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주의 결투 >
"폐, 폐하!"
놀라서 언성을 높인 것은 프랑스의 공사였다. 가만히 넘어갈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만주에서 양국에서 1만 명씩 가려 뽑아 단판 승부라니. 이건 조선의 유일한 승기를 없애버리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극동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조선이 유일하게 우위를 잡을 수 있는 부분이 바로 물량이었다. 그런데 1만 명 대 1만 명의 정병으로 단판 승부를 본다면 순수하게 병사들의 질과 운용 전술로 승부를 봐야 한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는 언사가 아니었다. 거기에 결투라니. 한창 기사도의 로망이 유행하던 중세 시대 이후로는 군대 간 결투 따위 이뤄진 적 없다. 그리고 중세 시대에도 영지 간 결투라면 몰라도 국가 간 결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조선의 유일한 승기를 지워버리는 실책이라고 여긴 것이다.
"짐이 다 생각이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그러나 이형은 정작 여전히 느긋한 모습이었다. 그 나름대로 승기가 있어서? 물론 그것도 있을 것이다. 조선에게는 개틀링 포가 있고, 개틀링 포 한문 한문의 화력은 한정되어있는 만큼 아예 양측에서 동원 가능한 병력들을 한정 지을 수 있다면 개틀링 포가 끝까지 급탄 불량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확실하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물론 그 급탄 불량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전제 부터가 상당한 천운을 전제로 한 계획이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형이 꾸민 일 중 천운이 따르지 않으면 곤란에 처하는 계획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이형은 이번에도 자신에게 천운이 따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이형을 기쁘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그래, 인제야 이쪽을 바라보는구먼. 어떠냐. 약이 올라서 죽겠지? 낄낄낄! 자아, 여기까지 도발 당하고서 물릴 거냐? 못하겠다고 거절할 테냐? 아니, 너희들이라도 그건 못할걸!
가능하다면 말로 좋게 좋게 넘어가자고 한 건 나다. 너희들은 끝내 그건 못하겠다고 했었지. 그럼 정정당당하게 결투로 승부를 보면 되는 거 아니겠나? 설마, 러시아의 신사들에게는 그 정도 담력도 없는 건가?'
이형은 히죽히죽했다. 반쯤은 고의였다. 이형의 도발로 우선 이그나티예프 공사를 낚지 않으면 러시아라는 대어를 낚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기에서 러시아를 오도 가도 못하게 확실히 낚아둘 작정이었다.
그 모습에 이그나티예프 러시아 공사는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 지나친 분노에 얼굴은 시뻘겋게 물들고 콧수염은 파르르 떨렸다. 빠득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머리에 징징 울려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만큼 그는 분노를 차마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극동의 노란 원숭이 놈이 뭐가 어쩌고 어째…!'
이형의 제안은 분명 러시아에 있어서 유리하기 그지없는 제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그나티예프 공사는 분노를 멈출 수가 없었다. 조선이 러시아에 아량을 베푸는 형식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량은 강자가 약자에게나 베풀던 것이 아닌가? 울화가 치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러시아가 먼저 요구하는 것이었다면 모른다. 조선에 먼저 이런 제안을 받으니 이그나티예프 공사로서는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그러나 거절할 수도 없다. 이걸 거부하는 순간 전쟁이고, 그럼 러시아는 이제 피할 수 없이 극동의 평화를 깨는 주범으로 지목받게 된다.
이미 극동에 동원 가능한 모든 전력을 전개하고 있는 프랑스와 영국이었다. 이런 와중에 러시아가 먼저 전쟁을 시작한다면 조선이 문제가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블라디보스토크가 불타오를 판국이다. 울화가 치민다고 무턱대고 거부할 수도 없는 것이다.
"아니면, 짐과 극동도독 두 사람이 승부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려. 뭐, 조금 더 배려해 준다면 동시베리아 총독도 괜찮소. 괜히 애꿎은 병사들이 죄 없이 죽어가는 것도 가엽지 않소? 최소한의 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다면 양국 모두에게도 이익이라고 생각하오만."
그러나 이그나티예프 공사에게 대답을 질질 끌 시간은 없었다. 이형의 도발 수위가 날로 격화되고 있던 것이다. 처음에는 단지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한 이그나티예프도 그 무렵에는 생각을 고쳐먹을 수 밖에 없었다. 눈앞의 소년왕이 진지하게 결투를 신청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이 미친 애송이가…!'
그럴 수록 궁지에 몰리는 건 러시아였다. 사내답고 용맹하며 호쾌한 쾌남상이 유행하고 전쟁에 대한 낭만이 지배하던 제국주의 시대였다. 만일 이 날의 대화가 언론에 보도된다면 친 조선 여론의 득세는 필연적이었다.
병사들이 헛되이 죽는 대신에 정정당당히 결투로서 승부를 보자는 소년왕이라니. 이 보다 유럽의 낭만주의 성향의 신문 독자들을 열광하게 할 소재가 또 있을까. 독자들의 열렬한 호응에 부응하여 신문들은 매일 같이 자극적인 기사를 써낼 테고, 그때마다 조선의 용기는 부각되고 러시아의 악랄함 또한 함께 부각될 터였다.
이그나티예프 공사는 눈 앞이 아찔해 오는 걸 느꼈다. 설마하니 하다 하다 중세 기사도 문학에서나 찾아 볼 수 있던 지도자 상을 이런 극동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기사왕이 사냥할 악룡이 그의 조국 러시아가 되는 구도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이그나티예프 공사로서는 도저히 현실 감각이 느껴 지지를 않았다.
"우리 대영제국에서는 조선의 관대한 제안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만일 최소한의 피로 이 극동에서의 분쟁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명예로운 일이겠습니까? 국왕 폐하의 기사도 정신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군요."
"실로 그러합니다. 우리 프랑스 제국 또한 조선의 관대한 제안에 지지를 표하는 바입니다. 조러 양국이 최소한의 피해로 이번 분쟁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요. 동의하십니까?"
처음에는 기겁하던 영국과 프랑스의 공사들도, 점차 이그나티예프가 선뜻 답하지 못하고 부르르 떨고만 있자 점차 태도를 고치고 있었다. 조선이 저렇게 자신만만해 하는 이유가 있듯이, 반대로 러시아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 또한 있으리라고 짐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죽거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비웃음을 읽어낸 이그나티예프 공사는 더욱 이를 갈았다. 그들의 추측대로 러시아는 이 제안에 선뜻 답하기도 곤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주 이권을 포기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지금 이 자리에서 조선에 선전포고 한다면 그때는 겨우 회피한 2차 크림전쟁을 치르게 될 판국이었다.
하지만 조선이 바라는 대로 따라주는 건 러시아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필사적으로 묘안을 짜내야만 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참으로 모험을 좋아하시는 분이시군요. 진정으로 폐하의 병사들이 우리 러시아 제국의 병사들을 동일 조건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양국의 격차가 분명한데 이를 두고 어찌 결투라 할 수 있겠습니까?"
"흐음, 그거 그럴듯하구려. 그래서, 어쩔 셈이요? 우리 조선에 더 많은 병사를 동원하게 해주시겠소?"
"그 또한 조선을 모욕하는 일이 되겠지요. 그러니, 제안 드리겠습니다. 폐하께 전투의 개시를 선언할 권리를 드리지요. 저희 러시아군의 진형을 보고 난 다음, 진형을 정하실 권리 또한 말입니다. 이만하면 공평하겠지요. 어떻습니까?"
이그나티예프 공사가 택한 길은 강자로서의 여유를 한껏 뽐내는 것이었다. 어차피 러시아와 조선이 대등한 싸움을 하려면 적어도 조선군 3만 명 이상에 러시아군 1만 명 이하가 되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이그나티예프였다. 조선에 진형과 시간적 이점을 주는 일 따위 페널티조차 될 수 없었다고 확신한 것이다.
요컨데, 러시아는 신사로서의 명예를 과시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물론 겉으로만 그러할 뿐이었다. 이그나티예프는 우선 이 자리를 떠나는 즉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청하여 유럽 본국에서 사단 병력을 파병해줄 것을 요청할 작정이었다.
'오냐, 먼저 도발한 건 네놈이겠다. 그럼 바라는 대로 철저하게 짓밟아주마. 감히 웃기지도 않는 술책으로 우리 러시아의 도량을 시험하려 한 그 오만, 지옥에서 후회하게 해주겠다…!'
이그나티예프 공사는 과장스럽게 웃으면서도 내심 이를 갈았다.
그 모습에 이형은 히죽 웃었다. 알아서 함정까지 뛰어든 사냥감을 바라보는 사냥꾼의 얼굴이었다.
"과연 귀국 러시아는 명예를 아는 기사 중 기사로구려. 알겠소. 받아들이리다. 그럼 시기는 이듬해 여름으로 합시다. 장소는 그대로 둥베이 평야로 하겠소. 구체적인 장소와 시기는 이듬해 봄 중에 확정 짓도록 하겠소. 승패는 그날 당일로 결판을 짓고, 심판역은 미리견에게 부탁하기로 합시다."
"훌륭하신 결단이십니다. 알겠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그리 전해두겠습니다. 그리고 미합중국에 심판을 맡기시겠다는 폐하의 결단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들이라면 한치의 틀림 없이 공평하게 판결해 주겠지요."
"좋소. 일이 이렇게 술술 풀리니 짐도 기분이 좋구려. 승패에서는 반드시 결과에 승복할 것이며, 후에 따로 요구사항이 바뀌지 않도록 지금 미리 승리 시에 요구사항을 글로 적어 확실히 해둡시다. 어떻소?"
이형과 이그나티예프 공사는 서로 웃으면서 계속하여 협의를 이어갔다. 물론 그들이 겉으로 웃고 있다고 속까지 웃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겉으로 보이는 웃음도 정말로 즐거워서 짓는 미소인지 비웃음인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두 사람은 다른 누구에게도 시선을 팔지 않고서 똑바로 서로를 노려다 보고 있었다.
"그럼, 명예로운 결투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겠소."
이형은 먼저 악수를 건냈다. 여전히 싱긋거리며 웃는 낯으로 말이다.
"그야 물론입니다. 명예로운 결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그나티예프 공사 또한 웃으면서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손을 마주 잡는 순간, 끔찍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뿌드득, 하고. 누가 봐도 뼈가 으스러지거나 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이번에 애써 입술을 깨물고서 고통을 눌러 참는 건 이형이 아니었다. 그와 손을 마주 잡은 이그나티예프 공사 쪽이던 것이다.
'그 불곰 놈한테 된통 당한 이래로 힘들여 힘을 기른 보람이 있구만.'
이형은 히죽 하고 웃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냐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이그나티예프 공사는 더더욱 이를 갈았다. 차마 고작 15살짜리에게 악력으로 밀렸다는 걸 티 낼 수도 없던 만큼 그는 억지로 꾹 눌러 참으면서 아무 일도 없던 듯 태연한 척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이, 이 빌어먹을 애송이 자식이…! 어디 두고 보자. 허세를 부리는 것도 오늘까지다. 반드시 그 째진 눈에서 피눈물을 쏟게 만들어 주겠다!'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올 때까지 힘을 줘 억지로 고통의 비명을 눌러 참고서는, 이그나티예프 공사는 황급히 뒤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 누가 들어도 심상치 않은 소리가 울려 퍼졌던 것이다. 탈골 정도로 마무리되었다면 다행이었다.
"참으로 폐하께서는 지독하신 분이십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만 있던 미국 공사는 혀를 내둘렀다. 러시아의 최대 강점 분야라고 할 수 있는 강 대 강 외교에서 저런 극동 소국의 소년 왕이 한치의 물러남 없이 맞선 끝에 러시아 공사가 먼저 꼬리를 말고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주다니. 그로서는 질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에 이형은 태연하게 답했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이오. 그냥 저자가 우리 조선을 적으로 돌리고서도 조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으니, 억지로 우리 조선을 바라보게 해주었을 뿐이라오."
"바로 그 점이 대단하시다는 것입니다."
혀를 내두른 것은 프랑스 공사 다비드였다. 그는 본국 프랑스의 언론들이 새삼스럽게 왜 조선을 극동의 프랑스라고 부르는지 깨닫고 있었다. 강짜 놓는 솜씨도, 자존심도, 무엇 하나 뒤처지지를 않았다. 아니, 그들의 문약한 황제보다도 이 눈앞의 소년 왕이 더 강직할지도 몰랐다.
유일하게 뒤처지는 부분이 있다면 근본적인 국력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자존심과 국력이 비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말이다.
"안심하십시오. 미리 홍콩으로 향하는 배편을 준비해두지요. 물론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말입니다만."
말에 비꼼을 섞고 있는 건 영국 공사 토마스였다. 그 또한 조선이 극동의 프랑스라 불리는 까닭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 안하무인 그 자체에 용기라는 이름의 광기와 자존심에 대한 강박증세까지. 무엇 하나 영국인들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프랑스인의 정형 그 자체였다.
만일 조선이 러시아와 적대하고 있지만 않았어도 밥맛이 뚝 떨어져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자리를 떠났을 토마스 공사였다.
"필요 없소. 됐으니 포탄이나 더 팔아주었으면 좋겠구려. 어차피 총도 대포도 1만 명 정도 무장시킬 정도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그의 말대로, 이미 조선은 1만 명의 제1 보병사단을 완편한 상황이었다. 남은 건 그들을 훈련하는 일이지, 이 이상 무기들을 들여와 더해봤자 당장 전쟁, 아니 결투에서는 불필요했다.
물론 그것이 조선이 러시아보다 유리한 고지에 있는 증거라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개틀링 포대 하나만 믿고 싸움을 건 만큼, 개틀링 포대에 뭔가 이상이라도 생기는 것만으로 승산이 바닥을 치는 것이다. 도박이 아닐 리가 없었다.
그러나, 만약 이 도박에서 이기게 된다면 조선은 최소한 시베리아 횡단철도 공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약 20년에서 30년 가까이 러시아의 간섭 없이 활동할 수 있게 된다.
20년에서 30년 가까이 열강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서 극동의 지역 패권국으로서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
'이기면 그만인 일이지.'
이형은 허리춤에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어차피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청국과 전쟁을 시작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은 승리했고, 그 결과로서 화북을 발아래에 두고 만주를 합병하는 등 불과 5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돌이킬 수 없이 먼 곳까지 와 버렸다.
이제 와서 그 모든 걸 포기하고서 원점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이상, 지금 조선에 필요한 것은 승리할 수 있는가 하는 확률론이 아니었다.
반드시 승리한다. 그 길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어떻게 승리할지를 고민하는 게 나 같은 놈들이 할 일이고.'
이형은 잠시 권총에서 손을 떼고, 오른손을 폈다가 다시 강하게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강하게. 웃음을 참기 위해서였다.
딱히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전쟁광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웃음을 어떻게 해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러시아를 돌아보게 했다. 그 사실이 그에게 짜릿짜릿한 전율을 느끼게 했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시선을 뗄 수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