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권분배 >
"귀국 영길리에게는 부탁이 있소. 짐은 중화제국과 싸울 의사가 없소. 그들과의 화친을 주관해주지 않겠소? 만일 그렇게 해준다면 채관의 변제를 겸하여 서태후 그 마녀가 두고 떠난 금은보화들을 양도할 의사가 있사오만."
"실로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기꺼이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우리 대영제국은 극동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헌신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형의 말에 그제야 영국의 토마스 공사는 환히 미소지었다. 영국 또한 눈과 귀가 있는 만큼 서태후가 얼마나 많은 금은보화를 쌓아뒀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러시아를 눈앞에 두고서 조선과 중화제국이 전쟁을 벌이는 것 또한 영국으로서는 영 마땅치 않은 전개인 만큼 그들이 이형의 호의를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아닌 말로, 조선이 앞으로 10년간 쌓게 될 국채보다 서태후의 보물창고 하나가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조선이 중화제국과 화친한다면 중화제국은 자연히 영국의 세력권으로 편입된다. 이홍장은 영국의 후원을 받아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화북을 가져가고, 영국이 강남을 가져간다면 영국으로서도 나쁜 장사는 아니었다.
'물론 그것 만으로는 부족하고….'
"또, 짐이 그대들 영길리에 한 가지 더 부탁할 것이 있소. 아마 지금쯤 우리 조선의 유학생들이 그대들 영길리의 대학에 도착하였을 것이라 생각 하오만."
"네, 그 말씀대로 입니다. 그들 모두 우수한 학생들이지요. 필시 장차 조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형이 뜸을 들이자, 어딘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영국의 공사는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불필요한 경계였다. 적어도 아직까지 이형은 영국의 이익에 반하거나 하는 모습을 보여 영국의 적의 내지 경계를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별 것 아니오. 그들과는 별개로 우리 조선 땅에 귀국 영길리의 학자들을 교수 자격으로 초빙하고 싶소. 머지않아 백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대학을 세워 학문을 익히고자 하는데 이를 가르칠 이들이 부족하여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요.
이는 비단 영길리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경들 모두에게 부탁하는 바이기도 하오. 보다시피 이번 전쟁으로 조선은 당분간 원 없이 써 볼 수 있을 만큼 넉넉히 벌었소. 수당과 대우는 섭섭하지 않게 해주겠소."
이형의 말이 끝나고 서야, 영국의 공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입꼬리를 비틀며 음흉한 미소를 떠올렸다가 이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동요를 필사적으로 숨겼다. 이는 영국만이 아니라 미국과 프랑스의 공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곧 조선에 친영, 친프, 친미 인사들을 사회 깊숙이 심어둘 절호의 기회였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무엇보다도 이번 전쟁에서 벌었으니 나쁘지 않게 대우해주겠다 솔직히 밝힌 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이는 조금 확대 해석 하자면 이번 전쟁에서 번 돈을 이들 3개국에게서 인재들을 초빙해 오거나 이것저것을 구매하면서 사용하겠다는 뜻이나 다름 없었으니 말이다. 그들이 비록 약탈한 것은 아니더라도, 조선을 통해 상당한 규모의 사업을 수주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이들 3개국은 당초 기대하던 소기의 성과는 얻은 셈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대영제국의 학문적 성취는 유럽 제일이라 자부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이던 간에 폐하께서는 손에 넣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대영제국의 학문적 성취는 실로 광대하며, 또한 바다와도 같이 깊으니까요."
"섬나라 우물 안 개구리들이 입만 살았군요.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프랑스 제국은 조선에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저희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이 조선 곳곳에 사립학교를 세운 것으로 전해 듣고 있습니다.
기왕이면 검증된 학자들이 가르치는 것이 조선의 백성들에게도 마음이 놓이지 않을까요? 우리 프랑스 제국의 교육 제도는 유럽 제일이라고 자부합니다."
"개구리라! 하, 정말이지 누가 누구보고 개구리라는 건지."
"말 다했습니까, 로스비프?"
'야, 잠깐. 너희들 내 앞에서 싸워도 되는 거냐.'
이형은 돌연 자존심 대결을 시작한 영국과 프랑스의 공사를 차디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일부러 이런 구도를 어느 정도 의도하고서 말을 꺼낸 것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왕이 보는 앞에서 꺼리는 기색도 없이 말다툼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가 찼다.
'하기야 뭐, 저 치들도 하루 이틀로 해결될 원한이 아니긴 하지. 아무튼 이걸로 전쟁 끝나고 나서 보편 교육에 시동 걸 기반 정도는 마련된 셈인가.'
물론 본격적인 보편 교육이 시작 되려면 교사들의 숫자부터 충당해야 할 테고, 신식 교육을 받은 교사들이 충분히 보충 되려면 못해도 10년은 더 필요했다. 하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하였다. 그동안은 재정적 여유가 없어서 무리였지만, 재정적 여유가 생긴 지금부터라도 시작해 두지 않으면 백년 후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형은 교육을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다.
"그대들 미리견에게는 일찍이 수주하였던 공사를 확장하여 봉천과 목포를 기존 구간에 연결하고 채광기술을 협력 받고 싶소. 그리고 이번 기회에 못해도 조선 전역에 걸쳐 5000개 이상의 학교를 세우고자 하는데, 그 공사 수주를 귀국 미국에 주문하고 싶소.
학교를 세우고자 하면 엄청난 양의 시멘트가 필요할 테니 이 공사 수주에는 시멘트 공장을 세우는 것 또한 포함 되어 있소. 적절한 부지를 물색해 볼 테니, 그 또한 협력 부탁드리리다."
"그야 물론입니다. 폐하의 혜안에는 언제나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미합중국은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대충 도자기랑 동화랑 은화 전부 처분하면 되겠네. 앞으로 은화는 계속 가치가 떨어지기만 할 테니, 이번 기회에 모두 처분해 버릴까.'
이형은 앞으로 장차 금의 가격이 점점 오르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 이 시기 열강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 무렵 개최된 유럽 통화 회의에서 금본위제가 채택되면서 각국이 보유하고 있던 은을 대거 시장에 풀면서 은의 가격은 매일 같이 폭락하고, 반대급부로 금의 가격은 매일 같이 올랐다.
미국에서 채광기술을 협력받고자 하는 건 운산 금광산의 개발을 본격화하기 위함이었다. 집권과 동시에 광산업을 장려하면서 이 무렵에 와서는 이미 상당한 양의 금이 산출되고 있던 운산 금광산이었지만, 열강들이 증기기관을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뽑아내는 것에 비하면 양이 극히 적었다.
어차피 이 시기의 금본위제는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었다. 언젠가 올라탈 수밖에 없다면, 하루라도 빨리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는 것이 국운을 위하는 길이었다.
'슬슬 내전 기간 한창 흉흉하던 전쟁 인플레도 가라앉았을 테고 성장이 본궤도에 오를수록 달러의 가격은 오르기만 할 테지. 미국과는 경제적으로 깊게 맺어질수록 좋아.'
이형은 잠시 이번에 베이징에서 긁어모았던 금은보화들을 떠올렸다. 그동안 조선이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거금이었다. 관료들도 차마 그게 다 합하여 얼마쯤 되는지 파악하지 못하여 그냥 작은 산봉우리가 만들어졌다고밖에 표현하지 못했다. 그만한 재화가 있었으니 한때 중원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우쭐거렸던 것이라고 이형은 납득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는 아니었다. 앞으로도 중원은 계속하여 그들의 금은보화들을 세상에 토해내야만 할 것이다. 이번에 이형이 한 일은 중원이 금은보화를 토해내는 창구 중 하나로 조선을 추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의 힘을 빌려 제위에 오르는 이상, 공친왕은 계속하여 조선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조선도 한동안은 금은보화를 계속하여 세상에 토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선으로 흘러간 금은보화도 그 끝에는 서구 열강들의 호주머니를 채워주는 것이다.
'그게 뭐 어때서?'
이형은 대담하게 웃었다. 처음부터 조선 내부의 자원과 재화만으로 근대화를 진행하는 건 불가능했다. 조선이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어딘가에서 자원과 재화를 끌어올 필요가 있었고, 조선은 이번 전쟁을 계기로 중원이라는 지갑을 손에 넣게 되었다.
서구 열강들에게 금은보화를 바치게 되는 것이 뭐 어떻단 말인가. 어차피 기술적으로도 산업적으로도 한없이 뒤처진 조선이었다. 기술에서 뒤처져 있다면 그 격차는 돈이나 자원으로 메울 수밖에 없고, 산업에서 뒤처져 있다면 경제가 굴러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해외에서 들여오는 수밖에 없다. 그건 21세기에 와서도 변하지 않았다.
'요는 결국 돈만 있다면 기술적 격차는 언젠가 메워진다는 것이고, 언젠가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거지. 그거면 된 거 아니겠어? 자본주의 만세다, 만세야. 부족한 건 돈으로 사 오면 된다!
캬아, 멋져부려! 이제부터, 우리 조선은 너희 러시아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부자다! 스파시바, 따바라쉬! 쎼쎼, 서태후! 감사합니다, 만력묘 지기 놈들아! 이제 중원의 절반은 우리 조선의 것이나 다름없다!'
이형은 낄낄 웃으며 러시아 공사 이그나티예프를 마지막으로 쳐다보았다. 어딘가 께름칙한 기운을 느낀 듯, 그는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웬 애송이가 비웃는 눈초리로 실실 웃고 있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만무했다. 이형도 그걸 자각하고 있었지만, 이형은 굳이 그걸 숨기지 않았다.
러시아는 적성국이었다. 이번에야 영국과 프랑스의 압력에 물러났지만, 이들의 압력이 조금만 약해지더라도 러시아는 조선이 이번 전쟁에서 챙기게 된 모든 이권에 이의를 제기할 터였다. 조선이라고 그걸 순순히 내놓을 수도 없으니, 두 나라를 기다리는 건 언제나 전쟁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안되지.'
이형은 잠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자신을 향하여 열강들의 시선이 쏠리고 있는 걸 느꼈다. 그들 또한 조선이 러시아를 상대로 어떤 거래를 제시할지 기대한 것이다.
이형은 담담한 목소리로, 고요하게 말했다.
"제안이 있소. 신장과 몽골에서의 귀국 노서아의 지배적인 이권을 인정하리다. 그 대신, 아무르강 이남 만주에서 즉각 철퇴할 것이며 심요를 포함한 만주 전역에서의 우리 조선의 지배적인 이권을 인정하시오. 그것이 거래 조건이요. 어떻소, 받아들이겠소?"
이그나티예프 러시아 공사는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
"만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이그나티예프 공사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말을 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이형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를 빙 둘러싸고 있는 열강들의 시선을 살피고 있었다. 이번 원정에서의 대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러시아는 조선을 경시하고 있던 것이다.
러시아는 여전히 러시아가 마음만 먹는다면 조선 정도야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확신하는 듯 보였다.
'뭐, 그야 그건 아직은 사실이겠지.'
이형은 웃었다. 일부러 소리를 내어가며 킥킥 웃어댔다. 그제야 이그나티예프 공사의 시선도 이형을 향했다. 분노 어린 시선이었다. 만일 지금 이 자리에 이형과 이그나티예프 공사 두 사람만 있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험한 말이 오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열강들의 앞에서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아직 너희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수로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건 내 자존심이 인정 못 한다. 나를 봐라, 이 불곰 놈들아. 영국이니 미국이니 프랑스가 아니라 나를 보라고. 너희 적은 이 몸이시다. 우리 조선이다. 우리들도 너희를 볼 테니 너희도 우리를 봐라.'
이형은 서슬 퍼런 눈빛을 빛냈다. 피바람이 몰아치는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자만이 낼 수 있는 흉흉한 살기였다. 그 기세에 눌려 이그나티예프 공사는 무심코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추태를 깨닫고서,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에 이형은 헤벌쭉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라. 그거야 두말할 것도 없는 일 아니겠소? 지금까지의 대치상황이 계속될 뿐이지. 그리고 지금 우리 양국의 긴장 상황은 언젠가 필연적으로 극동에서의 대전쟁을 야기하게 될 것이오. 그건 아무래도 바람직하지 않잖소?"
"그러니 양국이 전쟁을 치르기 전에 합의하자, 이 말씀입니까."
"그렇소. 만일 그대들이 진정으로 극동의 평화를 위하고 있다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겠지. 안 그렇소?"
이형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모습에 이그나티예프 공사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단번에 이형의 노림수를 눈치챈 것이다.
'이 애송이가…!'
이형은 러시아가 이미 한차례 봉천조약을 어기고 전쟁을 일으키려 했다는 점을 부각해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건 러시아로서도 뼈아픈 실책이었다. 만약 서태후가 그리 간단하게 정보를 누설할 줄 알았더라면 그들은 처음부터 서태후와 손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현 상황에서 극동의 평화를 위협하는 적은 러시아였고, 조선은 그런 러시아에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로서는 결코 그 손을 마주 잡을 수 없었다. 물론 몽골과 신장에서의 이권은 매력적이다. 신장과 몽골마저 손에 넣는다면 그때야말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전역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영국령 인도에 본격적으로 압력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결국, 그래봤자 몽골과 신장은 내륙이었고, 바다로 뻗어 나갈 수 있는 만주와는 비교를 불허했다.
"그렇다면 이미 아무르강 이남까지 이주한 저희 러시아의 백성들은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러시아의 백성들은 마땅히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야 옳습니다. 조선의 백성이 조선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미 아무르강 이남까지 남하한 저희 러시아 시민들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러시아 제국은 결코 만주 진출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결국에는 민족주의였다. 이 무렵 범 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발칸반도로 진출하려 노력하던 러시아에는 흔하디흔한 개념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조선도 할 말이 딱히 없었다. 이미 앞선 조청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서 만주에 대한 이주와 만주 내 조선인 마을들에 대한 통치권을 받아낸 조선이었다. 여기에서 러시아의 명분을 부정하기에는 조선 또한 찔리는 구석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이렇게 풀릴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러시아가 맨입으로 만주를 포기할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결국, 이건 전쟁으로서 결판을 지어야지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말이 통하지를 않는구려. 참으로 유감이오. 평화를 위한 길이 왜 이렇게도 멀기만 한지, 안타까울 따름이오. 그럼 예정했던 대로 이듬해 만주의 둥베이 평원에서 결판을 보도록 합시다. 짐은 우리 조선의 정병 1만 명을 대동하도록 하겠소. 귀국에서도 1만 명의 정병을 가려 뽑도록 하시오. 양국에서 당당히 결투로서 승부를 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