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청 >
"여보게나, 그거 들었는가? 아니, 글쎄 양반 어르신들이 상경하여 우리네 땅을 빼앗아 가려 한다지 뭔가?"
"아니, 어찌 그럴 수가 있나? 양반 어르신네들은 땅만 넓고 농사도 안 지으시면서! 나라님께서 우리 같은 농사꾼들에게 땅을 좀 나누어주신다고 하는 걸 없던 거로 한다니 에라 이런 욕심만 많은 것들이!"
"내 말이 바로 그 말일세. 아니 양반 어르신들이라면 마땅히 우리들 같은 천것들에게 모범을 보이지는 못할지언정 제 잇속만 채우려 들고 있으니 원!"
이하응은 그 즉시 선비들이 상경하는 목적이 토지개혁안을 저지하기 위함이라고 소문을 냈다. 사실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계기가 징병제였을 뿐, 그들의 목적이 병인년 정월 초하룻날 시행될 대개혁을 틀어막는 것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니까.
자연히 이는 민초들로 하여금 상경에 참여한 선비들에 대한 적의를 극대화했다. 인제야 겨우 소작농 신세에서 벗어나 꿈에 그리던 자영농이 될 판국에, 명색이 배우고 가진 자들이라는 양반 지주들이 앞장서서 이를 반대하려고 나서니 고까워 보일 수밖에는 없었다.
"어허, 이 천것들이 어딜 감히 양반 어르신네들 가시는 길을 가로막는가! 어서 썩 비키지 못할까!"
"아이고, 어르신! 한 번만 봐주십시오. 이 쇤네 들도 겨우 제 땅을 가지게 되었는데, 어찌 이를 그리 매정하게 다시 가져가려 하십니까!"
상경하는 내내 선비들은 몇 번이고 민초들과 충돌하여야만 했다. 이하응은 보부상들을 동원해 이를 적극적으로 부추겼다. 민초들은 상경하는 선비들에게 눈물로 호소하거나 때에 따라서는 아예 몸으로 저지하려 들었다. 모두 평소라면 불가능했을, 이하응이 의도적으로 부추겼기에 가능한 사태였다.
뻐억-.
"아이고, 나 죽네!"
"아니, 이 천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정신이 나갔나! 그래, 네놈들도 섭정공 그 간신 놈과 한패렸다? 어디 잘 걸렸다. 오랜만에 매타작 좀 해보실까!"
이에 흥분한 선비들은 그들의 행로를 가로막는 민초들을 구타하는 등 무수한 소란을 일으켰다. 평소 같잖게 보던 천것들이 감히 양반 어르신네들이 가는 길목을 틀어막고서 눈물로 호소하고 몸으로 틀어막는 등 방해 공작을 펼치니 분통이 절로 터진 것이다. 이러한 선비들에 의한 매타작 소식은 보부상들에 의하여 고의로 더더욱 빠르게 퍼져나갔다.
소문이 늘 그렇듯이 여기에는 확산하는 와중 무수히 잔가지가 붙어, 선비들의 매타작에 반병신이 된 사람이 나왔다느니 아직 상투도 틀지 않은 어린 소년을 발로 걷어차 죽였다느니 하는 등 더욱 과격하게 변하였다.
안 그래도 양반 지주들에게 좋은 감정을 품은 경우가 드물었던 민초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고, 개혁에 반대하는 선비들에 대한 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 결과, 겨우 한양에 다다른 선비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성난 한양 백성들의 추방령이었다.
"물러가라! 여기가 어디라고 너희 금수 같은 작자들이 오느냐?! 네놈들은 조선 땅 선비들의 수치다, 수치야!"
"어, 어허! 이 나라 조선을 위하여 충언을 올리려 상경한 선비들을 이리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어디에 있는가!"
"충언은 무슨! 네놈들 전부 사욕에 눈먼 금수 같은 작자들이다! 어딜 감히 너희들 같은 종자들이 조선의 선비들을 대표한다는 말이더냐!"
여기에 앞선 것은 이하응의 사주를 받은 한양의 잔반들이었다. 평소에도 떵떵거리며 어깨에 힘 넣고 다니던 양반 지주들을 질투하던 이들 잔반들은 이하응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판까지 준비되자 꺼릴 것 없이 양반 지주들을 향한 폭언을 쏟아냈다.
비록 경제적으로 완전히 몰락하여 때에 따라서는 천민들보다 못한 대우를 받던 잔반들이었으나 그들은 일단 양반이었고, 이러한 잔반들의 주도로 도성의 백성들이 군집해 길을 틀어막고 물러나라 아우성을 치자 도성까지 상경한 선비들도 궁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하고서 내쫓기는 수밖에는 없었다.
"아니, 도대체 도성의 선비들은 뭘 하고 있단 말인가! 저 천것들이 제 세상이라도 온 마냥 날뛰고 있는데 마땅히 폐하께 충언을 올리지 않고서는! 그러고도 저들이 이 나라 조선의 선비란 말인가?"
"쉿, 조용히 하게! 그 역적들과 함부로 엮여서 좋을 게 무엇이 있다고 함부로 입에 담는단 말인가? 말조심하게. 괜히 안동이니 풍양이니 하는 족속들과 연줄이 있다고 의심 받는 순간 끝장이야, 끝장!"
"허, 허허허! 나 원참,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고 이러는지…!"
그렇다고 한양의 선비들이 들고일어나 시위를 벌이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한양을 비롯하여 경기권의 선비들은 세도 가문들이 완전히 몰락하며 한차례 피의 숙청에 휩쓸린 직후였던지라, 감히 조정의 결정에 군소리할 담력도 여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연히 도성의 선비들과 필담을 주고받으며 그들의 시위 참여를 유도하려고 했던 이들은 도성의 선비들을 집중 감시하고 있던 포졸들에게 사로잡혀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죄목은 물론 역적 김좌근과의 연관성을 추궁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누명이나 다름없었지만, 아직 김좌근과 그 일탕을 소탕한지 채 1년을 넘지 않은 시점이었다. 실제로도 그 잔당이 여전히 남아 암약하고 있을 가능성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이상, 설령 그것이 누명이라고 할지라도 그 대응이 지나치다고 할 수 는 없었다.
단지 혐의만이 아니라 실제로 역성혁명을 꾸민 역적 김좌근의 이름은 그만한 무게가 있었다.
결국, 향림들의 상경과 시위는 하지 않는 편이 나았던 일이 되어버렸다.
"허, 허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간신이 선비들의 입을 틀어막고 백성들을 현혹해 제 수족처럼 부리고 있으니, 참으로 말세로다!"
"여보 게나, 그거 들었는가? 전주에서는 이미 뜻 있는 선비들이 힘을 모으고 있다고 하네. 자네도 함께하지 않겠는가?"
"뜻 있는 선비들이라니…아니, 자네들 제정신인가? 역모라니! 안될 일일세. 그거야말로 안될 일일세! 그것만은 결코 안 되네!"
"그럼 자네는 빠지도록 하게. 나는 더는 참을 수 없네. 이대로 가면 온 나라가 간신과 오랑캐 소굴이 될 판일세. 나는 조선의 선비로서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생각일랑 추호도 없다네!"
"자네의 뜻이 정녕 그렇다면…."
일이 이렇게 되자, 선비들은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무장봉기였고, 부정할 여지가 없는 역모였다.
어느 곳이 주모자이다, 라고 지목할 수도 없었다. 역모는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넓고 얕게 퍼져나갔다. 지난 전쟁 때 조직된 의병들이 비밀스럽게 재조직 되었고, 그들은 이름만 근왕군이지 실상은 한양의 이하응을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군이었다.
그들은 손쉽게 무기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들 스스로도 의아할 정도로, 각지의 상인들이 엄청난 양의 병기들을 시장에 풀은 덕분이었다.
"아니, 가만.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 나라 조선에 총포가 이토록 흔했던가? 아무리 범 사냥이 한창이라고 하지만, 이만한 총기가 어디에서 났단 말인가?"'
"이 사람이, 그것도 모르는가? 코쟁이들이 요 근래 한창 이 조선 땅에 무기들을 풀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양이들의 무기는 우리 조선의 것과는 비교를 거부하니, 그야 원래 이 조선 땅에 있던 무기들이 헐값에 풀리는 수 밖에."
"허, 그게 사실이라면 다행이구만. 좋네. 그럼 올해 중에 적절한 때를 정하여 그때 봉기하도록 하세나."
께름칙해 하면서도, 유생들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서 되는 대로 무기를 구입하여 숨겨두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허술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겠지만, 이때의 그들은 절박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만일 이대로 가만히 앉아있다가는 꼼짝 없이 군대에 끌려갈 판국이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에 가기 싫어하는 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똑같았다. 당장 내년에 군대에 끌려갈 판국이던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든 이를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지 하나하나 따지면서 냉철하게 움직일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가지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걸렸군."
그들에게 무기를 대거 공수하며 궐기를 부추기던 것이 다름 아닌 섭정공 이하응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번 숙청에서 어떠한 뒷말도 없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생들에게 군역을 지게 하고 그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를 무효화할 방법도 없애 퇴로를 지운 다음 무력 봉기를 부추겨 단번에 숙청할 명분을 준비하고 있던 것이다.
"호랑이 사냥이 제철이라더군. 모조리 쓸어와라. 잔챙이라고 봐줄 까닭은 없다. 이번 기회에 씨를 말린다."
이하응이 명하자, 그날로 산을 타던 시위대의 병졸들이 산에서 내려와 마을로 들이닥쳤다. 이하응이 부리는 보부상들에게서 무기를 사서는 무장봉기를 꾸미던 양반 지주들은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모조리 시위대에게 사로잡혔다.
일부 지주들은 그동안 숨겨둔 무기로 저항을 시도하였지만, 그 또한 유효하지는 못했다. 프랑스 고문단의 혹독한 훈련을 받고서 호랑이들을 사냥하며 실전경험을 쌓은 그들과 단지 읍에서 힘 좀 쓰는 이들을 모아 저항하던 양반 지주들의 사병이 대등할 수는 없었다.
이하응은 그들 모두에게 역모를 모의한 죄를 물어 참수형을 선고했다.
* * *
"아이고, 나으리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십시오! 나으리!"
"이 기름에 튀겨 죽일 역적 간신 놈아! 네놈의 천하는 영원할 듯싶더냐? 두고 보아라. 검으로 선 자 검으로써 망하게 될지니, 선비들의 피와 살 위에 살찌우는 네놈과 너희 족속들의 권세도 오래가지는 않을 게다!"
"역적 놈들이 입만 살았구나. 당장 목을 쳐라."
뎅겅-.
병인년 정월은 피로 어지럽혀진 시기였다. 한쪽에서는 무력봉기를 꾀하다 사로잡힌 양반 지주들이 한강 변 잠두봉에 끌려와 줄줄이 목이 잘렸다. 워낙에 그 죄질이 뚜렷하고 혐의가 분명했던 만큼, 심문은 길었으되 집행은 신속했다. 고문을 못 이겨 아무 이름이나 뱉어낸 이들 탓에 처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루어졌다.
그 한 달 동안만 8천여 명의 선비들이 목이 잘렸다. 기실 삼남도에서 내로라하던 양반 지주들은 모조리 끌려와 목이 잘린 셈이었다. 실로 유례가 없는 대숙청이 아닐 수 없었다. 홍경래의 난 진압 후 처형된 이들조차 농민들을 포함하여 20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흥선군이 조선 팔도에서 선비의 씨를 말리려 든다는 소문이 돌 지경이었다.
"이 나라 조선이 전주 이씨의 나라가 되기 위하여 조선 팔도의 선비들을 모조리 죽여야 한다면, 마땅히 그래야지요."
이하응은 그러한 의혹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물론, 공적인 자리에서 한 말은 아니었다. 이형과 단둘이 있을 적 주고받은 사적인 발언이었다. 그러나 사적인 발언이기에, 그 말에 거짓은 없었다. 이하응은 필요하다면 진심으로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애초에 그럴 작정으로 시작한 토지개혁이었고, 거기에 기름을 붓기 위하여 덧붙인 군제개혁이었다. 효과는 확실했고, 결과는 그가 기대했던 대로였다. 이하응은 그가 당초에 계획하였던 대로 장차 그들의 집권에 방해가 될 세력의 씨를 말려버리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번 일은 지나쳤소."
이형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말하였다. 전혀 심각한 태도가 아니었다. 그 또한 이번 숙청은 결국 어떤 식으로건 일어났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피로 손을 더럽혀야 한다면, 정면에서 당당히 쳐들어가는 것이 그의 직성에도 알맞았다.
"「삼가 아뢰옵니다. 예기 곡례편에 이르기를 '아버지의 원수와는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고, 형제의 원수를 보고 무기를 가지러 가면 늦으며, 친구의 원수와는 나라를 같이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오늘날의 일이 이와 다르겠습니까? 역적의 혈족을 벌하지 아니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어찌 손을 피로 더럽히고 그 원한을 나날이 키우고만 계십니까?
혹여나 역도들의 혈족들이 후일 이를 핑계로 화를 끼치려 하지는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경전에 이르기를 군자는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기에 화를 입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선비들의 언사를 가로막는 것은 덕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선조들에게서 이어받은 옛것을 멀리하고 오랑캐의 것을 가까이함은 참된 도리라 할 수 없습니다.
문치를 멀리하고 무기와 폭력을 앞세워 나라를 다스리고자 함은 곧 도적 떼에게 나라의 중책을 맡김과 같습니다. 청컨대 폐하께서는 선조들의 옛것을 두루 익히시고 선비들의 언사에 귀를 기울이시며 덕으로서 문치를 하소서.」"
"최익현이라는 언관의 상소요. 뭐, 이미 읽으셨겠소만. 참으로 신랄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이형은 자조하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또한 최익현의 상소가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비들의 언사를 틀어막고,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옛것을 멀리하고, 무기를 앞세워 폭압적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것을 결코 옳다고 할 수 없다. 제아무리 그럴싸한 명분으로 포장해도 그건 독재이고, 폭정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폭정이 아니고서야 근대화는 불가능했다. 결국, 말이 좋아서 근대화지, 서구화이기 때문이다.
근대화를 이루고자 함은 곧 그동안 지켜온 옛 가치를 제 손으로 포기하고 그것을 지키려 하는 이들을 제 손으로 짓밟고서는 서구 열강들의 것을 받아들이라 윽박지르는 일이다.
평화와 안정을 바라는 백성들에게 전쟁과 변화를 강요하는 꼴인데, 그걸 말로 해서 듣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확실히, 신랄하더군요. 그래서, 이 일을 후회하십니까?"
"짐이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족속이었다면 지금 이러고 있겠소? 전혀. 이 또한 필요한 일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이형은 이 일을 후회하지도 않았다. 결국, 조선이 스스로 하지 않는다면 외세가 억지로 윽박질러서라도 이루어질 서구화다.
설령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고 외세와의 교류를 거부하고 고립된다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외세가 총과 대포를 끌고 쳐들어 와 문명개화를 명분으로 조선 땅을 정벌하여 상투를 자르게 하고 그들의 종교를 강요하며 그들의 말과 문물을 익히리라 강요할 게 뻔했다.
지금은 서역인들을 본받을 것을 강요당하는 시대였다. 조선에 주어진 선택지는 처음부터 스스로 변화하는가, 아니면 타의에 의하여 변화하는가?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형은 스스로 변화할 것을 택했다. 그럼 외세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내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잠시 쉬고 계시는 게 좋겠구려. 영 조짐이 심상치가 않소.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뭔가 변고가 터질는지도 모르지. 당분간은 어딘가 으슥한 곳에 숨어계시는 것이 좋겠소."
"흠, 호의를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느긋하게 책을 읽으며 세월을 낚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이하응은 빙긋이 미소지으며 순순히 물러났다. 지금 설령 그가 잠시 궁을 비우게 되더라도, 이형이 벌써 이하응을 내치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결국, 언젠가는 다투게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 두 사람이 갈 길은 멀고도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