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규수 사절단 >
"아니, 대관절 이게 어딜 봐서 우리 조선이란 말인가? 조총 한 자루 없다니. 우리 조선군을 어디 토인 오랑캐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내 말이 그 말일세! 그리고 복장은 또 이게 뭔가? 오랑캐 취급도 정도가 있지, 이거야 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하는 박규수의 말에, 민치상은 시가 담뱃재를 털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처음에는 조선의 승리를 기뻐하는 내용이라고 해서 일부러 신문기사를 찾아보았더니 정작 조선을 떠난 지 2년이 넘어가고 있던 그들이 한눈에 보기에도 말도 안 되는 묘사를 보여주고 있던 것이다.
실제로 조선이 어떠한가보다는 반드시 이래야만 한다는 편견이 겹치고 겹쳐진 모습이었다. 그들끼리 돌려보기에는 이 정도로도 문제없겠지만, 정작 진짜 조선인이 보기에는 모욕적이기 그지없었다.
사실 영국과 프랑스처럼 이번 전쟁에서 조선이 승리함으로서 직간접적으로 이익을 본 나라들을 제외하면 유럽의 언론들은 이보다 심하다면 심했지 결코 조선에 호의적인 논조는 아니었다. 러시아를 비웃으면서도 동시에 조선의 승리 또한 별 것 아닌 듯 까내리는 논조가 보편적이었다.
그들에게는 결국 고작해봤자 극동에서의 분쟁에 지나지 않던 것이다.
"…후우, 그래서. 미리견인들은 좀 어떠한가? 그들 또한 이번 승전을 보았을 터인데."
"아침 신문을 읽었으면 알지 않나. 우리 조선의 승리로 얻게 될 금전적 이익에 대해서나 떠들고 있더군. 정말이지 미리견인들은 돈 밖에 모르는 금수들일세."
박규수의 질문에 민치상은 씁쓸하게 답했다. 2년여간에 해외 순방 동안 친분을 쌓아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허울 없이 지내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 친우의 솔직한 대답에, 박규수는 말없이 민치상이 건넨 시가의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처음에는 조국 조선의 승리에 한없이 기뻐하던 두 사람이었지만, 막상 색목인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조선을 토인 비스무리한 족속들로 묘사하는 것을 보고 그런 마음은 싹 가시고 있었다.
고작 열강과의 전쟁에서 한 번 승리한 정도로 결정적으로 인식이 바뀌기에는 여전히 색목인들에게 조선은 낯선 나라였다.
'청을 쓰러트리고 노서아까지 쓰러트린 다음에도 이럴진대, 그조차 아니었다면….'
박규수는 새삼 그의 어린 주군이 그토록 전쟁에 목을 맸던 이유를 깨달았다. 전쟁에서 연달아 승리하면서 위신을 드높인 다음에도 이런 취급인데, 그조차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보나 마나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 극동의 토인 부족 국가 정도가 보편적인 인식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계속해서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두고두고 회자가 되고 주목을 받고 관심이 생기면서 조선에 대하여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나마도 파천황적인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소년 왕에 대한 관심이 대다수였다. 지금에 와서는 색목인들 사이에서 조선이라는 나라 그 자체보다도 소년 왕이 이름을 떨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으신 분일세. 정말로 승리하기 위하여 태어나신 분이 아닐까 싶을 정도야. 설마하니 고작 5년여 만에 여기까지 오실 줄은."
박규수가 상념에 잠겨있는 사이, 민치상은 품 안에서 고이 접은 신문을 꺼내 프랑스의 관영 언론 기자가 단독취재했다는 소년 왕의 기사를 펼쳤다. 비록 나폴레옹 대제의 추종자라느니 뭐라느니 하는 이상한 사족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지만, 용감무쌍하고 유쾌하며 병사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인격자라는 등 칭송이 가득했다.
그뿐일까. 묘하게 피부도 새하얗게 미백 되어 있었고 이목구비는 뚜렷한 데다 눈매도 시원스럽고 날카로운 것이 색목인들이 일상적으로 그리는 편견 속의 누렇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눈 째진 아시아인보다는 서구적 미남 상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박규수는 이처럼 색목인이 아닌 인물을 색목인에 가깝게 그리는 것이 색목인들 나름의 호의의 표현이라는 걸 경험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걸 알고 보아도 그리 기쁜 경험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서구적 미남 상에 익숙해진 이들이라면 모를까, 박규수의 시야로 보기에 삽화 속 이형은 무슨 도깨비나 그 비스무리한 요괴가 사람 흉내를 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 참으로 놀라우신 분일세. 정말로 어디까지 가시려고 하시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네. 저분이 어디까지 가실지 마지막까지 함께 지켜봐 드릴 수 없을 거라는 것이 슬픈 따름일세."
박규수는 애써 삽화 속 이형을 외면하며 답했다. 그가 조선을 비운 동안 베이징을 함락시키지를 않나, 만주의 칸이 되지를 않나, 러시아와 싸워 압승을 거두지를 않나. 정말로 무엇 하나 행보를 예측하기 어려운 왕이었다. 덕분에 해외를 순방하는 동안 박규수도 곤욕이 끊이지를 않았다.
매일 같이 사건·사고를 일으키면서 화제의 주인공이 되는 통에 덩달아 유럽을 방문 중이던 박규수의 사절단에게도 온갖 관심이 쏟아진 탓이었다. 그들은 좋은 광대를 찾기라도 한 듯한 시선으로 박규수와 그 일행들에게 온갖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조선은 어떤 나라인가, 조선인들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기초적인 질문에서부터 기독교로 개종할 생각은 없는가, 뉴턴에 대하여 알고 있는가, 영국이나 프랑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부다처제 같은 미개한 풍습을 왜 없애지 않는가 등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도 끝이 없었다.
소년 왕 이형이 사건·사고를 일으킬 때마다 그들은 당대 사교계 화두의 주인공이 되었다. 박규수로서는 광대라도 된 기분이었다. 이와 같은 문답을 통해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계에 널리 알려질 것이라 애써 마음을 다잡지 않았더라면 도중에라도 광대놀음은 더는 못하겠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게 분명했다.
"터무니없으신 분이지. 그걸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민치상은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형을 불신한 결과가 좌천에 가까운 추방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감상이었다. 만일 5년 전으로 돌아가면 다면 그때야말로 변함없는 충성을 바칠 것이라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다짐해봤자 무슨 소용일까. 현실은 그와 동떨어져 있는데.
민치상의 신세 한탄에 어울려줄 생각이 없던 박규수는 헛기침하여 화두를 돌렸다.
"듣자 하니 미리견의 대통령 각하께서 우리를 불렀다고 들었네만, 그것이 사실인가?"
"음, 사실일세. 이번 승전과 관련하여 긴히 할 말이 있다더군. 하기야, 사안이 사안이니 주목을 받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나."
박규수의 질문에 민치상은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규수는 그 당연하다는 듯한 모습에서 새삼스레 아직 미미하기는 하나 조선이 얼마나 먼 길을 달려왔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한 나라의 왕이나 다름없는 대통령을 알현하게 되는 일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던 것이다.
처음 유럽까지 가는 길에 식민지 총독을 만나는 일조차 당황스러워했던 과거를 떠올리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 부족하지마는, 조선은 이미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 사실에 박규수는 새삼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그리고."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민치상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박규수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하였다.
"그 앤드루 카네기라는 상인이 이번 회담에 동참할 걸세. 긴히 이야기할 것이 있다더군.“
"앤드루 카네기? 아니, 일개 상놈이 어찌…."
그런 자리에, 까지 말하지 못하고서 끊은 것은 박규수 자신도 놀랄 일이었다. 조선인으로서 생각하기에, 이는 틀림없이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한나라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과 조선의 영의정이 만나는 자리에서 일개 상인이 끼어들다니.
만일 이 사실을 조선의 유자들이 듣게 된다면 필시 기함을 할 것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박규수는 요 2년여간 서역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깨닫고 있었다. 조선이 선비의 나라이듯이, 이들은 상인의 나라라는 걸 말이다.
미국은 그가 방문한 나라 중에서도 특히 유별나게 상인들의 힘과 목소리가 강한 나라였다. 그렇기에 박규수는 가까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쩌면 탄핵 위기를 겪으면서 사실상 없는 거나 다름없어진 현 미국의 대통령보다도 그 상인이 더욱 조선에 있어 중요한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나라고 한들 어찌 알겠는가. 그저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는 것뿐이지. 잘은 모르겠지만, 이번 기회에 미리견에서 우리 조선에 상당한 투자를 하려는 모양일새. 그, 모건인가? 하는 양반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하던데."
그에 반하여 민치상은 사태의 심각성을 거의 눈치채지 못한 듯 시큰둥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그에게 처음부터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소년 왕에게서 신임을 회복하여 조선으로 돌아가는 일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제아무리 서역인들에 가깝게 치장하였어도, 그의 본질은 여전히 조선인이었다.
돈벌이보다는 조정에 진출하여 뜻을 펼치는 것을 더 좋아하고, 또 마음속 한쪽에 상인들을 천시하는 기질을 버리지 못한 민치상에게 있어서 앤드루 카네기건 모건이건 단순한 가십거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그가 가볍게 언급한 인물들이야말로 그를 조선으로 다시 불러와 줄 수 있는 거물 중 거물들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미국 철강업의 대부 앤드루 카네기, 미국 금융계의 뿌리 J.P 모건. 이형이 이름을 듣기라도 했다면 그 즉시 민치상을 조선으로 다시 불러올 인물들이었다.
"뭐, 그리 신경 쓸 것 없네. 장사치들이 하는 생각이야 다 거기에서 거기가 아니겠는가. 어떻게든 쥐어짜서 크게 한몫 잡아보려는 거겠지. 우린 우리들의 일을 하면 되는 걸세."
"그렇지,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면 되는 걸세."
시가의 담뱃재를 털면서 민치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박규수 또한 표정을 굳히면서도 민치상의 말이 틀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이형이 보았다면 답답해서 가슴을 마구 두들길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 순방을 통하여 확실하게 깨달았네. 우리 조선에는 장차 필요한 것이 너무나도 많아. 우리 조선은 모든 면에서 이 서역인들에게 뒤처져 있네. 그걸 따라잡으려면 보통의 방법으로는 어림도 없을 테지. 당분간 숨 쉴 틈도 없을걸세."
"그 말대로라네. 지금 우리 조선이 노서아를 이겼다고 하나, 우리 조선에 저런 철선이 있기를 한가, 아니면 하늘 높이 우뚝 선 첨탑으로 가득한 도시들이 있기를 한가? 우리 조선이 가야 할 길이 멀고 또 머네. 세상에는 아직 우리 조선이 모르고 있던 것들이 너무나도 많아."
"그렇지. 서역의 오랑캐라고 해서 무시할 바가 못 되네. 이렇게 조선을 떠나고 나서야 우리 조선이야말로 오랑캐라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어.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하여 배우고 익혀야 할걸세. 앞으로 자라날 청년들 또한 그러하겠지. 우리 조선은 부강한 나라가 되어야 할 걸세."
두 사람은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황홀한 얼굴로 말했다. 몽실몽실 피어오른 담배 연기는 두 사람의 몽환적인 감성을 한껏 자극하고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으로는 이미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은 도시의 첨탑들과 기계가 뿜어내는 매캐한 증기 매연, 그리고 활기찬 시민들로 가득한 미래의 조선이 그려지고 있었다.
조선을 떠나고서야 그들은 그들이 그동안 알고 있던 천하관이 너무나도 협소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중원은 천하의 전부도 아니었고, 더는 천하의 중심도 아니었다. 색목인들의 발전상은 눈부셨고, 그들의 사회상은 동경의 대상 그 자체였다.
조선이 소중화라는 꿈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동안, 색목인들은 누가 보아도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고 있었다. 민치상과 박규수는 조선 또한 그들과 같은 문명을 손에 넣기를 기대했다. 단지 아무런 근거도 없는 맹목적인 환상도 아니었다.
그들의 소년 왕은 그들에게 견문을 넓히고 오라면서 이번 순방을 맡겼다. 장차 조선이 근대화를 마무리 짓기 위하여 필요한 일이라면서 말이다. 연전연승을 계속해 나가던 소년 왕이었다. 그런 그가 마음먹은 이상 조선의 근대화는 그리 큰 문제도 아니었다.
남은 건 그저 밀어붙여서 차분하게 성과를 기다리는 일뿐이었고, 그들은 기꺼이 조선의 근대화를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래 살아야겠군."
박규수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민치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을 근대화하는 일이 고작 하루 이틀로 가능할 리가 없다는 건 누가 봐도 자명했다. 색목인들 또한 고작 하루 이틀 만에 이 모든 번영을 이뤄낸 것은 아니었다. 단기간에 그들의 번영을 따라잡고자 한다면 그에 버금가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터였다.
그리고 천문학적인 돈도. 여전히 그저 땅 파서 농사짓는 것이 경제의 전부인 줄 알고 있는 중농주의 선비들에게 이 사실을 인지하기란 역시나 무리였지만 말이다. 근대화를 해야 한다는 건 알아도 실제로 근대화를 하는데 무엇이 가장 절실한지는 모르는 두 사람이었다.
"오래 살아야겠지. 물론 그보다 나로서는 조선에 돌아가는 일이 우선이 되어야겠지만 말일세. 대감, 조선에 돌아가시면 이 못난 놈 한 번만 살려주신다고 생각하시고 금상께 잘 좀 말씀드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이건 심심하지만…."
"에헤이, 됐네! 이 사람아. 갑자기 웬 대감은 무슨. 그리고 이 사람이 다른 건 몰라도 청탁만큼은 결단코 받을 생각이 없네. 썩 물러나시게!"
"그럼 하다못해 그간 봐온 정을 생각해서라도 부탁하네, 응? 아니 조선 사람이 조선에서 살아야지 언제까지 이역만리 땅에서 이런 생판 모르는 색목인들과 지내란 말인가! 어떻게 잘 좀 부탁하네, 응?"
"아니, 이 사람이 그래도!"
품 안에서 금으로 도금한 회중시계를 건네려다 박규수가 손으로 다시 밀어 넣자, 민치상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을 듯이 고개를 숙이며 절실하게 빌었다. 이국땅에서 지내는 것도 사람에 따라서는 체질에 맞을 수도 있겠지만, 민치상으로서는 어떻게 해도 기름진 음식과 물렁물렁한 침대가 익숙해지지를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이형의 총애를 되찾아 조선으로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민치상의 사정이었고, 박규수로서는 갑작스레 고개를 숙이면서 청탁을 시도하는 민치상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평범하게 잘 지내다가도 갑자기 이렇게 달려드니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긴 공공장소일세! 색목인들이 보는 앞에서 이게 뭐 하는 건가! 안된다면 안된다는 줄 알고, 인제 그만 썩 일어나시게나! 나라 망신 좀 그만 시키고!"
두 사람이 만나고 있던 장소는 뉴욕의 카페였고, 그들은 바쁜 출근 시간 거리를 오고 가는 시민들의 시선을 한 몸에 끌고 있었다. 박규수로서는 망신살이 뻗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민치상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박규수에게서 이형에게 잘 이야기해주겠다는 확답을 들은 다음이었다.
참으로 지독한 향수병 증세가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