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진개혁 >
"적어도 앞으로 반년간은 절대안정을 취하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한창 자연 회복력이 좋을 나이대여서 이렇게 금방 일어나실 수 있었던 거지,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출혈이었습니다. 한동안 물을 많이 마시시고, 영양분을 충분히 보충해주십시오."
이형이 병상에서 일어난 것은 7월이 된 다음이었다. 약 4주간을 병상에 누워있던 셈이었다. 사실 이마저도 이형이 억지를 부려서 몸을 일으킨 것이지, 프랑스인 의사는 적어도 3달간은 침상에 누워있을 것을 권고했었다. 출혈도 출혈이었지만, 한번 오른쪽 무릎에 총탄이 박혔다가 끄집어내다 보니 무릎이 성치를 못했다.
"씁…."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이형은 무릎에서 상당한 압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의사가 설명한 대로, 총탄이 관절을 한번 통째로 부숴버렸던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게 뼈가 붙은 것이 천운이었다. 아직 페니실린을 비롯한 현대 의약품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이전인데도, 청소년기의 회복력은 정말이지 놀라웠다.
'괜히 그때 외신기자들 앞에서 허세 부렸나.'
이형은 작게 혀를 찼다. 그때는 아직 약 기운이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던지라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때 이미 무릎은 한계에 도달해 있던 것이다. 당장 누워서 절대 안정을 취하며 집중치료를 받았어도 모자랐을 시기에 무릎에 무리를 줬으니 그 결말은 뻔한 것이었다. 이형은 두 번 다시는 이 두 다리로 달릴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뭐, 술이라도 마셔서 잊으면 되겠지. 요즘 한창 고량주만 마셔댔으니 간만에 소주나 까보실까."
"절대로 안 됩니다."
'빌어먹을 바게트 놈. 쓸데없이 배우는 것만 빨라서는.'
이형은 작게 혀를 찼다. 아직 조선이 개항을 한 지 5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조선말을 제2의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담당의였다. 담당하는 환자가 환자이다 보니 속이 썩어서라도 하루라도 빨리 조선말을 익히는 수밖에 없었다는 발상은 미처 하지 못하는 이형이었다.
결국 이형은 무릎 관절이 모두 온전히 돌아올 때까지 나무 지팡이를 짚고서 걸어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 무릎 관절이 모두 온전히 돌아올 것이라는 보장도 없던 만큼 기약 없는 기다림이었다. 이형도 크게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옥체를 생각해주소서, 폐하. 부부는 둘이서 하나라고 하셨던 건 폐하가 아니셨습니까? 그렇다면 폐하의 몸을 돌보기를 저를 돌보듯이 하여 주소서. 부탁드리옵니다, 폐하."
"아, 알았소. 그러리다. 안 그래도 이제부터는 조심하려던 참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라질, 진짜로 나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막 대할 수도 없고…. 대하기 어렵구먼, 정말.'
아직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벌써 지팡이를 집고 다니는 신세가 된 이형의 모습에 중전이 눈물까지 보이면서, 이형으로서는 더더욱 좌불안석이 되었다. 기실 조선의 근대화도 안정기에 접어든 만큼 더 이상 몸을 험하게 굴릴 이유도 사라진 터였지만, 더더욱 몸을 험하게 쓰면 안 되는 이유가 생긴 것이다.
전생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묘한 속박 감에 이형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서로 걱정하고 걱정을 일 또한 부부생활 일부라고 이형은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동안은 이형의 몸은 그 혼자만의 것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형은 내심 귀찮게 되었다며 투덜거렸다.
그런 이형을 지켜보면서 히죽히죽 웃고 있던 이하응은 덤이었다.
"…별로 그렇게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하오만."
"흠, 금상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지만 이 늙은이로서는 즐겁기 그지없습니다. 역시 젊음이란 좋군요, 폐하."
이하응은 일전에 이형에게 잠자리를 적극적으로 권하던 적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형이 가장 껄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영락없이 능글거리는 장난꾸러기 영감이라, 오히려 평소처럼 음흉하게 눈동자를 희번덕거리고 있을 적보다 대하기 어려웠다. 이형은 결국 정면으로 대응하기보다 적당히 다른 구실을 대 도망치기로 했다.
"시끄러우니까 빨리 일이나 시작합시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들이 한가득하잖소. 이상한 잡담은 일을 모두 마친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어떻겠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진짜 이 능구렁이 영감탱이가….'
싱글싱글하는 이하응에게서 시선을 돌리고서, 이형은 그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들을 마음속으로 정리했다. 하나같이 굵직하기 그지없는 일들이었다. 그리고 막 승전하여 권위가 한창 오른 지금 한 번에 몰아붙이지 않으면 앞으로는 기회를 잡기 어려울 강도 높은 개혁들이기도 했다.
'사실 말이 좋아서 개혁이지 내가 지금 하는 일들도 친위 쿠데타에 가깝지.'
이형은 선선히 자신의 독선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망설이거나 후회할 생각도 없었다. 이제 와서 망설이거나 후회하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을뿐더러, 애초에 그는 그런 사소한 일들에 연연하는 성정도 아니었다. 애초에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의 희생과 부작용 등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찰하는 인물이었다면 자진해서 모르핀을 복용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도 기꺼이 탄환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결과 지상주의적 인물이 바로 이형이었다. 다른 말로는 타짜 내지 스릴중독자라고도 부를 수 있었다. 조선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까지 판돈으로 거는 판국에 옆에서 말려봐야 들은 척도 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옆에서 잔소리한다고 들을 인물이 아니다.
'알 게 뭐야. 난 내 길 갈련다. 뭐, 불만 있는 놈들은 알아서 까던지 말든지 하겠지. 그거야 뭐 무시하면 그만인 일이고, 일단 시작해보실까.'
다음날, 이형은 국왕 명으로 강도 높은 서구화를 담고 있는 무진 개혁안을 발표했다. 그 이전까지 사실상 모든 개혁이 군부에 멈추고 있던 것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행정, 사법, 재정개혁에 나선 것이다.
우선 관료제를 정비하여 공무원들을 9계급으로 나누었고, 과거시험 또한 공무원 시험으로 재편하고 매년 5월에 개최하도록 하며 한 번에 등용하는 공무원의 숫자 또한 크게 늘렸다. 또한 문제 출제 시에는 유교 경전보다는 근대 행정학을 비롯하여 실질적인 실무에 필요한 지식을 시험하도록 했으며, 전문직 공무원의 경우에는 해당 분야에서의 전문 지식을 무엇보다 중시하도록 하였다.
이 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지방공무원들의 급료를 대폭 늘린 사실에 있었다. 더 이상 부업에 손댈 필요가 없도록 오로지 나라에서 주는 녹봉만으로 먹고 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녹봉은 상평통보로 지급 되었고, 마찬가지로 세수 또한 이후로는 오로지 상평통보만으로 받는 것으로 개정되었다.
세수에 있어서 가장 큰 변화는 소득세와 토지세, 법인세, 상속세와 증여세, 종합부동산세, 주세, 부가가치세 등의 도입이었다. 본격적인 시행은 1869년 2분기로 예정되었고, 이 1년여간의 준비 기간 동안 조선 정부는 국가공무원 전부를 총동원해 전국적인 세무조사에 돌입했다.
이를 위해 프랑스 극동총독부의 관료들이 행정 고문으로서 참여하였고, 이들 프랑스 관료들과 익문사 요원들의 지원 아래 철저한 세무조사가 시행되었다. 물론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하여 속이려 드는 이들은 많고도 많았지만, 결국에는 무의미한 저항일 따름이었다. 이 모든 사업을 선두지휘한 이하응은 그들이 뇌물로 구워삶을 수 있을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결국 세금을 덜 내려 재산을 속이려 한 이들은 오히려 순순히 세금을 냈을 때보다 훨씬 많은 벌금을 물어야만 했다. 이전까지의 조선이라면 곤장을 때리던가 했겠지만, 지금의 조선은 당장 이것저것 여러 사업에 손을 대면서 그야말로 재정을 물 쓰듯이 써야 하는 지경이었다. 곤장으로 시원하게 두들기는 것보다는 벌금을 받아내는 걸 우선시할 수 밖에 없던 것이다.
"자, 어째서 멍하니 멈춰 계시는 겁니까? 이제 막 서류를 펼치신 것뿐 아닙니까. 휴식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 남아있지요. 어서 함께 힘내보도록 합시다, 금상! 껄껄껄!"
"이, 이 능구렁이 영감탱이가…!"
그리고 세무개혁을 비롯한 대대적인 개혁과정에 동원된 행정인력 중에는 이형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이형은 그저 서류를 쓱 읽어보고서 이상이 없다면 도장을 찍어주는 역할 정도밖에는 하지 않았지만, 조선 전체에서 서류가 몰려드니 그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거기에 한동안 활자를 멀리하고 말 타고 술 마시는 일에만 전념하던 이형이었나 보니 그 고충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형으로서는 숨도 쉬기 어려웠는데, 이하응은 이형이 서류를 똑바로 처리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고의로 중간중간 엉터리로 기재된 서류들을 끼워 넣었다. 당연히 이 엉터리 서류를 도중에 구별해내지 못하면 이하응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었다.
자신이 벽에 똥칠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형만큼은 서류만 읽다가 죽게 해주겠다는 이하응의 다짐은 단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오냐, 어디 같이 죽어보자! 이깟 서류 금방 익숙하게 되어주마. 노쇠한 네놈으로서는 체력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터. 서류만 읽다가 기절해서 똥오줌을 지리게 만들어 주겠다!'
'보나 마나 고약한 생각을 하고 있구먼. 쯧쯧, 멍청한 놈. 망나니 놈이 고작 며칠 글 좀 읽었다고 본관 흉내라도 낼 수 있을 것 같더냐? 그럴 일은 일평생 없을 테니 꿈 깨거라!'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면서 더욱더 서류 업무에 전념했다. 서로 서류를 짬처리하면서 상대방이 하루 동안 처리해야 할 서류의 양을 대폭 늘리며 보복하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서류업무로 맞붙어봐야 밀리는 건 이형이었다. 이형이 집권한 이래로 온종일 글만 읽어야 했던 이하응을 상대로 이형은 무엇 하나 따라갈 수가 없었다.
시종일관 느긋한 이하응에 비하여 이형은 하루하루 탁자에 가득 쌓인 서류들을 처리하는 것만도 바빴다. 그간 몸이 힘들고 머리는 쉬운 일들만 골라서 하던 부작용이었다. 인과응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렇게 이하응과 이형이 서로 서류를 짬처리하면서 보복하고 있을 무렵에도 개혁은 끝없이 진행되었다. 세무개혁 다음은 행정개혁과 사법개혁이었다.
가장 큰 변화는 기존의 전근대적 행정구조에서 탈피하여 내무부, 외무부, 법무부, 재무부, 농림부, 상공부, 교육부, 국방부, 궁내부의 9개 부서로 이뤄진 의정부 내각으로 개편된 것이었다. 궁내부가 의정부 내각의 하위기관으로 포함되었다시피, 왕실 업무 또한 내각에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왕실 내탕금을 관리하던 내수사는 재무부의 하위기관으로서 통폐합되었고, 대신 임시로 호조의 하위기관으로 편성되어있던 왕립은행은 호조에서 독립하여 독립적인 지위를 가진 기관으로서 재편되었다. 익문사는 정식으로 국가정보원과 우체국으로 분리되었고, 국가정보원은 국왕 직속 기구로 남았으나 우체국은 내무부의 하위기관으로 분리되었다.
법무부로 재편된 형조의 하위기관으로 검찰청이 신설되었고, 기존에 포도청은 국가헌병대와 경찰청으로 세분되어 국가헌병대는 국방부의 휘하로, 경찰청은 내무부의 휘하로 재편되었다. 내무부의 하위기관으로 소방청이 신설되어 소방업무를 전담하게 되었고, 특허청이 상공부의 하위기관으로 신설되고 재무부의 하위기관으로 국세청, 관세청, 통계청이 신설되는 등 근대적 국가조직을 갖추기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로서, 기존에는 지방의 수령들이 보유하고 있던 지방의 군권과 수사권, 재판권이 회수되어 각각 국방부와 법무부, 대법원에서 관리하게 되었다. 근대적인 중앙집권이 이뤄진 것이다.
이를 위해 군관학교는 육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로 분화되고 각각의 정원 또한 1000여 명씩으로 크게 늘렸으며, 경찰대학교와 법과대학이 준비되었다. 최초의 법학과는 성균관에 새로이 개설되었고, 성균관 또한 성균관 대학교로서 조선 최초의 근대적 대학교로 개편되었다.
성균관 대학교를 시작으로 경기 대학교, 평양 대학교, 전주 대학교, 충주 대학교, 부산 대학교, 해주 대학교, 강릉 대학교, 함흥 대학교의 8개 국립종합대학교와 해양대학교, 교육대학교, 농수산대학교, 예술대학교, 기술대학교 등의 국립전문대학교들이 준비되었고,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해외 교수들을 초빙하고 사립대학교의 설립이 적극 권장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형이 베이징에서 끌어왔던 자금 전부가 증발한 것은 물론이었다. 의무교육에 이어 고등교육과 행정, 세무개혁까지. 하나 같이 돈 먹는 하마들뿐이었으니 필연적인 일이었다.
"기호 1번! 이 심영에게 깨끗한 한 표를 던져주십시오! 금상께 충언을 아끼지 않으며 우국충정의 자세로 이 나라 조선이 군자의 도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와아아! 심영! 심영, 심영!"""
삼권분립을 위해 재판을 전담하는 대법원과 상원과 하원으로 이뤄진 의회가 설치되었고, 총선거는 국왕탄신일인 1868년 9월 8일 실시되었다. 다만 선거구는 한양에 한정되었으며, 출마한 의원들은 모두 왕당파 의원들 뿐인 데다 출마한 의원들 전원이 당선되는 등 사실상의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다. 애초에 국민교육조차 아직이던 판국에 정상적인 선거가 진행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들 최초의 제헌의회는 프랑스와 미국의 법학자들을 초빙하여 프랑스와 미국의 사법체제를 참고하여 헌법과 형법을 제정했다. 형법의 경우에는 프랑스의 대륙식 법체계를 받아들이되 경국대전을 기반으로 하여 백성들이 법이 낯설어 불편을 겪는 일을 최소화했고, 헌법의 경우에는 프랑스식 중앙집권을 지향하되 시민의 권리와 의무에 한해서는 미국 헌법을 참조하였다.
특히 상원과 하원의 역할과 의무에 관해서는 미국의 수정헌법을 참조하였는데, 이에 따라 기존의 조선 8도에 더하여 만주를 심요도, 간도, 흑룡도 3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모두 11개 도에서 하원은 인구비례로 선출하되 상원은 1개도 마다 10명씩 모두 110명을 뽑도록 하여 각 지역의 균형 개발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민심은 곧 천심이라 하였소. 미리견과 불란서의 헌법을 보시오. 그들의 헌법 서문이 무엇이오? 다름 아닌 백성들의 민생과 권리를 무엇보다 우선시하겠다는 민본의 맹세가 아니오! 우리도 마땅히 이들과 같이 민본의 자세를 견지하고 헌법 서문에 이를 명시하여 우리 위정자들의 다짐을 보여야 하오!"
"아니, 이 나라 조선의 국왕 폐하를 빼놓고서 어찌 헌법이라 할 수 있겠소! 마땅히 조선국 헌법의 서문은 이 나라 조선이 왕국이며 국왕 폐하께서는 황송하옵게도 이 나라 조선 만민의 구심점임을 보여야 하오! 한비자가 이르기를 법은 통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하였소. 도구가 되어야 할 법이 감히 왕권 위에 서려 하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요!"
오히려 형법과 헌법의 세부조항들을 제정하는 데에 있어서는 별다른 장애가 없던 제헌의회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가 된 것은 다름 아닌 헌법의 서문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였다. 보통 서구권에 대해 동경을 드러내던 개화파 의원들은 프랑스와 미국의 선례를 따를 것을 주장했고, 유교적 관념을 고수하던 수구파 의원들은 국왕의 권리와 역할이 명시되어야 한다 주장했다.
이 나라의 주인이 백성인가, 아니면 전주 이씨인가 하는 논의였다. 당연히 충돌이 없을 수가 없었다. 이 무렵 연이은 승전으로 한창 왕권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 문제는 수구파 의원들에게 힘이 쏠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 문제에 한해서는 이하응이 적극적으로 수구파의 손을 들어준 덕분이었다.
"의원들의 논쟁이 날로 격화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거 폐하께서 용단을 내려주셔야겠습니다."
이하응은 싱글싱글 웃으며 이형에게 결단을 내려주기를 권했다. 중앙집권이라는 절대 명제에 있어서는 뜻을 함께하던 두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이형이 이하응과 뜻을 함께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막상 국회에 출석한 이형의 대답은 이러했다.
"제 1조 1항, 대한제국은 입헌군주국이다. 제 1조 2항, 대한제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끝. 더는 이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는 일 없도록."
별 시답잖은 걸로 떠든다는 듯이 한쪽 귀를 후비적거리며 이형은 답했다. 그 즉시 국회의 공기는 차갑게 식었고, 이하응의 표정도 딱딱히 굳었다. 국왕의 용단에 누구보다 기뻐해야 할 개화파 의원들조차 놀라서 감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짜릿한 전율이 목을 타고 꼬리뼈까지 흘러내렸다. 파격적인 헌법 서문 때문에? 아니, 겨우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마침내, 소년왕이 칭제건원을 입에 담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