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44화 (44/530)

< 예상치 못한 승전(1) >

"저 야만스러운 중국인들에 맞선 조선의 전쟁은 참으로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은 조선도 극동의 은자로서 지내왔으나, 이제 마침내 둥지에서 나와 세계만방의 형제들을 향하여 먼저 손을 내밀고 있으니 어찌 먼저 앞서간 자로서 이 손을 잡아 끌어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희 미합중국은 문명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생각입니다."

"실로 그 말씀대로 입니다. 중국인들은 여전히 문명인이기를 거부하며 정당한 기독교 신앙을 탄압하고 야만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조선은 먼저 세계로 나와 스스로 문명인이 되기를 자청하고 있으니, 어찌 이를 모른 체하고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주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차르를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 러시아 제국 또한 미합중국과 뜻을 함께하는 바입니다."

김병국이 며칠을 사정하는 동안 들은 체도 하지 않던 러시아의 이그나티예프 공사는 미국에서 온 로버트 공사를 만난 즉시 반색하며 이번 전쟁에서 조선을 지지할 것을 확정지었다. 조선의 요청만으로 차르의 인가도 없이 조청전쟁에서 조선의 손을 들어준다면 그것은 이그나티예프 공사 개인의 직권남용이었지만, 미국과 함께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러시아 제국은 전제제국이었다. 따라서 법이나 절차보다는 차르의 절대 권력이 우선시 되었고, 설령 직권남용을 벌이더라도 최종적으로 성과를 올려 차르의 마음에만 든다면 용서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현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미국에 호의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미국이 북아메리카에서 영국의 확장을 견제해주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그나티예프 공사는 링컨 대통령으로부터 협상 전권을 부여받은 로버트 공사가 나타난 그 즉시 차르의 명령을 듣지도 않고서 조청전쟁에서 조선의 입장을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귀국에서는 어느 정도의 지원을 예상하고 계십니까? 현 러시아 극동도독부에서는 4천 정의 소총과 32대의 야포를 제공할 의향이 있습니다. 미합중국은 어떠합니까?"

"유감스럽게도, 현 미합중국은 아직도 독립을 외치는 남부 반란군과의 전쟁으로 그만한 지원을 제공할 여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와이 근해에 제너럴 셔먼호라는 이름의 저희 미국 상선과 연락이 닿아, 그를 통하여 의료물자들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아, 과연. 조속히 그 간악한 반란군들을 쓰러트리고 평화와 번영을 되찾으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반군들의 본거지가 함락되는 것도 머지않았습니다. 곧 미합중국은 다시금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그나티예프의 애도는 진심이었다. 그의 조국 러시아 제국 또한 불과 1년 전 독립을 외치는 폴란드인들의 반란으로 내전에 준하는 유혈사태까지 번진 바 있었다. 그런 경험이 있던 러시아 제국의 귀족이자 외교관이었던 이그나티예프에게 기본적으로 독립을 외치는 족속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찢어 죽여 마땅할 불순분자들이었다. 따라서 미국에서 마찬가지로 독립을 외치는 남부 딕시에 대한 경멸의 감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로버트는 자신 있게 조만간 반군들은 격멸될 것이라 답했다. 이미 본국에서 남부 반군들의 주요 보급 거점이던 애틀랜타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로버트였다. 그는 1년 안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 확신했고, 조선과 청의 전쟁도 그 무렵 즈음에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것이라 짐작했다.

이러한 계산에 있어서는 이그나티예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차 아편전쟁이 2년이 소요되었고, 2차 아편전쟁이 4년이 소요되었다. 비록 무너질 대로 무너진 청나라라고 하지만, 문명국도 아닌 인접한 비문명국 조선과의 전쟁이라면 미국과 러시아가 모두 달려들어 조선을 지원하고 난 다음에야 간신히 길항이 맞춰질 것이고 그럼 적어도 4년 이상의 전쟁 기간이 이어질 것이라 짐작했던 것이다.

'으흐흐, 주께서 도우시는구나. 역시 하느님께서는 우리 러시아와 함께하고 계시다! 양키들이 목소리를 내준다면 그다음은 편하지. 차르께서 곧 정식 명령서를 내려주실 것이다. 그때 카자크 놈들을 이끌고서 남하한다면…!'

'본국에서 대통령 각하께서 남부 반군 놈들을 쓸어버리고 나면, 나는 루스인들과 함께 더러운 칭크 놈들을 압박하여 놈들의 항복을 받아내는 거다. 그러고 나면 우리 태평양 지부는 더 이상 대서양의 덤이 아니라 미합중국의 핵심 이권 지대로 부상하게 될 거다…!'

두 사람은 이런 계산 하에 서로 웃으며 손을 마주 잡았고, 밀약을 체결하여 조청전쟁에서 조선을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기대는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리고 말았다. 개전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청의 16만 대군이 4만의 조선군에게 격파당하고 현재 조선의 10만 대군이 만주로 북진하는 중이라는 첩보가 들어왔던 것이다. 현재 청의 주력군은 화북과 강남에 밀집되어있는 상황 인지라 텅 빈 만주로 조선의 10만 대군이 들이닥친다면, 저항 한번 못해보고 항복하게 될 공산이 컸다.

그럼 이야기가 달라졌다. 아직 조선의 승전 보고를 듣지 못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차르는 미국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충돌을 일으키기 꺼리며 개입을 주저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또다시 직권남용을 반복한다면 이그나티예프 공사라도 목이 성치는 못할 터였다.

한편 미국의 경우에는 상황이 더 급했다. 아직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까지 닿으려면 3개월은 더 필요했고, 무엇보다 아직 남부 반란군과의 전쟁은 이미 압도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고 하나 완전히 종전되려면 반년은 더 필요했다. 그리고 3개월 후건 반년 후건 그때까지 전쟁이 계속 이어지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급한 대로 지금 당장 움직여야 했다. 문제는, 마땅히 움직일 수단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듣자 하니 이미 프랑스에서 조선과 접촉을 끝마쳤다고 합니다. 선수를 빼앗겼으니, 서둘러야 하지 않을는지요."

"서둘러야 한다는 말씀은 공감합니다만, 이제 뭘 어떻게 하면 좋단 말입니까? 대통령께서도 제가 이 이상 깊이 간섭하는 것은 허락해주지 않으실 겁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빌어먹을, 이 도움도 안 되는 양키 놈 같으니라고! 나라고 그걸 어떻게 알겠느냐? 차르께서도 이 이상 깊이 관여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실 거란 말이다. 일개 공사 나부랭이인 내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진하기라도 하라는 말이더냐?'

'역시 저 불곰 놈들과 함께 일을 꾸미는 게 아니었다. 무식하고 야만스러운 아시아 놈들 같으니라고! 이럴 때는 눈 딱 감고 친히 병사들을 이끌고 남하하겠다 나서주면 안 되는 거냐?'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보았으나, 이렇다 할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미 그들의 권한 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쓴 다음이었다. 이 이상 대담한 움직임을 위하여서는 그들보다 높은 지위와 권한을 가지고서 대담하게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런 인물들이 그리 쉽게 나올 리도 없었던 만큼, 두 사람은 그저 발을 동동 구르는 수밖에는 없었다.

"제국을 위한 일은 곧 차르를 위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찌 이 한목숨 아낄 수 있겠는가? 마침 몸이 근질거리던 참이다. 오늘만큼은 러시아 제국의 국무위원으로서가 아닌 제국의 국경을 지키는 제국의 귀족으로서 참전하고자 하노라! 가자, 만주로! 가자, 조선으로!"

이런 총체적 난국에서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은 전 동시베리아 총독이자, 지금은 국무위원으로서 활동 중이던 니콜라이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백작이었다. 비록 동시베리아 총독직에서는 물러났으나 그의 영지는 아무르 강 일대였고, 이는 청나라와 러시아의 국경선에 해당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비록 총독직에 물러났다고 하나 자신들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해준 아무르스키 백작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던 1만 2천의 코사크 군단이 있었다. 극동 도독부에서 곤란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그 즉시 아무르 코사크인들에게 소집령을 내리는 한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도독부에 참전 의사를 밝혔다.

이에 이그나티예프 공사가 반색한 것은 물론이였다.

"이제 살았다! 무라비요프 백작께서 몸소 움직여주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도다! 국경에서의 소동을 명분 삼아 백작께서 친히 코사크인들을 이끌고 조선인들을 도우러 간다면 프랑스인들도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만일 이 일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차르는 이번 일의 책임을 거부할 것이고, 그와 무라비요프 백작은 차르의 명령을 어기고 괜한 소동을 일으킨 죄를 물어 재판에 회부될 터였다.

그러나 성공한다면 그만이 아니던가? 그리고 코사크 1만 2천 대군과 함께라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자신감이 붙은 이그나티예프 공사는 거칠 것 없이 일을 몰아붙였다.

"부탁드립니다. 지금 당장 아무르 강으로 가 백작 각하와 합류해주십시오. 조선과 러시아 양국 모두를 위한 일입니다. 기필코 늦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어서 서둘러주십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 길로 이그나티예프 공사는 김병국을 시켜 아무르강에서 남하할 무라비요프 백작의 군세와 합류하도록 부탁했다. 말이 부탁이지,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김병국은 자신을 제 하인쯤 되는 줄 아는 색목인의 오만에 불쾌함을 느꼈지만, 이 또한 그의 가문과 조선을 위함이라고 억지로 납득하고서 그의 부탁에 따라 발 빠른 말을 빌려 아무르강으로 향했다.

러시아인들이 남하한다는 소식은 로버트 공사와 그와 함께 있던 박규수에게도 전해졌다. 그러자 다급해진 것은 로버트 공사였다. 러시아인들의 돌발행동으로 조청전쟁에서 프랑스는 물론이도 러시아에마저 밀려 최 말석으로 밀릴지도 모르게 된 것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박씨는 이대로 조선으로 돌아가 전하께 저희 미합중국의 의사를 전해주십시오. 저는 내키지 않지만, 이 길로 영국인들의 손을 빌리려 합니다. 러시아인들이 남하하려 한다면 그들도 움직이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하께는 제가 잘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하인이나 다를 바 없이 부리던 것은 매한가지였으나, 로버트 공사의 태도는 이그나티예프 공사에 비하면 한결 유순했다. 이는 당장 병사들을 이끌고서 남하할 수 있게 된 러시아와는 달리 아직 내전으로 쉽게 움직일 수 없었던 미국의 상황에 근거했다. 눈 찢어진 노란 원숭이들이라고 얕보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직접적으로 움직일 힘의 유무가 차이를 만든 것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던 박규수는 로버트 공사의 부탁을 선선히 받아들였고, 그 길로 미국인들이 빌려준 증기선을 타고서 조선으로 향했다. 이미 그를 제외한 조선통신사 일행은 슬슬 일본에서 조선으로 귀국한 다음일 터였다.

한양에서 왕이 기다리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박규수 개인일 것이 분명했던 만큼, 박규수는 서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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