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세를 준비하다 >
"조선왕이 걸물은 걸물인 모양이더군. 설마하니, 이 짧은 시간 만에 여기까지 올라올 줄이야. 고마울 따름이지. 덕분에 운신의 폭이 한결 넓어졌어."
그 시각, 일본국 에도성.
전 에도 막부 제15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즐거운 듯이 웃고 있었다. 단지 이러한 조선의 상승세가 그의 권위 상승에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소년 왕의 행보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우습기 때문이었다.
청과의 전쟁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승리하더니 곧장 러시아에게 시비를 걸지를 않나, 러시아가 잘못된 판단으로 주춤하는 틈에 단숨에 심요 지역을 따내고 베이징을 함락시키지를 않나. 그러고서는 청을 한족 왕조로 전락시키고 그를 대신하여 만주의 칸을 자칭하지를 않나.
비단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아니더라도 전통적인 유교적 세계관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절로 기가 찰 파천황 적인 행보가 아닐 수 없었다. 일본 역사는 물론이고 극동의 역사를 통틀어 저런 어린 나이에 여기까지 내달리는 소년 왕이 있기는 했던가.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게 거짓말이었다.
"예, 실로 그러합니다. 조선을 통해 중원과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게 되면서 서역인들이 그간 끝도 없이 가져가던 은화 중 일부를 보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설마하니 조선이 불과 5년여 만에 여기까지 크게 일어날 것이라고는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던 마츠다이라 가타모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요시노부의 말에 동의했다. 격식을 차리는 자리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이 두 사람은 모두 하오리 차림에, 비교적 간편한 복식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시중드는 시종 한 사람 찾아볼 수 없었다. 괜히 엿듣는 귀가 있기라도 한다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근래 존왕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초슈와 사츠마, 토사 3개 번이 손을 잡으면서 세력의 추가 급속도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내전이 임박했다는 것은 더 이상 숨길 것도 없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전쟁에 보다 적극적인 이들은 요시노부에 대적하는 역도들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만일 조선이 러시아와의 전쟁에 정말로 승리하기라도 하면, 그들에게는 더는 기회가 사라질 테니까. 설령 조선이 패하더라도, 이미 국운이 크게 일어나고 있는 조선이 러시아와의 패전에서 잃은 걸 일본에서 벌충하려 한다면 마찬가지로 존왕파에게는 더는 기회가 없다.
존왕파로서는 조선과 러시아가 결판을 보기 전 반드시 승부를 볼 필요가 있던 것이다.
"그래, 그 말대로다. 설마하니 조선이 여기까지 일을 터뜨릴 줄 누가 알았을까. 만약 5년 전의 과인에게 이 사실을 직접 전한다 하더라도 과연 믿을 수 있을지 의문이로군."
요시노부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 스스로도 얼떨떨했기 때문이다. 조선과 한 묶음으로 엮인 덕분에, 도쿠가와 가문은 여러모로 특혜를 보고 있었다.
조선과의 무역이 활성화 되고 통화가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경제에 조금씩 활기가 되살아났고, 이러한 활기는 곧 민심의 안정과 현 정부의 권위 상승을 이끌어냈다. 이는 곧 도쿠가와 가문이 주도하는 현 조정의 체제 안정을 의미했다.
그뿐일까. 조선에서 이런저런 토목 사업을 벌이면서 무수한 상선들이 조선을 드나드는 통에 자연스럽게 그 경유지에 해당하는 일본의 항구에도 활기가 돌고 있었다. 여러모로 유럽이나 미국에서 석탄을 들여오기에는 무리수가 많은 만큼 이들 상선들이 소모하는 석탄은 일본에서 충당하게 되었고, 상선들의 석탄 소모와 조선의 공업화로 인한 석탄 수요 증가로 일본의 광업은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개항 이래로 줄곧 수탈 당하기만 했던 일본의 경제였다. 그런 일본의 경제가 조선, 더 나아가 조선과 연결된 중원과 경제적으로 이어지면서 당장의 고비를 넘기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역시 하나 보다는 둘, 둘 보다는 셋이라는 건가.'
요시노부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해동포(四海同胞)니 뭐니 하면서 아시아주의를 부르짖는 토사번의 촌놈들이 조금은 이해가 갈 듯 했다. 조선이나 일본이나 서로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양국의 경제는 알게 모르게 긴밀히 엮여가고 있었다.
그러나 요시노부는 이러한 연결이 대등한 형태가 되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아직 상호 간의 연결이 느슨하여 잘 눈에 띄지 않지만, 이것이 조금만 심화되면 어느 한쪽의 경제 침탈이 될 공산이 컸다.
지금까지의 정세를 통하여 생각해보자면 침탈 당하는 쪽은 일본이 될 공산이 컸다. 이는 필연적이었다. 조선 하나라면 모를까, 만주에 화북까지 꿰차고서 열강들의 지원을 받는 조선을 지금의 일본이 앞지르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수가 많았다.
그리고 요시노부가 알기로, 그 당찬 소년왕은 만일 일본이 조선과 적대한다면 가차 없이 일본을 먹어 치우려 들 야심가였다.
"귀찮은 일이지. 덕분에 싸워보지 않고서 항복한다는 선택지가 사라져 버렸다. 조선의 애송이가 괜한 일을 해주었군."
"저, 전하?"
요시노부는 끅끅거리며 웃었다. 카타모리는 그런 요시노부의 말에 영문을 몰라 눈을 껌뻑거릴 따름이었다. 그에 요시노부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카타모리, 과인은 본래 이번 전쟁에서 싸워보지 않고 역도들의 손을 들어줄 작정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네가 녀석들과 다투는 것까지 막을 생각이야 없었다만."
요시노부의 말에 카타모리는 할 말을 잃고서 멍하니 요시노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서는 다양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배신감, 의아함, 그리고 호기심. 그것을 한순간에 읽어낸 요시노부는 자못 가라앉은 태도로 말을 이었다.
"내전은 곤란하다. 내전이 길어질수록 이 나라는 외세들에 개입할 여지를 주고 말아. 그리고 외세가 개입할 여지가 늘수록 이 나라 일본이 살아남을 길도 좁아지겠지. 그럴 바에야 이 몸이 모든 것을 떠안고서 항복해 버린다면 전쟁은 단숨에 끝이 난다. 너를 비롯한 몇몇은 끝까지 싸우겠지만, 이 나라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둘로 나눠진 채로 피까지 흘려가며 살아남기에는, 이 나라 일본의 사정이 좋지 못해. 하다못해 오닌 원년의 분열이나 텐메이 2년의 대기근조차 지금의 일본보다는 나을 게다."
"하, 하나 전하! 빠르게 전쟁을 끝낼 방법이라면 항복하는 것만이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저와 저희 병사들이 재빠르게 승리를 거둔다면…!"
"그렇겠지.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다. 카타모리, 너도 알지 않더냐? 영길리인들이 저들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동안의 역도들과 같은 선상에서 본다면야 큰코다칠 거야. 단기간에 전쟁을 마무리 짓지 못한다면 반드시 영길리인들이 저들을 통해 개입해 오겠지. 그러면 일이 한결 귀찮아진다. 그러니 포기하려 했다, 그러나…."
요시노부는 입꼬리를 뒤틀었다. 웃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한 씁쓸한 미소였다. 요시노부는 구름에 가린 달을 올려다보며 작게 읊조렸다.
"조선의 애송이 왕에게는 천운이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과인은 어떠할까. 카타모리, 네 녀석이 보기에 과인은 어떠한가. 그대가 보기에 과인은 승리할 운명을 타고 태어난 자 같던가?"
회한에 찬 목소리였다. 카타모리는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그리 간단히 대답할 수 없는, 그의 주군의 솔직한 속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는 답할 수 없었다.
그 모습에 요시노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에게는 다시 언제 나와 같은 여유 있는 모습이 돌아와 있었다.
"하기야, 지금부터 그걸 확인해보려고 가는 것 아니겠나."
요시노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모습은 한결 홀가분해 보였다. 그의 손에는 도쿠가와 가문을 상징하는 황금빛 세잎 접시꽃이 화려하게 장식된 부채가 쥐어져 있었다.
"병사들을 모으도록. 저 역도들이 우리를 치려 한다면, 당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저 역도들을 친다. 올해가 가기 전에는 마무리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 저 역도들에게 도쿠가와의 천하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똑똑히 보여주도록."
"존명!"
요시노부의 지시에 카타모리는 그 즉시 자리에서 부복하여 경의를 표했다. 여전히 달은 먹구름에 가린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풍취를 모르는 달이라며 요시노부는 내심 투덜거렸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오늘은 그믐이었다. 그가 아직 보지 못하는 달은, 저 서쪽의 역도들 또한 보지 못할 터였다.
달빛에 취하는 건 역도들의 눈을 영원토록 감겨준 다음이라도 늦지 않았다.
* * *
푸엣취
"크흠! 이런 우라질, 어디에서 내 이야기를 하나?"
각국이 그들의 국익에 따라 손을 잡을 상대를 고르고 있을 무렵, 이형은 만주의 칸으로 즉위식을 올린 이후로도 계속하여 봉천에 머물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전장을 엄선하고 병사들을 계속하여 훈련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물론 루이 대령의 프랑스 군사 고문단과 브라이언 소령의 영국 군사고문단도 함께하고 있었다.
이 무렵에는 군사 목적을 위해 최우선으로 건설된 남포항에서 장춘까지를 잇는 철도 구간이 완공되고 무기공장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여 1차 양산품들이 군에 보급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태평양을 건너 도착한 미제 소총 20만 정은 우선 속오군에 보급되었고, 무기공장에서 생산된 샤스포 소총은 먼저 시위군에게 보급되었다.
딱히 미제 소총이 프랑스제 소총에 비하여 못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결국, 조선군에게 보병 전술을 가르칠 이들은 미군이 아니라 프랑스군이기 때문이었다. 각국이 무기를 개발하는 이념이 각각 다르고, 그를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보병 전술 또한 각기 다른 만큼 프랑스군에게 교련을 받을 시위군이 프랑스제 무기를 선호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리고 샤스포는 조선 땅에 있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거잖아. 부품 수급이라던가 개조라던가 여러 면에서 쉬운 게 당연한 건데, 그럼 우선 근위사단들에게 몰아줘야지.'
타타탕-.
이형의 잡념을 깬 것은 멀리에서 들려오는 한 무리의 총성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사격훈련을 하던 시위군이 낸 소리였다. 사격 소리는 일정한 주기로 연속하여 들려왔다. 시위군에게 보급된 샤스포 소총이 프랑스에서 개발한 최신형 후장식 소총인 덕분이었다. 여러모로 실험적인 성격이 강한 드라이제 소총보다 샤스포는 본격적인 근대식 후장식 소총이라고 부를만했다.
분당 평균 8발, 최대 15발을 발사 가능한 이 볼트액션식 소총은 분당 빨라야 2, 3발씩 발사할 수 있던 전장식 소총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처음 샤스포 소총을 지급받은 포수 출신 병졸들이 한동안 너무 빠른 발사속도에 적응을 못 해서 허둥지둥거릴 지경이었다.
"흐음, 이제 꽤나 잘 쏘는구먼. 아니, 원래부터 잘 쏘던가?"
물론 그것도 예전 이야기이고, 본격적으로 서구제 소총들이 지급되어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간 지 몇 개월이 넘은 지금은 달랐다. 원래부터 분당 1, 2발이 고작인 전장식 소총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던 조선 포수들이었다. 250m 거리에 세워둔 표적판을 100m 거리라도 되는 양 전탄 명중판정을 내는 특등사수들이 수두룩하게 나왔다.
조선을 괴롭히던 화약 문제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 없었다. 청나라에서 있는 대로 헐값에 사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조선의 보호 없이는 존립 그 자체가 불가능한 청나라였다. 톈진항에서는 매일 같이 쌀과 철, 석탄, 초석, 구리 따위를 실은 상선들이 인천항, 목포항, 남포항을 목표로 출항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서 청은 조선에서 홍삼과 한약재를 비롯한 기존에도 수입하고 있던 수입품목들에 더하여 조금씩 조선에서 생산한 공산품에 대한 수입을 늘려가고 있었다. 물론 아직은 산업화도 이제 막 시동이 걸렸을 뿐이라 크게 눈에 띄는 비율은 아니었지만, 그 수입 비중은 나날이 늘어나고만 있었다. 이형이 청을 두어 조선의 지갑이 되었다고 평가한 이유였다.
'프랑스 놈들은 프로이센이 열심히 시비 걸어줄 테니까, 당분간 극동에 깊이 관여할 수 없겠지. 그 틈에 지분을 확실하게 늘려둬야 한다.'
퍼퍼펑-.
멀리에서 고막을 찢는 듯한 대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브라이언 소령이 가르치는 조선군 포병대의 사격훈련이었다. 청을 확보하게 되면서 재정적 걱정을 던 덕분에, 포병대는 원 없이 포탄을 발사해 보면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여전히 미숙하기 그지없었으나, 처음 보는 후장식 대포에 어리둥절해 하던 처음에 비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아무튼, 초탄 사격 이후로도 감을 잡지 못하고 계속 감으로 있는 대로 쏴 버리던 이전까지와 다르게 이제는 초탄 사격 이후로 포탄이 직격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회차를 거듭해갈수록 지근탄 정도는 착실하게 늘려가고 있었다. 지근탄이 늘다 보면 그만큼 직격하지는 않더라도 그 일대에 착실하게 피해가 누적되는 법이다.
포병장교들이 탄도학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형은 난생처음 접하는 만유인력이니 포물선 운동이니 미분 적분이니 같은 근대 물리학의 결정체를 붙잡고서 몇 개월간을 씨름한 조선의 포병 장교들의 애환에 마음속 깊이 애도를 표했다.
"이제 제법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해졌군요. 처음 훈련을 시작할 무렵만 해도 어떻게 될까, 싶었습니다만."
한참을 망원경 너머로 조선군의 훈련을 구경하던 이형의 뒤편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그 익숙한 목소리에 이형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가 예상했다시피, 시위대장 허계였다.
이제는 예순이 넘은 노장이 된 허계는 한 눈으로 봐도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리한 일도 아니었다. 아무리 강직한 인간이라도 세월의 흐름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거기에 그간의 마음고생이 겹치니 한눈에 보기에도 그의 본래 나이보다도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런 노장이 된 허계가 아직도 시위대장으로 남아있는 건 소년 왕에 대한 우려 탓이었다.
이형은 처음에는 그가 자신에 대한 충성심 탓에 이런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추측해왔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허계가 나이가 들어 말에 오르는 것조차 버거워하면서도 계속하여 그의 곁에 남아있으려 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생각을 고쳤다.
'나를 망나니 손자 즈음으로 여기고 있는 건가. 오지랖도 넓은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나 같은 망나니 놈, 적당히 무시하고 편해지려 했다면 지금쯤 얼마든지 편히 살 수 있었을 텐데….'
이형은 입맛이 씁쓸해지는 걸 느꼈다. 이형 자신도 평소답지 않은 감정이라는 걸 알고서도,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타인의 호의에 서투른 왕이었다. 타인의 호의를 눈치채고서도, 거기에 어떻게 답하면 좋을지 소년 왕은 알지 못했다. 스스로 알고자 한 적도 없었다.
그러니 소년 왕은 짐짓 모른 체하고서 언제 나와 같은 망나니 왕의 모습으로 허계를 마주하였다. 그편이 서로를 위하여 편리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