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72화 (72/530)

< 출진 >

"어차피 저 이홍장이라는 작자도 이제 시작일 뿐이오. 그대도 알지 않소? 언제나 난세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권신의 배반이었지. 우리 조선도 각오해두는 편이 좋을 거요. 이제부터가 진정한 난세의 시작일 테니까."

"물론입니다.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지요. 우리 조선이라고 저 난세에 휩쓸리지 말라는 보장은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형의 말에 이하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두 사람은 이 또다시 시작된 천명 쟁탈전에 조선이 휘말릴 것을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조선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극동의 소국으로 남을 작정이라면 모를까, 극동의 강국으로 우뚝 서려면 어떻게든 심요를 확보해야 한다. 그런데… 그쯤 되면 베이징은 말 타고서 하루 거리란 말이지.'

이건 이형에게도 떨떠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딱히 베이징을 차지하고서 천자가 될 생각도 없는데, 일단 심요를 차지하면 베이징이 너무 가깝다.

당장 심요 지역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봉천과 베이징 사이의 거리가 대강 한양에서 제주도까지의 거리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한반도의 절반 길이도 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제주도와 한양 사이에는 바다와 산이라도 있지만 봉천에서 베이징까지 지형적 장애물이라고는 요하 하나밖에 없으니, 좋은 말 여러 필만 준비할 수 있다면 정말로 베이징 정도는 일일생활권에 편입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심요를 포기하고 모른 척한다는 선택지도 없었으니 당연히 베이징을 차지하고서 천자가 되려는 중원의 황제병자들에게 조선은 거슬리는 존재가 될 수밖에는 없었다. 조선에서 말 몰고서 남하하기 시작하면 하루 안에 수도가 포위될 판국이다.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편이 이상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베이징을 점령하고서 짐이 몸소 천자가 되는 건 어떻겠소?"

그러니 이형은 장난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렇게 노려질 바에야, 차라리 조선에서 먼저 중원을 통일하고자 하는 야심자들을 치자는 발상이었다.

"그 또한 나쁘지 않겠지요. 물론, 이 나라 조선에 중원 전역을 통치할 여력이 남아있다면 말입니다만."

그러나 이형이 장난스럽게 꺼낸 말에 이하응은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현 조선이 얼마나 무리해 가면서 가까스로 대개혁과 근대화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이하응이였다.

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세도 가문의 역모마저 저지하면서 얻게 된 재정적 여유도 연이은 대개혁과 군비증강으로 바닥나 버린 지금, 조선에 심요를 넘어 베이징을 통치할 여력은 딱 잘라 말해서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단순 점령이라면 지금도 가능하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통치가 불가능했다. 설령 서구 열강들에게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챙긴다고 할지라도 그걸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지조차 미지수였다.

"알고 있소. 그냥 한 번 해 본 말이오. 뭐,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기꺼이 받을 작정이기는 하오만."

이형도 그런 조선의 속사정을 모르지는 않았던 만큼 장난스레 이를 받아넘겼다. 심요까지라면 모를까, 본격적으로 요하 너머의 중원까지 탐하기 시작하면 잘라서 먹는다는 선택지가 없다.

중원의 영토를 탐한다면 무조건 중원이라고 관습적으로 불리는 모든 영토를 점령하고서 그를 통치할 각오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될 민족주의의 시대에서, 본국의 인구와 면적 모두 열 배를 아득히 넘는 신규 영토의 병합은 그 자체로서 자살행위였다.

'그렇게 치면 만주도 사실 그렇게까지 안전한 건 아니지만. 만주는 아직 빈 땅이라는 게 조금 다르지. 이제부터 채워나가야 하는 땅과 이미 가득 찬 땅은 근본적으로 다른 법이야.'

그러나 이형은 그렇다고 중원을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도 없었다. 직접 통치가 불가능할 뿐이지,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사실 직접 통치할 필요 없이 이렇게 간접적인 통치를 하는 것 만으로 조선은 충분히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 이상부터는 과욕이 될 터였다.

"그럼 또 잠시 다녀오리다. 저번과 같이 한양은 잘 부탁드리겠소."

"역시나, 또다시 친정하실 작정이시로군요."

"그야 물론. 이런 일에 가만히 있기에는 몸이 근질거려서 어디 참을 수가 있어야지. 뭐얼, 안심하시오. 저번처럼 몸소 돌격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니. 이번에야말로 구경만 하다가 오리다."

당연하다는 듯이 제복을 고쳐 입는 이형의 모습에, 이하응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자신의 핏줄에서 저런 망나니가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앞섰다.

궁인들은 이를 두고서 이하응이 이형을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수군거렸다. 이하응으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장차 왕이 되기 위하여 엄격히 가르쳤으면 가르쳤지, 이하응은 맹세하건대 저런 망나니가 될 만한 교육은 추호도 시키지 않았다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했다. 이하응은 결국 저 망나니의 아버지였고, 또 교육계였다. 저 망나니 왕이 망나니가 된 것은 결국 크건 작건 이하응 자신의 책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하응으로서는 그저 혹시 자신이 타 먹인 한약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추측할 따름이었다.

'이제 와서 태조 대왕의 피가 눈을 뜨기라도 한 건가. 허허, 웃길 노릇이군. 그간 문약하다는 소리가 두고두고 나왔던 우리 전주 이씨에서 저런 망나니 왕이 나오다니.'

"옥체 강녕히 다녀오십시오, 폐하. 왕자를 만들기 전까지 혹여나 무슨 변고라도 당하신다면 그때야말로 본때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각오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때에는 폐하의 교육계로서도 톡톡히 훈계해드릴 작정이니."

"어이쿠, 무서워라. 이거야 원, 어디 섭정 공이 무시무시해서 살 수가 있나! 그럴 걱정일랑 마시오. 이번 전쟁은 소풍이나 다름없을 테니. 러시아인들과 직접 싸우지 않는 것만으로 이게 어디요?"

이하응의 장난스러운 충고에, 이형은 장난스럽게 답하였다. 그것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충분했다. 이미 서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할지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던 부자였다.

잠시간의 이별에 그리 복잡한 수식어나 애절한 안부 인사는 필요 없었다. 또다시 당연하다는 듯이 다시 만나 당연하다는 듯이 티격태격할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번에 봉천에 다녀올 예정이오. 뭐, 너무 걱정은 마시오. 정월 전까지는 돌아올 테니까. 그저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불렀소…."

궁을 떠나기 전, 이형은 잠시 중전을 만나 이처럼 말했다. 물론 온전히 순수한 목적은 아니었다. 이번에 심요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면 무엇보다도 그녀와 공친왕의 존재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출진 전에 두 사람의 금슬이 나쁘지 않다는 걸 대외적으로 과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폐하와 적으로서 마주치게 된다니 참으로 운이 나쁜 역도들이로군요."

중전은 담담하게 이처럼 답했다. 이형의 이번 출진은 심왕으로서 역도들을 토벌하는 것뿐이라는 의미였다. 혹은, 서태후가 국정을 농단하고 있는 지금의 청의 현실을 꼬집어 서태후와 그 일당들을 청의 공주로서 역도라고 표현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이형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심왕으로서건, 공친왕의 사위로서건 심요 지역만 얻게 된다면 그만이었으니까.

"에헤이, 섭섭한 소리를. 그래서야 짐이 마치 극악무도한 악인이라도 되는 것 같잖소. 짐은 관대한 사람이오. 만일 그들이 스스로 죄를 뉘우치기만 한다면 짐은 기꺼이 저들을 용서할 것이오."

"용서와 처벌은 별개의 것이라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만."

"…쯧."

이형은 작게 혀를 찼다. 역시나 온실 속 화초일지언정 지혜가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이형은 잠시 크게 헛기침을 하여 말을 돌리기로 했다.

"장인… 아니지. 부원군께서는 조금 어떻게 지내시오? 듣자 하니 병을 핑계로 요양 중이라 들었소만."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짐작하신 대로, 그저 병을 핑계로 대고 계시는 것뿐이니까요. 아마 폐하께서 역도들을 벌하고 돌아오실 즈음에는 쾌차하실 테니, 폐하께서는 심려하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크흠."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중전의 말에 되레 말문이 막힌 이형이었다. 그의 이번 생에서는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그는 중전을 대하기가 어려웠다.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돌발발언이 나올지 예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젠장, 답지 않게 애를 먹고 있군.'

이형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깊이 들이쉬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서,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고, 그제야 마음이 진정되어 말했다.

"다녀오리다, 부인."

"…옥체 강녕하십시오. 폐하."

엉뚱한 곳을 바라보며 잠시간의 이별에 인사를 고한 두 사람이었다. 그 풋풋한 모습에 궁인들이 뭐라 뭐라 작게 속닥거리는 걸 무시하고서, 이형은 궁을 나왔다.

"받들어, 총!"

""""충!"""

"음."

그의 앞에는 이번에 새롭게 조련된 시위군. 제1 기병연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전 미국에서 들여온 기병용 소총과 세이버, 랜스 따위로 난잡히 무장한 이들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무엇 하나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없는 이상, 이들이 무엇으로 무장 하는가는 열강들이 어떤 무기를 쥐여 주는가로 결정될 수밖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저토록 난잡히 무장한 겉보기에만 그럴듯한 오합지졸들이 실전에서는 어느 정도의 힘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것만은 이형도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금위영 시절이라면 모를까, 시위군으로 재편된 지금 저들을 앞세워 전쟁을 펼친 적은 없었으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꽤 그럴 싸해졌구만."

그러나 걱정은 없었다. 아직까지 경험이 없다면, 이번 출진을 계기로 시험해보고 또한 수정해보면 그만이니까.

이형은 나지막히 말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제 1 기병연대를 이끌게 된 시위군 대령 한성근이 환하게 웃었다가 다시 표정을 딱딱히 굳혔다. 이형의 칭찬에 반색했다가 뒤늦게 자신의 지위를 자각한 것이다.

애써 표정을 딱딱히 하고 있는 한 대령의 모습에서 이형은 묘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본래라면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서 프랑스군과 맞서 싸울 장군이 인물이 프랑스 기병 대령복을 입고서 머리를 짧게 자르고 있었으니까.

'역사의 아이러니란.'

그러나 이형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자신의 행보로서 변하게 된 역사가 조선에 있어서 보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갔을 지 언정 그 반대는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일본 놈들이 잘랐을 머리고 일본 놈들이 입혔을 서구식 제복이야.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스스로 서구식 제복을 입었는데 그게 무슨 잘못이냐.'

"병사들의 사기는 어떠한가?"

"언제나 최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서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저 되놈들 따위 우리 조선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폐하께 지금 당장이라도 증명해드리고 싶습니다!"

실로 기운찬 대답이었다. 아직 30대 중반 밖에 되지 않은 젊은 대령이었으니 예상 못할 바도 아니었다. 이형이 전생에 이승을 등지던 나이보다도 젊은 대령이었던 것이다. 아직 젊은 혈기가 넘칠 만도 했다.

'역시나. 아직 군관학교에서 1기 졸업생도 배출하지 못하다 보니 일단 되는 대로 인재부터 모았더니 이 모양이군.'

이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30대 중반에 벌써부터 대령을 달고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는 것이 아니었다. 20대 후반에 사단장을 다는 경우도 왕왕 벌어지는 게 전쟁이었다. 크고 작은 전투가 북방에서 계속되고 있는 지금의 조선에서 30대에 대령을 다는 인재가 나와도 이상할 건 없었다.

문제는 그가 최근 들어 보고 있는 영관급 장교들의 평균 나이가 30대 언저리였다는 것이다. 부사관은 20대 중반, 위관급은 1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 장성급은 50대에서 70대.

부사관들과 장성급을 제외하면 도저히 정상적인 군대라고 하기 어려운 나잇대 분포였다. 계급만 그럴싸하게 맞췄을 뿐 일단 기존에 있던 무관들과 새로이 무과에 급제한 인재들을 되는 대로 채워 넣었을 뿐인 군대였으니 필연적인 일이었다.

'하기야 걸음마도 아직인데 뭘 기대해. 적어도 군관학교 1기 졸업생들이 본격적으로 위관 자리를 채워 넣기 시작해야 뭐가 제대로 굴러가겠지.'

"굳이 증명할 필요가 있던가? 청군은 더 이상 우리 조선군에 대적할 수 없다는 건 온 천하가 알고 있는데."

이형은 그러나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서 있는 힘껏 허세를 부렸다. 그 모습에 감명을 받은 듯 한성근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한성근으로서는 이제 갓 사춘기가 한창인 소년왕이 어엿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감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눈앞의 소년왕이 소문 속 평양성 전투의 전쟁영웅이라는 걸 다시금 확신하게 된 것이다.

"시정하겠습니다!"

"아니, 시정할 것 까지야. 됐으니 어서 준비하시게. 알겠나? 우리 조선군의 이번 전쟁 목표는 심왕과 공친왕 전하의 이름으로 베이징의 역도들을 토벌하는 일이네. 결코 백성들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네, 알겠습니다!"

이형이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활기찬 대답을 보여주는 한성근 대령의 모습에, 이형은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한 여정이 될 것만 같은 안 좋은 예감이 그를 덮쳐오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언제나 그를 보위 하던 허계는 이미 간도에 주둔 중이었다. 적어도 간도까지 출진하는 동안에는 한성근 대령의 호위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이거 귀찮게 되었군. 하지만….'

"역도 토벌, 이라."

푸히힝-.

허리춤에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이형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한성근 대령의 지시 아래 제 1 기병연대의 병졸들이 하나 둘씩 출진할 채비를 하는 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뜨거운 콧김이 그의 손등을 간질거렸다.

이형은 슬쩍 감상에서 깨어나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그의 앞에는 그의 체구에 10배는 족히 되는 듯한 거대한 검은 군마가 힘찬 콧김을 내뿜으며 자신의 어린 주인이 올라 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 프랑스에서 조선에 종마 100마리를 선물하면서 함께 이형에게 선물로 바친 유럽의 군마였다. 과연 성질 사납기로 유명한 프랑스 기병대의 군마라는 것인지 성질머리도 사납기 그지없었다.

물론 옛날이야기일 뿐이었다. 이 조막만 한 주인이 얼마나 성질머리 더러운지를 경험을 통해 알고 있던 군마는 조용히 무릎을 굽혀 주인이 올라타기 쉽도록 자세를 취하였다.

이형은 앞으로 그가 타게 될 이 흑마의 총명함을 칭송하는 의미에서 마음 속으로 '바둑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명분 하나는 좋군."

비릿한 미소를 띠며, 이형은 바둑이의 등 위에 올랐다. 그리고 올라타는 즉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말을 몰았다. 그 뒤를 따라 시위군 제1 기병연대도 뒤따르기 시작했다. 이미 한번 전장에서 왕을 보위하여 전장에 나선 바 있던 기사들은 재빠르게 소년왕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목표는 심왕의 적법한 도읍 봉천.

아니, 어쩌면 베이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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