼마 남지 않은 영감탱이가 이제는 역모를 꾸몄단다.

'이쯤 되면 진짜로 무언가 인과력이 있어서 죽을 때가 오면 알아서 하늘이 죽을 이유를 만들어 주는 거 아닌가 싶은데.'

"그래서, 어떻게 할 거요?"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고서, 이형은 가까스로 고통을 눌러 참고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생뚱맞은 질문에, 그의 장수들은 일제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물론 한양으로 향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중죄입니다. 설령 그 김가놈이라고 할지라도 몸 성히 빠져나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입궐하시어 이 나라 조선의 정당한 주인이 누구인가를 보이셔야 합니다."

덕분에 돌아온 대답은 그런 원론적인 답변들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형이 원하던 답변이 아니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지금은 전시이지 않소이까. 이번에는 운이 좋게 적을 대파하였으니, 어떤 조건으로 전쟁을 끝내야 할지를 묻고 있는 거잖소."

"""아…."""

이형의 신경질적인 답변에, 그제야 장수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좌근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식에 그만 눈이 멀어서, 청과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답이 궁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김좌근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은 원군이 계속하여 늦어지고 있는 것과 그의 친인척인 김병학의 증언을 통하여 입증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럴만한 작자였다. 오히려 그동안은 어찌 그런 욕망을 참아왔을지가 의문이었다. 이제 와서 이를 드러냈다고는 하나, 예상하지 못한 일도 아니었다. 김좌근은 부정할 여지 없는 이 나라 조선을 쥐락펴락하던 권신이었다. 그런 김좌근의 역모 사건을 두고서 청과의 전쟁에 집중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대가 보기에 어떻소. 과인이 손수 군세를 몰아 한양으로 돌아간다면, 김좌근 그 작자가 순순히 병졸들을 해산하고 항복할 것이라 생각하오?"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이미 김좌근 그 작자는 노망이 든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필시 마지막까지 도성에 남아 항전하려 들것입니다."

"흐음, 역시 그러한가."

김병학의 대답에, 이형은 작게 혀를 찼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면전에서 일이 그렇게 간단히 풀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대답을 들으니 입맛이 썼다. 아마 실제로 도성에 진입한다면 도성에 주둔 중인 병력 대다수는 근왕군으로 돌아설 것이다. 조선의 왕이란 이름에는 그만한 권위가 있었다. 끝까지 김좌근에게 충성을 바칠 작자들은 적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수백 명 정도는 남을 것이고, 그럼 도성에서 시가전을 벌이게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럼 기껏 대승을 거두고서도 청과의 전쟁에서 그리 많은 것을 받아낼 수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어쩐다?'

이형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일단 한양에 돌아간다면 확실하게 승리할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한양으로 병사들을 물린다면 청과의 전쟁은 기껏 대승을 거두고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끝나게 될 가능성이 컸다. 청은 아무튼 여전히 대국이었고, 조선은 청에 비하면 근본적인 체급이 부족했다. 장기전에 들어가면 청도 불리하지만, 조선은 확실하게 허리가 부러질 터였다.

'김포에 주둔 중인 프랑스군을 이용해본다면….'

잠시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이형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아무리 머지않아 보불전쟁으로 쫄딱 망할 프랑스 제국이라지만, 프랑스 제국이 망하고서 들어선 프랑스 제3 공화국도 무시할 수 없는 열강 국가였다. 이번 전쟁에서 필요 이상으로 빚을 지게 된다면 필시 훗날에 후회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빌어먹을, 그리고 생각해보니까 일단 내가 직접 가지 않으면 여차하면 김좌근 놈이 근왕군 흉내를 낼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럼 일단 나는 무조건 지금은 한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건데.'

이형은 지끈거려오는 왼쪽 어깨를 신경질적으로 움켜쥐었다. 일이 마구 꼬여가는 감각이었다. 염원하던 대승리로 이제 겨우 활로가 보이는가 싶었더니 집안싸움으로 또 모든 것이 꼬여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예 후방의 김좌근을 무시하고서 진군한다는 선택지도 없었다. 만약 이대로 김좌근이 수명이 다하여 죽는다면 세도가를 단숨에 쓸어낼 절호의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었다.

근대화를 위한 개발 독재에서 두고두고 걸림돌이 될 세도가 세력이었다. 깡그리 몰살한다면 그 또한 부작용이 심각하겠지만, 기회가 온 이상 한 번쯤 솎아줄 필요는 있었다.

"청군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미 조선 땅을 빠져나갔다고 하던가?"

"몽골친왕 승격임심(僧格林沁:셍게린첸)이라는 작자의 군세는 이미 압록강을 건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야인 보졸들은 여전히 평안도 곳곳에 흩어져 한창 기사들이 수급을 취하는 중이라 알고 있습니다."

"허, 제 전우들을 버리고서 도망치는 건가? 그거참 너무한 놈들이로구만."

이형은 셍게린첸의 군세가 압록강을 이미 빠져나갔다는 소식에는 입맛을 다셨지만, 여전히 청군 패잔병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상황이라는 유창근의 후속설명에는 어처구니가 없어 되물었다. 그래도 명색이 같은 청나라의 병사들끼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다니 너무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승격임심이라는 자의 군세는 몽고족이 주축이고, 저들은 야인들이 주축이라고 들었습니다. 같은 북적이라도 족속이 다르니, 서로 도울 의리는 없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허, 거 참."

'그래,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민족이 같아도 출신지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면 다투는 법인데, 하물며 족속이 다르다면야.'

홍우길의 보충설명에 이형은 혀를 내둘렀다. 만주족과 한족 간의 알력만 생각하고서, 같은 유목민족인 만주족과 몽골족 간의 알력은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것이다. 그 문답에, 김병학은 번개 같은 것이 뇌리를 스치는 감각을 느꼈다. 묘안이 떠올랐던 것이다.

"전하, 청국과의 혼약을 맺으시겠다는 마음은 변치 않으셨습니까?"

"음? 혼약 말인가? 뭐어, 아직 정비도 정해지지 않았잖느냐. 그럼 아직 유효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청국과의 혼인을 대가로서 심왕에 봉해달라 청하여 보겠습니다. 소신을 보내주소서. 만주에는 이미 저희 조선의 백성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전하께서 애신각라와 피를 섞으신다면 야인 족속들을 통치하실 명분 또한 섭니다. 청국에서는 상당수의 만주족 병졸들을 잃었으며 만주족 병졸들을 버리고서 도망친 승격임심이라는 자 또한 더 이상 못 미더울 테니, 화친에 응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 옵니다."

"아니, 그것이 무슨 소리요? 야인들과 피를 섞는다니! 지금 제정신이오!"

김병학의 말에 홍우길은 그 즉시 노기를 터뜨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다투던 양국이었다. 이제 와서 왕실 간의 혼약을 맺자니, 그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형의 입장에서는 달랐다. 그로서는 눈이 번뜩 뜨이는 기분이었다.

'햐, 역시 그 안동 김씨의 유력인재답구먼. 두뇌 회전이 장난이 아닌데?'

이형은 히죽 하고 웃었다. 슬슬 어떻게 하면 좋을지 구체적인 계획이 서는 기분이었다. 그 모습에 홍우길의 얼굴은 절로 일그러졌다. 이형이 김병학의 말에 구미가 당겼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설마하니 전하, 진심이십니까? 아니, 이제 와서 청국과 부마 관계를 맺으시겠다니요. 그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란 말입니까! 이것은 도리에 맞는 일이 아닙니다. 청컨대 물려주소서!"

"뭐, 저 오랑캐들에게 그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건 그럼 도리에 맞는 일이었단 말이오? 아시다시피, 저들은 몽고 카칸의 계승을 자칭하고 있소. 그럼 우리 조선이 몽고 시대의 심왕을 다시 주장한다고 한들 저들이 무슨 명분이 있고 무슨 힘이 있어서 이를 막는단 말이오?"

"하오나, 전하…!"

"어허, 과인의 생각은 이미 정해졌소. 그대는 김 판서와 함께 군세를 몰아 강 건너 봉천을 포위하도록 하시오. 굳이 점령하라고는 하지 않겠소. 유 장군께 도원수의 벼슬을 제수하리다. 그리고 김 판서, 이 일은 경에게 일임하겠소. 뒷일은 잘 부탁하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김병학은 고개를 숙이고, 동시에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 군세를 몰아 봉천을 포위하라는 지시까지는 이해하겠는데, 구체적인 병력의 규모가 정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김병학은 이를 드러내지 않고서, 그냥 지레짐작으로 아직 어린 소년 왕이 실수로 누락하였거니-하고 생각했다.

이는 졸지에 김병학을 대신하여 도원수가 된 유창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간 평양성에서 소년 왕의 무모한 모습을 자주 지켜봐 온 유창근은,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고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되물었다.

"…하오면 전하, 소신은 몇이나 되는 병졸들을 지휘하게 되는 것인지요?"

"물론 전부요. 아, 물론 성의 치안을 유지할 최소한의 병력은 남겨주시는 편이 좋소이다.

그 부분은 홍장군과 알아서 논의하시오. 허 대장, 과인과 함께 한양으로 갑시다. 150명의 기사가 소리 소문도 없이 들이치면 저들도 깜짝 놀랄 거요."

소년 왕이 태연하게 그런 말을 지껄인 다음에야, 김병학은 이형의 뜻을 헤아리고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창근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고, 허계는 지쳤다는 얼굴로 먼 곳을 바라봤으며 홍우길은 가슴이 답답해졌던 듯 쿵쿵하고 가슴팍을 두들겼다.

전부! 전부란다. 김병학이 이끌고 온 근왕군 4만을 더하면 장장 9만에 달하는 대군이 집결해있는 이곳 평양성이다. 그런데, 그 9만 명 중 금위영 150명만 남기고서 모조리 봉천으로 보내겠다고 한 것이다. 경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적어도 그들로서는 없었다.

만일 그들이 역심이라도 품어서 한양으로 회군하려 든다면 지금의 조선으로서는 저들을 막을 병력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한양에 아직도 남아있는 4만의 병졸들이 있다지만, 그들은 현재 김좌근의 사병들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당연히 그들을 조선군이라고 헤아리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많았다.

그러니 김병학으로서는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어린 소년 왕이 도대체 뭘 믿고서 자신을 이토록 전폭적으로 신뢰해주는지 알 수가 없던 것이다.

"저, 전하! 그것도 안 될 말씀이십니다. 옥체를 생각하소서. 적어도 김좌근 그 작자보다는 많은 병졸들이 필요하실 것입니다! 고작 기사 150명이라니요. 통촉하여 주소서!"

"이미 금위영 기사 150명과 함께 십 수만의 야인 병졸들도 휩쓸어본 과인이요. 이제 와서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소? 그대야말로 몸조리 단단히 하시오. 겨울의 간도는 살이 에일만큼 춥다고 들었으니."

"하오나, 전하!"

"거 참 시끄럽구려. 그렇다면 묻건대, 경도 과인에게 누런 송곳니를 들이댈 작정이요?"

성가시다는 듯이 귀를 후비적거리며 되묻는 소년 왕의 질문에, 김병학은 말문이 막혔다. 그것이 그의 신변에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서도, 그는 차마 답할 수 없었다.

왕, 왕이라! 이 나라의 주인이나 다름없던 세도가의 일원으로서 어찌 왕이 될 야망 한번 가져보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것도 안 될 일이었다. 김병학은 왕좌란 단지 힘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물론 힘이 있다면 왕좌를 빼앗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가 없다. 왕좌를 뺏고서, 더 이상 그 왕좌를 지킬 방도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민심을, 곧 천심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태생이 기득권 그 자체인 김병학의 안동 김씨로서는, 어떻게 해도 민심을 얻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이 불가능했다. 도리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더 많은 특권을 그들과 같은 기득권에게 뿌려야 할 것이다.

그럼 그 뒤는 아찔했다. 분노한 민초들이 그들을 죽이러 달려들 것이다. 왕을 지키고자 궐기한 무식하지만, 충심 깊은 조선의 농민들이 죽창을 들고서 달려든다면, 그 어떤 무적의 군세도 무의미했다. 결국, 그 군세도 조선인이기 때문이다. 힘으로 권좌를 쟁취한다고 해봤자 힘을 신뢰할 수도 없으니, 그 끝은 결국 부하의 배신 또는 분노한 민초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는 죽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하. 어찌 소신을 시험하려 하십니까. 소신은 골백번을 고쳐 죽더라도 조선의 신하이옵니다."

"그럼 뭐가 문제라는 거요? 과인은 경만 믿고 있겠소. 과인은 이 길로 한양으로 떠날 작정이오. 자, 함께 갑시다. 허 대장."

김병학은 고개를 푹 숙이고서 간신히 대답했다. 그것이 사실상의 패배 선언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는 없었다. 아무리 그가 그 안동 김씨의 일원이라고 해도, 어전에서 역모를 벌일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서 그렇다 내지 그럴지도 모른다고 대답할 비대한 간덩이는 가지지 못했다.

도리어 권신의 앞에서 대놓고 역모를 벌일 작정이냐고 묻는 소년 왕의 비상식적인 간덩이에 혀를 내두를 따름이었다.

이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를 받아넘기고서, 자리에서 벌떡 하고 일어섰다. 이 길로 한양으로 떠나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던 것이다. 그를 둘러싼 장수들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차마 이를 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동안 소년 왕을 지켜봐 오면서, 비록 저 위풍당당한 모습이 허세일지언정 저 소년 왕은 그 허세를 단지 허세로 끝내지 않는 부류의 인종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전하."

별수 없이, 부름을 받은 금위대장 허계는 그 즉시 소년 왕이 입을 두정갑을 가져왔다. 소년 왕은 어깻죽지의 고통을 눈살을 찌푸리며 억지로 참으면서도 이를 악물고서 앓는 소리 한번 없이 두정갑을 걸쳤고, 일부러 깍지로 뚜둑하는 뼛소리를 내며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그때였다.

똑똑똑.

"음, 누구냐?"

"전하, 불란서의 공사라는 자가 급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어찌할까요?"

비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이형은 이곳 평양성의 아전 중 하나의 목소리라는 걸 기억해냈다. 이름조차 기억해두지 않은 비굴한 작자였다. 그러나, 지금 만큼은 그에게 크나큰 쓸모가 되고 있었다.

이형은 남몰래 입꼬리를 비틀어 회심의 미소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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