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상치 못한 승전(3) >
청의 선제침공으로 조선과 청이 전쟁에 돌입했을 무렵, 서구열강 중 조선의 승리를 점치는 나라들은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근본적인 체격 면에서 우위에 있던 청의 우세를 예상했다. 그편이 상식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탓에 미국과 러시아는 일찌감치 장기전을 예상하고 조선에 물자를 지원할 준비를 갖추었었고, 프랑스 극동 식민총독부의 경우 본국에 일찌감치 참전을 제의하였다가 거절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끝났다. 개전한 지 1달 만에 대승을 거두고서 승기를 잡은 조선이 3개월 만에 청나라를 협상장으로 끌어낸 것이다. 이는 그 어떤 나라들도 짐작하지 못한 대이변이었다.
그렇다, 짐작하지 못했다.
즉, 다시 말해서 봉천에 모인 공사들 중 일찍이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프랑스를 제외하면 누구 한 사람 본국으로부터의 정식 훈령은커녕 제대로 된 외교전략을 갖추고서 참가한 열강들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러시아 제국은 청의 야만스럽기 그지없는 이번 침략전쟁을 강력히 규탄하는 바요! 우리 러시아 제국은 조선 왕국의 자주독립을 강력히 지지하는 바이며,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1만의 코사크 병단을 만주에 주둔시킬 용의가 있소이다!"
러시아는 무턱대고 진군시킨 병사들을 물리지 않으려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뜻이 아니었다. 전 동 시베리아 총독이자 여전히 동 시베리아의 세력자로서 군림하고 있던 무라비요프 백작의 목소리였다. 그건 그가 지난 반평생을 거쳐 육성해온 동 시베리아와 극동도독부에 대한 애착의 발로이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차르의 명령마저 무시하고서 함부로 군사를 일으킨 이상 그 또한 차르의 추궁을 피하려면 실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무라비요프 백작은 무턱대고 만주를 계속하여 점령하겠다며 죽어라 버텼다. 이렇게 일단 막 질러서 상대를 곤욕스럽게 만들어 먼저 수그리게 한 다음 그보다는 못하더라도 그럭저럭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어내는 것이 러시아식 외교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러시아가 유럽에서 고립을 면치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우리 대영제국은 러시아의 침략행위를 강력히 규탄하는 바요! 귀국은 지금 입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지지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귀국의 남하는 극동에서의 긴장을 끌어올릴 뿐이며 귀국의 팽창주의는 조선과 청 양국의 자주독립을 심각히 침해하고 있소. 대영제국은 러시아 제국이 지금 당장 군사를 물릴 것을 요구하는 바요!"
영국은 그런 러시아에 맞서 일단 무턱대고 반대하고 봤다. 사실, 그들이 이번 전쟁에 개입할만한 명분은 없었다. 청과 영국은 불과 5년 전에 전쟁을 치른 사이였고, 조선과 영국은 아직 외교 관계조차 수립하지 않은 생판 남이었다. 조선의 편을 들어 청을 압박하기에도 모호했고, 청의 편을 들어 조선을 압박하기에도 모호했다. 무엇보다, 현재 빅토리아 여왕의 칩거로 뇌사상태에 빠진 영국이었다. 자연히 이번 협상장에 참가한 것도 미국의 초청으로 토마스 공사 개인 자격으로 참가한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명분이 없다고 해서 러시아가 낀 판에 끼지 않는다면 그건 영국이 아니었다. 영국은 언제나 명분이 없다면 없는 대로 끼어들어서 러시아를 훼방 놓고 봤고, 설령 본국의 훈령이 없더라도 러시아에서 일을 꾸미면 거기에 훼방을 놓는 정도는 영국의 외교관들 사이에서 직권남용이라고 불릴만한 건수도 못되었다.
비록 이번 전쟁을 통해 영국이 뭔가 이권을 얻는 것은 뇌사상태에 빠진 본국의 사정으로 불가능했지만, 러시아가 이번 전쟁을 통해 이권을 얻어가는 걸 훼방 놓는 정도는 토마스 공사 개인 선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 프랑스 제국은 조선과 청 양국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 프랑스 제국은 이를 위하여 여순항의 조차와 저희 프랑스 극동함대 및 해군육전대 병력의 상시 주둔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저희 프랑스 제국은 극동의 세력 균형자로서 조선과 청 양국이 평화를 되찾을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한편 파리의 황제에게서 정식으로 훈령까지 받아낸 프랑스의 벨로네 공사는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프랑스는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나라들 중 유일하게 조선과 청 양국 모두와 수교하고 있는 나라였고, 따라서 양국의 평화를 중재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명분이 섰다.
거기에 프랑스는 조선에게 먼저 청과의 화친을 중재할 것을 요청받고 조선에게 150정의 중고 소총을 선물하는 등 무턱대고 폭주한 러시아와 아무것도 안 한 영국에 비하면 여러모로 제대로 된 전쟁 관련국이었다. 자연히 명분에서 앞섰고, 프랑스 제국이 앞선 두 나라에 크게 밀릴 이유도 없던 만큼 협상에서도 우세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여타 열강들도 프랑스가 일찌감치 여순항을 조차 받아 황해를 장악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어도 딱히 이를 저지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봉천에서 협상권을 가질 수 있는 건 전쟁 당사국인 조선과 청, 그리고 조선에게 화친을 중재해 달라 먼저 요청받은 프랑스 3개국뿐이었기 때문이다.
"저희 미합중국은 저희 유럽의 문명국들이 먼저 개항을 요구하기 전 스스로 문호를 열고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참여할 것을 결의한 귀국 조선의 용기와 명예를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또한, 오랜 박해를 마무리 짓고 신앙의 자유를 공인해주신 조선의 국왕 전하께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미합중국은 조선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의무와 권리를 익히고 이를 성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은 처음부터 꼽사리에 가까웠다. 링컨 대통령이 로버트 공사에게 내린 훈령은 어디까지나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라는 것이었고, 그 훈령을 확대 해석하여 조청전쟁에서 조선을 지원하기로 결의한 것은 로버트 공사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로버트 공사의 지원은 불발로 돌아갔다. 예상한 것보다 조선이 너무나도 이르게 청을 상대로 승전을 거둔 탓이다.
그렇다면 로버트 공사는 초심으로 돌아가서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라는 링컨 대통령의 훈령대로 행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프랑스가 저렇게 전면에 나선 이상 2, 3류 열강 취급을 받던 미국이 제대로 된 이권을 받아 챙기기는 불가능했다.
그러니 로버트 공사는 영국을 불러 러시아도 아무런 이권도 챙겨갈 수 없도록 발목을 잡고 늘어져 극동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우선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데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었다.
"…."
"…."
판세가 이렇게 되자 정작 전쟁 당사국인 조선과 청 양국의 의사는 이미 뒷전으로 밀렸다. 봉천에서 조선 측 대표로서 협상을 맡게 된 김병국 김병학 형제는 색목인들의 기에 눌려 한마디도 못 하고 있었다. 이는 청 측 대표였던 공친왕 또한 다르지 않았다. 정작 전쟁을 한 것은 조선과 청인데, 본국의 훈령조차 없이 폭주하는 색목인들 탓에 아무 말도 못 하고 관전만 하고 있는 꼴이었다.
김병국 김병학 형제로서는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노서아야 그동안 연해주에서 자주 보았으니 그렇다 쳐도, 저 영길리라는 자들은 뭔데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협상장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으며 미리견이라는 자들은 또 뭐길래 협상에는 관심도 없이 계속해서 조선에게 추파를 던져대고 있고 소년 왕이 불러온 불란서는 불란서대로 이쪽에는 시선 한번 안주고 저들 멋대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왜 청나라는 색목인들이 나서는 것을 막지 않는가? 세계의 중심을 자처하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어째서 이런 수모를 당하고서도 참고만 있단 말인가?
'세상이 우리 조선도 모르는 틈에 너무나도 많이 바뀌었소, 형님.'
'그래, 그런 것 같다. 아무래도, 이미 세상천지는 오랑캐들의 것인 모양이야. 저 자존심 강하던 되놈들이 색목인들 틈바구니에서 말 한마디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그제야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김병국, 김병학 형제였다. 서역의 오랑캐들은 부정할 여지 없이 청을 웃돌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다시 말하여 조선 또한 가뿐하게 웃돌고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형제는 등골이 절로 오싹해지는 공포를 맛보았다. 만일 조선이 여전히 바깥세상의 일을 모른 체하고서 무턱대고 나라의 문호를 틀어막고 보았다면, 저 청나라마저 숨을 죽이게 만든 오랑캐들의 군홧발 아래에 짓밟혔을 것이라는 생각에 절로 침이 넘어갔다.
'빌어먹을, 이 색목인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 설마, 조선에서 끌어들인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보나 마나 우리 다이칭구룬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서는 또다시 그 틈을 노려 재화를 챙기려는 것이겠지. 정말이지 약아빠진 오랑캐 놈들 같으니라고…!'
한편 청은 청대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당초에 프랑스 공사가 조선군과 함께 나타났다는 것만 듣고서 일단 프랑스, 그리고 느닷없이 남하한 러시아 양국만 신경 쓰면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하고서 협상에 돌입한 청나라였다. 그러나 막상 협상이 시작되고 나니 그것은 부질없는 망상에 불과했다.
영국, 러시아, 미국, 프랑스 4개국이었다. 글자 그대로 지금까지 청이 접한 서구 열강들 전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절로 현기증이 나는 듯했다.
이러면 당초에 그의 딸아이를 주고서 조선에게 군사를 끌어와 반정을 일으킨다는 계획도 물 건너갔다. 조선과 프랑스 3개국과의 협상이었다면 그것도 그럭저럭 현실성이 있었겠지만, 영국, 러시아, 미국까지 낀 열강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밀약을 꾸몄다가는 당장에 열강연합군이 결성되어 이번에야말로 청나라는 멸망할 터였다.
그건 당연하게도 공친왕 혁흔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어흠, 어흠!"
"자, 그럼 이만 모두 정숙을 지키도록 합시다. 아직 오늘의 주인공들 차례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저희들의 남은 이야기는 주인공들의 주 무대가 마무리 지어진 다음에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비로소 협상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은 역관 자격으로 협상에 동참한 베르뇌 주교가 헛기침하며 분위기를 환기한 덕분이었다. 직후 벨로네 공사 또한 가볍게 손뼉을 두 번 쳤고, 이는 이번 협상을 주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프랑스 제국이라는 무언의 압력이기도 했다.
비록 폴란드의 봉기 이후로 사이가 틀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적국이라고 할만한 나라는 아닌 프랑스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던 러시아 대표단이 가장 먼저 침묵하였고, 러시아 대표단의 침묵을 확인한 영국 대표단 또한 입을 다물었다. 미국 대표단은 애초에 꼽사리를 낀 격이었으니 군말 없이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