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86화 (86/530)

< 결전을 앞두고 >

좋건 싫건, 조선군 장교들은 그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주군이 승리를 저토록 갈망하고 있다면, 어떻게든 승리를 거머쥐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는 것이 신하로서 올바른 도리가 아니던가. 조선의 장교들은 승리를 향한 결의를 마음속 깊이 되새겼다.

"하나 할 때 정신, 둘 할 때 통일! 마지막 구령은 붙이지 않는다. 팔굽혀펴기 60회 실시!"

"""정신! 통일! 정신! 통일! 정신! 통일! """

그런 장교들의 각오는 고스란히 병졸들의 훈련 강도 강화로 이어졌다. 지옥 같은 특훈 기간의 시작이었다. 그토록 가려 뽑은 시위군 제1보병사단의 병사 중에서도 탈수나 탈진으로 도중에 쓰러지는 병사들이 심심치 않게 나올 지경이었다.

그들은 기초적인 체력 훈련에서부터 시작하여 총검술 훈련, 사격훈련, 진지 구축 훈련 등과 같은 병사의 기본 소양, 그리고 전열 보병의 기본 소양이라 할 수 있는 방진을 짜는 법과 대열을 맞추어 걷고 달리는 법까지 모든 것을 익혔다.

처음에는 프랑스의 군사고문관들이 모든 것을 가르쳤지만, 이 무렵에는 이미 조선군에서도 자체적으로 이를 신병들에게 가르칠 조교들을 육성할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앞으로 1미터는 더 깊숙히 파라는 금상 폐하의 명령이시다. 자, 다들 삽들어!"

"""추, 충!"""

병사들을 가장 지치게 만드는 것은 소년왕에게서 직접 떨어진 진지공사명령이었다. 사단이 총동원되어 다 같이 삽을 들고 맨땅을 파고 있으니 참으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사단장 명령이라도 부대 전체가 뒤집힐 판국인데 하물며 국왕 명령이었다. 병사들은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전투가 시작되기를 고대하며 삽질에 전념하는 수 밖에 없었다.

퍼퍼펑-.

"제 3포대, 초탄 발사까지 2초씩 늦고 있다! 옆 포대와 맞추도록! 각도는 양호하다. 장전만 좀 더 분발하도록!"

"""시정하겠습니다!"""

이 중 가장 빠르게 숙련도가 축적되고 있던 것은 포병대였다. 결전을 앞두고서 매일 같이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실탄훈련을 계속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숙련도도 급속도로 따라붙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건 세계 제일의 포병전력을 자랑하던 영국군 군사고문단이었고,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대포는 영국군의 제식대포인 암스트롱포였다. 매일 같이 실탄훈련을 반복하면서 최고의 교사들에게 이론 교육을 받고 있으면서 전력이 개선되지 못한다면 게으름 피운다는 이야기 밖에는 되지 않던 것이다.

아직 열강의 군대와 비교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조선군에 있어서, 매일 같이 실탄훈련을 반복하며 빠르게 숙련도를 축적하고 있는 포병대는 그나마 유일하게 열강의 군대와 비교해도 크게 뒤쳐지지 않는 특기병과가 되어가고 있었다.

"호오, 이게 우리가 앞으로 입게 될 제복이란 말인가. 검고 푸른 것이 어째 칙칙하구만. 겉으로 보기에는 불란서인들이 입고 다니는 것과 그리 큰 차이는 없는데, 색감이 좀 칙칙한게 꺼림칙한 걸."

"쉿, 이 사람아! 조용히 하게. 이건 금상 폐하께서 친히 정하신 색감이란 말일세! 괜히 한 소리 듣기 싫거든 말 조심 하는게 좋아."

"폐, 폐하께서 말인가? 아이고,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만…!"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변화는 조선군이 입을 제복이 마침내 생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디자인 그 자체는 프랑스 육군에서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따왔지만, 색감은 확연하게 달랐다.

안감은 검은색에 가까운 흑갈색에, 상의는 새까만 검은색이었고 하의는 어두운 남색을 띄어 한눈에 봐도 어두운 인상을 주었다. 눈에 띄는 화려한 총 천연색의 제복이 유행하던 이 시대의 제복들을 떠올려 봤을 때 이는 다소 어색한 색 선정이었다. 실제로도 이를 두고 칙칙하다는 불평이 왕왕 나왔지만, 색감을 지정한 사람이 소년왕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난 다음에는 불평불만은 사라졌다.

이형이 이처럼 어두운 색을 지정한 이유는 크게 두가지가 있었다. 우선 하나는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시대의 군인들은 낭만주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해 최대한 화려하고 눈에 잘 띄는 군복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형은 그것이 자살행위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1차대전기에 참전자 대비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은 마지막까지 총 천연색 군복을 고집한 프랑스군이었다. 반대로 참전자 대비 희생자가 가장 적었던 건 일찌감치 보어전쟁의 전훈을 받아들여 눈에 잘띄지 않는 갈색 군복을 채택한 영국군이었다. 이는 군복이 눈에 잘 띌수록 적들이 노리기 쉬워지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 시대까지만 해도 화려한 군복은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적들의 기선을 제압하는 등의 효과가 있어 선호되는 것이 당연했지만, 이제부터 펼쳐질 참호전의 시대에 화려한 제복은 이승을 하직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이형은 굳이 병사들에게 화려한 수의를 입혀 보낼 생각은 없었다.

"그러고보니 이제부터 우리 조선군도 제복을 지어입어야할텐데…우선 의견 정도는 확인해둘까. 경들이 생각하기에 어떤 색깔이 가장 알맞다고 생각하는가?"

"역시 푸른색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조선은 천하의 동쪽이요, 동쪽은 예로부터 청룡이 수호하였으며 이를 상징하는 색 또한 푸른 빛이었습니다. 마땅히 푸른색으로 하여야하지 않겠습니까?"

"음, 좋은 의견이구만. 하지만 거절하겠소. 경들은 아무래도 제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착각하고 있는듯 하오."

"아니, 폐하. 그게 도대체 무슨…?"

"경은 푸른색 옷을 입고 다니면 얼마나 얼룩이 질지 생각도 안해봤소? 툭하면 얼룩지고 꿰매면 실밥 자국 보이고 할텐데 그거 하나하나 신경 쓰다보면 어디 싸울수나 있겠소. 그냥 시꺼멓게 하면 피가 묻건 진흙이 묻건 음식이 묻건 하나도 안 보일텐데 얼마나 편하겠소.

하다못해 잔주름도 조금만 멀리 있어도 잘 안보일테니, 걍 새까맣게 칠해버리고서 알아서 입고 다니게 둡시다."

"아…."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물론 편의성 때문이었다. 염료로 색을 들일때도, 후일 병사들이 입고 다닐때에도 어두운 색은 용이하다. 염색과정에서 뭔가 착오가 생겨도 적당히 색을 덧칠해서 숨길 수 있고, 입고 다니는 동안 얼룩이 지더라도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본격적인 위장색은 아직 가내수공업 상태에서 그리 벗어나지 못한 조선의 공업력으로는 무리였다. 이형은 병사들이 입고 다니기에도 편리하고 색을 먹일때도 편리하라는 의미에서 그냥 모든 군복을 칙칙하고 어두운 색으로 통일해 버린 것이었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삼족오를 상징하는 검은빛이라고 선전했지만 말이다. 한창 민족주의에 열광하던 병사들과 일선장교들은 그런 줄로만 알고서 자랑스럽게 검은색 군복을 입었다.

"제1, 제2, 제3 연대의 행군속도는 모두 시속 3km로 같다고 가정한다. 사단 참모 본부로부터 제1 연대가 북서로 7km, 제2 연대가 남으로 6km, 제3 연대가 남동으로 4km 떨어져 있다고 가정하였을 때, 북으로 14km 지점에서 시속 5km로 남하하는 적 경보병 연대와 맞서기에 적합한 1, 2, 3 연대의 집결지점은?"

"훈련번호 2031번 질문 있습니다! 행군 시 장애가 될 지형 장애물의 유무와 정확한 전장 환경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처지에 벌써부터 그걸 듣는다고 지형 장애물과 전장 환경까지 오차범위에 포함 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어떠한 지형 장애물도 기상 이변도 없는 이상적 전장 환경을 가정하도록, 훈련번호 2031번."

한편 장교들은 장교들대로 특훈이 한창이었다. 병졸들이 몸으로 구르면서 근대 병사가 익혀야 할 기본 소양을 익히고 있었다면, 장교들은 그야말로 돌을 깨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미터니 킬로그램이니 뭐니 하는 단위에 익숙해지면서 또 한편으로는 생전 처음 보는 계산식을 끄적여야 했으니 이들의 고충도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나이가 젊은 장교들의 경우에는 밤을 새우거나 동기들끼리 모여서 함께 공부하면서 어떻게든 진도를 따라오고 있었지만, 중장년 장교들에게 이러한 신식 군사 교육은 도저히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딱히 그들이 보수적이거나 해서라기보다도, 흔하디흔한 배움에도 시기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후우, 정말이지 젊음이 부럽구먼.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지만, 말이 그렇지 어디 그게 그렇게 쉽나…. 이래서야 원, 차라리 다른 길을 알아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구먼."

"에헤이, 이 사람이. 너무 그렇게 자학하지 말게. 자, 여기 콤파스일세. 색목인들이 원을 그릴 때 쓰는 물건이라는 구만. 굳이 복잡하게 계산할 게 뭐 있는가? 지도에 우선 점으로만 찍어두고서 원 3개를 그려서 이 3개의 원이 만나는 점을 구하면 그만인 일이지. 이 점들 중에서 그대가 보기에 가장 적과 맞서기 좋을 것 같은 지점이 정답일걸세."

"오호, 과연! 고맙네. 이런 방법이라면 나도 아직 따라갈 수 있을 것 같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 또한 아예 배우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중간한 선에서 내려온 지시도 아니고 왕에게서 직접 내려온 지시였다. 배우거나 익히는 것이 힘들다면 힘든 대로 어떻게든 익히는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흔히 말하는 야매나 가라였다.

당연히 올바른 방법도 아니었고, 맞는 경우보다 틀리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야매나 가라도 계속하다 보면 정교해지고 익숙해지는 법. 청년 장교들이 아직 팔팔한 두뇌를 사려 스펀지처럼 군사고문관들이 가르치는 족족 익혀 나갔다면, 중장년 장교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대로 어떻게든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려 애쓰고 있었다.

누가 그러던가. 군대는 야매와 가라가 전부라고.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은 법인데, 시대가 다르다고 군대가 달라지라는 법은 없었다.

* * *

"확실하게 놈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돌파력과 저지력이 동시에 필요하다. 그러자면 역시 육탄돌격이 제격일 테니, 우선 창기병 대대가 전면에 서고, 그 뒤로 검기병 대대가 뒤따른다. 총기병 대대는 대열에 뒤섞여서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는 부사관들이나 장교들부터 저격하도록.

혼성편성이라는 것이 지금은 도움이 되는군. 앞으로도 당분간은 혼성편성으로 가야 하나."

한편 그 무렵 소년 왕 이형은 이형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일 같이 한성근 대령이 이끄는 제1 기병연대와 함께 말을 타고 훈련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다가올 결전에 대비하여 운용 전술에 대한 연구도 아끼지 않았다. 결전 당일 함께 돌격하여 러시아군의 시선을 끄는 역할을 자청한 만큼, 이들을 어떻게 이끌지에 대하여 연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어차피 전략 자체는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개틀링 포대와 보병대가 좌우로 넓게 퍼져 모든 화력을 적 기병사단의 돌격을 저지하는 데 집중하고 있으면, 측면에서 튀어나온 제1 기병연대가 적의 측면을 치면서 보병대와 개틀링 포대가 적 주력을 섬멸할 시간을 버는 일이었다.

전략이 단순한 만큼, 그들 각각을 운용할 전술은 결코 단순해서는 안 되었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오랜 시간을 끌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러시아군의 시선을 확실하게 끌어올 수 있는가. 그에 대한 다양한 방책이 연구되었고, 또한 시험되었다.

"하오나, 폐하. 역시 이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일이 아닐는지요. 한 번 부딪힌 후 거짓으로라도 후퇴한다면 적 경보병대에 큰 타격을 입을 것이고, 적 포병대의 포격을 뒤집어쓰게 된다면 병사들의 사기가 꺾여 적군의 수적 열세에 동요하여 돌격하기를 거부할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폐하께서 친정하신다고 하여도, 이건 역시…."

"그렇습니다, 폐하. 그리고 만에 하나 성공적으로 돌격이 이루어져도, 러시아인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단지 휩쓸리기만 할지도 모릅니다. 부디 재고하여 주십시오. 이번 작전은 역시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흐음…."

그리고 면밀히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나오는 결론은 암울했다. 우선 위험부담이 워낙에 컸고, 성공하려면 러시아군의 시선을 확실하게 끌어와서 포대와 보병대를 공격하는 일보다 제1 기병연대를 막는 걸 우선시해야 하는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이형이 나서더라도 멀리에 있어서 보지 못하거나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설령 성공적으로 이형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더라도, 1개 기병사단 전체가 이형의 등장을 알게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문제였다. 성공적으로 맞부딪히더라도 거리나 소음 등의 문제로 이형의 돌격을 눈치 못 챈 나머지, 러시아 기병들이 보병대를 휩쓴다면 화력을 최대한 살리기 위하여 넓고 얇게 산개한 보졸들은 학살당할 공산이 컸다. 그럼 잘해봐야 공멸이었다.

그럼 방법은 한가지뿐이었다. 러시아군이 받는 충격도, 실제 돌파력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 되어 러시아군이 도저히 제1 기병연대의 돌격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러시아군이 받을 충격은 이형의 존재만으로 충족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돌파력.

'일단 육탄돌격 시의 돌파력이 강대해지려면 속력이 대단하거나 무게가 대단하거나 아니면 배짱이 두둑해서 거칠 것 없이 사지로 달려들거나 뿐인데….'

속력은 군마의 품종개량이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했다. 기마술이 아무리 우수해도 근본적으로 군마가 느리다면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는 하루 이틀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당장 여름에 결전을 준비해야 하는 조선군에게 품종개량은 효과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무게는 마찬가지로 군마의 품종개량과 기병들의 무장상태가 완성시켰다. 품종개량은 앞서 말했듯이 논외였고, 기병들을 중무장시키는 것에도 한계는 있었다. 어차피 총탄 한방에 절명할 텐데 필요 이상으로 무거운 갑옷을 입혀봐야 움직임이 굼떠질 뿐인 것이다.

그럼 가장 쉬운 건 역시 정신론이었다. 물론 말만 그랬지 실제로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백날 정신교육이니 뭐니를 핑계로 얼차려를 줘봤자 눈에 띄는 성과를 얻기는 어렵다는 걸 이형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럼 어쩔 수 없구먼."

이형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말에 이형이 마침내 생각을 고친 것이라 여긴 한성근은 반색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건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이형은 태연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말했다.

"아편 10kg 정도만 강남에서 밀수해 올 수 있나? 하는 김에 지독한 고량주들도 한 1,000병 정도 준비할 수 있으면 좋겠구먼. 그리고, 말 정도 크기의 대형 포유류에게 환각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독초들을 물색해 주었으면 하는데."

"…네?"

한성근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나 이형은 여전히 태연한 모습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정답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무적의 병사들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깟 정신론이니 정신교육 운운할 시간에 용기의 물약과 광기의 연초부터 복용하는 것이 100배는 더 싸게 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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