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오를 굳히다 >
"재고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폐하. 이번 작전은 너무 무모합니다. 아직 지금의 조선군으로서는 러시아군과 1:1로서 대등하다고 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하물며 3배의 러시아군과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전멸뿐입니다. 옥체를 생각해주십시오."
루이 대령은 얼굴을 딱딱히 굳히고서 이형에게 충언을 올렸다. 그가 말하는 것은 사실에 가까웠다. 극동 러시아군을 상대라면 지금의 조선군이라도 그럭저럭 대등하게 맞서 싸울 수 있겠지만, 유럽 러시아군을 상대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썩어도 준치고, 썩어도 열강 본국의 군세다.
루이 대령은 러시아군을 프랑스군의 한 수 아래로 얕잡아보고 있을지언정 러시아군을 조선군보다 아래에 두는 우행을 벌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루이 대령은 조선군 3명이 모여야 간신히 러시아군 1명의 전력을 낼 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는 다른 군사고문단의 일원들 또한 마찬가지였고, 러시아 또한 이에 있어서는 다를 바 없었다.
다시 말하여, 조선군이 3배의 러시아군을 상대로 정면충돌을 고집할 경우 전력상 9배 이상 우월한 상대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꼴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렇습니다. 폐하, 소신을 보내주십시오. 각오라면 되어있습니다. 대조선국과 겨레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목숨 따위 아깝지 않습니다. 폐하, 소신에게 그 임무를 맡겨주십시오."
제1 기병연대의 연대장 한성근 대령 또한 이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창백하게 질려있는 한성근의 모습은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한눈에 알게 했다. 경악, 경외, 결의. 무엇 하나 강렬하기 그지없는 감정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적 동요는 한성근을 포함한 다른 조선군 장교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든 이 소년 왕의 객기를 말리고 싶었다. 용맹스러운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용맹이 아니라 만용에 불과했다. 용맹은 무장들에게 추앙받아 마땅할 덕목이지만, 만용은 마땅히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결점이었다.
만일 소년 왕이 후사조차 남기지 않은 채로 목숨을 잃게 된다면 조선은 지금까지 손에 넣어온 모든 것을 잃게 될 터였다. 그들은 소년 왕이 이른 나이에 요절하게 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그들 전부가 죽음에 이르는 한이 있더라도, 소년 왕은 이 만주 땅에서 살아서 나가야만 했다.
"아니, 거절하겠소. 짐이 직접 나가지 않는다면 저 노서아인들은 우리 조선군 기병대가 저들의 측면을 노리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속력을 최대한 살려서 정면으로 돌격해 포대와 보졸들부터 짓밟으려 들 것이오. 제아무리 개틀링 포의 연사력이 대단해도, 수천 명의 기병들을 십수 초 안에 몰살시킬 수는 없을 테지.
그럼 포대와 보졸들은 침묵할 것이고, 우리 조선의 패배요. 죽음을 각오하고서 미끼가 되어봐야, 본군이 패배하고 만다면 그거야말로 헛된 죽음이 아니겠소."
"하오나 폐하, 이 나라 조선의 백성이 1천만 명이 훌쩍 넘습니다. 그에 반하여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병졸들은 모두 합하여 고작 1만 명이 아닙니까. 재고해주소서. 폐하께서는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병졸들 모두를 합한 것보다 값지신 분입니다!"
"괜찮소. 길어야 10분 안에 모든 결판이 나게 될 것이오. 반대로 말하자면 길어야 10분 정도만 살아남으면 그만이라는 이야기지. 어떻게든 10분의 시간을 벌어 보리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10분간 살아남아서 돌아오겠소.
경들은 어떻게든 10분 안에 저들 모두를 절멸시킬 고민이나 하시오."
이형은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10분이라는 전제는 결코 근거 없는 전제가 아니었다. 분당 400발의 총탄을 뿜어내는 개틀링 포였다. 그런 개틀링 포가 8문에, 10분이라면 최대 32,000발의 총탄이 좌우로 쏟아지는 셈이다.
그뿐일까. 이 무렵에는 제1 보병사단 전군에 보급이 완료된 샤스포 소총도 있다. 숙련병이 들었을 시에는 평균 4초에 한발씩 발사가 가능한 샤스포 소총과 개틀링 포대가 더해진다면, 10분조차 과했다. 빠르면 5분 안에 승산이 날 가능성도 충분했다.
제1 기병연대가 해야 할 일은 그 5분에서 10분 동안 적 주력을 확실하게 화망에 가두어 두는 일이지, 적과 싸우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적 주력의 시선을 확실하게 끌 수 있는 이형이 직접 친정을 하겠다고 자청한 것이었다.
'아직 기병의 시대가 끝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병이 전장의 주인공이 되는 시대인 것도 아니지. 앞으로 전장의 주역은 보병이고 또 포병이다. 기병들은 그저 보좌해주는 역할로 족해.
한성근 대령이 돌격해봤자 러시아에게는 그저 날파리가 하나 달려드는 꼴이야. 시선을 확실하게 잡아둘 거라는 보장이 없어. 여차하면 그냥 무시하고 돌격할 테지.
하지만 내가 돌격한다면 저놈들은 절대로 나를 가만히 두고서 지나칠 수 없을 거다. 내가 얼마나 러시아 놈들의 성질을 벅벅 긁어 놨는데, 그놈들이 나를 무시하고서 그냥 돌진을 해? 그리고 나에게 시선이 팔린 틈에 싹 쓸어버리는 거다.'
이형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언제나와 같은 나쁜 장난을 떠올린 악동 같은 미소였다. 승산이라면 충분했다. 필요한 것은 배짱뿐이었고, 그 배짱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빠르면 5분, 늦어도 10분. 그동안만 러시아군 주력을 확실하게 붙잡아 둘 수 있으면 조선은 확실하게 승리할 수 있었다. 이형은 눈앞까지 다가온 승리를 향하는 길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폐하, 10분이라니요. 고작해봐야 10분이 아닙니까! 도대체 어찌 10분안에 저 많은 기병들을 쳐부순단 말씀입니까!"
물론 그건 1차대전에서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간단하게 죽어 나갔는지 잘 알고있는 이형의 이야기였고, 그런 역사적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장교들로서는 이형이 도대체 어째서 그토록 자신만만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물론 개틀링포의 위력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고작해봤자 강력한 대포 정도의 인식에서 그치고 있었다. 이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여러 정의 개틀링 포가 참호 지대와 철조망, 지뢰지대의 조합은 아직 실증되기는 커녕 논의된 적조차 없던 상황이던 것이다.
'그야 뭐, 아무 때나 터지는 결함병기인 초기 지뢰나 제조기술의 낙후로 고작해봐야 양 떼나 사냥견 정도나 막아줄 수 있는 19세기형 철조망, 사람이 일일이 수동으로 돌려야하는 개틀링 포, 땅을 파는데만 하루종일 걸리는 참호까지.
이걸 전부 설치하는데 들어갈 노력도 노력이다만 겉으로 보기에는 전력상 큰 도움이 되기 어려워 보이는 녀석들을 굳이 애써 조합하려고 드는 녀석은 왠만하면 없지.'
그리고 이형은 그 왠만하지 않은 경우에 해당했다. 딱히 그가 천재라서가 아니라, 미래를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직 여러모로 운용상에 미흡함과 실제 성능상의 결함으로 실전에서 운용하기 꺼리는 개발 초기의 실험병기들을 결전병기랍시고 내놓고 있으니 의심을 사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형은 그가 미래를 알고 있다고 설명할 생각도 없었고, 그렇다고 이 모든 병기들이 조합 되었을 경우의 시너지 효과에 대하여 설명할 군사적 지식도 없었다. 그 또한 이 모든 걸 조합하면 강력하다! 정도로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는데, 장교들을 설명할 수 있을리가 없던 것이다.
"10분이요. 그렇게만 알아두시오. 뭐, 어쩌면 그보다 훨씬 짧을지도 모르지. 그건 노서아인들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오.
그러나 10분 이상은 결코 걸리지 않을 것이외다. 그렇게만 알아두고서 준비해두고 계시오."
결국 이형은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어찌어찌해서 이렇게 된다-가 아니라 그냥 이럴테니까 이렇게 해라-가 그의 한계였던 것이다. 애초에 만일 그에게 능숙하게 타인을 설득시킬 역량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선비들을 능숙히 설득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형에게 그런 재주는 없었다. 그의 화술은 좋은 말로도 능숙하다고 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일방적인 통보 밖에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미 몇차례고 이렇게 독선적으로 행동한 끝에 터무니 없는 성과를 얻는 것을 보여준 바 있던 소년왕의 결정에 저항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폐하…!"
그 사실이 더더욱 한성근을 비롯한 장교들로 하여금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들었다. 겁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 정도면 사실상 죽음에 대한 공포 그 자체가 부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혹여나 이형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더 나아가 죽기라도 한다면 조선에 있어서 얼마나 큰 재앙일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에 장교들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야 뭐,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조선은 한동안 미칠 듯이 휘청이긴 하겠지. 내정이야 흥선군이 대신해준다 쳐도, 지금 조선에 나처럼 움직일 수 있는 놈이 과연 있기는 하려나. 그리고, 나처럼 코쟁이들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놈도 없을 테고.'
물론 이형이라고 지금의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자각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물론 지금 이형이 죽는다고 조선이 망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한동안은 정신을 못 차리고 휘청일 것이 분명했다. 그럼 그동안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완성할 테고, 조선은 러시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터였다.
그러나 이형은 이번 전쟁이 자신이 목숨을 걸기에 충분히 가치 있는 전쟁이라 자신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만약 설령 내가 죽더라도 일단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를 꺾는다면 최소한 우리 조선은 그동안의 불평등조약 전부를 일거에 처리해 버릴 수 있다.'
이형은 눈을 희번덕거렸다. 지금 그가 가장 집착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이 때문이었다. 설령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한다고 해도 영토를 얻는 것도, 배상금을 타낼 수 있는 것도, 이권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딱 한 가지, 조선은 열강을 상대로 승리하였다는 경험을 얻게 된다.
그건 단지 승리하는 것 이상의 결과였다. 1만 명 대 1만 명의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조선이 이 단기간의 근대화 동안 러시아군과 대등한 조건에서 승리할 수 있을 만큼의 성취를 얻어냈다는 걸 대외적으로 과시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서구 열강들이 조선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달라지게 된다.
일본 제국이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하고 난 다음에야 열강들과의 불평등조약들을 한 번에 개정하고서 당당히 열강의 일각으로 인정받았던 것처럼, 조선 또한 흔하디흔한 준 문명국 따위가 아니라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열강의 일각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언제까지고 아시아의 비문명국이니 준 문명국이니 소리나 듣고서 살까 보냐.'
이형은 이를 갈았다. 그동안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또 납득해왔지만,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저 서구 열강들이 조선을 언제부터 보아왔다고 대뜸 미개하다느니 문화가 뒤떨어졌다느니 떠든단 말인가. 배움이 뒤처지고 힘이 부족하다고 인간은커녕 원숭이 취급당하는 것은 이형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행보로서, 인품으로서 저평가되는 것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켜 손가락질을 받는다면 납득할 수 있다. 범죄를 일으켜 인간 대우를 받기 힘들어졌다면 정중히 사과하고서 조금이라도 속죄하려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선이 도대체 무슨 도덕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범죄행위를 저질렀단 말인가. 오히려 도덕적으로 손가락질받아야 할 건 제국주의 열강들이 아니던가?
'할당량을 못 채웠다는 이유로 애꿎은 콩고인들 손모가지 자르고 2천만명을 학살한 레오폴드 그 인간백정 놈과 벨기에 와플 놈들은 그냥 유사인류고. 남아공에서 같은 백인인 보어인들도 수용소에 쳐넣어서 학살한 나치 독일의 직계 스승 영국 홍차 놈들,
자유 평등 박애는 개뿔이고 본보기를 보이겠다며 알제리에서 해안포격으로 도시를 불태우고 민간인 학살한 프랑스 개구리 놈들, 북미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몰살하고서 그 시체를 박제해다가는 박물관에 전시한 양키 놈들, 조선인들을 데려다가 만국박람회에서 동물원에 전시한 일본 쪽바리 놈들,
나미비아에서 흑인들 데려다가 인체실험하고 인구의 80%를 학살한 독일 전쟁광 놈들이나 나치보다 먼저 유대인 학살하고 다닌 러시아 놈들은 뭐 말할것도 없고. 온 세상이 미친 놈들에 학살자들 천국이지.'
그에 반하여 조선은 무엇을 했을까. 청나라와 전쟁을 했다. 그리고 이제 러시아와도 전쟁을 벌이려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민간인을 학살했던가? 아니면 민간인들에게서 무언가를 강제로 빼앗았던가.
아무것도 없었다. 전쟁 중에 죽였던 것은 어디까지나 정규군 병사들이었고, 국내에서 숙청한 양반들의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체제 전복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국가반역자들이었다. 전쟁 중에 정규군 병사를 죽이거나 국가반역자들을 죽인 것이 죄악이라면 이 세상에 국가는 존재해서는 안되었다.
이형은 그저 힘없고 배움이 부족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을죄라도 지은 양 살아가는 약소국의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조선의 백성들이 그런 비참한 삶을 언제까지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납득하고서 살아가는 일 또한 바라지 않았다.
겨우 저 제국주의 열강들이 조선을 다시 보게 될 기회가 손안에 들어온 것이다. 이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기회를 헛되이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결국 언젠가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납득하고 포기해 버린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이형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했다.
"짐은 승리하고 싶다. 저 노서아인들에 맞서서, 말이다. 그리고 이는 승리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이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짐에게 마상 검술을 가르쳐다오. 함께 싸워서, 승리를 거머쥐는 것 이외에는 윤허하지 않겠다."
그렇기에 이형은 간단하게 답했다. 이 또한 승리를 거머쥐기 위함이라고 말이다. 그 대답에 장교들은 차마 답하지 못하고 말문이 막혔다. 승리하기 위하여 어떤 수단이라도 쓰겠다고 말하는 자야 세상에 널리고 널렸지만, 정말로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승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참으로 끔찍한 언행일치가 아닐 수 없었다. 차라리 언제나와 같은 허세일 뿐이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그들은 마음속 깊이 뜻을 모았다. 그들 스스로 바라왔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로써 조선군은 돌아갈 수 없는 배수의 진을 치게 되었다.
조선의 왕이라는 자가 몸소 자신을 사지에 몰아넣겠다고 선언해 버린 것이다. 전투에 임하는 장교들과 병졸들의 자세부터가 사뭇 달라질 수밖에는 없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충!"""
시위 대장 유창근의 선창으로, 막사의 장교들은 일제히 소년 왕을 향하여 경례를 올렸다. 그에 답하여 이형은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경례를 돌려주었다. 그의 눈빛은 승리를 향한 갈망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막사에 모인 장교들 또한 그들의 어린 주군에게서 승리를 향한 갈망을 엿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