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공사 토마스 >
「삼가 아뢰옵니다. 경전에 이르기를 사람의 신체와 털과 살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감히 손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조선이 공맹의 도를 받들어 주명의 천명을 이은 증거로써, 조선이 오랑캐의 나라가 아닌 중화의 문명국인 까닭입니다.
하온데 오늘날 서역의 오랑캐들이 이를 훼손하려 하고 있으니, 마땅히 이를 물리고 주명의 천명의 이어받은 중화의 문명국으로서 당당히….」
"듣기 싫다. 치워라."
"하오나 전하…!"
"내 듣기 싫다 하였을 텐데? 더는 이 일에 대하여 논하지 말라. 과인의 뜻은 굳건하도다. 다시금 이 일을 논하고자 한다면 그때는 과인도 가만히 듣고만 있지는 않으리라."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형이 스스로 상투를 쳐내고 난 후 한양으로는 반대 상소들이 쏟아졌다. 하나같이 주명의 천명을 이어받은 조선이 오랑캐들의 풍습에 따를 수는 없다는 항변이었다. 그나마 한양까지 직접 상경하여 시위를 벌이는 유생들이 없던 건 김좌근과 안동 김씨 일가가 실각한 이래로 아직 한양의 경계가 흉흉한 까닭이었다.
이형 또한 그걸 짐작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굳이 단발령을 따로 내리는 대신 자신이 직접 상투를 자른 후 서역의 옷을 입은 것이기도 했다. 백 마디 말보다 직접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 빠를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걸로 프랑스에서도 내 의지를 눈치챘겠지.'
왕이 몸소 나서서 이국에서 온 군사고문단을 감싸준 것이다. 루이 베르그송 대령은 이 일에 크게 감명을 받은 듯 일국의 왕이 병사의 옷을 입을 수는 없다며 그 자리에서 자신의 옷을 벗어 이형에게 건네주고서는, 따로 청의 프랑스 공사관과 연락을 취하여 프랑스군 대원수복 한벌을 공수해 이형에게 가져다 바쳤다.
지금 이형이 입고 있는 것 또한 곤룡포가 아닌 프랑스에서 선물한 프랑스 육군 대원수의 제복이었다. 비록 프랑스 본국의 공장에서 만든 된 것이 아니라 상하이의 조계지에서 급히 만들어진 것이라 다소 엉성한 완성도였지만, 아직 자그마한 이형의 체구에 맞춘 덕분에 행동하는데 불편함이 있지는 않았다.
이렇게 이형이 더는 듣지 않겠다고 딱 잘라 거부하자, 유생들도 더는 이형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못했다. 아무튼 결국 머리를 자르고 호복을 입게 되는 것은 시위대와 이형뿐이었고, 그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 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복적들과의 사대교린을 마무리 짓고 김좌근 일당을 쓸어낸 왕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기에는 그들도 담력이 부족했다. 왕의 주변 측근들을 간신이라 비판할 수는 있어도 왕 그 자신이 몸소 나서 상투를 자르고 호복을 입는데 거기에 함부로 뭐라 왈과왈부 하는 건 곧 왕권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묘한 불안감이 조금씩 조선 8도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소년 왕과 섭정 공이 개혁을 밀어붙이는 목적이 단순히 세도정치의 청산만이 아니라 오랑캐들의 문물을 도입하는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간 것이다.
"사실이지. 그러니 부정할 까닭도 없소.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시위대장."
"전하…."
탕-.
태연하기 그지없는 소년 왕 이형의 모습에, 금위대장-이제는 시위대장 허계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단정히 자르고 대원수복을 차려입은 소년 왕 이형과 다를 바 없이, 그 또한 준장으로서의 제복을 차려입고서 머리를 단정히 자르고 있었다. 다만 이런 서양식 의복에 익숙한 이형과 다르게 아직 이 낯선 제복이 어색하기만 한 듯, 허계의 모습은 자연스럽지 않고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요근래 들어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당을 찾아 권총 사격에 열심인 소년 왕이었다. 틈틈이 단련한 마술 또한 크게 늘어, 이제는 달리는 말 위에서 표적 판을 맞추는 정도는 가뿐히 해내고 있었다. 오늘 또한 그러했다. 허계의 잔소리로 술을 마실 수는 없으니 반대급부로서 몸을 쓰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다.
물론, 여차하면 누군가의 미간에 바람구멍을 내놓기 위함이라는 것 또한 부정 할 수는 없었다.
"하다못해 소신에게 한마디 말씀이라도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전하의 옥체를 언제나 생각하여야 하는 입장에서, 전하께서 저희 금위영 병졸들이 보는 앞에서 날붙이를 손에 대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건 미안하게 되었소. 뭐, 하지만 그대도 내 성미는 잘 알지 않소. 일이 생각나면 일단 지르고 봐야 직성이 풀리다 보니, 이번에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 되는대로 일을 벌이게 되었소. 미안하게 됐소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전혀 반성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허계는 머리가 지끈거려오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모시기 어려운 소년 왕이었다. 안 그래도 그도 예순이 가까워 늦어도 올해나 내년까지는 이만 시위대장 자리에서도 물러나야 할 텐데, 이래서야 그를 대신하여 후임을 맡게 될 새로운 시위대장이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무리하는 한이 있더라도 앞으로 한 5년여간은 곁에서 보위해 드려야…아니, 그조차도 부족할지도 모르겠군.'
허계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소년 왕을 모시고 난 이후로 줄곧 한숨만 늘고 있는 허계였다. 이래서야 울화병을 얻어서 제명에 죽지 못하는 건 아닐지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포자기하고 있다는 점이 허계의 서글픈 점이었다.
결국 충신의 비애였던 셈이다.
"훈련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소? 이제 슬슬 1달여 즈음 되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만."
"차라리 그동안 배워온 것을 모두 잊고서 초심으로 돌아가 걸음마부터 배운다 생각하니 진전이 있었습니다. 불란서인들도 의욕이 붙었다 보니, 배우는 입장에서도 한결 수월합니다. 불란서인들의 병장기는 실로 강력합니다. 만일 지난 전쟁에서 먼저 이를 도입할 수 있었다면 희생을 보다 줄일 수 있었을 터인데,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허계의 호언장담은 허세가 아니었다. 앞서 실전을 경험한 조선군이었다. 십 수만의 병졸들 틈으로 말을 달려본 금위영 기사들과 의병해산 이후 자발적으로 군문에 남은 이들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전 금위영-현 시위대는 다른 건 몰라도 실전경험만큼은 확실하게 축적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프랑스 군사고문단에서도 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한결 수월했다. 전장에서 직접 무기를 들고 적을 죽여본 이들과 그렇지 않은 병사들은 훈련에 임하는 자세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어차피 이 시대의 유럽의 군대는 근대적인 참모본부를 만들어낸 프로이센 정도를 제외하면 각 지휘관과 하사관들의 경험에 근거한 보병 전술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던 만큼, 실전경험이 풍부한 병졸들은 그 자체만으로 우수한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프랑스 군사고문단에서도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프랑스식 훈련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모두 실전경험을 쌓으면서 전력이 크게 일신된 덕분이었다.
"뭐, 어차피 언젠가는 그들에게서 배운 것을 토대로 우리 조선만의 방식을 만들어야 할 것이오. 그러나, 그 전에 우선 기본은 익혀두어야 그것을 기반으로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개발할 수 있지 않겠소? 우선은 그들에게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배워두도록 하시오. 글로서 남겨 후일 책으로 엮어낼 수 있다면 더욱 좋겠구려."
"하명하신대로 하겠습니다, 전하. 결코 실망하게 해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형은 그렇게 프랑스 군사고문단에서 배운 모든 것들을 책으로 엮어 전군에 보급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프랑스군도 머지않아 보불전쟁에서 패하고 경험 위주의 보병 전술에서 벗어나 프로이센식 이성과 합리에 근거한 참모체제를 도입하는 이상, 이는 필요한 조치였다. 결국 근대적 참모체제의 근간은 체계적인 교육체계와 합리적인 보급안에 집중된 만큼 더욱 그러했다.
이는 허계에게 있어서도 그리 이상한 점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사소한 일이라도 뭐든지 기록하고 보는 것이 습관화된 조선이었다. 군사고문단이 도착한 이래로 훈련을 받으면서 겪게 된 크고 작은 사건들이나 교훈들이라면 이미 그를 비롯하여 활자를 아는 무관들이 각자 알아서 기록해두고 있었다.
이형의 지시는 결국 각 무관이 독자적으로 기록한 사항들은 한 데 엮어 정리하는 정도의 수고에 불과했다.
"그러고 보니 군기시로부터 서역의 소총을 복제한 물건의 초도 생산품이 나왔다고 들었소만."
"그러하옵니다, 전하. 사용해 보시겠습니까?"
"사용하게 해준다면야 과인으로서는 거절할 까닭이 없지. 어디-."
타앙-.
말 위에서 내려온 이형은 허계를 따라온 군기시의 장인에게서 총을 건네받아 표적 판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실로 경쾌한 소리였고, 호쾌한 반동이었다.
그 위력 또한 나쁘지 않았다. 탄환은 정확하게 표적 판을 관통하였다. 그러나, 이형은 그와 동시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양산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성을 들여 만든 게 눈에 보이는걸.'
건네받은 소총을 이리저리 살핀 이형의 소감이었다. 물론 이는 왕에게 헌상할 물품인 만큼 공을 들였을 공산이 컸지만, 그렇다면 왕에게 헌상하기 위하여 무수한 공을 들였음에도 프랑스의 원전에는 다소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아마 실제 양산에 들어간다면 조선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것보다는 나아도 프랑스의 생산품에 비하면 크게 부족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 이 한 자루 만드는 데에 얼마나 들었다고?"
"쌀 18석 가량으로, 동화로 108냥이 들었사옵니다."
'보자, 조총이 한 자루 만드는데 쌀 3석 5두가 들었으니까….'
단순하게 생각해서 5배 이상이 들었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물론 이는 왕에게 헌상할 총을 만드느라 무리하게 완성도를 높여서 그럴 공산이 컸지만, 실제 양산에 들어간다고 쳐도 3배 이하까지 떨어질 리는 없었다. 기존에 조총 3자루를 만들 분량으로 퍼커션캡을 사용하는 전장식 소총 한 자루를 복제해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퍼커션 캡, 미니에 탄두 등의 부차적인 비용까지 포함하면 그 운용비용은 배 이상으로 뛰었다.
'하지만 감수하는 수밖에. 구식조총과는 달리 저건 나중에 따로 장비를 들여와서 후장식 소총으로 개량하는 것 또한 가능해. 일단 되는대로 복제해야 한다.'
"그럼 먼저 함경도와 평안도의 병졸들에게 먼저 나눠주도록 하라. 근시일 내에는 힘들 것이라는 건 안다만, 늦어도 10년 안에는 모두 배치해야 한다. 그리고 복제하다 잘 모르겠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불란서인들을 찾아가 보도록 하라. 과인의 부탁이라면 그들도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어차피 그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까 조선에 떠넘긴 프랑스였다. 아직 저작권의 개념이 널리 퍼진 시대도 아닌 만큼, 귀찮아할 지언정 그들도 거부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일본도 이미 자국의 장인들을 총동원하여 되는대로 무기들을 복제하고 또 그걸로도 부족하여 서역의 열강들에게서 무기를 대거 사들이고 있는 판국이었다.
조선이라고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일본은 당장은 내전만 준비하면 되지만 조선은 당장 러시아와 충돌을 빚게 된 상황이었으니 더욱 사정이 급했다.
'그럼 슬슬 찾아올 놈들이 있는데….'
그 순간 이형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 이들이 있었다. 물론 영국이었다. 러시아가 이미 만주로 남하하면서 극동의 균형을 깨고 있는 이상, 영국이 어떤 식으로건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이상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칩거도 이 무렵 즈음이면 여왕이 상복을 입고서 의회에 출석하면서 마무리될 무렵이었다. 이미 프랑스에서 러시아의 극동 남하에 불쾌해하며 조선에 이것저것 많은 것을 베풀고 있는 이상, 영국도 이에 한 손 거들게 될 공산이 컸다.
그리고 이형의 예상대로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그로부터 이틀 후, 영국의 주청 공사 토마스가 선교사 출신 역관과 함께 주 조선 공사의 정식 부임이 이뤄질 단옷날 전에 조선을 찾아왔다.
'호랑이도 부르면 온다더니 사자라고 다를 것도 없구먼.'
"조선에 온 것을 환영하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오. 조금 더 일찍 만나 뵙게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구려."
"송구합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환영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저 죄송스러운 마음뿐입니다."
이형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이형은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서, 짐짓 태연한 얼굴로 토마스 공사를 마중하였다. 한편 토마스 공사는 이형의 모습에 작은 놀라움을 느꼈다. 서역의 열강들과 교역을 튼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국왕이 머리를 자르고 대원수복을 차려입는 등 영락없는 유럽의 왕들을 따라 한 모습을 하고 있던 것이다.
'보아하니 조선의 왕이 유럽의 문물들을 받아들이는 데에 적극적이라는 프랑스인들의 선전이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그것은 토마스 공사에게 있어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 말인즉슨 저 소년 왕은 나이는 아직 어려도 말이 통하는 부류에 속한다는 이야기였으니.
말이 통하는 상대와의 교섭이라면 영국도 극동에 대한 노력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우선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귀국 조선에서는 러시아인들의 남하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고 계십니까?"
토마스 공사는 굳이 돌려 말할 것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프랑스인들의 말에 따르면 소년 왕은 용감무쌍한 성격이라고 했고, 그 프랑스인들이 용감무쌍한 성격이라고 표현할 정도면 안하무인에 가까운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옳았다.
따라서, 용건을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은 조선왕의 심기를 거스를 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것은 옳았다.
"짜증 나는구려."
짧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차피 한눈에 봐도 어리고 미숙한 것이 보이는 왕이었다.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토마스 공사는 회심의 미소를 띄웠다.
"저희 영국의 여왕 폐하께서도 러시아인들의 욕심이 극동의 긴장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 우려하고 계십니다. 이는 극동의 평화를 극히 저해하는 행위로서,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영국은 러시아인들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하여 조선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듣기야 좋구려. 그러나, 과인이 바라는 것은 그런 막연한 약속이 아니오. 귀국에서는 우리 조선에 얼마나 되는 지원을 제공할 생각이며 또 무엇을 보장해 줄 생각이오? 그것을 말해주시오."
'호오, 꽤 머리가 좋군.'
토마스 공사는 마음속으로 이형에 대한 평가를 상향 조정했다. 보아하니 단지 안하무인의 애송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유럽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으면서도, 유럽인들의 호의에 쉽게 마음을 열지도 않았다. 이는 어느 정도 유럽에 대하여 잘 알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행보였다.
그러나 토마스 공사로서는 나쁜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조선을 식민지화할 생각일랑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도 않은 영국이었다. 괜히 프랑스와 필요 이상으로 갈등을 빚는 일은 피하고 싶었던 만큼 이는 당연한 행보였다.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러시아를 틀어막을 고기 방패였지 식민지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토마스 공사는 태연하게 말했다.
"반대로 여쭙겠습니다. 조선에서는 영국에 무엇을 필요로 하십니까? 무엇이든지 말씀만 해주십시오. 영국에서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예, 그렇습니다. 대영제국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전하."
"허, 허어!"
이형과 공사의 만남을 기록하던 사관들과 수발을 들던 궁인들 사이에서 동요가 터져 나왔다. 그들로서는 프랑스에 이어서 영국까지 마주하게 되는 서역의 열강마다 조선에 이것저것 퍼주겠다고 나서니 정신이 들지를 않았다.
그러나 정작 이형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젠장, 이거 진짜로 러시아랑 전쟁하라고 등 떠미는 거군.'
"우선 섭정 공과 논의해 보시오. 이 일에서는 과인보다는 섭정 공이 보다 능할 터이니."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대영제국은 귀국 조선국에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렇게 일단 영국의 공사를 뒤로 물리고서 이형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허리춤에 미제 권총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우라질, 죽을 때 죽더라도 이걸로 러시아 놈들 대가리 통에 바람구멍 하나는 뚫어줘야 할 텐데."
일찌감치 직접 전장에 나서 싸울 생각부터 하는 이형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날이 현실성을 띄어간다는 것이 바로 가장 큰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