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기시연 >
타타탕-.
"허, 허어!"
"오호, 이것 참…."
내성에서는 무기시연식이 한창이었다. 바로 벨로네 공사가 가져온 150정의 프랑스제 미니에 소총의 사격 시범이었다. 사격 시범은 소년 왕 이형의 제의로 평양의 백성들과 무관들이 보는 앞에서 이뤄졌고, 그 경이로운 위력에 누구 하나 혀를 내두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분당 2발, 숙련자의 경우에는 분당 3발까지도 발사 가능한 사격속도는 그리 대단할 것 없어도, 900미터 거리에서 10cm 두께의 소나무를 관통하는 위력은 실로 인상적이었다. 조선에서 이에 비교할만한 위력의 천보총이 1m 60cm 정도로 당시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과 맞먹거나 그보다 큰 데 반해, 이 미니에 소총은 총열 길이만 95cm에 개머리판까지 모두 합해봐야 어깨까지 밖에 오지 않았다.
조선과 서구 열강들의 기술적 격차를 여실히 보여주는 무기였다. 백성들은 그저 저런 무기를 조선에서도 사용하게 된다니 그저 신기해하고 감탄할 뿐이었지만, 무관들은 저런 무기들을 수도 없이 보유하고 있을 나라와 적대하게 되었을지도 몰랐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오한을 맛봤다.
'…뭐야? 저 녀석들 아직 후장식 소총도 없었나? 이때면 슬슬 볼트액션식 소총 아니었어?'
정작 그걸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선보인 이형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니에 소총은 물론 이전에 사용하던 조선의 구형 화승총에 비하면 월등히 발전한 소총이었지만, 여전히 전장식 소총으로 장전 시에는 사수가 직접 화약을 채워 넣어야 했다. 막연한 지식으로 이 무렵 즈음부터 후장식 소총이 개발되었다는 것만 알고 있던 이형으로서는 다소 떨떠름한 상황이었다.
물론 벨로네 공사가 개인 자격으로서 150정의 소총을 무상으로 지원해주겠다고 먼저 제의한 이상 이에 관하여 뭐라 불평해봤자 반찬 투정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실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후장식 소총인 샤스포가 도입되는 건 2년 후인 1866년이었고, 현시점에서 후장식 소총을 도입한 프로이센은 아직 극동까지 올 여력이 없었다. 퍼커션 캡과 미니에 탄두로 성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전장식 라이플 정도가 현재 프랑스가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총기였던 셈이었다.
"저 총을 우리 조선에서 복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오?"
"…노력해보겠습니다. 아니, 반드시 이뤄내 보이고 말겠습니다! 저와 같은 무기가 있다면, 이 나라 조선은…!"
이형이 심드렁하게 내뱉은 것과 반대로 답하는 홍우길의 태도는 한없이 진중했다. 이형으로서는 여전히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말이다. 사실 K2소총과 M16을 드르륵 갈겨본 이형으로서는 이 시대의 그 어떤 소총을 들고 와도 눈에 차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흐음, 그렇다면 다행이구려. 나중에 군기시에 한번 보여봐야겠소. 어디 얼마나 재현할 수 있을지를 봅시다."
이형은 그렇게만 적당히 답해두었다. 다만, 큰 기대는 없었다. 근본적으로 기계의 생산량과 정밀도를 인간이 따라갈 수 없는 이상, 프랑스 공장에서 생산된 미니에 소총과 군기시에서 수제로 하나하나 복제할 미니에 소총과 품질이 비등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는 우선 서구에서 본격적으로 증기기관을 도입한 다음에야 해결될 문제들이었다.
물론 증기기관을 어디에서 받아올지에 대해서도 이미 이형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번에 벨로네 공사를 통하여 조선인들에게 호의적인 모습으로 기억될 프랑스였다.
'어차피 프랑스에서 조선을 세력권에 넣겠답시고 이것저것 베풀어봤자 프로이센에게 대패하고 나면 한동안 손도 발도 못쓰게 될 텐데 뭘. 적당히 단물만 빨고 뱉어주자고. 이때면 나폴레옹 3세였던가? 고려천자 한 놈 더 생기게 생겼네.'
이형은 입꼬리가 찢어질 지경으로 소리 죽여 웃고 있는 벨로네 공사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벨로네 공사가 알게 된다면 길길이 날뛸 폭언을 퍼부었다. 양심의 가책 따위는 없었다. 어차피 지금은 무상으로 무기를 제공해주며 호의를 베풀고 있어도 언젠가는 조선을 먹어 치우려 달려들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시대의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확장공식을 잘 알고 있었다. 우선 선교사들과 상인들을 앞세워 명분을 쌓은 다음, 해당 국가에서 기독교를 탄압하거나 아니면 상인들의 착취를 방해하면 이를 명분 삼아 쳐들어가 문호를 개방시킨다. 그 뒤 문명개화를 명분으로 철도를 깔아 수탈에 용이하게 교통을 정비하고 유학생들을 받아 자국에 호의적인 상류계층과 지식인들을 형성한 다음 최종적으로 본국에 친화적인 괴뢰정권을 내세우거나 아예 총독부를 세워 직접 통치한다.
그는 이 식민 확장공식 중 앞선 문호 개방 이전까지의 모든 과정을 뛰어넘고서 이것저것 프랑스에게서 받아내기만 한 다음 보불전쟁으로 프랑스가 휘청이는 틈을 타, 다른 나라와 손을 잡건 아니면 프랑스와의 협력조약을 개정하건 간에 할 작정이었다. 물론 거기까지 모든 일들이 술술 풀리려면 상당한 천운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프랑스 다음에 손잡게 될 나라가 누가 될지는 아직은 모르겠다만. 처음에는 러시아를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꼭 러시아에게 매달릴 필요도 없단 말이지. 뭐, 일단은 일본에서 누가 이기는가를 보고서 정할까.
'됐다. 해냈어! 기대한 그 이상이다. 우리 프랑스는 이제 극동에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개 같은 해적 놈들, 우리 프랑스가 극동을 호령하는 것을 평생 구경만 하다가 죽게 만들어주마…!'
한편 이형이 대담하게도 열강국을 단 꿀만 빨고서 버리겠다는 대담한 미래구상을 펼치고 있을 때, 벨로네 공사는 이형에게 가볍게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대담한 미래구상을 펼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정말로 꿈만 같이 술술 풀리고 있었다. 청나라가 영국에 의하여 개항되고, 일본이 미국에 의하여 개항되는 가운데 조선은 아직 그 어떤 서구 열강국과도 접촉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조선이 먼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통하여 개항 의사를 전하고 그 결과로서 프랑스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먼저 개항지를 선점했을 뿐만 아니라, 가톨릭 신앙의 자유마저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그뿐이랴. 이 와중 느닷없이 조선에 쳐들어온 중국인들의 방해로 프랑스에게 이 모든 호의를 베풀어준 조선 제일의 친 프랑스 인사(?) 소년 왕을 잃게 되는가 싶더니 소년 왕은 불과 4만의 군세로 16만에 이르는 청군을 대파하며 조선의 국력을 과시해 보였다. 본의 아니게 평양성으로 수성 시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들고 찾아온 벨로네 공사와 그 일행들이 승전 축하 사절단이 되고 150정의 중고 미니에 소총이 승전 축하 선물이 된 것은 덤이었다.
이는 프랑스와 벨로네 공사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복이나 다름없었다. 총알 한 발 쏘지 않고서 미지의 나라 조선을 그 어떤 나라보다 먼저 개항시켰을뿐더러, 박해받던 신앙의 형제들마저 구해냈을 뿐 아니라 조선과 청 양국 간의 평화를 중재하고 그 대가로서 이권을 따낼 기회마저 선점했다.
이만하면 보통 공적이 아니었다. 이미 프랑스 본국에서는 조선의 개항과 천주교 신앙의 자유화 소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었고, 이 모든 것을 총알 한 방 쏘지 않고서 이뤄낸 벨로네 공사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머지않아 나폴레옹 3세가 벨로네 공사를 본국으로 불러들여 손수 훈장을 수여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극동 총독부에 속한 프랑스 관료들 사이에서 파다한 와중이었다. 그런 와중 조선의 승전마저 누구보다 앞서 읽어내고서 이를 축하하게 된 꼴이 되었으니, 벨로네 공사로서는 정말 이국의 왕만 아니라면 조선의 소년 왕을 몇 번이고 끌어 안아주면서 볼에 입이라도 맞춰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고 보면 요즈음 극동에서 양키들이 루스랑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첩보가 있었는데….'
그게 무슨 대수랴? 라는 것이 솔직한 벨로네 공사의 심정이었다. 미국은 독립전쟁 이래로 프랑스의 오랜 우호국이었고, 러시아는 최근 사이가 크게 틀어지기는 했어도 프랑스의 잠재 적국이라고 할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 두 나라는 영국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거로 유명한 만큼, 다 된 밥에 영국에서 괜히 재를 뿌리는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결국 어떤 식으로 건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최근에 사이가 개선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영국은 프랑스의 오랜 라이벌이니 말이다.
저들이 알아서 프랑스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 준다면야, 벨로네 공사로서는 수고를 덜게 되었으니 고마운 일이었던 것이다.
'말석 정도는 양보해주마. 그러나, 조선은 이제부터 우리 프랑스의 세력권이다. 으흐흐, 스스로 알아서 입안에 들어온 녀석들을 차마 뱉어내라고는 못 할 거다.'
벨로네 공사는 입꼬리를 뒤틀어 회심의 미소를 떠올려 보였다. 벨로네 공사와 함께 역관 자격으로 참관한 파리 외방전교회의 베르뇌 주교와 악수하기 위하여 다가온 이형은 그것을 목격했지만, 딱히 이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등신. 내가 언제 먹혀준다더냐? 뭐, 망상은 자유라고 지금은 내버려 두는 편이 낫겠지.'
다만, 속으로는 비웃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참으로 반갑습니다, 전하."
"오오, 베르뇌 주교! 이렇게 다시 만나 뵙게 되어서 참으로 반갑소. 그래, 교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소?"
"장경일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조선에서는 조선의 법도를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마음을 써주신 덕분에 교인들도 비로소 안심하고 신앙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전하의 호의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베르뇌 주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반복했다. 반평생을 극동에 신앙을 퍼뜨리기 위하여 전교회에 몸담아 온 그였지만, 그간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는 등 갖은 고생을 겪으며 그 뜻도 조금씩 꺾여가던 베르뇌 주교였다. 그런데 그런 고난이 마침내 보답받는 순간이 온 것이었다. 그의 눈에는 조선에서 천주교도들의 신앙의 자유를 공인해준 눈앞의 소년 왕이 흡사 아기 예수와 같이 느껴졌다.
'실로 이 분은 하느님께서 내리신 천국의 전령임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 저 어린 나이에 전장에서 이토록 의젓하실 수가 있을까? 필시 주께서 갖은 박해로 고통받는 조선의 교인들을 돕기 위하여 내린 전령이실 것이다!'
물론, 오해였다. 이형은 그저 왕으로서의 직업윤리에 충실하게 살 것을 다짐한 속 늙은이에 불과했다.
이형으로서는 베르뇌 주교의 과장된 반응에 되려 부담스럽기만 할 따름이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내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해도 괜찮겠소?"
"얼마든지 받겠습니다. 설령 전하께서 제 심장을 원하신다고 하셔도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나라 모든 교인들의 은인이십니다. 어찌 협력을 아낄 수 있겠습니까?"
'…뭐야. 그 악랄한 외방전교회 선교사가 왜 이렇게 순박해? 역시 외방전교회에서 인계철선 담당이었나?'
이형은 베르뇌 주교가 껄끄럽게 느껴졌다. 평생을 허송세월로 보내다 허망이 이승을 하직한 그 자신이 그다지 긍정적인 인물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던 만큼, 고결한 인품을 가진 인물을 대하기 어려운 이형이었다. 차라리 베르뇌 주교가 파리 외방전교회의 전형적인 선교사처럼 위선적이고 우생학에 심취해있으며 우국충정에 불타오르는 프랑스발 간첩 지망생이었다면 훨씬 대하기 쉬웠을 터였다.
그러나 결연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그에게 은혜를 갚겠다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난 성의를 보이고 있으니, 감동적이다기보다는 어렵기만 했던 것이다.
"다름이 아니라, 본인이 아직 평양에서 할 일이 많아 한양으로 돌아가자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소. 신자들을 통하여 한양에 승전보를 전해 줄 수 있겠소? 가능하다면 빠를수록 좋소."
"알겠습니다. 오늘 즉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불란서의 기선은 참으로 빠릅니다. 늦어도 내일 정오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소만…. 그리고 그대는 역관이 아니었소? 그대가 없으면 불란서의 공사 일행은 어떻게 한단 말이오?"
"그건 걱정 없습니다. 리델 신부가 저와 함께 이곳 평양에 와있습니다. 그는 조선에서 4년의 세월을 보냈으니, 무리 없이 신도들과도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를 보낸다면 문제없을 것입니다."
"허, 참."
이형으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열정이었다. 상식적으로 파발을 보내어 정식으로 승전보를 전하는 대신 조선의 천주교도들을 이용해 한양 안에서부터 승전보를 퍼뜨리겠다는 것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필시 뭔가 한양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을 직감했을 테고, 그럼 어떤 식으로건 협상을 가하는 것이 도리였다.
그러나 눈앞의 주교는 대신에 무엇을 달라는 요구도, 무슨 일인지 알려달라는 요청도 없이 선선히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딱히 이형은 그의 주군도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이형을 아기 예수가 내린 전령으로 보고 있던 베르뇌 주교 개인의 신앙적 열정에서 근거한 태도였지만, 신앙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는 이형으로서는 그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참 별의별 인간도 다 있구만.'
"고맙소.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으리다."
"은혜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결코, 전하를 실망하게 해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형은 결연한 각오를 보이는 베르뇌 주교를 내심 꺼림칙하게 여기면서도, 겉으로는 억지로나마 미소를 띠면서 그와 악수를 주고받았다. 그의 구상에서 베르뇌 주교와 천주교도들의 역할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뜻하지 않게 귀국에는 큰 은혜를 받게 되었소. 이 은혜는 필히 갚으리다. 아직 전시 중이라 그대들을 귀히 대접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라오."
"당치도 않습니다. 저희 프랑스에게 먼저 손을 건네주신 그 호의, 결코 잊기 어려울 것입니다. 조선은 저희 프랑스에게는 이미 오랜 친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어찌 대접에 소홀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오랜 친우라. 그래서 두둑이 친구비 뜯어가실 작정이겠지.'
이형의 뒤틀린 심사와는 별개로, 그날의 무기시연은 악수를 주고받는 소년 왕 이형과 프랑스 공사 벨로네의 모습으로 마무리되었다. 무대 뒤에서 벨로네 주교와 악수를 주고받는 이형의 모습을 보지 못한 평양의 민초들은 이 모습에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형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어차피 장차 조선에서는 서역의 색목인들이 그리 드물지 않게 보이게 될 터였고, 그럼 지금부터라도 익숙해지는 편이 좋았다.
처음에는 동요하던 평양의 백성들도, 미리 이형을 통하여 전달받은 관료들로부터 저것이 서역의 예법이라고 전하자 그럭저럭 동요가 가라앉았다. 조선의 예법을 따르지 않는 태도에 무례하다 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론은 호의적인 편이었다. 누구보다 앞서 승전을 축하하고 무상으로 150정의 소총까지 증정한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탓이었다.
그 뒤에도 벨로네 공사 일행은 평양에 남았다. 김병학과 유창근이 이끄는 조선군이 봉천까지 진군하여 청에게 화친을 강요할 것이라는 계획을 듣고서, 이 기회에 아예 조선군과 함께 봉천까지 따라가 청과 조선 양국의 화친을 중재할 작정으로 합류를 자청한 것이었다.
이형은 이를 선선히 받아들였고, 김병학과 유창근은 뜻하지 않게도 9만의 대군을 이끌고서 색목인과 함께 봉천에 진군하게 되었다.
"그럼, 출발합시다. 허 대장. 한양으로 가려면 길이 멀지 않소. 서두를 필요가 있을 것이오."
"이미 기사들에게는 일찌감치 준비해두라 명해두었습니다. 하오나 전하, 한양에는 어찌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역적 김좌근이 필시 성문을 모두 단단히 봉해두었을 것입니다. 다른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는지요."
그렇게 청과의 전쟁을 유창근, 김병학, 벨로네 공사 세 사람에게 떠맡긴 이형은 그 길로 150명의 금위영 기사와 함께 그날 밤 평양성을 떠났다. 벨로네 공사가 건넨 150정의 미니에 소총과 함께였다.
금위대장 허계의 걱정은 타당해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한양으로 돌아가면 좋을지 알 수가 없던 것이다. 길목이란 길목은 모조리 이미 역적의 대군으로 틀어 막혔을 테고, 그렇다고 산을 타고서 움직이기에는 150명의 기사들은 너무 눈에 띄었다. 말에서 내려 산을 통해 움직인다면 발견될 위험도 덜겠지만, 그 경우 막상 잠입한다고 쳐도 역적들을 타격할 방법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주군 이형은 정작 아무런 걱정도 없는 얼굴이었다.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저렇게 태연한가 하는 불안이 절로 들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무엇을 그리 걱정하고 있는 거요? 그거야 뻔하지 않소."
"저, 전하.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이 나라 조선의 국왕은 바로 이 몸이오. 왕이 본인의 궁으로 돌아가는데 어찌 좀스럽게 돌아갈 필요가 있단 말이요? 과인은 숙정문을 통하여 당당하게 정문에서부터 개선할 것이외다. 어디 막아볼 테면 막아보라고 하시오. 무슨 명분으로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소만."
경악한 허계와 달리, 소년 왕은 언제나처럼 뻔뻔한 낯짝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지금 이 말도 허세일지언정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 진짜로 그럴 작정이라는 말이었다.
허계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현기증에 그만 머리를 감싸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