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62화 (62/530)

< 군제개혁 >

"신혼생활은 어떠십니까? 지난밤에는 조금 즐기셨는지요."

이튿날, 섭정공 이하응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은밀히 이형에게 농을 걸었다. 이미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고 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형은 그 모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답하였다.

"거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 그만두시오. 짐이 이 나이에 짐보다도 한 살 어린 젖비린내 나는 애를 안고서 재미를 보기는 무슨 얼어 죽을. 적어도 우리 두 사람 모두 약관의 나이가 되기 전까지 왕손은 꿈도 꾸지 마시오."

"흠, 그렇습니까. 그거 유감입니다. 하기야 뭐, 이 늙은이도 약관의 나이가 되어서야 장자를 보았으니 그런 줄로만 알고 있겠습니다."

이하응은 유감이라고 말하였지만, 전혀 그런 기색이 아니었다.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염을 쓸어내리는 꼴이 영락없이 이형을 놀리려 드는 모습이었다. 이하응으로서는 왕좌에 앉은 이래 귀여운 구석일랑 찾아볼 수도 없는 아들이 청국에서 온 공주에게 쩔쩔매는 꼴이 꽤 즐거웠다.

물론 놀림을 받는 당사자인 이형으로서는 그저 짜증만 날 따름이었기에, 이형은 신경질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삼남도의 민심이 심상치 않소. 알고 있소?"

"그야 물론이지요. 조만간 크고 작게 소란이 있을 겁니다. 가능하다면 아예 무기를 들고 떨쳐 일어나 준다면 고맙겠습니다만, 그런 기특한 유생들이 몇이나 될지."

이하응의 대답은 반란이 일어났으면 한다는 폭언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형도 이하응도 그것이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방의 반발이라면 각오하고 있었고, 또 기대하고 있기도 했다.

3년 후에 예정된 조직적이고 동시다발적인 탄핵 상소를 기다리기보다는, 아직 향림들이 준비가 덜 되었을 때 선공을 가하여 일망타진하는 것이 그들이 바라는 전개였기 때문이었다.

3년 후 이형이 성인이 된 다음이라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명분에서 밀릴 까닭은 없었다. 여차하면 역적 김좌근과의 인연을 근거로 역모 모의로 엮어 넣는 방법도 있었다. 세도정치가 조선을 좀 먹은 지도 백여 년 가까이. 이 조선 땅에서 목에 뻣뻣하게 힘주고 사는 양반치고 안동 김씨 일가와 어떠한 연관도 없는 이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안동 김씨의 몰락 이후로 각지의 향림들이 목소리를 죽이고 땅에 바짝 엎드리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괜히 지금 같은 정세 속에서 목소리를 키웠다가는 목이 날아갈 판이었으니 말이다.

"들고 일어나 주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들고 일어나게 만들어주는 수밖에."

이형은 심드렁하게 말하였다. 어차피 언젠가는 있을 수밖에 없는 진통이라면 차라리 이쪽에서 예상 가능한 시점에서 최소한의 피해만으로 수습해 버리자는 생각이었다. 이하응 또한 그에 관하여서는 판단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와 이형이 다른 점이 있다면 이형이 단지 힘으로 찍어누를 생각밖에 못 한다면 이하응은 조금 더 세심한 조율을 거칠 수 있다는 점뿐이었다.

"물론입니다. 굴에 연기를 피우고서도 무사할 수 있는 너구리들은 없지요."

이하응은 히죽 웃었다. 안동 김씨를 위시한 세도 가문도 세도 가문이라지만, 그를 무시하던 서원의 유생들에게도 여러모로 쌓인 게 많던 이하응이었다.

그 모든 한을 이번 한번에 되갚아 줄 생각을 하니, 도저히 웃음이 멈추지를 않았다.

"미리 말해두겠지만, 저번처럼 재미 볼 생각은 마시오. 서역의 공사들이 이 조선 땅 안에 들어와 있소. 괜히 지나친 고문으로 우리 조선이 야만의 나라라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소."

"허, 역도를 벌하는 일까지 함부로 참견한단 말입니까? 하다못해 청국에 사대를 하던 적에도 이런 일은 없었거늘."

"그야, 저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청국보다 더 한 작자들이니 말이오. 경계를 그다지 늦추지 않는 것이 좋소. 여차하면 언제든지 우리 조선을 집어삼키려 달려들 테니까."

이형은 사뭇 진지하게 경고했다. 사실 당연한 경고이기도 했다. 이 시대의 서역 열강들이 식민지를 확장하는 명분은 다름 아닌 문명 개화였다. 물론 말이 좋아 문명 개화지, 그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일이었다.

후일 조선이 힘을 얻게 되어 적어도 저들이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힘을 보유하게 된 다음이라면 모를까, 지금 조선은 저들과 대등한 문명국은 못 되더라도 최소한 적극적으로 문명 개화를 시도하는 모범생적인 인상으로 남아있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지만 문명 개화를 내세워 내정 간섭을 시도해 올 서구열강에게 간섭을 덜 받을 수 있었다.

이하응은 이형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숨에 이해했다. 머리가 나쁘기는 커녕 교활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이하응이었다. 이미 서역의 열강과 몇차례 교류를 가진 지금 이하응은 저것이 단지 말 뿐인 경고가 아닐 거라는 걸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이하응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단칼에 손 속에 자비를 두지 않고서 염라국에 입국 시켜줘야 할 모양이었다.

"참, 그럼 그 잘난 서역의 공사들이 주거할 곳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능하다면 저들과는 그다지 자주 얼굴을 맞대고 싶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요 성저십리 용산방에 이태원이라는 역원이 있으니 그 주변에 모아두기로 하였소. 일찍이 청에서 사신이 오면 그 일대에서 묵게 하였으니 문제는 없을 거요. 장차 청국과 왜국의 공사들도 그곳에서 묵게 될 것이오."

이형의 설명에 이하응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형으로서는 본래 외국의 대사관들은 이태원 주변에 모여있었던 것을 기억하여 그곳에 모아두기로 한 것뿐이었지만, 이형 스스로 설명한 대로 이태원은 본래도 청에서 사신이 오면 사신단 일행이 불편 없이 지내다가 갈 수 있도록 조선 조정에서 직접 운영하는 여관인 역원이었다.

이제 서역의 나라들과도 통상하게 되었으니 서역의 사신단들 또한 이태원에서 거하도록 하는 것은 이하응이 생각하기에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뭐. 보아하니 청국의 사절단은 근시일 내에는 이 조선 땅에서 나가지 않을 성싶더구려."

이형은 성가시다는 듯이 덧붙였다. 단옷날의 왕실 혼 이래로 다른 외국의 사절단들은 앞으로도 조선에서 계속 머물게 될 공사 일행을 제외하자면 모두 떠났지만, 청국의 사절단 대표 공친왕만큼은 병치레를 핑계로 조선에서 떠나지 않고 있던 것이다.

"조선에 망명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지요."

"그 말대로겠지. 일이 복잡하게 되었소. 어쩌면 노국과의 전쟁은 둘째치고 청국과도 또 한 번 전쟁을 치르게 될지도 모르겠구려."

이하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에 응수했다. 이형도 별다른 반발 없이 그에 수긍하였다. 서태후가 러시아를 끌어들인 이래로 서태후와 대립하는 입장이던 공친왕의 입지가 나날이 축소되어가고 있다는 건 굳이 숨길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와중 공친왕의 장녀인 영수 공주가 각국의 대표들이 보는 앞에서 조선에 그녀의 아버지인 공친왕을 잘 부탁드린다. 청하였으니, 안 그래도 좁던 공친왕의 입지가 더 좁아졌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아마 병치레를 핑계로 시간을 질질 끌다가 북경에서 작심하고 공친왕을 돌려받고자 하면 그때 정식으로 망명을 신청할 공산이 컸다. 그리고 조선으로서는 그를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아무튼, 그는 현 중전의 친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할 이유도 없지.'

이형으로서는 딱히 나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심요 지역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명색이 심왕이 정작 심요 지역이 없다는 것도 우스운 꼴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는 곧 또 다른 전쟁의 불씨였다.

그때 공친왕을 내세운다면 심왕 작위와 함께 심요 지역을 손에 넣을 명분을 굳힐 수 있었다. 아무튼, 그는 애신각라의 황족이니 심요 지역을 통치한다고 한들 문제가 될 이유는 없었고, 또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니 만일 그가 죽고 나면 자연적으로 공친왕의 영지는 공친왕의 사위인 이형에게 돌아올 수밖에는 없었다.

그 과정에서 북경의 조정에서 러시아를 앞세워 조선에 공친왕을 돌려달라고 압력을 넣는다고 해도 그리 나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러시아와는 일전을 각오한 상황이었으니만큼, 크게 달라질 이유도 없었다.

"듣자하니 장강 이남 땅에서 사교도들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난 전쟁에서의 피해를 그리 쉽게 회복할 수 있을리도 만무하니, 이번 기회에야말로 청국의 천명을 다하게 만들어야겠지요. "

이하응은 청과의 전쟁에서 자신감을 보였다. 물론 그만큼 조선이 강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청이 그만큼 쇠락하였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옳았다. 이미 청은 겉 껍데기만 그럴싸한 송장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 전쟁에서 위신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은 청이었다. 태평천국을 비롯한 사교도들이 장강 이남에서 들끓는 건 단지 그로 인한 무수한 부작용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하응을 비롯한 동아시아인들은 이미 중원이 또 다시 나누어져 천명을 두고 사력을 다해 다툴 것이라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역적 김좌근의 시신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김좌근의 시신을 가지러 온 공친왕이 청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우리 조선에서 먼저 조약을 깨는 꼴이 될 공산이 큽니다만."

"그건 문제없소. 짐이 따로 평안 관찰사에게 부탁해두었으니까. 저들이 가지고 가지 않는다면 우리 조선에서 배달해주면 그만이 아니겠소?"

이형의 대답에 그제야 안심한 듯 이하응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정치는 명분 싸움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이하응이었다. 공연히 조선에서 먼저 조약을 깸으로써 협상장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던 것이다.

"청국에서 온 손님들의 대접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당분간 소신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듯하니 말입니다. 물론 이 일을 모두 마무리 짓고 나면 그때는 폐하께 한 손 거들어 드리지요."

"허, 말만이라도 고맙구려. 그럼 잘 부탁드리오. 이런 일은 짐에게는 영 맞지 않으니, 좋은 소식 기대하고 있겠소."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하는 이하응의 모습에, 이형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적거렸다. 그 모습에 피식하고 웃고서는, 이하응은 그대로 몸을 굽힌 채로 궁에서 물러났다. 이하응 자신도 말했다시피, 앞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터였다. 준비에 늦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은 유자의 나라, 라."

그거야말로 웃기는 소리라고 이하응은 남몰래 소리죽여 웃었다.

그래, 물론 유자들이 이 나라 조선의 머리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디 몸을 이루는 것이 머리가 전부이던가? 제아무리 대단하더라도, 결국 머리는 몸을 이루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가 유자들을 품에 끌어안았던 것은 그들이 자신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돕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것이 뒤집혀 버렸다. 작금에 와서는 유자들이 이성계를 도운 것인지, 이성계가 유자들을 도운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무엇이 계기였는가. 언제부터 이리되어버렸는가. 그런 건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는 모든 걸 바로잡아야 할 순간이었다.

"이 나라 조선은 우리 전주 이씨의 것이니라. 이제부터 그것을 알려주마."

이하응은 불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이번 기회에 이 나라의 주인이 대관절 누구인지 분명히 보여줄 심산이었다. 그걸 위한 계획도, 힘도 그의 손안에 있었다. 남은 건 행동하는 것 뿐이었다.

물론 그 행동은 피를 불러올 것이다. 전례 없이 많은 피가 흐를 터였다. 하지만 이하응은 그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피를 묻히지 않고서 근본적인 체질 개선은 불가능할 테니까.

"개혁이라…."

스스로 곱씹고도 헛웃음이 절로 흘러 나왔다. 이하응은 결국 개혁이라는 건 허울 좋은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토록 많은 피를 요구하는 개혁은 더 이상 개혁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아니, 이건 혁명이다."

이튿날 이하응은 새로운 군제 개혁안을 발표하였다. 내용은 간단하였다.

"「이듬해 병인년 정월 초하루를 기점으로 불란서의 군사계급을 도입하여 모든 무관과 병졸들의 계급을 원수, 장성급 장교, 영관급 장교, 위관급 장교, 부사관, 병졸로 세분화한다. 이를 위하여 시위대를 시위군으로 재편하여 오군영 이하 전력을 이에 통폐합하며, 상설화한다.

이듬해 병인년 이후로 무과에 급제한 모든 무관들은 일괄적으로 향후 한양에 설치될 군관학교에서 의무적으로 4년 간 교육을 이수하도록 한다. 군관학교에서는 서역의 신식 학문을 가르칠 예정이며, 이미 현역으로서 복무하고 있는 무관들 또한 적어도 1년 이상의 교육을 의무적으로 수료할 것을 명한다.

또한, 병인년 정월 초하루를 기점으로 군포를 폐하고 모든 건강한 20대 성인 남성은 3년간 양인은 사병, 양반은 부사관으로서 복무하여야 한다. 이에 해당하지 아니하는 경우를 다음과 같이 기재한다.

하나, 심신에 불편함이 있는 경우.

하나, 집 안에 일할 수 있는 남성이 하나뿐인 경우.

하나, 삼대독자로 군 복무 중 사고가 있을 시 가문의 대가 끊기게 될 경우.

이상 3개 사항에 해당 사항이 없으면, 신분의 고저를 불문하고 군에 복무할 수 있도록 한다. 군복무를 마친 모든 병졸은 전역 후 10년 간 예비역으로 예편 되어 매년 20일간 예비역 훈련을 의무적으로 수료하여야 한다.」"

시위대의 시위군 확장과 군 계급의 세분화는 기실 민간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물론 오군영 내부에서는 금위영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시위대에 나머지 오군영 전부가 통폐합된다는 소식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왕왕 나왔지만, 청과의 전쟁을 승전으로 이끈 소년 왕에 대한 지지가 절대적이었던 상황인지라 반발은 없던 것이나 다름없이 무마되었다.

문제가 된 것은 그 밑에 명시된 징병제의 시행이었다. 오군영은 사실상의 모병제로 유지되었고 속오군 또한 군포를 마련하지 못한 천인들이 주를 이루는 와중, 신분의 고저를 불문하고 군에 복무하도록 강제하는 군제개혁은 무수한 반발을 일으켰다.

"섭정공 그 작자가 이제는 천하가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날뛰는구려! 이는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폭정이오! 반드시 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옳소, 옳소! 당장 상경하여 유림의 뜻을 전하께서도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어서 빨리 국정을 농단하는 간신배들을 농간하고 이 나라 조선을 되찾도록 합시다!"

그간 몇 번이고 논의만 되어왔던 지방 유림의 상경은 그제야 현실화하였다. 보부청과 시위대의 흉흉한 기세보다도 당장 병인년 정월 초하루 날 예정된 토지개혁안을 비롯한 급진적이기 그지없는 개혁들을 저지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앞선 것이다.

이대로 가면 꼼짝없이 군에 끌려갈 판국이었으니 그들로서는 당장 공포보다도 절실함이 앞서는 것도 당연하였다.

그리고 이는 그 즉시 보부상들을 통하여 이하응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를 예견하고 있던 이하응은 그 즉시 다음 단계로 이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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