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을 떨치다 >
그 뒤는 설명할 것도 없었다. 러시아 측 대표단은 사실상의 포로가 되었고, 조선군은 그들이 조선 측에서 사전에 준비해둔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동안 계속해서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그들을 도와줄 병사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러시아군은 사실상 전멸했고, 미군은 단지 관전을 위하여 왔을 뿐 본격적인 전투에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만일 조선 측에서 사전에 제시하였던 요구사항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였다면 심판역으로서 미합중국 측에서 간섭할 수도 있었겠지만, 조선 측의 요구는 처음부터 변한적이 없었다.
조선은 러시아가 조선명 흑룡강, 러시아명 아무르강을 국경선으로 받아들이고 만주에서의 모든 이권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고, 그 대가로서 조선은 러시아가 신장 위구르와 몽골에서 지배적 이권을 가지는 걸 용인했다. 다시 말해, 조선은 연해주를 포함한 만주 전역에서의 지배권을 요구한 것이다.
"자, 어서 싸게싸게 서명하시고 끝냅시다. 서로 얼굴 붉힐 일은 적으면 적을 수록 좋지 않겠소? 우리가 이겼고, 그대들이 졌소. 알았으면 빨리빨리 서명하고 일어납시다."
이를 요구하는 이형의 태도는 그야말로 건달패나 다름 없었다. 껄렁거리는 태도하며 협상장에 대동한 수백 여명의 병사들까지, 무엇 하나 러시아 대표단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저런 야만인들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그들은 다시금 치욕을 곱씹어야했다.
"…두고 봅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차르께서 이와 같은 폭거를 인정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감히 러시아 제국에 덤벼든 것을 뼛속 깊이 후회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후일을 기약하는 것 뿐이었다. 아무튼 그들이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오늘의 결투에서 러시아 제국이 패배한 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던 것이다.
"그야 나중에 걱정해야 할 일이지. 지금 당장에 걱정해야할 일은 아니요. 그리고, 그대들은 우선 그 이전에 두 팔 두 다리 멀쩡히 러시아로 돌아가는 일 부터 걱정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에 대한 이형의 답변은 조소였다. 그는 품 안에서 콜트 리볼버 권총을 꺼내어 몸소 무라비요프 백작의 관자놀이에 자국이 날 때까지 힘껏 총구를 찍어 눌렀다.
그의 태도는 오만했고, 광오했다. 하지만 그 누가 그의 태도를 탓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이번 전쟁의 승자였다. 그리고 승자의 오만은 당연한 권리였다. 아닌 말로,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그들의 태도는 이보다 겸손하였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무라비요프 백작은 이를 갈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에 서명할 수 밖에는 없었다. 그것 외에는 이 공간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다.
"음, 겨우 알아준 듯하구려. 참으로 고맙소. 자, 그럼 이만 돌아가봐도 좋소. 그동안 수고가 많았소이다."
이형은 러시아 대표단에게서 서명을 받아 챙기자 마자 그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여전히 한손으로는 권총을 쥔채로 말이다. 총구의 끝은 여전히 러시아 대표단을 노리고 있었다. 언제든지 총구를 당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이형은 오른손으로는 권총을 쥐고서 왼손으로는 손가락 총을 만들고서 연신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 너절한 손짓에 러시아 대표단은 굴욕을 곱 씹으면서도 잠자코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들은 포로나 다름없는 신분이었고, 조선은 무라비요프 백작의 서명을 받아챙기는 대가로 포로들을 풀어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러시아로 돌아가 후일을 도모하는 수 밖에 없었다.
"…우라질, 진짜로 죽겄네."
"폐, 폐하!"
그리고 러시아인들이 물러나고 난 다음에야 이형은 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즉시 한성근과 호위병 한사람이 달려들어 서둘러 자리에 주저앉는 이형을 좌우로 부축했다. 러시아 대표단 앞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듯 뻔뻔하게 서있었지만, 몸이 그렇게 금방 회복될 리가 없던 것이다.
오히려 계속하여 무리하게 멀쩡한 시늉을 내느라 몸만 축나고 있었다. 이쯤되면 장기간 요양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여차하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던 것이다.
"하지만 이겼어."
이형은 주저 앉은채로 낄낄 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의 광오함은 온데간데도 없이,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중간중간 거친 숨소리가 뒤섞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형은 웃었다. 이제서야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천운 같은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계략을 짜고 함정을 판 끝에 지금의 조선군이 최대의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전장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성취감부터가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거둔 승리 중 가장 공을 들이고 들인 끝에 거둔 승리였으니 말이다.
"조금은 자중해 주십시오. 옥체를 이렇게 축내시니 정말이지 앞날이 근심입니다. 폐하께서는 이 나라 조선의 천만 백성들을 짊어지고 계시다는 걸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를 부축하던 한성근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이형은 그에 딱히 답하지 않고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아무튼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아무래도 좋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렇지만 뭐…이대로 계속 난리쳤다가는 진짜로 제명에 못살 것 같기는 하군. 조금은 자중할까.'
마음 속으로 그리 생각하면서도, 이형은 자기 자신이 이번 일을 계기로 뭔가 바뀌리라는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고 했던가.
이형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형이 알고 있는 이형이라는 인간은 자중하라고 하면 더 미쳐 날뛰는 성가신 인간이었다. 보나마나 이렇게 생각만 해두고서 또 일을 터뜨릴 것이 분명했다.
"설마하니 정말로 이겨버리시다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
뒤늦게 이형을 찾아온 루이 대령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물론 그 또한 조선의 승리를 위하여 노력해왔지만, 정말로 조선이 승리할 것이라는 예측은 차마 하지 못하던 차였다. 헌데 정말로 승리해버리고 만 것이다.
1만 대 1만, 사실상 양군이 대등한 전력을 갖추고서 시작된 전쟁이었다. 그 누구도, 심지어는 조선군을 몸소 훈련시킨 프랑스와 영국의 군사고문단조차 차마 조선이 승리할 것이라고는 감히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조선은 승리했다.
유럽인들이 만들어낸 무기를 유럽인들 스스로 보다 능숙히 다룬 끝에 유럽의 열강을 상대로 승리하고 만 것이다.
"뭐, 대수로울 것도 없소. 오늘은 노서아인들이 너무 조선을 만만하게 보았다. 그것 뿐인 일이니까."
들판에 주저앉은채, 이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주변인들이 아무리 띄워주더라도 그 스스로는 이것이 대단하지 않은 승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고작해봐야 미래지식을 이용한 요행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이형은 자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조선이 승리했다고 해봤자 결국 미래지식의 덕택이었다.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러시아는 여전히 강대했고, 그들은 고작 이번 한번의 패배로 물러나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진지하게 조선을 쓰러트리려 하겠지."
이형은 조용히 입꼬리를 뒤틀었다.
***
효력이 발휘되는 것은 협정에 조인한 당일부터였고, 러시아군은 2년 안에 연해주를 포함한 만주 전 지역에서 퇴거할 것을 요구받았다.
극동의 비문명국이 유럽의 열강을 패배시키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비문명국의 군대가 열강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일 그 자체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 경우는 아무래도 특별했다. 양자 간의 대등한 조건에서 양측 모두 근대 병기를 동원하여 맞부딪힌 결과였기 때문이다.
문호를 개방한 지 불과 5년도 채 되지 않은 미지의 나라 조선이 유럽의 열강 러시아를 상대로 유럽의 무기를 사용해 학살에 가까운 압승을 거둔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이는 화젯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지에 출장 나갔던 기자들이 전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유럽의 신문사들은, 어떤 식으로건 여기에 논평을 내놓아야만 했다.
"『충격! 러시아 제국의 패전! 몰락의 시작인가?』"
"『조선 왕국, 예상하지 못했던 통쾌한 승리! 극동의 호랑이가 불곰을 깨부수다!』"
"『용감무쌍한 극동의 기사왕! 악룡을 물리치다!』"
런던의 언론들은 러시아의 패배를 한 입으로 비웃었다. 크림 전쟁과 중앙아시아에서의 팽창주의적 행보로 나날이 국민감정이 악화하고 있던 양국이었다. 러시아의 불행은 곧 영국의 행복이었고, 러시아가 쇠약해지는 것이 곧 영국의 국익이었다.
영국인들은 러시아에 크게 한 방 먹여준 조선인들에게 호의를 품었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단순한 논리였다. 만일 조선이 바다를 통해 세력을 확장하려는 모습을 보였다면 조금은 경계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조선은 일관적으로 대륙에만 관심을 보일 뿐 해상진출에는 무관심한 모습을 보여왔다.
국익이 겹칠 일이 없으니 마음 편히 적의 불행을 비웃고 또 조선의 승리에 함께 기뻐할 수 있던 것이다.
"대영제국은 존귀하신 여왕 폐하의 이름으로 조선 왕국의 위대한 승리에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조선 왕국의 승리는 러시아 제국의 팽창주의적 행보에 대한 응당한 징벌이라 할 수 있으며, 러시아인들의 오만함에 대한 경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 왕국의 위대한 승리는 극동에 명예로운 평화가 선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대영제국은 앞으로도 이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며, 조선 왕국의 우호국으로서 협력을 멈추지 않을 것을 선언합니다."
보수당과 자유당을 막론하고서 런던의 정계에서는 한입을 모아 조선의 승리를 축하하였다. 이번 전쟁을 끝으로 러시아가 극동에서의 팽창을 포기할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영국의 정계는 조선의 깜짝 승리에 놀라는 한편으로 체면을 구긴 러시아가 앞으로 극동에 총력을 다하는 구도를 기대했다.
러시아가 이번 패배에 보복하기 위하여 극동에 국력을 투자하면 투자할수록 영국은 유럽이나 인도 등지에서 큰 힘을 들이지 않고서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극동의 평화를 이야기해도, 그들은 향후 10년에서 20년간 극동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극동의 새로운 패자 조선은 이번 승리를 계기로 더 많은 전란에 휩쓸리게 될 터였다. 그리고 영국은 극동에서의 분란을 더더욱 조장할 작정이었다. 그레이트 게임의 번외 전장이었던 극동은 점차 무대의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조선의 나폴레옹, 러시아 원정을 승리로 이끌다! 황제 폐하의 명예로운 극찬!』"
"『조선의 깜짝 승리! 승리의 비결은? 극동의 프랑스군 조선군의 전격해부!』"
"『이달의 영광스러운 프랑스인-조러전쟁의 영웅 루이 베르그송 대령!』"
런던의 언론들이 러시아의 패배에 배꼽을 잡고 비웃었다면, 파리의 언론은 조선의 승리를 프랑스의 승리인 양 보도하고 있었다. 조선군이 압승을 거두게 된 것은 프랑스군 군사고문단이 훌륭히 훈련한 덕분이었고, 조선이 승리한 것은 프랑스와 손을 잡은 덕분이었다.
러시아가 패배한 것은 물론 프랑스와 적대했기 때문이었고, 파리의 시민들은 이 위대한 프랑스의 승리를 자기 일인 양 기뻐했다. 그들의 위대한 조국 프랑스는 극동에서도 당연하다는 듯이 승리를 거두고 있었고, 이는 축하해 마땅할 일이었다. 프랑스인들은 그들의 승전을 축하했다.
그나마 소년 왕 이형 정도가 승리의 주역 중 한 사람으로서 주목받았을 뿐이었다. 물론 주목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극동의 가장 대표적인 친 프랑스 인사였기 때문이었다. 소년 왕은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폐쇄적이던 조선에서 몰래 나폴레옹의 일대기를 읽으면서 정복 군주의 꿈을 키운 소년기를 가지게 되었다.
파리의 어느 황색언론에서 처음 만들어낸 이와 같은 낭설은 삽시간에 정설로 받아들여 졌고, 파리를 시작으로 프랑스 전역에 널리 퍼져나갔다. 소년 왕은 어느새 나폴레옹의 열렬한 신봉자이자 추종자로서 러시아 원정의 패배를 갚기 위해 복수의 칼을 갈아온 인물로 탈바꿈되어있었다.
"우리 프랑스 제국은 무사히 양국 간의 적대행위를 마무리하고 평화를 되찾기 위한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준 조선 왕국과 러시아 제국 양국에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프랑스 제국은 앞으로도 극동의 평화를 수호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며, 양국과의 우호 관계를 이어나갈 것입니다."
그에 반하여 프랑스 정부의 공식담화는 신중했다. 독일과의 일전이 나날이 임박해오면서, 프랑스 또한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를 재고해야 할 필요가 발생하였던 탓이었다. 프랑스는 조선의 승리를 축하하기보다는 조선과 러시아 양국이 평화를 되찾은 사실을 축하하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러시아가 계속하여 조선과 으르렁거려 주기를 바란 영국과 다르게, 프랑스는 양국이 이번 전쟁을 끝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회복하기를 기대했다. 극동에서의 식민이권을 지키려면 조선과의 협력이 필수적이지만, 본국의 안보를 위해서는 러시아와의 협력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파리의 의회는 조선에 대한 지원을 축소 시키는 결의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 이상 조선을 지원할 경우 조선이 러시아를 상대로 강 대 강 대립을 계속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동안 조선의 가장 확실한 우호국이었던 프랑스는 조금씩 조선과 거리를 두려는 모습을 보이었다.
"『탐욕스러운 제국주의자 부르주아지에 대한 천벌! 식민주의를 분쇄하라!』"
"『아시아 반격의 서막! 반동주의 제국주의자들이 뭐라 지껄여도 국제주의의 기차는 달린다!』"
또 한편으로는 의외의 진영에서 우호적인 논평이 나오기도 했다. 런던의 카를 마르크스와 파리의 사회주의 코뮌세력이었다. 공산혁명과 체제전복을 노래하던 그들은 조선의 승리가 제국주의의 파멸의 전주곡이 되기를 기대했다. 식민지를 통한 국내 불만 억제는 그들의 공산혁명을 방해하는 방해요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조선의 승리를 핍박받는 아시아의 프롤레타리아들의 승리로 포장하고 조선을 아시아 식민지인들의 해방자라도 되는 양 포장했다. 그들은 애써 소년 왕의 역할을 무시했고, 조선이 열강들과 같은 군대를 가지기 위하여 들인 노력 또한 외면했다.
사회주의 세력에서 발간한 신문에 묘사된 조선군은 청나라와 일본의 전통 갑주 사이 어딘가 즈음에 존재하는 정체불명의 군복을 입고서 칼과 창 따위의 원시적 무장으로 근대적 소총과 대포로 잘 무장한 러시아군을 상대로 승리하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그들이 기대한 열강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비문명국의 모습이었던 탓이다.
차라리 존재한 적조차 없는 프랑스군 장교들이 프랑스 군복을 입고 프랑스제 무기를 들고서 전투에 임한 조선군을 지휘한 것으로 묘사한 프랑스 제국 관영언론의 삽화가 조금 더 실제 전장에 가까웠다. 아예 실제 전장의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해간 미국이나 영국 언론들의 경우에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이 무렵 미국에 머물면서 유럽의 소식을 살피던 박규수와 그 일행들에게는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