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역과의 거래 >
"조금 전 말씀은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과연 듣던 대로 용감무쌍한 분이시로군요. 우리 대영제국은 전하의 뜻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바입니다. 함께 저 거만한 루스인들에게 한 방 먹여줍시다!"
회장으로 돌아온 이형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영국령 인도의 부왕 겸 총독 로런스 남작이었다. 양장차림의 그는 유난히도 호들갑을 떨면서 이형에게 찬사를 날려왔다. 그 모습에 이형은 기분이 좀 묘해졌다. 이 시대 영국의 인도 총독 즈음 되는 자가 생전 처음 보는 동양인 소년 왕에게 아양을 떠는 꼴이라니.
'이건 또 러시아와 정면에서 으르렁거리지 않았다면 보기 힘들었을 진귀한 구경거리로군'
물론 이 또한 현 조선의 행보가 영국의 국익과 합치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조선이 러시아에 굴복한다면 영국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손을 뒤집어 매도를 퍼부을 것이 분명했다.
그걸 다시금 마음속으로 되뇌면서, 이형은 로런스 남작과 악수를 하였다.
"귀국에서 포대를 구입하고 싶소. 물론 포병훈련을 도와줄 군사고문단 또한 필요하오. 가능하다면 대포공장을 세워준다면 더더욱 좋소. 공장유치와 기술 이전을 위하여 은화 100만 냥을 지불할 의사 또한 있소.
또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 조선에서 서역의 문물을 배우기 위하여 유학생들을 보낼 생각인데, 귀국 영국에서 이를 받아주었으면 하오. 가능하다면 상선 사관들과 해군 생도들을 먼저 받아주었으면 더욱 좋소."
이형은 굳이 서론을 늘릴 것 없이 본론부터 말했다. 영국은 자국에 대한 자긍심이야 물론 대단한 나라였지만 국익이 자존심에 앞서는 나라였다. 이형이 설령 영국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더라도, 로렌스 총독이 기분 좋아할지언정 조선에 무언가 추가적인 양보를 베플리가 없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형이 굳이 입 아프게 칭찬할 이유도 없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로렌스 총독은 여전히 과장되게 웃고 있는 낯으로 이형의 요구를 수용했다. 어차피 영국은 앞서 조선이 러시아에 맞서는 대가로 조선이 요구하는 모든 대가를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한 바 있었다. 이형이 주제를 모르고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 한, 영국은 진심으로 이형의 요구 전부를 수용할 작정이었다.
다만, 로렌스 총독은 속으로는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조선의 요구가 굉장히 구체적이고 세세했다.
'도대체 어디에서 저런 어린 나이에 우리 대영제국에 대하여 여기까지 세세한 정보를 얻었을까? 보아하니, 우리 유럽에 대하여 문외한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조선은 이번에 막 개항을 했을텐데…. 모태신앙이라고 하더니, 구교도인 어미에게서 전해 들었던 건가.'
물론 로렌스 총독의 착각이었다. 그러나, 이형이 따로 해명할 까닭도 없던 만큼 이 추측은 로렌스 총독을 통하여 영국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것임이 틀림없었다. 본의 아니게 친모의 이름을 떨치게 된 이형이었다.
"우리 대영제국의 병사들은 세계 최강이라고 자부합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저 프랑스인들과 미국인들에게 직접 여쭈어 보셔도 좋습니다. 그러니, 우리 대영제국과 함께 러시아인들과 맞서 싸우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전하께서 파병을 원하신다면 우리 대영제국에서도 기꺼이 이번 전쟁에 참여할 것입니다."
"말은 고맙구려. 그러나, 사양하겠소. 물론 언젠가 궁지에 몰린다면 대영제국의 힘을 빌려야 할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과인이 생각하기로 아직은 그럴만큼 우리 조선이 궁지에 몰린 것 같지는 않소이다.
마음만 받아두기로 하겠소. 앞으로도 귀국 대영제국과는 두고두고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싶구려."
'되도 않는 고집을 부리기는….'
로렌스 총독은 살짝 눈살을 찌뿌렸다가, 다시 인상을 피면서 활짝 미소 지었다. 어차피 그 또한 당장 이형이 받아들이라고 해서 운을 띄운 것은 아니었다. 자국 영토에 열강들의 군세를 들이기 꺼려하는 비 유럽권 군주들이라면 널려있었다.
"물론입니다. 앞으로도 대영제국은 조선의 친구로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조선의 승전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어차피 러시아에게 직접 당해보면 싫어도 알게 되겠지. 너희들은 결국 우리 영국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기 위한 대포 사료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개처럼 바닥을 기면서 원병을 구걸할 날을 기대하고 있겠다, 원숭이 놈아.'
그렇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주고 받고서, 로렌스 총독은 이형과 악수를 주고받은 후 헤어졌다. 이형을 향한 비웃음은 덤이었다.
이형이 제 아무리 겉으로 허세를 부려봤자 결국 절대적인 힘의 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러시아군에게 굴복할게 뻔한 이상, 어차피 영국군의 조선 반도 주둔은 시간문제일 따름이었던 것이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국민학교 6학년 상대로 힘 자랑 한번 좋아하는구먼.'
이형은 로렌스 총독의 시선에서 비웃음을 읽어냈으나, 굳이 이를 지적하지 않고서 그저 말없이 세차게 손을 털었다. 사실 이번에는 로렌스 총독이 딱히 유별나게 힘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한번 피멍이 들었던 부분을 또 한번 자극 당하니 별다른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저릿저릿했다.
'보나마나 일부러 그런 거겠지. 이 변태 자식들.'
이형은 그러나 애써 고통을 누르고서 미소를 유지하였다. 아직도 그가 만나야하는 손님들은 많고도 많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루이 베르그송 대령은 우수한 인재입니다. 3년의 세월이라면 넘치도록 충분할 것입니다. 3년 후, 조선은 극동의 프랑스가 되어 그 이름을 떨치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이형을 맞이한 것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 그랑디에 제독이었다. 과장된 환영 인사로 이형을 맞이한 로렌스 남작과는 달리, 그는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모습이었다. 단지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프랑스에서 가르치는 대로만 따라와 준다면 조선이 3년 안에 극동의 군사 강국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모습이었다.
'뭐, 그야말로 전형적인 프랑스인이로군.'
"과인의 생각 또한 그와 같소. 귀국 불란서에서 우리 조선을 가르치고 또 이끌어준다면 이 세상에 두려워할 것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우리 조선이 구라파에 유학생을 보내고자 하는데 귀국 불란서에서 이를 받아줄 수 있겠소?
귀국 불란서의 위대한 과학기술력과 선진적인 교육정책, 우수한 사법체계는 우리 조선의 학자들에게 모범이 될 것이오."
"물론입니다. 귀국 조선은 우리 프랑스 제국의 둘도 없는 극동 제일의 친구입니다. 어찌 지원을 아낄 수 있겠습니까?"
이형은 내심 그렇게 자평하고서는, 있는 힘껏 찬사를 섞어 프랑스 유학단 파견을 승낙받았다. 사실, 엎드려 절 받기이기도 했다.
식민지, 혹은 식민지 예비 후보국의 엘리트들을 초청하여 교육한 다음 본국에 친화적인 지배계층으로 삼는 것이 이 시대 서구 열강들의 주요 수법인 이상, 조선에서 먼저 유학생들을 파견하겠다고 나서면 이를 거부할 서구열강은 없었다.
이형이 먼저 프랑스 유학 단을 요청하자 이형이 현 극동 제일의 친 프랑스 인사임을 다시 한번 확신한 그랑디에 제독은 희희낙락했다. 이형 또한 딱히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조선을 위해서라도 당분간 이형은 친 프랑스 인사로서 각인되는 편이 편리했다.
'어차피 지금 유학생들을 보내봤자 5년, 길면 10년 후에나 조선으로 돌아오겠지만.'
러시아와의 결전이 당장 눈앞까지 다가온 현실이라면, 후일 조선으로 돌아올 유학생들은 곧 조선의 미래였다. 해외에서 아무리 자문단을 지원받는다고 해도 결국 한계가 있는 이상, 발전된 서구사회를 직접 보고서 그것을 조선에 이식해 줄 유학생들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장차 뤼순은 이 조선과 요동, 청을 잇는 우리 프랑스 제국의 홍콩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뤼순은 우리 프랑스 제국에게 있어서도 너무나도 먼 만큼, 귀국 조선에서 이에 이주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를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물론, 뤼순에서 조선인들은 우리 프랑스인들과 대등한 수준의 대우를 받을 것이라 약속 드리겠습니다. 이는 조선에게 있어서도 우리 프랑스의 우수한 공업 기술력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냥 싼 값으로 부려 먹게 할거 없이 떠도는 부랑자들 내놓을 생각 없냐고 대놓고 말하지 그러냐.'
그러나 이어진 그랑디에 제독의 요청에, 이형은 절로 있는 힘껏 유지하고 있던 미소가 흐트러지면서 기분도 떨떠름 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랑디에 제독은 분명 말로는 프랑스인과 대등한 대우를 해주겠다고 말하였으나, 이형은 그것이 사실이 아닐 거라는 걸 알았다. 애초에 이 무렵의 프랑스 제국은 따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조항이 법적으로 명시된 나라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인종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사회적으로 암암리에 인종차별과 우생학이 당연시 되고 있었고, 또 이를 저지할 어떠한 법적 보호망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만해도 분명 다른 열강들에 비하면 앞서가는 것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차별이 존재하는 건 분명한 사실인 이상 뤼순으로 건너간 조선인들이 공정한 대우를 받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물론이오. 귀국 프랑스 제국에서 그와 같은 기회를 제공해준다면 우리 조선으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오. 우리 조선은 극동의 평화를 위하여 귀국 프랑스 제국에 대하여 협력을 아끼지 않을 예정이오."
'하지만 지금부터 미리미리 이주민들이 건너가면 장차 조선이 뤼순을 영토의 일부로 주장할 근거가 생긴다. 그리고…솔직히 외화벌이가 절실한 것도 사실이고. 젠장, 이러니까 진짜 노예장사라도 하는 기분인데.'
하지만 이형에게 그렇다고 제안을 거부한다는 선택지도 없었다. 이형은 억지로 다시 미소를 띄우고서는 그랑디에 제독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이형이 순순히 프랑스의 요청을 승낙하자, 그랑디에 제독은 희희낙락 하면서 그와 정중히 악수를 주고 받은 뒤 돌아섰다.
다행히 로렌스 총독과는 달리 힘 조절을 잘못하거나 하지도 않았기에, 이형은 비교적 편하게 이어서 미국 공사 로버트를 맞이할 수 있었다.
'미국은…당분간 정부 차원에서 움직임을 보이기는 어렵겠지. 한창 링컨 대통령 암살로 혼란스러울 무렵이고.'
거기에 링컨 대통령의 후임 앤드루 존슨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탄핵 위기에 시달린 대통령이었다. 지원을 요청한다고 한들 대통령의 리더쉽 부재로 소득 없이 마무리될 공산이 컸다.
이형은 악수를 주고 받으면서 미국에게는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을 제의하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우리 조선은 개화를 위하여 해외 투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오. 귀국 미국에서 우리 조선의 경제를 위하여 투자해준다면 과인은 미국인들이 조선에서 사업을 하기에 편리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오.
또 이번 기회에 은화 200만 냥을 들여 창춘, 평양, 한양, 부산을 잇는 국토횡단철도를 세우고자 하는데, 이를 귀국 미국의 철도회사들에 맡길 의향이 있음을 전해주었으면 좋겠소.
이 국토횡단철도 사업에 필요한 강철을 위하여 포항에 제철소를 세울 예정인데, 이 또한 그대들 미국에 수주하도록 하겠소. 제철소 건설에는 우선 은화 100만 냥을 들일 예정이지만, 만일 필요하다면 그 이상의 비용 또한 감수할 수 있소. "
"물론입니다. 기꺼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미합중국의 철도와 철강은 세계 제일입니다. 결코, 실망하실 일 없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내전이 마무리된 직후라 여전히 국내가 뒤숭숭하여 이번 방한에서 이렇다 할 소득을 얻기 힘들 것이라 여겼던 로버트 공사는, 단번에 귀가 찢어질 듯이 미소를 띄웠다. 자그마치 은화 300만 냥. 은화 300만 냥이었다.
이번에 조선이 청에서 받아낸 전쟁배상금의 절반이었고, 이는 이 시대의 달러로 환산해도 4200만 달러에 가까운 거금이었다. 후일 알래스카가 단돈 700만 달러에 팔렸음을 고려하면, 알래스카를 6번은 사고도 남을 거금이었던 셈이다.
그 모두를 털어내어 창춘에서 부산까지 잇는 국토횡단철도망과 그걸 지탱할 제철소를 세우겠다고 한 것이다. 당장 내전 직후 재건에 허덕이던 미국에 있어서, 이보다 희소식은 있을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을 미국에 전하기만 한다면, 당장에라도 공사를 수주하겠다고 나설 철도회사들이나 제철소들이야 널리고 널려있었다.
거기에 저 은화 300만 냥, 4200만 달러를 호가하는 대공사가 철도만 깔고 끝날 리도 없었다. 일단 철근 콘크리트로 한양역을 세워야 할 테고, 차량도 구매해야 할 테고, 탄광을 뚫어 석탄도 캐내야 할 테고, 기관사들도 교육해야 했다.
그뿐이랴. 제철소에서 뽑아져 나오는 강철은 글자 그대로 어디에서나 쓸 수 있다. 댐을 세울 수도 있고, 다리를 놓을 수도 있고, 크고 작은 건물들을 세우거나 요새를 세우고 배를 건조하는 등 모든 면에서 사용 가능하다. 자연히 제철소만 세워지고 나면 그 이후로도 대규모 토목공사가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현 상황에서, 그 모든 초대형 사업을 수주하게 된 건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심 봤다!'
로버트 공사로서는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리는 걸 느꼈다. 비록 극동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에서는 프랑스에 뒤처졌지만, 이번 공사는 그 모든 손실을 메우고도 남을만한 가치가 있었다. 현 조선왕이 문명개화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만큼, 만일 이번 공사를 성사시킨다면 이후로도 미국은 엄청난 규모의 공사를 연달아 수주받게 될 것이고 조선에서의 대규모 토목사업은 내전 직후 침체한 미국의 경기를 살리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할 터였다.
"우리 미합중국은 이번 내전을 끝으로 군축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라 내전 기간 중 사용한 무기들을 대거 처분할 예정에 있는데, 이를 조선에서 매입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만일 조선에서 이를 받아들인다면 미합중국은 기꺼이 시장 가의 4분의 1 가격으로 이를 처분할 의향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소년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로버트 공사는 그 즉시 이형에게 링컨 대통령이 그에게 하달한 지시를 제안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형에게서 제의받은 대규모 토목공사는 덤이었고, 이 중고무기의 판매가 이번 방한의 주목적이었다.
미국으로서는 당분간 이 많은 무기를 쓸 일도 필요한 곳도 없었고,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은 미국에 있어서도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일이었던 만큼 이는 필연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준다면야 감사할 따름이라오. 가능하다면 귀국의 개틀링포라고 하는 무기를 먼저 매각해주었으면 하오. 가능하다면 이를 운용할 교관들도 같이 파견해주었으면 하오만."
"그것은 물론입니다. 기꺼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미합중국은 귀국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예정입니다."
'뭐, 이걸로 일단 이번에 딴 여유자금은 날아갔군.'
그래도 헛된 곳에 쓴 것은 아니었다고 이형은 자평했다. 일단 당장에 필요한 무기 공장들을 유치하고 청춘에서 부산까지를 잇는 국토횡단철도사업까지 주문했다. 어차피 쉽게 이긴 전쟁이었다. 그 전쟁으로 얻은 것들이 쉽게 나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메이지 신정부도 근대화기에 쌓이고 쌓인 부채들을 모두 청산한 건 1차대전 이후, 다이쇼 덴노의 치세에 와서야 겨우였던가. 돈이 없어서 러일전쟁 직전에는 야하타 제철소에 불도 못 피우는 사태가 터지기도 했고. 당분간 한동안은 빚잔치하겠구먼.'
어차피 근대화의 성과가 나오기 전까지 정부 부채에 허덕이는 건 필연이었다. 그것이 싫다면 결국 전쟁에서 이겨서 전쟁배상금을 타내고 그 돈으로 이것저것을 세워 눈덩이를 굴려 차근차근 조선이 가진 몫을 불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나마 청나라가 유럽에서 기계 들여와서 동전 찍어내기 전이라 다행이지.'
청에서 양무운동의 일환으로 은화를 대거 찍어낸 이후로 청에서 양산한 은화는 그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 1865년 아편전쟁 당시 은화 800만 냥은 대영제국의 대중무역 적자를 한방에 청산할 수 있는 큰 돈이었지만 1895년 일본이 청에게 요구한 은화 2억 냥은 아직 강철조차 스스로 만들지 못하던 메이지 신 정부의 5년치 세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이형이 청에서 은화가 들어오자마자 모조리 소모한 이유이기도 했다. 보유하고 있어봤자 머지않아 그 가치가 계속하여 추락할 화폐이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최선이었어.'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면서, 이형은 마지막 손님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