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48화 (48/530)

< 예상치 못한 승전(5) >

"우선 한가지 여쭙겠습니다. 전하, 만일 지금의 조선이 심요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면 그것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 여기십니까?"

"지켜낼 수야 있을 것이오. 다만, 그 경우 불란서의 황제라는 자에게 의지할 필요가 생길 뿐. 저 노서아 북적들과 맞서 심요 지역을 지키려면 우선 적어도 20만 대군은 상시유지해야 할 터인데, 그만한 여유는 조선에게 없소. 그럼 결국 불란서의 황제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실례지만 전하, 그 20만이라는 숫자는 어디에서 나왔는지 여쭐 수 있겠습니까?"

"청의 20만 대군이 서역 오랑캐들의 보졸 2만 명을 당해내지 못했소. 우리 조선이 청보다는 사정이 낫다고는 한다면, 그래도 적어도 20만 명은 상시 주둔하고 있어야 최소한 싸움다운 싸움은 할 수 있지 않겠소?"

이형의 심드렁한 대답에 조정의 신진 관료들은 그제야 현실감각이 돌아온 듯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20만의 상비군. 그건 제아무리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젊은이들이라고 해도 가벼이 웃어넘길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지금의 조선이 의병들과 속오군, 오군영 총동원하여 간신히 만들어낸 숫자가 13만 대군이었다. 이 중 실질적으로 조선 조정에서 급료를 지급하여 유지하고 있는 건 오군영 1만 명 정도로, 속오군과 의병들은 조선 조정에서 따로 급료를 지급하여 유지할 의무가 없었다.

그러나 상비군 20만 명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현재 급료를 지불하여 유지하고 있는 오군영 1만 명을 20배로 늘리는 수준인 것이다. 감당이 될 리가 없었다. 그쯤 되면 조선이 오군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군영이 조선을 가지는 격이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바로 그러합니다."

"흐음, 역시나 영토할양은 무리라는 것이로구려."

이하응은 그제야 회심의 미소를 떠올려 보였다. 이형 또한 별다른 저항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청이 그들의 정신적 고향인 심요 일대를 할양할 리는 없었다. 심왕 작위도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까 임시로 떠맡기는 것에 가까울 테고, 나중에 청이 다시 힘을 되찾는다면 그 즉시 심왕 작위부터 회수하려고 달려들 터였다.

그럼 결국 챙길 수 있는 건 청의 공주와 그에 딸려오는 심왕 작위, 그리고 결혼 지참금이라는 이름의 전쟁배상금 정도가 고작. 물론 그 또한 적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번 전쟁에서 조선이 대외적으로 주창한 건 심요 지역의 탈환이었던 만큼 허무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심요 지역에 이미 적지 않은 저희 조선의 백성들이 거주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옵니다.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만이라도 우리 조선의 관료들이 조율할 수 있도록 요구하시는 건 어떠실는지요."

"안 그래도 과인 또한 그럴 작정이었소. 한데, 배상금은 어찌하는 것이 좋겠소? 정말로 은 1000만 냥을 요구한다고 한들 청에서 들은 척이나 하겠소?"

"혼사에 재물을 논함은 오랑캐의 도리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오랑캐들이 아닙니까? 오랑캐와의 혼인에 오랑캐의 도리를 따르는 것이 무엇이 나쁘단 말입니까. 사정이 허용하는 대로 챙겨달라 합시다. 그들도 켕기는 게 있는 만큼, 1000만 냥보다 적게 지불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거 참 지독한 양반일세….'

이형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부마국에게 사정이 허용하는 대로 결혼 지참금을 지불하라는 말을 듣고서 가만히 있을 중화제국은 없다. 정말로 사정이 허용하는 만큼만 지참금을 지불한다면 그건 곧 그들의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방증이 되기 때문이다. 그건 곧 천명이 이미 떠났다는 의미였으니, 언제나 황제가 되기를 꿈꾸는 중원의 황제 병자들에게 어서 북경으로 달려가라는 신호였다.

조선이 되려 동정을 베푸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면, 청은 필시 1000만 냥의 지참금 그 이상을 지불해야만 했다. 우리는 거기까지 요구하고 싶지 않았지만 불란서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하는 서론이 덧붙여져 있다면 더욱 좋았다. 그 비대한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언제나 폼생폼사를 유지해야 하는 북경의 천자였다.

조선에게 동정받아서 배상금 일부를 탕감받았다는 오명까지 뒤집어쓰면 당장에 청이 공중분해 될 터였다.

"그런데, 청에게 은 1000만 냥을 지불할 능력이 있는 것은 맞소? 듣자 하니 강남이고 몽고고 만주고 소란스럽지 않은 곳이 없다고 들었소만. 정말로 1000만 냥을 지불할 능력이 있는 거요?"

"지불할 수 없다면 그때야말로 영토로 지불받으면 그만이겠지요. 그러나, 그럴 일은 적을 겁니다. 저들도 명색이 상국인 이상 영토를 내놓을지언정 흥정을 하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심요를 지키는 대신 은화 1000만 냥이라면 값싸지요."

"흐음, 그 말대로라면 다행이오만."

'그러나 은화 1000만 냥이라….'

이형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건륭통보가 평균적으로 4.5g 정도였으니, 은화 1000만 냥이면 화폐로서의 가치를 제하고 은만 따져도 45톤가량이었다. 과연 저만한 양의 은을 조선 국내의 수요가 감당할 수는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국내에 푸는 건 논외구만. 저만한 양의 은을 한 번에 시중에 풀었다가는 그 즉시 하이퍼 인플레이션이다. 하루아침에 은값이 똥값이 될 거야. 그렇다고 국고에 쟁여두면 적어도 저 절반은 순식간에 철밥통들이 슬쩍할 거란 말이지.'

은화 1000만 냥이 있다면 당장에 조선 전 국토에 포장도로를 깔고 인천 원산 목포 부산 남포 등 주요 항구 전부를 근대화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 경우 시장에 당장 갑작스럽게 은화 1천만 냥이 풀려나면서 화폐가치가 바닥을 칠 걱정부터 해야 했다. 조선 국내의 수요도 생각하지 않고서 무턱대고 정부에서 돈만 풀어봤자 그 끝은 경제의 파멸이었다.

그러니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시장에서 갑작스럽게 불어난 화폐유통량에 적응할 수 있도록 적당히 완급조절을 해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건 애초에 조선 국내의 수요로는 감당할 수 없단 말이지. 그냥 이 돈으로 프랑스에게 무기랑 이것저것 사들이는 편이 낫겠구만.'

1867년 조선 중앙정부의 세수가 쌀가마니 9만 톤가량이었다. 은화 1000만 냥이면 조선의 1년 치 세수의 수십 배에 해당했다. 단기간에 조선의 경제 규모가 수십 배로 팽창하지 않는 한 조선 국내시장이 은화 1000만 냥을 감당할만한 수요와 탄성을 갖추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결국, 이형은 그 돈으로 차라리 프랑스에게 이것저것을 사들이는 방향으로 마음을 정했다. 어차피 프랑스에서 바라는 것도 이런 식으로 프랑스가 간접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보는 것일 터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조선에서 1000만 냥을 통째로 써서 이것저것을 구매하려 들 거라는 생각은 못 했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그걸 싫어할 까닭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미리견은 어떠했는가? 그들 또한 우리 조선을 위하여 무언가 약조한 바는 없던가?"

"그들은 아직 내란으로 국내가 소란스러운지라, 직접 무언가 약조한 바는 없었습니다. 다만, 저희 조선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내디딜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 약조하였습니다."

"흐음."

미국의 로버트 공사를 만나고 돌아온 박규수의 대답이었다. 이형으로서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대답이기도 했다.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 구두로 약조해봤자, 강제력이 없으면 믿을 수 없었다.

'보면 아주 관심이 없는 건 아닌 것 같기는 한데, 힘이 달리는 모양이군. 지금이 남북전쟁기였던가? 하기야 미국은 적어도 10년은 더 기다려봐야 힘을 좀 쓰겠지.'

"그래, 그럼 왜국은 어떠했는가? 대군으로부터 뭔가 약조는 있었는가?"

"가까운 시일 내에 왜국에서도 국왕사를 파견하여 화답할 것이라 약조하셨습니다. 또한, 이번 기회에 왜관을 확장하여 조선과 왜 양국의 교역을 크게 늘리는 것은 어떨지 전하의 뜻을 여쭈어보라고 하셨습니다."

"흐음, 과연."

박규수가 건넨 정이대장군의 서신에는 그와 함께 왜국의 일은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괜히 간섭하지 말아 달라는 추신도 덧붙여져 있었다. 다만 박규수가 그것을 아는 것 같기는 않았기에, 이형은 따로 그 부분에 대하여 지적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건 정이대장군이 그에게 개인적으로 보내는 서신일 터였다. 머지않아 일본에서 화답할 것이라는 일본국왕사 또한 이것의 연장선일 가능성이 컸다.

속내가 어떻건 간에, 일단 정이대장군은 지금 당장 조선과 마찰을 빚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 듯했다.

'일본과의 협력이라.'

그 또한 고려해 봄 직하다고 이형은 생각했다. 물론, 정한론이 앞설 메이지 신정부와는 힘들 터였다. 초슈와 사츠마가 구심점이 될 메이지 신정부가 느끼는 조선과의 거리와 에도의 도쿠가와가 구심점이 될 막부가 느끼는 조선과의 거리는 달랐다.

초슈와 사츠마에게 조선은 일본이 강성해진다면 가장 먼저 정벌해야 할 먹잇감이었고 반대로 조선이 강성해진다면 가장 먼저 일본을 침략할 가상 적국이었다. 반대로 관동 끝자락의 에도 막부에게 조선은 요주의 대상이라고 하기에도 다소 어려운 감이 있었다. 상호 간의 거리가 방벽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청과 적대한 이상 일본까지 적대하게 된다면 그때는 양면전선이다. 어차피 청과 사이가 틀어진 이상 일본과는 화친하는 수밖에.'

이형은 다소 떨떠름하게 막부와의 화친을 받아들였다. 이 시대의 일본과 화친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양면전선은 곤란했다. 적대할 수 없다면, 화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아마도 청은 화친을 받아들일 거다. 돈으로 현 상황을 무마할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거니까. 에도 막부도 굳이 조선과의 우호 관계를 깰 이유가 없는 이상 함부로 뒤통수를 후려치지도 않을 테지. 따라서, 지금 문제는….'

이미 1만의 기병들을 이끌고 만주까지 내려온 러시아와 그 러시아의 확장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가 없는 영국.

두 나라는 필연적으로 이번 전쟁을 계기로 어떤 식으로 건 조선에 개입하게 될 터였고, 조만간 보불전쟁으로 크게 휘청이게 될 프랑스는 러시아와 영국으로부터 조선을 지켜줄 만한 힘이 없었다.

'영국이냐, 러시아냐.'

조선의 생존을 원한다면 러시아가 옳았다. 그러나, 러시아와 손을 잡게 된다면 조선은 러시아의 위성국 신세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조선의 부국강병을 원한다면 영국이 옳았다. 그러나, 영국과 손을 잡게 된다면 바다가 방벽이 되어주었던 일본제국과 달리 조선은 근대화 초기부터 러시아와 정면충돌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쉬운 길은 없던 셈이다.

'제기랄, 산 넘어 산이군. 일단 전쟁부터 끝내고 고민해야 하나?'

"붓과 먹을 가져오라."

이형은 깊이 한숨을 내쉬고서, 궁인을 시켜 붓과 먹을 가져오도록 하여 봉천의 김병학, 김병국 형제에게 친서를 써 보냈다. 이하응이 말했던 그대로, 영토 대신 간도의 조선인 마을들에 대한 통치권과 결혼 지참금만 받아오라는 내용의 지시였다.

봉천의 청 대표단은 이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북경의 청 조정은 1000만 냥은 너무 많다며 포로 송환을 위한 200만 냥의 지불을 거부하고 결혼 지참금 600만 냥만 지불하겠다고 선언하였다.

"…."

"…허."

이하응은 할 말을 잃었고, 이형은 헛웃음을 흘렸다.

명색이 상국이라는 작자들이 번국을 상대로 공주를 시집 보내며 결혼 지참금을 흥정하다니.

아니, 그것보다도.

'…만주 황실이 한족도 아니고 만주족 포로 2만 명을 버리겠다고?'

그것은 이형에게 있어서도 기이한 경험이었다.

제 일조차 아닌 일에 치를 떨게 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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