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선 >
다시 시점을 돌려, 한양성.
도성의 민심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평양성에서 어떠한 소식도 없이 감감무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패하면 패했다, 이겼다면 이겼다, 아직 전투 중이라면 지원을 요청한다, 뭐 어떤 식으로건 소식이 있어야만 하는데 아무 소식도 없던 것이다.
이는 그리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고의로 정보가 차단되었거나, 아니면 김병학이 이끈 4만의 근왕군과 평양성의 주둔병단까지 한양에 뭐라 연락을 취할 새도 없이 전멸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었다.
"비켜요. 비켜! 우리 집에는 노모께서 계신단 말이오! 조금만 길을 양보해주시오. 그러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누구는 아닌 줄 아나? 괜한 헛고생하지 말고 어서 순서나 지키시게!"
"흐흐흑, 엄마아…. 어디 계세요? 엄마아…!"
이미 도성에서는 짐을 꾸려 피난길을 나서는 민초들로 즐비했다. 싸울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은 이미 모두 징용되었거나, 누구보다 빠르게 도망친 다음이었다. 어중간한 경우는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대책을 기다리기에는 이미 조정은 신뢰를 잃은 지 오래였다.
도성을 장악한 김좌근은 애초에 민초들의 신임을 받는 인물상이 아니었다. 그런 작자가 섭정공조차 무시하고 전권을 휘두르고 있는 오늘날, 한양의 백성들은 조정의 대책을 기대하기보다는 그들 자신의 손으로 살아남는 길을 택했다.
누구 한 사람 스스로 일어나는 이들도 없었다. 스스로 무기를 들고 일어나 목숨 바쳐 싸우기에는, 김좌근의 현 조선 조정은 그럴만한 가치가 없었다.
"젠장, 우리가 지금 뭣 하러 이 고생을 하고 있나? 김가놈 그 작자를 위하여? 나는 이 나라 조선과 전하를 위하여 한양까지 먼 발길을 한 것이지 저런 개나리를 위하여 무기를 들고 일어선 기억은 없네!"
"에헤이, 이 사람이! 말조심 좀 하게. 하옥 대감의 사람들이 그 말을 들으면 어찌하려고 그러나? 그리고, 설령 이 나라 조선이 망한다면 선비는 응당 그 마지막을 함께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만 술이라도 마시고 잊으시게."
"으흐흐흐! 참으로 말세로구먼. 간신 놈을 위하여 전장에 나서서 술로 허송세월이나 보내는 처지라니, 으흐흐흐!"
삼남도와 경기도, 강원도 등에서 모여든 의병들도 사정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왕명을 내세워 계속 출진을 지지부진하게 미루기만 하는 김좌근과 현실에 진저리가 난 상황이었다. 그들이 사비를 털어가면서까지 의병을 조직하고 궐기한 것은 선비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함이었지, 이렇게 왕도 없는 텅 빈 한양에서 술로 허송세월을 보내려 한 것이 아니었다.
자연히 사기는 바닥을 쳤고, 싸움은 의병들에게 떠넘기고 사병들과 오군영으로는 후방에서 그들이 함부로 배신하지 못하도록 감시만 하고 있는 조정의 권신들에 대한 혐오는 하늘을 찔렀다. 이미 적지 않은 의병들이 한양성을 지키기를 거부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와중이었다. 이대로 청의 대군이 한양에 들이치면 청은 텅텅 빈 한양성을 넘어 단숨에 궁까지 침범할 수 있을 터였다.
"저기, 이거 괜찮은 건가? 아무리 하옥 대감이시라지만, 이번 일은 좀…."
"쉿. 입을 조심하게. 우리는 그저 언제나처럼 하옥 대감만 믿고 있으면 되는걸세. 이 일이 잘 풀리시기만 하신다면 하옥 대감께서 우리들 모두 후하게 대접해주시겠다 하시지 않으셨나? 걱정 말고 기다리고만 있게."
"글쎄,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아무리 그렇다지만 이래도 괜찮은 건가? 전하께서 평양성에 계시는데 의병들이 딴마음 품지 않도록 감시나 하고 있으라니, 이건 영락없이 역…."
"에헤이, 이 사람이 그래도!"
그렇다고 오군영과 안동 김씨 사병들은 우호적이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애당초, 김좌근과 세도가문은 그들의 주군이라기보다는 고용주에 가까웠다. 돈을 받고서 성립한 계약관계 내지 더러운 돈으로 얽히고설킨 관계였지,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주군과 봉신의 관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불안이 없을 수가 없었다. 직접적으로 이것이 무엇이라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사병들과 오군영의 병사들도 대강 지금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역모였다. 그것은 즉, 여차하면 그들은 김좌근과 함께 줄줄이 굴비로 엮여 들어가 대역죄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그들 또한 조선인인 이상, 이 사실에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직접 모셔온 하옥 대감은 아무리 생각해도 새로운 왕조를 열 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그럴만한 인품도 없었고, 인기도 없었다. 그들로서는 일단 청과의 전쟁에 집중하여 이 일에 대하여서는 생각을 미뤄두는 것이 정신건강에 있어서 최선이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가? 어째서 아무런 소식이 없느냔 말이다! 그 애송이 놈이 패했다면 하다못해 청에서부터 항복을 요구하는 사신단이라도 와야 하는 거 아닌가!"
"저, 저도 그것이 도통…."
'빌어먹을,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것이냐?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으냔 말이다!'
김좌근 또한 속이 쓰리기는 매한가지였다. 8만의 대군이 한양에 머물렀을 때는 16만에 달한다는 청의 대군도 두렵지 않던 김좌근이었으나, 이제는 사정이 달랐다. 한양성에는 이제 고작 4만의 병사들이 끝이었고, 기나긴 한양성벽을 가득 채우기에는 이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즉, 평양성에서 소년 왕이 죽게 되면 청의 대군을 격파하고 그 군공으로 왕이 된다는 그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청의 대군을 격파하는 부분이 여의치 않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이제 김좌근은 왕이 되고자 하는 욕심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에게 중요한 건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청에게 항복하면서도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뿐이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이미 조선은 전쟁에 패한 지 오래였고, 눈엣가시나 다름없던 소년 왕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소년 왕을 구원하러 간 김병학 또한 구원하러 가는 길에 청의 대군에게 대패하여 시체조차 찾을 수 없는 꼴이 당한 것이 분명했다. 딱히 물증은 없었지만, 모든 심증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이대로 강화도로 들어가야 하는가? 그래, 그편이 좋겠지. 어차피 이미 전쟁에 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저 잡것들은 시간을 끌도록 하고서, 이 몸께서는 강화도로 도망쳐 마지막까지 항전하는 거다. 청도 크게 국운이 쇠하였으니, 이 조선 땅에서 그리 오래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대로 도망치게 두기만 한다면 끝이다!'
문제가 있다면, 도대체 무슨 명분으로 도망치냐는 것이었다. 김좌근이 스스로 몇 번이고 우려먹었다시피, 그들의 사명은 한양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 한양을 버리고서 강화도로 도망친다는 것은 단순한 적전도주였다. 이하응도 일단 당장은 김좌근의 세가 강하니 수그렸지만, 아예 김좌근이 강화도로 도망치자고 하면 당장에 노발대발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하응의 동의를 얻기 어렵다는 이유로 혼자서 사병들과 함께 강화도로 도망쳐서 농성하는 것도 논외였다. 그렇게 해서 승리한다고 해봤자, 김좌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도망자 낙인뿐이다. 도망친다면 조정의 신료들과 함께 도망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지만 다 같이 공범이 되면서 그에게 쏟아질 비난의 화살도 크게 줄었다.
이하응의 동의는 얻기 어렵다. 그러나 청의 군세가 한양성 가까이 당도한 것도 분명했다. 그렇다면야 방법은 한가지뿐이었다.
"그것이 무슨 말이요! 이제 와서 한양을 버리고서 강화로 도망쳐 들어가자니! 영상, 그대 미친 거요? 한양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왕명이라고 몇 번이고 말했던 건 영상 그대가 아니었소이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김병학 그 작자가 모든 것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고작 해봤자 4만의 병졸들로 무슨 수로 16만의 대군을 상대로 한양을 방비한단 말입니까? 종묘와 사직을 위한 일입니다. 저희와 함께 갑시다, 합하."
"어림도 없는 소리! 이건 역모요! 그래, 병졸들과 함께 궁으로 들이닥쳐 겁박한다면 이 몸이 순순히 들을 것이라 생각했소? 어림도 없소이다. 옥에 가두던 억지로 끌고 가건 좋을 대로 하시오!"
"어허, 말로 해서는 이렇게도 말귀를 알아듣지를 못하신다면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여봐라, 합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해드려라."
결국, 김좌근이 택한 방법은 오군영 병졸들과 함께 궁으로 쳐들어가 섭정공 이하응을 잡아 가두고서 자신이 그를 대신해 분조를 이끄는 것이었다. 발버둥 치는 이하응을 강제로 끌어내린 김좌근은 그 즉시 조정의 신료들에게 강화로 임시로 피신할 테니 짐을 꾸리라 명했고, 신료들은 물론 같은 안동 김씨조차 그의 폭주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지만 차마 병졸들의 총칼이 무서워 이에 대적하지는 못했다.
이 소식이 궁 바깥까지 퍼지면서 도성의 민심이 최악까지 치달은 건 물론이였다. 도성은 피난길을 떠나는 민초들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의병들은 마침내 조선이 진정으로 망했구나 하고 한탄하며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 무렵이었다.
"여보게, 그거 들었는가? 글쎄, 전하께서 평양에서 북적들을 크게 물리치셨다는구먼!"
"아니, 그게 정말인가? 아니, 그게 정녕 사실이라면 어찌 그동안 소리 소문도 없었단 말인가?"
"예끼, 이 사람아. 그것도 모르나? 북적 놈들이 두 번 다시 조선 땅을 밟지 못하도록 멀리 쫓아내느라 그러신 것이지!"
돌연 도성에서 묘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평양에서 소년 왕이 이끄는 군세가 청의 군세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문이었다. 물론 근거는 없었다. 그러나, 원래 소문이라는 것은 근거가 있어서 퍼지기보다는 사람들이 그 소문을 사실이라고 믿고 싶을 때 더 빠르게 퍼지는 법이었다.
당장에 조정의 신료들이 한양을 버리고서 꼴사납게 내빼려는 와중이었다. 그런 와중 퍼지기 시작한 평양에서의 대승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삽시간에 한양 곳곳까지 퍼져나갔다. 불안에 떨던 민초들에게 평양에서의 대승은 설령 거짓 소문이라도 크나큰 위로가 되어주었기에, 민초들은 어느새 그것을 진실로써 믿기 시작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것이 정녕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괜한 기대 말고 어서 피난을 떠날 준비들이나 하시게!"
"저, 하오나 대감. 저 소문이 정녕 사실이라면, 이 일은…."
"어허, 이놈이 정녕 내 뜻을 거스르려 하느냐? 뭣들 하는 게냐? 어서 내 명에 따르지 않고서!"
물론, 김좌근은 이를 헛소문으로 일축했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을뿐더러, 그것이 사실이어서도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김좌근은 이를 묵살하고서 강화로 떠날 채비를 서둘렀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그날, 숙정문은 소란스러웠다. 한눈에 봐도 전령의 것이 아닌 먼지구름이 멀리에서부터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병졸들은 마침내 청의 대군이 왔구나 하고 각오를 다졌고, 혹은 죽을 채비를 하거나 아예 싸움을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6만에 이르는 대군을 상대로 4만이 고작에 성벽까지 끝도 없이 늘어진 한양성이 견뎌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먼지구름이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숙정문을 향하여 다가오는 한 무리의 군세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비록 그들은 오랑캐들의 깃발과 갑주는 직접 본 적이 없으나, 조선의 갑주와 깃발이라면 얼마든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하여 다가오고 있는 것은 조선의 어기였고, 그것을 내걸고서 달려오는 이들은 조선의 기사들이었다.
"어명이오! 당장 문을 열도록 하시오!"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것은 숙정문의 오군영 병졸들과 군관들도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금위대장 허계의 목소리였다. 그는 어린 소년 왕과 함께 평양으로 떠난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이에 숙정문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소문대로 소년 왕이 북적들을 토벌하고서 당당히 개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던 것이다.
"현 한양은 폐쇄되었소이다. 설령 금위영이라 할지라도 영상의 명이 아니라면 열 수 없소!"
"네 이놈! 무엄하구나. 과인이 이 나라 조선의 왕이거늘, 과인조차 영상의 명이 없다면 지나칠 수 없다는 말이더냐!"
머뭇거리며 답한 수문장의 호통은 역효과였다. 금위대장 허계의 뒤에서 유난히 자그마한 체구의 기사가 앞으로 나선 것이다. 아직 약관도 되지 않았을 법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누구인지 한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 이 오랑캐 놈들의 보총이 보이지 않더냐! 과인이 당당히 북적들과 맞서 싸워 쟁취한 전리품이니라! 과인이 북적을 물리치고 개선하겠다는데, 어딜 감히 영상의 명을 운운하며 문을 가로막느냐? 어서 문을 열지 못할까!"
혼란스러워하는 숙정문에 결정타를 가한 것은 소년이 번쩍하고 들어 올려 보인 낯선 모습의 보총이었다. 멀리에서 보아도, 그들은 한눈에 그것이 조선의 장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걸 알 수 있었다. 물론 오랑캐들의 보총이되 청나라의 보총이 아니었으며, 전리품은 맞지만, 승전을 기념하여 오랑캐들에게서 선물 받은 것이었지만 숙정문의 무관들이 거기까지 알 방도는 없었다.
무엇보다, 병졸들의 동요가 결정적이었다. 그들은 그 위풍당당한 모습에서 승전을 확신하였고, 엄숙히 소년을 호위하는 금위영 기사들의 모습에서 눈앞의 소년이 진정 그들의 왕임을 자신하게 되었다.
"문을 열어라! 전하께서 돌아오셨다! 대조선국 천세! 국왕 전하 천세!"
"어, 어어어…! 이, 이놈들이 그래도!"
"""천세! 대조선국 천세! 국왕 전하 천세!"""
김좌근과 이래저래 엮인 것이 많은 무관들이 어떻게든 병졸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이미 대세는 넘어간 이후였다. 병졸들은 무관들의 제지를 듣지도 않고서 문을 열어젖혔고, 무관들이 말릴 틈도 없이 금위영과 소년 왕은 숙정문을 통과했다. 그 뒤로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숙정문을 시작으로 온 도성에 천세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던 백성들과 의병들도, 점차 커지는 천세 소리에 결국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깨닫고서 기뻐하며 천세 열창에 동참했다. 숙정문을 통해 도성 안으로 들어온 금위영 기사들은 도성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이를 더욱 부추겼다.
소년 왕이 30여 명의 호위무사와 함께 궁에 당도했을 무렵에는, 이미 도성 전체가 왕의 개선을 눈치채고 있었다.
"무, 문을 잠가라! 마, 막아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애송이가 성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라! 어명이니라! 아니, 끄으응…!"
한편 혼란에 빠진 것은 김좌근과 세도가문들이었다. 사방팔방이 천세 소리였다. 그것만으로 그들은 무엇이 일어났는지 깨달았지만, 손도 발도 쓸 방도가 없었다. 마지막까지 도성에 남아있던 근왕군 의병들이 두려워 차마 직접적으로 왕이 되겠다고 하지도 못하고서 왕명을 내세워 모든 일을 처리하던 그들이었다.
이제 와서 진짜 왕이 나타나 궁으로 개선하고자 한다면, 이를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들의 권위는 결국 왕에게서 빌려온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역성혁명 또는 반정을 선언한다고 해도, 거기에 병졸들이 따라줄 리가 만무했다. 북적들을 물리치고서 돌아온 왕을 폐하는 법도가 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역모나 다름없는 일을 벌이고서도, 도성 내의 의병들이 두려워 끝내 스스로 역모임을 밝히지는 못했던 그들의 자업자득이었다. 도망칠 곳도 없었다. 도망치려는 순간 민초들에게 맞아 죽을 테니.
"문을 열어라. 어명이니라. 과인이 누구인지 정녕 모르겠느냐?"
"이, 이이익…! 왕을 죽여라! 순순히 죽어줄까 보냐! 모두 문을 잠가라!"
돈화문까지 당도한 소년 왕은 그제야 저항다운 저항에 부딪혔다. 숙정문의 병졸들이야 제아무리 안동 김씨라도 4만에 이르는 병졸들 전부를 매수할 수는 없던 만큼 그가 왕임을 확인하자마자 선선히 문을 열어주었지만, 궁을 지키고 있던 안동 김씨의 사병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들은 김좌근의 수족이라고 할만한 이들이었던 만큼, 왕이 입궁에 성공한다면 어떤 식으로 건 처벌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순순히 포기할 수도 없던 것이다.
"명을 재촉하는구만. 여보 게나, 어디 기왕에 장난감이라도 얻은 김에 한번 시원하게 쏴보기나 하지 않겠나?"
"그거 좋지요, 전하."
타타탕-.
하지만 그들은 금위영의 기사들이 무엇을 가지고 왔는지 알지 못했다. 구경만 17.8mm에 이르는 미니에 소총이었다. 전장식 소총이라 연사력에서는 기존의 조총보다 우수하다고 하기 어려웠지만, 918m 거리에서 10cm 소나무를 관통하는 위력의 총탄을 목제 문으로 막으려 드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었다.
말에서 내린 금위영 기사들의 일제사격 한 번 만에, 문 너머에서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던 사병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3차례에 걸친 일제사격으로 문은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버렸고, 다시 말 위에 오른 금위영 기사들은 몸으로 들이받아 문을 억지로 열어젖혔다.
그 뒤에는 모든 저항이 무의미했다. 일개 사병들이 이미 한차례 실전까지 치르고 돌아온 금위영의 정예기병들을 상대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상황을 파악하고서 몰려든 근왕군 의병들까지 달려오자, 모든 저항은 무의미해졌다.
곧 안동 김씨의 사병들은 죽거나 포로로 잡히거나 투항하였고, 개국 이래 유례가 없을 권신의 역모는 궁에서의 무력충돌을 끝으로 간단히 진압되었다.
"소, 소신의 충정을 알아주소서! 소신은 그저 전하의 엄명에 따라 한양을 지키려 한 것뿐이옵니다. 전하, 부디 자비를…!"
김좌근은 넋이 나간 듯한 초라한 몰골로 바짝 엎드려 소년 왕에게 자비를 구걸했다. 소년 왕은 말없이 집게손가락 끝으로 목젖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한눈에 눈치챈 김좌근과 그 일당은 그저 바닥에 엎드려 덜덜 떠는 수밖에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