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징 약탈 >
그러나 상황은 이형의 예상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서태후와 그 애송이 황제 놈이 보이지 않는다고?"
"네, 네이!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이미 베이징을 빠져 나와 멀리 도망친 듯하여…."
이형이 짐짓 기분이 좋지 않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자, 베이징의 궁인들은 허리를 숙이며 벌벌 떨었다. 공친왕의 이름을 빌려 베이징에 입성하였다고 하지만, 결국 이형은 이국 조선의 왕이었고 그는 필연적으로 정복자로서 두려움을 살 수밖에는 없었다. 이형의 대의명분 또한 역적 서태후를 쳐 청의 천명을 바로 세운다는 것이었던 만큼 더더욱 그러했다.
지금, 이 자금성에 있는 자들은 크든 작든 서태후와 결탁한 이들이었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이미 모두 죽거나 낙향한 이후였으니까. 이형이 서태후에 결탁한 자들을 뿌리 뽑겠다면서 본격적으로 숙청의 칼날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성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 하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가. 그거 유감이구나."
다만 그건 불필요한 걱정이었다. 어차피 공친왕의 이름을 빌린 것 또한 그저 베이징에 손쉽게 입성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던 이형이었다. 그가 굳이 '남의 나라' 청을 위하여 그들 대신 숙청의 칼을 휘두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서태후와 황제가 도망친 것 또한 그러했다. 만일 그가 장차 베이징을 점령하고 이를 조선의 영토로 만들고자 했다면 이는 분명 큰일이겠지만, 그는 처음부터 베이징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이형은 다만 유감스럽다고 했을 뿐, 크게 성을 내거나 조급해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가 목표로 한 것은 처음부터 베이징의 점령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처음부터 목표는 약탈이었지. 그럼 우린 돈이나 챙겨서 도망치면 되는 거야. 뒷감당은 다른 놈들에게 떠넘기면 그만이고.'
이형의 목표는 처음과 비교하여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는 베이징에서 은화 1000만 냥을 홈치려 생각했었고, 그건 자금성의 황좌에 앉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은화 1000만 냥보다 조금 더 많은 재화를 탐내고 있기는 했다. 최저한도로 1억 냥 이상의 거금을.
다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베이징을 불태우고 백성들에게서 물건을 약탈하거나 하면서 악명을 쌓을 생각도 없었다. 그는 베이징의 시민들에게 저주 당하고 싶은 생각일 랑 추호도 없었다. 딱히 그가 선인이라기 보다, 시민들에게서 무언가를 빼앗는 건 근시안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민들에게서 물건을 빼앗고 엄한 짓을 하면 우리 조선에 악감정을 품을 테고 우리 조선에서 만든 물건들도 안 사주려고 할 텐데 내가 그 짓을 왜 해? 그거야말로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격이지.'
"베이징의 백성들에게 고하라. 그저 평소대로 생활하면 된다고 말이다. 동요할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짐은 머지않아 이 베이징을 떠날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면 된다.
그리고 당상관 이하의 관료들에게는 역모죄를 묻지 않겠다. 설령 서태후 그 마녀와 놀아난 자라고 해도, 짐이 이해할 법한 이유를 댈 수 있다면 용서해주겠다. 짐은 손에 피를 묻히려 베이징에 온 것이 아니니라."
따라서 이형은 이와 같이 포고령을 내려서 베이징의 시민들을 안심 시키고 조선을 침략자가 아닌 혼란스러운 정국을 안정 시키려 온 이들로 포장했다. 효과가 얼마나 있건 간에, 일단 이러한 포고령을 내리면 후일 뒷말이 나올 일도 적었다.
"네, 네에!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실로 감사합니다! 만세! 대조선국 만세!"
이형이 그런 포고를 내린 다음에야, 자금성의 궁인들과 관료들은 안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서태후의 측근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이해할만한 이유를 댈 수 있다면 용서해주겠다는 건 결국 뇌물을 바치라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그날로 앞다투어 서태후가 버리고 떠난 베이징의 고관들은 이형과 조선군 막사를 찾아와 그들의 금은보화를 한가득 바치면서 목숨을 구걸했다.
그들 모두가 서태후가 있을 적에는 목을 꼿꼿이 펴고 백성들의 고혈을 빨며 살아온 탐관오리들의 정점이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원하시는 거라면 뭐든지 드리겠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노모께서 이 못난 불효자가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라. 옳다구나. 마침 잘 되었도다. 좋다, 네놈의 전 재산을 내놔야겠다."
"저, 전 재산…!"
"뭘 그리 놀라고 있느냐. 내 일찍이 말하였을 터인데? 짐이 이해할 법한 이유를 댈 수 있다면 용서해주겠노라고. 짐은 어차피 머지않아 베이징을 떠날 것이고, 너는 앞으로도 베이징에서 권세를 누릴 터인데, 그까짓 재산 따위 다시 모으면 그만이 아니더냐?"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한참을 고민하던 탐관오리들은 대부분 그들의 전 재산을 헌납하는 길을 택했다. 이형이 스스로 말한 대로, 재산은 다시 모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이형이 떠나고 그들의 권력을 다시 찾게 된다면 얼마든지 되찾을 수 있었다. 권력은 재화를 모으는 법이니 말이다.
"그,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이건 순 날 강도가 아닙니까! 차라리 죽이려면 죽이십시오. 저는 절대로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오호, 이놈 참. 맹랑한 녀석이로구나. 감히 짐에게 아득 바득 대드는 꼴이 참으로 가엽 도다. 여봐라. 저 건방진 놈을 벌거 벗겨서 멍석으로 말아 저잣거리에 던져버려라."
"네이-."
물론 그들 중 끝까지 재물욕을 버리지 못하고 저항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경우에는 이형은 굳이 그의 손을 더럽힐 것도 없이 벌거벗겨 멍석으로 돌돌 만 다음 베이징의 시민들에게 던져주었다. 그 후에 그들은 결코 편하게 죽지는 못했다.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운 건 예삿일이었고, 죽은 다음에도 생간을 빼가 잘근잘근 씹어대거나 남은 살점들이 푸줏간에 내걸렸다.
그러고 나면 피를 본 백성들도 눈이 돌아갔다. 그들은 무기를 들고서 탐관오리들의 저택으로 몰려들었고, 그들의 집을 불태우고 가산을 약탈하고 일가를 몰살했다. 결국, 탐관오리들은 가진 재산을 모두 바치고서 조선군 막사로 피신하는 수밖에는 살아남을 길이 없었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이런 미친, 나라가 크니까 부정부패도 자릿수가 다르다 이거냐? 김좌근 놈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우라질 놈들 같으니라고. 정말로 해 처먹기는 오지게도 해 처먹었군."
그렇게 쓸어 담은 재화를 한곳에 모아두니 참으로 장관이었다. 베이징의 탐관오리들로부터 거둬들인 장신구, 술, 쌀가마니, 도자기, 은화, 동화, 고서, 비단옷 등 좌우지간 값이 나갈만한 것들은 모두 모아 한군데에 모아 뒀더니 작은 뒷산이 하나 만들어졌다. 정확히 얼마나 값이 나갈지는 짐작조차 불가능했다. 아무튼, 그동안 조선이 만져본 재화들과는 자릿수가 다르리라는 것만 막연하게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형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라에 이토록 돈이 많았는데, 그까짓 은화 200만 냥이 아까워서 한족도 아니고 만주족 2만 명을 버리려고 하다니. 그것도 만주 황실이 말이다.
"나라가 망할 만했군. 아니, 아직 망한 건 아니다만. 이쯤 되면 자업자득이라는 말조차 아까운걸. 여봐라, 이 쌀가마니들과 술을 풀어 온 베이징의 백성들과 짐의 병사들이 먹을 수 있도록 잔칫상을 차리도록 하라. 혹여나 잔칫상에 차릴 술과 음식이 부족하거든 여기 비단옷들을 가져가 백성들에게 사들이도록 하라. 혹 잔치를 돕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동화를 나눠주겠다 하여라."
"""하명하신 대로 하겠나이다, 폐하."""
이형은 조선까지 나르기 어려운 술이나 쌀가마니, 비단옷 등의 재화들을 긁어모아 그것으로 잔치를 열었다. 베이징의 화약창고를 열어 화약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 폭죽을 만들도록 하고, 산더미 같이 쌓아둔 비단을 풀어 사자탈 따위의 인형 옷을 만들기도 했다. 단지 베이징 시민들의 민심을 사로잡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렇게 화려한 축제로 혼을 쏙 뺀 다음 탐관오리들로부터 뜯어낸 금괴, 도자기, 장신구, 은화와 동화 등의 주요자산을 조선으로 실어 나르기 위함이었다.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언제나 돈이 부족하던 조선이었다. 뜻하지 않게 손에 넣게 된 금은보화들은 일단 되는대로 모조리 손에 넣어둘 필요가 있었다.
'따지고 보면 도둑질이긴 한데… 뭐, 나쁜 놈들 재산 훔쳐다가 좋은 데 쓰면 그게 바로 의적 홍길동 아니겠나. 그래도 나는 저놈들이랑 다르게 황실 재산이랑 청나라 국고에는 손 안 댔는데 뭘. 이만하면 착한 도둑인 거지.'
이형은 그렇게 자기 합리화했다. 사실 이는, 베이징에 입성한 명분상 청나라 국고나 아이신기오로 황실 자산에 손대기 힘들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더 컸다.
공친왕의 이름을 빌려 청의 천명을 바로잡겠다 하고서 청의 국고를 털어다가 제 배를 채우면 이형은 서태후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역적이었다. 이형이 그런 걸 신경 쓰는 인간은 아니었으나, 백성들에게는 달랐다.
이형에게 호의적이던 베이징의 민심이 단숨에 적대적으로 변할 위험이 있던 것이다. 그건 처음부터 빠르게 한탕 하고서 베이징에서 물러날 작정이던 이형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었다.
장차 베이징의 시민들이 조선에 악감정을 품게 되면 조선의 상인들이 베이징에서 곤욕을 당할 위험이 너무나도 컸던 것이다.
"서태후의 보물창고는… 아아, 젠장. 더럽게 아깝네. 하지만 이쯤이 물러날 최적의 시기다. 괜히 더 욕심냈다가 본전도 못 찾을 바에야 슬슬 빠져야겠지. 여봐라. 서역의 공사들을 불러와라. 긴히 전할 말이 있다고 해두고."
이형은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도 체념하고서 물러나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형이 서역의 공사들을 부르자마자, 그들은 앞다투어 자금성에 머무르고 있던 이형을 찾아왔다. 하나같이 의아함과 경악, 그리고 기대와 경계가 뒤섞인 시선이었다.
그들로서는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심요에서 미적거리던 조선이 도리어 이홍장보다도 먼저 베이징에 입성하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형으로서는 그가 빨랐던 것이 아니라 이홍장이 느렸던 것이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들은 이형이 무슨 마술을 쓴 것인지 해명을 요구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형은 설명할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어차피 설명한다고 해봤자 저들이 알아들을 것이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 아프게 설명하는 건 이형의 성미에 맞지를 않았다.
'영국, 미국, 프랑스, 러시아. 뭐, 모일 녀석들은 전부 모였네.'
이형은 차근차근 자리에 모인 공사들을 살펴보았다. 그들 각각이 이형을 바라보는 시선은 전부 달랐다. 프랑스 공사는 희희낙락하고 있었고, 영국 공사는 꺼림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국 공사는 조선을 다시 봤다는 듯이 놀라워하고 있었고, 러시아 공사는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어딘가 기대 어린 시선으로 이형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자신들 덕분에 조선이 무사히 베이징에 입성할 수 있었으니, 자신들의 지분을 내놓으라는 은밀한 압박이었다.
이형은 새삼스레 서태후의 보물창고에 손대지 않았던 것을 안심했다. 열강들의 몫을 남겨두지 않았다가는 조선이 이번에 챙긴 것들까지 모두 열강들에게 빼앗길지도 몰랐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참으로 반갑소. 오늘 이렇게 그대들을 부른 것은 종전 이후의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오. 먼저, 이것 하나만은 밝혀두겠소. 우리 조선은 베이징에 그리 오래 주둔할 생각이 없소."
이형의 말에 열강들은 일제히 안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니, 안심하기보다는 그럼 그렇지 하는 태도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마치 제 주제를 알아서 다행이다고 말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 노골적인 모습에 이형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에 비하면 나아졌어도, 여전히 열강들이 조선을 깔보고 있는 시선은 여전했다.
"먼저 한 가지 귀국 불란서에 부탁드릴 것이 있소. 우리 조선국 한양에서 머무르고 계실 공친왕 전하를 이곳 베이징까지 모셔와 주실 수 있겠소? 그렇게 해주신다면 더없이 기쁠 것이오."
"물론입니다. 조선국은 우리 프랑스 제국의 친우입니다. 어찌 도움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이형이 부탁함과 동시에 프랑스 공사는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은 베이징에 오래 머물지 않을 거라 하였고, 조선에 있는 공친왕을 베이징까지 데려오는 역할은 프랑스군에게 맡겼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분명했다. 조선군은 인제 그만 프랑스군과 바통을 교체하여 물러날 것이며 이후 베이징의 통제권은 프랑스군이 이어받는다는 뜻이었다.
요컨대 장차 공친왕을 내세워 수립될 새로운 조정은 프랑스의 괴뢰정권이 될 예정이라는 뜻이었다. 그리 많은 것이 필요 없이, 이것 하나만으로 프랑스는 이번 전쟁에서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낸 셈이었다. 화북 일대가 통째로 그들의 괴뢰정권이 되었으니 말이다.
자연히 다른 열강들의 표정은 질투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어려웠다. 이유야 어쨌건, 현시점에서 베이징을 점령하고 있는 건 조선군이었으며 그들이 선택한 프랑스는 무시할 수 없는 식민제국이었다. 이의를 제기했다가는 극동에서의 식민이권을 두고 프랑스와 사생결단을 내야 할 터였다.
"그거 감사한 말씀이구려. 그래서 말인데, 이번 기회에 우리 조선과 정식으로 동맹을 맺는다면 어떻겠소? 만일 이를 받아들여 준다면 우리 조선은 결코 귀국 불란서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며 조선의 친우를 위하여 헌신을 다할 것이오."
"참으로 감사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답을 돌려드리기에는 너무 중대한 사안인 듯합니다. 우선 폐하의 뜻은 곧장 본국에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역시나 여기서는 한 발자국 물러나나.'
최대한 예의를 갖춘 거절 의사를 전해 듣고서, 이형은 힐끔 러시아 공사를 바라봤다. 그 이유야 뻔한 것이었다. 북독일과의 전쟁 가능성이 날로 커지면서 프랑스도 러시아와의 외교를 재고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결국, 식민 이권보다는 본국이 소중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물론 그렇다고 프랑스가 조선을 버릴 리는 없었다. 일전에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조선과 전쟁을 시작하려 하자 즉각적인 대응에 나선 것처럼, 이미 프랑스에게도 조선은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운 존재가 되고 있었다.
그런 심정을 대변하듯 프랑스 공사는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선의 손을 들어 주자니 러시아와 무턱대고 적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러시아의 손을 들어 주자니 조선이 아까웠다. 그러니 우선 조선을 지원하면서도 직접적으로 동맹을 맺기는 꺼려하던 것이다.
러시아의 이그나티예프 공사는 이형의 시선을 받고서 대담하게 웃었다. 꼴좋다고 말하는 듯했다. 이형은 눈살을 찌푸리고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 여기에서 끌어들여야 할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