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98화 (98/530)

< 엇갈린 부자 >

칭제건원. 그 자체는 이상할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인제야 겨우?처럼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청과 대등한 외교 관계를 수립한 시절부터 이미 조선은 더이상 제후국 따위가 아니라 천명을 거머쥔 제국이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왕실혼을 전후로 하여 국왕을 폐하라 부르고, 왕이 스스로 짐이라 칭하는 등 예법에서는 황제와 다를 바 없이 대할 수 있었고, 청 또한 이를 두고 대청국의 부마로서의 권리라고 정신승리 했을지언정 조선에 사실상 천자와 다를 바 없이 행동할 권리가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이 칭제건원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황제임을 칭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린다. 그것이야말로 천하의 주인이라는 상징이자 증거이지 않았던가. 이제 조선이 그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부푸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듯한데, 짐은 중원의 천자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오. 대초원의 카칸이 되겠다는 것이지. 대초원의 카칸도 황제는 황제이니 이제 제국이라 불러도 문제없지 않겠소?"

그리고 의원들의 부푼 가슴은 그 즉시 이형이 대수롭지 않은 듯 꺼낸 말 한마디에 산산이 조각났다. 그제야 그들은 이 소년 왕이 만주의 칸으로서 즉위식을 끝마쳤음을 기억해냈다. 지난 수백 년간 만주의 칸이 곧 대초원의 카칸을 겸직했음을 생각하면, 이 주장의 무리 자체는 없었다.

조선의 국왕이라는 자가 구태여 중원의 천자임을 부정하고서 대초원의 카칸임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을 뿐. 의원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며 착잡함을 감추지 못했다.

"뭘 그리 한숨을 내쉬고 있는 게요? 카칸도 황제는 황제지 않소. 영길리의 황제라는 작자도 어차피 몽골인들이 세운 무굴 제국의 제위를 빼앗아 인도의 황제임을 주장하고 있으니 카칸이고, 노서아도 몽고의 카칸이나 다를 바 없고 청의 천자도 본래는 카칸이었으니 결국 지금의 천하는 카칸의 천하임이 아니겠소. 그깟 중원의 천자보다 대초원의 카칸이 더 중한 세상에서 뭘 그리 아쉬워하는지, 참."

"푸, 푸흡!"

이형은 여전히 따분하다는 듯 귀를 후비적거리며 그런 의원들에게 추가로 폭탄선언을 던졌다. 그 한마디에 수구파 의원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개화파 의원들은 헛웃음을 흘렸으며 프랑스와 미국에서 초청된 법학자들은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아직 유교적 세계관에서 탈피하지 못한 의원들이야 아무튼, 프랑스와 미국으로서는 영국의 제위를 몽골 카칸이라고 대놓고 까버리니 웃음을 참을 수 없던 것이다. 정작 인도제국이 성립한 건 10년 뒤의 이야기로, 미래인인 이형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논하는 꼴이었지만.

이형으로서는 딱히 웃으라고 한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던지라, 그는 역관들이 자신이 한 말을 이상하게 번역한 것은 아닌가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역관들을 탓하지도 않았다. 그 스스로는 절대 인정하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 그는 어딘가 이상한 인물에 속하는 모양이었으니.

"뭐, 아무튼 그런 줄만 알고 계시오. 뭐라 왈가왈부하든 상관하지는 않으리다. 그걸 들을까 말까는 짐이 알아서 하겠지만. 그대들은 그대들이 할 일을 하시오. 짐은 짐이 할 일을 할 테니. 이상이오."

거기까지 말하고서는 이형은 임시로 창경궁을 빌려 쓰고 있던 국회를 떠나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지만, 요컨대 이형 나름대로는 그것이 국회 연설이었던 것이다. 모두가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창경궁을 떠나는 소년왕의 그 뒷모습을 눈길로만 뒤쫓는 가운데, 이하응은 이를 악물고 내달려 한걸음에 이형을 따라잡았다.

그러고서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이형에게 따져 물었다.

"도대체 조금 전 그건 무슨 생각입니까!"

"음? 카칸 말이요? 그거야 뭐, 이미 말씀드렸잖소. 청은 앞으로 한족의 제국이 될 테니 우리 조선은 대초원의 카칸이 되어야 할 거라고."

"그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아시잖습니까! 무슨 생각입니까. 기껏 되찾은 조선을 저런 무지렁이들에게 넘기신다니요! 이 나라 조선은 전주 이씨들의 나라라는 걸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하물며 입헌군주국이라니요. 치세의 도구가 되어야 할 법이 군왕 위에 군림하다니, 제정신입니까!"

이하응은 전에 없이 화가 난 모습이었다. 평소에 장난스럽게 이형과 다투던 것과는 달랐다. 목에는 핏대가 서고, 눈은 시뻘겋게 물들었으며 털이란 털은 모두 곤두섰다. 영락없는 도깨비의 몰골이었다. 이하응은 전에 없이 이형에게 강렬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해도, 제정신이 아니기는 했어도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이상은 같다고 여겼던 동반자에게 어처구니가 없는 배신을 당한 것이다.

'하물며 칭제건원이라니. 그따위 얕은수로 이 몸의 눈을 가리려 하는가? 이놈, 백 년은 이르다. 아암, 백 년은 이르고말고! 네놈의 그따위 얕은수로 저 어중이떠중이들을 속일 수는 있어도 이 몸의 눈까지 속일 수 있을 성싶더냐!'

이하응은 이형이 느닷없이 대한제국을 입에 담은 것 또한 이형의 수작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자리에 함께 동석했던 의원들의 경우 이형이 대한제국을 입에 담음과 동시에 온통 거기에만 정신이 팔려 정작 이형이 그 뒤에 덧붙인 헌법 서문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 정작 보다 중요한 건 헌법 서문이었을 텐데 말이다.

이하응으로서는 도저히 이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간 잘 해오지 않았던가. 전주 이씨의 천하를 위하여 지긋지긋한 양반들을 숙청하고, 부국강병을 이룩하여 왕권을 있는 대로 끌어올리고, 백성들에게 토지개혁이라는 당근을 내밀면서 그들이 알아서 입을 다물게 했다. 그뿐일까. 익문사, 아니 이제는 국가정보원을 이용해 온 나라의 불평분자들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마침내 백여 년 만에 전주 이씨의 천하가 돌아왔단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입헌군주국이라니. 무지렁이 백성들에게 국권을 넘겨주겠다니.

"정녕 네놈이 이 나라 조선의 국왕이더냐!"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하응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고함은 온 궁궐에 울려 퍼졌다. 필시 이날의 소란을 두고서 뒷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데도 이하응은 참을 수가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에게서 최악의 배신을 당한 이하응의 심정은 차마 말로써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에 대한 이형의 답변은 이러했다.

"그럼 댁이 보기에 짐이 조선의 왕 노릇을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보이시오?"

시큰둥한 대답이었다. 뭘 그리 요란을 떠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대답이기도 했다. 딱히 연기 같은 게 아니라, 이건 이형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조금 성정이 많이 삐뚤어지기는 했어도 21세기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살다 온 이형에게 이건 딱히 소란을 떨 이유도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은 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던 조선을 강제로 깨워 달리게 할 필요가 있었으니 총칼을 동원하여 선비들의 입을 틀어막고 백성들의 불평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달랐다. 조선의 근대화는 이미 본궤도에 올랐고, 남은 건 그저 어긋난 방향으로 빠지는 일 없이 올바르게 나아가도록 방향을 지정하는 것이었지 굳이 폭력으로 백성들의 목소리를 틀어막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형이 스스로 자각하고 있다시피 이형은 결코 서류 작업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조선 제일의 유학자로서 누구보다 많이 공부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야 하는 조선의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걸 알고 있으니 이형 또한 유교적 질서에 순응해야 하는 중화제국의 천자보다는 대초원의 카칸임을 천명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나보다 잘 아는 놈들이 하나둘씩 유학 생활 끝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올 텐데 이 나라 망하는 꼬락서니 볼일 있냐. 내가 직접 하나하나 손보게. 댁이야 그럴 수 있겠지만 난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다고. 난 일평생 도장이나 찍다가 죽을 거다,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

두 사람의 생각은 완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이는 예고된 일이었다. 처음부터 이형은 근대화가 주목표였고, 이하응은 절대권력이 주목표였다. 일시적으로 두 사람의 길은 일치하는 듯 보였지만, 본격적인 근대화의 시동이 걸린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의 길은 결정적으로 어긋나 버리고 있었다.

이형으로서는 절대권력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그의 동기는 권력욕이 아니었고, 전주 이씨는 그에게 어떠한 소속감도 느끼게 할 수 없었다. 그의 동기는 처음에는 직업윤리였고, 그 다음부터는 자존심과 허세었다. 이형에게 있어서 절대권력은 수단일 뿐이었다. 목적을 이룩한 이상, 이형이 수단에 목을 맬 이유는 없었다.

이하응으로서는 근대화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그의 동기는 자존심과 허세 따위가 아니었고, 백성들은 그저 위정자로서 일깨우고 지배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동기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권력욕이었고, 전주 이씨란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었다. 이하응에게 있어서 근대화는 수단일 뿐이었다. 목적을 이룩한 이상, 이하응이 수단에 목을 맬 이유는 없었다.

결국, 상대에게 있어서 수단이 자신에게는 목적이었고 자신에게 있어서 수단이 상대에게 있어서는 목적이었다. 지금까지는 서로 부딪힐 일도 갈등할 일도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달랐다.

이형이 머릿속으로 그리는 지향점은 21세기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었으며, 이하응이 머릿속으로 그리는 지향점은 태정태세문단세의 전제군주국 조선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

이하응은 그제야 자신이 뭔가를 착각하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눈앞의 소년 왕을 정적으로 받아들였던 순간, 그는 그것이 서로 권력을 두고 다투어야 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했다. 이하응은 그 스스로 자각하고 있다시피 권력욕이 대단한 인물이었고, 설령 이형이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시작한다고 한들 섭정직에서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니까 정적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왕좌는 하나인데 그것을 바라는 인물은 두 사람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보다 근본적으로, 두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것 그 자체가 달랐다.

이하응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그가 난생 처음 보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의 이질적인 무언가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이하응은 그것이 그가 색목인들을 처음 보았던 순간 느꼈던 거부감이었다는 걸 기억 해냈다.

"…그렇게도 색목인이 되고 싶으십니까."

이하응은 노골적인 경멸을 담아 이형을 쏘아보았다. 그간은 근대화가 단지 절대권력을 손안에 넣기 위한 수단이라 생각해왔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이하응은 겉모습만 조선인일 뿐, 그 속 알맹이는 색목인들과 무엇 하나 다르지 않은 이형을 향해 굳이 혐오감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하여 이형은 한차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답했다.

"이 나라 조선의 선비들이 그토록 중국인이 되고 싶어 하던 것과 그다지 다를 것도 없잖소?"

이하응은 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뭐라 지적한다고 해봐야 소용없을 것이라는 걸 직감한 것이다. 답하는 대신, 이하응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거기에 협력하리라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이형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 또한 이하응과 언젠가는 척을 지게 될 것이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고, 그 끝이 이러리라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형은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처음부터 협력해줄 거라고는 기대한 적도 없으니까."

그것이 끝이었다. 두 사람은 뒤돌아섰다. 이제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걷는 일은 없을 터였다. 두 사람의 길은 이제 돌이킬 수 없이 엇갈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에게 완전한 이별은 불가능했다. 이형은 이하응 없이 국정을 볼 수 없었으며, 이하응은 이형의 심기를 거스르는 순간 황제에게 광신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는 군부를 통제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서로의 뜻이 엇갈렸음을 확인하고서도, 두 정적은 위태로이 공존하는 수 밖에 없었다.

***

일찍이 국회에 나가 예고했다시피, 이형은 무진년 개천절에 카칸으로서 즉위할 것을 천명했다. 본래 중국에서 온 사신을 맞이하는데 쓰이던 덕수궁 남별궁을 개조하여 원구단을 짓도록 하였으며, 대초원 곳곳에 이름난 부족장들에게는 초대장이 보내어졌다. 여기에 반발하는 부족은 어디에도 없었다. 청과 러시아를 차례로 꺾은 자가 카칸이 아니라면 도리어 누가 카칸이란 말인가?

카칸으로서 즉위함은 그저 이형이야말로 정당한 대초원의 카칸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한성 곳곳에는 만주 팔기의 여덟 깃발이 휘날렸고, 그 여덟 깃발의 위로 조선 국왕의 붉은 어기가 휘날렸다. 그 상식을 초월하는 현실에 졸도하는 선비가 한양 저잣거리에 한둘이 아니었다. 얼핏 보기에는 마치 만주 팔기가 한양을 점령하기라도 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정반대였다. 조선에 정복당한 것은 만주였고, 만주를 정복한 것은 조선이었다. 여덟 깃발 위로 휘날리는 조선 국왕의 어기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소년왕은 조선 육군 원수복을 입고서 카칸으로서의 즉위식-예케 쿠릴타이에 참가했다. 그와 대비되게도 중전은 언제 나와 같은 만주 황실의 전통 복을 입고 있었다. 섭정공 이하응은 병을 핑계로 참석을 거부하였고, 지난 왕실혼 때와는 달리 이번 즉위식에는 영불미 3개국 또한 조선에 주재하던 공사들을 통하여 참석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절차는 단지 재확인하는 절차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하여 소집 장을 받은 만주의 대부족장들은 전원 참가하였고, 러시아의 봉쇄가 풀리면서 내몽골의 몽고친왕 셍게린첸과 그 휘하의 몽골 부족장들 또한 참가하였다. 그들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엄숙한 모습이었고, 또한 진중한 모습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들 대초원의 새로운 황제를 맞이하는 의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오랜만이구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4년 만이던가? 그때는 정말이지 고생이 많았소."

이형은 내몽골에서 찾아온 셍게린첸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불과 4년 전 그는 조선을 침략한 침략자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러시아에 맞서 조선의 힘을 빌리기 위해 먼저 찾아왔다. 이형은 오랜만에 만난 친우를 대하듯이 살가운 태도로 그를 환대했다.

"이 보잘것없이 초라한 게르의 비천한 양치기를 환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충정을 다하겠나이다. 부디 저와 저의 일족들을 굽어살피어주소서."

"그야 물론이고말고! 아암, 걱정하지 말아도 좋소. 내 그대와 그대의 일족들을 내 가족과 같이 생각하여 후하게 대접해줄 테니! 오늘은 그저 함께 마십시다!"

셍게린첸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이형에게 예를 표했다. 이형은 그에 언제나처럼 껄껄거리며 술잔을 들이밀었을 뿐이었다. 되도록 음주를 피해달라는 담당의의 주문 따위는 진작에 잊은 지 오래이던 이형이었다. 셍게린첸은 제자리에 부복하여 엄숙히 이형이 내리는 술잔을 받았고, 그와 함께 동행한 몽골 부족장들 또한 이를 받았다.

새로운 대초원의 주인을 받아들이는 의식이었다. 결코 소홀히 하거나 할 수는 없었다. 곧 한성에 모인 모든 대부족장들이 이형이 내리는 술잔을 받았다.

그들은 새로이 카칸이 될 조선의 왕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가 이 순간 무엇을 말하는가가 곧 앞으로 대초원의 방침을 결정짓게 될 터였다. 전쟁인가, 평화인가. 정복인가, 굴복인가.

"앞으로도 노서아의 칸과는 두고두고 다툴 일이 있을 것이오. 내 그때는 그대 몽골인들을 선봉에 세우겠다 약속 드리리다."

지나가는 듯한 말로, 이형은 나지막히 속삭였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몽골 초원의 대부족장들은 얼굴을 딱딱히 굳혔고, 마음 속으로는 환호성을 질렀다. 새로운 카칸의 결정은 전쟁이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꺼릴 이유는 없었다. 몽골인들은 이 순간 러시아의 칸에 맞서 사력을 다해 저항할 것을 결의했다.

"…결코 실망 시켜드리지 않겠나이다, 카칸이시여."

셍게린첸을 시작으로, 몽골의 대부족장들은 일제히 술잔을 비우고서 자리에 엎드려 공손히 절을 올렸다.

그들을 내려다보며, 이형은 입꼬리를 뒤틀었다.

19세기의 유목제국, 대한제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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