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을 거래하다 >
유구 왕국의 탈환과 사츠마번의 잔당 소탕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후.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각 총리대신 박규수는 이형에게 유구 왕국의 처분을 물었다. 그리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이번 유구 정벌을 계기로 유구를 보호국으로 삼을 것인가, 전근대적 번국으로 삼을 것인가, 그도 아니면 식민영토로 병탄할 것인가. 혹은 좀 더 신중을 기하여 보호국으로 삼은 다음 차근차근 시간을 들여 병합할 것인가.
해외 순방을 다녀오기 이전에 박규수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발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박규수는 달랐다. 그는 지금의 세계가 어떤 논리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한 이후였다. 지금은 힘이 곧 정의였고, 열강들에게는 이를 정당화할 압도적인 과학기술력에 근거한 힘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대한제국 또한 그와 같은 힘을 손에 넣었다. 어느 정도는 말이다. 적어도, 유구 왕국 정도의 자그마한 소국이 상대라면 어떤 저항이 나와도 가볍게 짓밟을 수 있을 만한 힘을 손에 넣었다. 그러니 박규수는 일부러 이형에게 물었다. 어찌 할 거냐고 말이다.
"무엇을 말인가?"
그에 대한 이형의 대답은 시큰둥한 것이었다. 뭘 그리 요란을 떨고 있느냐는 듯한 질문이었다. 이에 당황한 박규수가 뭐라 말을 더하기도 전에, 이형은 덧붙였다.
"설마 이번 기회에 유구 왕국에 손을 뻗치겠다는 허황된 생각일랑 버리는 게 좋소. 바다는 영길리인들의 것이오. 노서아와 척지고 영길리와 손을 잡기로 한 이상 우린 거기에 순응하는 수밖에 없소. 우리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영길리에게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냐고 운을 띄우는 일이지 이번 기회에 바다로 뻗어 나가는 게 아니오."
"…과연. 폐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에 대하여는 잘 알겠습니다."
이형은 성가시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박규수는 그제야 이형의 뜻을 헤아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형은 일찍이 지금의 천하를 영국의 천하라고 하였었다. 박규수는 그때 이형이 보여주었던 세계지도를 똑똑히 기억했다. 러시아의 천하관에서 조선 반도는 대양으로 뻗어 나가는 관문이었고, 영국의 천하관에서 조선 반도는 대륙으로 뻗어 나가는 관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한국은 영국과 손을 잡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한국은 대양을 등지고 대륙으로 뻗어 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영국과 척을 지고 싶지 않다면, 바다는 쳐다도 보지 않는 것이 옳았다. 그래야지만 뒤탈 없이 영국의 지원을 받으며 러시아와 맞설 수 있었으니까.
"주제를 파악 못 하면 우리 한국은 그저 패망할 따름이오. 짐이 죽고서 50년 후, 100년 후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짐이 죽기 전까지 우리 한국은 죽으나 사나 영미의 사냥개니까. 밥그릇을 착각하지 마시오. 대양은 우리 것이 아니오. 이번 원정은 단지 안심하고 노서아와 싸울 수 있도록 후방을 안전하게 만들었을 뿐 이상도 아니오.
바다는 머리에서 지우는 것이 좋소. 괜히 바다로 뻗어 나가겠다며 국력을 낭비해봐야 노서아와 싸우는데 필요한 국력만 낭비할 뿐이고, 노서아와 싸우는 데 소홀하면 주인에게 버림받을 테니까."
"명심하겠나이다, 폐하. 그렇다면, 왜국과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비록 해적이라고 하나, 이번 유구 원정에서 토벌한 것은 왜인들이 아닙니까."
"폐, 폐하!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그래서야 영락없이 영길리를 상국으로 모시시라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황제가 또 새로이 상국을 섬기다니요, 그것은 아니 될 말씀입니다! 청컨대 자주의 기치를 잃지 마소서!"
"실로 그러하옵니다! 폐하, 옛 야인들조차 조선을 형제로서 대우하였고, 그보다 조선의 처지가 못하게 되었을 적에도 군신의 관계로서 예우하였습니다. 하온데, 사냥개라니요! 그것은 아니 될 말이옵니다! 어찌 그런…!"
이형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담담히 말했다. 이것이 그가 인식하는 지금 한국이 견지해야 할 자세였으며, 극동의 정세에서 한국이 맡은 역할이었다. 그러니까 이를 말하는 데에 주저함이 있을 리도 없었다.
다만 한가지, 지금 이 자리가 내각의 장관들이 모여 국무회의가 한창이었다는 점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박규수와 단둘이 있을 적에는 자주 하였던 이야기였던 만큼 박규수로서는 그것이 당연한 듯이 넘겼지만, 여타 장관들에게는 달랐다. 단번에 소란이 퍼져나갔고, 어전이라는 사실조차 잊고서 웅성거리는 이들이 나왔다.
"시끄럽다. 그 입 다물라."
그리고 이형은 팔을 괴고서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 한마디에 자리는 침묵에 잠겼다. 숨소리조차 감히 들리지 않았다. 연이은 승전으로 군부에서 광신적인 충성을 받던 황제였다. 그의 권위와 권력은 조선 팔도는 물론이고 극동아시아 전역을 통틀어도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이형 또한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고, 또 필요에 따라 휘두르고 있기도 했다.
이미 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김좌근 세도세력을 정리한 시점에서 감히 궁내에서 이형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최익현 정도나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오고 선비들의 목을 베어 절두산을 세우는 등 사안이 사안이었나 보니 잠깐 목소리나 낼 수 있었다. 그 이후로는 그 간 큰 최익현조차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 이형의 권위는 확고부동했다.
그러나 이형은 그것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대한제국의 황제였고, 대한제국은 극동의 패권국이었다.
'하지만 고작 해봤자 그것뿐이지.'
21세기의 상식으로 생각하여 베트남이 동남아시아에서 이름을 날린다고 하여 지구 전체를 기준으로 봤을 때에도 강대국이던가? 결코 아니었다. 이형은 그 스스로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극동이니까 열강 대우를 받는 것뿐이지, 지금 당장 유럽에 떨어진다면 그리스 왕국이나 바이에른 왕국과 다투어야 하는 체급이라는 걸 말이다.
이형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말했다.
"우선 영길리의 공사를 들라 하여라. 긴히 할 말이 있다고 말이다. 그러고 난 다음 왜국과 이 일에 관하여 의논하겠다. 알아들었다면 그렇게 알고서 행하라."
""대한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만만세!""
그럼 그것으로 끝이었다. 실상 이 자리에 모인 장관들은 그저 이형이 내리는 명령을 행정적으로 구현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부속품일 뿐, 현재 대한제국에서 존재하는 정치의사는 황제 이형이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형은 내각총리대신 박규수 하나를 제외하면 그들 하나하나의 얼굴이나 이름도 외우지 않았다. 외우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고작 해봤자 그런 존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것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고서 만세를 외치며 황명에 순응하였다. 이하응조차 대만으로 떠난 지금의 대한제국은 그런 나라였다.
"귀찮아. 이러니까 주제 파악이 안되는 놈들은 성가셔. 설마하니 벌써 영국과 맞먹자고 하는 미친놈들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슬슬 좀 더 어렸을 적부터 서양물을 먹여놔야 주제 파악 하는 놈들이 나오겠군."
장관들을 내쫓고 방에 혼자 남은 이형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서는 자조했다. 그 자신도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역시나 승전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 주제 파악을 못하고 대한제국이라고 하니까 진짜로 국제적으로 제국이라 대접받을만한 강국이라고 착각하는 인사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극동에서라면 모를까, 국제무대에서 한국은 이제 막 데뷔한 신인가수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이런 인사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계속하여 한족이나 몽골족, 만주족, 일부 위구르족과 타타르족 등의 중앙 아시아계, 러시아인, 전쟁을 피하여 건너온 일본인 등 사방에서 인적자원이 유입되고 있던 대한제국이었다. 이들 모두에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해서 하나로 동화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대한제국이 이들 모두가 동경해 마지 않는 위대한 나라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흡사 미국이 이민자들을 동화시킬 때와 같이 말이다. 지금 당장은 연이은 승전으로 굳이 무언가 대단한 선전을 할 필요도 없이 알아서 위대한 대한제국과 황제의 권위 아래 하나로 뭉치고 있었지만, 영광은 세월이 지나다 보면 언젠가는 퇴색하기 마련이다. 계속하여 새로운 영광을 만들 수 없는 한 애국주의는 앞으로 강도 높은 동화정책을 펼쳐야 하는 대한제국의 실정에서 필수적이었다.
"국내적으로는 아무리 애국주의를 떠들어도 국제적으로는 적당히 주제파악할 줄 아는 놈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게 가장 이상적인데, 그게 말이 쉽지."
일전에 자금성에서 털어온 고량주를 까면서, 이형은 계속 투덜거렸다. 주제 파악이라고 이야기를 꺼내니, 그의 머릿속에서도 마침 딱 맞는 인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기는 했다.
이완용.
"그놈은 너무 주제 파악을 잘해서 대강 힘의 차이를 알자마자 나라를 팔아먹은 개새끼고. 뭐든 적당한 게 딱인데…아아, 우라질. 그 적당한 놈이 없구먼."
고량주 한 병을 너끈히 비우고서는, 이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지금쯤 한국에서 군을 움직여 자칭 오키나와 공화국을 멸하고 유구 왕국을 수복하였다는 것쯤은 영국인들도 전해 들었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럼 한국에서 굳이 찾아갈 필요도 없이, 영국에서 먼저 찾아올게 뻔했다.
"그럼 또 시작해볼까."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이형은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술기운이라도 빌리지 않는다면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동안 해왔던 일이었다. 바나나 공화국의 독재자로 끝날 작정이 없다면, 지금은 열강의 비위를 맞추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형의 예상대로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이형이 제 발로 걸어서 공사를 만나러 가려 했을 무렵에는 이미 영국의 공사가 궁궐까지 찾아온 다음이었다.
이형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토마스 공사의 모습을 확인함과 동시에 양해를 구하고서 고량주 한 병이라도 더 비울까 진지하게 고찰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한쪽에서 사근사근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중전, 아니 이제는 황후가 궁인들을 시켜 차를 끓이게 시키고 있었다.
이형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들이쉬면서 자리에 앉았다.
"보아하니 이야기가 빠를 듯 합니다. 폐하께서는 참으로 현명하신 분이로군요. 폐하와 같이 현명하신 군주를 모시고 있는 한국인들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토마스 공사였다. 겉으로는 과장되게 웃고 있고, 얼핏 듣기에는 이형과 한국을 드높이는 표현처럼 들렸지만, 이형은 이것이 우회적인 협박이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굳이 이야기가 빠를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인 사실만 봐도 명백했다. 그건 이번 사안에 있어서 영국과 한국의 이익 관계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암시였다.
"시답잖은 소리하지 말고 어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이번에 보성에서 막 재배한 찻잎으로 달인 차입니다. 식기 전에 맛보셔요."
이형은 시큰둥하게 답했고, 황후는 그들에게 녹차를 대접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형은 토마스 공사가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분명히 확인했다. 이형은 한숨을 내쉬며 작게 덧붙였다.
"…우유나 설탕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이야기하여도 좋소."
"과연 폐하께서는 현명하신 분 이시로군요."
'녹차에 우유랑 설탕을 타 먹는다니. 에라, 이 홍차 중독자 놈들이.'
이형은 그 즉시 은밀히 궁녀에 손가락질하여 몰래 우유와 각설탕을 가져오게 시켰다. 그제야 토마스 공사는 표정을 풀면서 찻잎을 우려낸 녹차에 그대로 우유와 각설탕을 타서 휘휘 젓기 시작했다.
가루녹차도 아니고 현미를 띄운 녹차에 우유를 타고 설탕을 넣어 휘휘 저어 밀크티를 만들고 있는 모습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흘겨보면서, 이형은 한입에 녹차를 들이켰다. 언제나처럼, 이형에게는 쓰기만 할 뿐이었다. 이형은 몰래 각설탕 하나를 주워 입안에 넣었다. 그제야 조금 넘길 만 했다.
"뭐, 이것 하나만 말하리다. 우리 대한제국군은 유구 왕국에 그리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소."
이형은 그제야 머리가 조금 맑아짐을 느끼며 말문을 열었다. 토마스 공사는 밀크티라고 부르기라도 뭣한 뜨물을 한입 머금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럭저럭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이형은 내심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그럼 언제쯤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귀국에서 현 일본국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한다면 말이오."
"…지금 거래를 제안하시는 겁니까?"
토마스 공사는 한쪽 눈을 치켜뜨고서 되물었다. 네까짓 것들이 감히?하는 우월의식은 굳이 숨길 생각도 없는 듯 보였다. 이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흐음, 그럼 우리 대한제국에서 유구도를 12번째 행정구역으로 편입하리다. 저어기 흑룡강 언저리보다야 사람도 많겠다 굳이 못 할 이유도 없지. 안 그렇소?"
"호오…."
토마스 공사는 말없이 잔을 비웠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것이, 무언가 고민하는 듯했다. 잠시간 생각하던 토마스 공사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답했다.
"좋습니다. 인정하도록 하지요. 그래서, 그 대신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일본군을 드리리다."
"…말장난 하실 때가 아닐 텐데요."
토마스 공사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누가 봐도 기분이 좋지 않다는 표시였다. 이형은 그래서 뭐 어쩌라는 듯이 코웃음을 치고서는 말을 이었다.
"말장난? 진정으로 그 말을 입에 담는 거요? 지금 우리 대한제국이 어째서 이렇게 육군만 되는대로 키우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우습구려. 그럴 역량이 되지를 않는단 말이오. 육군과 해군을 동시에 육성하기에는 당장 노서아 놈들과 대치하는 것만으로 벅차서 온 나라가 비명을 지르고 있는 지경이지.
그런데 우리 한국이 육군만 되는대로 키운다고 노서아 놈들이 언제까지 육군만 끌고서 와줄 리가 없잖소. 노서아 놈들이 정식으로 함대를 끌고 온다면, 그때에는 그대들 영길리가 직접 참전하여 노서아 해군과 싸워주기라도 할거요?"
토마스 공사는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역시나, 이 황제와는 말이 통했다.
"좋습니다. 일본인들을 대역으로 세우라는 것입니까. 그거야 나쁜 제안도 아니로군요. 오히려 이렇게 빨리 부족함을 인정하시고 먼저 대영제국에 도움을 청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러자면 우선 현 일본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프랑스 제국과의 토의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퍽이나."
"역시나 기대하신 대로 말이 통하시는 분이라 안심했습니다."
토마스 공사는 과장되게 미소를 띄웠다. 이형은 참 짜증 나는 웃음이라고 내심 생각하면서도,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원하는 것은 얻었다. 이걸로 한국은 그나마 말석이라도 영국의 우호국이자 동맹국으로서 대우받게 되겠지만, 일본은 그냥 영국 해군이 쓰고 버리는 장기말 중 하나로 전락했다. 지금의 일본에 뻗어 나갈 구석이 없는 이상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구도 대만도 모두 영국의 세력권 안에 들어온 와중이다. 이런 와중 한국은 일본을 러시아를 견제할 보조전력으로 쓸 것을 권했고, 영국은 이를 받아들였다. 미국은 열강조무사고, 프랑스는 본국에서의 소란으로 극동에 신경 쓸 수 없으니, 영국은 거리낌 없이 일본의 모든 여력을 쥐어짜네 해군을 육성하도록 할 터였다. 그럼 일본은 산업화조차 내팽개치고서 자국경제로는 유지할 수도 없는 거대한 군대에 짓눌리게 될 것이다.
그건 나라는 남았으되 나라가 아니다.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영국 해군의 외인부대에 불과하다. 원 역사의 일제는 이웃국가들을 침략하며 이 처지에서 탈출했지만, 지금의 일본에 그런 편법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거스름돈이 있어야겠군요. 폐하께서는 무엇을 받아 가시겠습니까?"
싱글싱글 웃으면서, 토마스 공사는 되물었다. 그에 이형은 답했다.
"일본의 경제를 받고 싶소만."
영국은 이를 승낙했다.
그것으로 일본은 한국이 물자를 대고, 영국이 국채를 사 자국의 역량만으로는 유지조차 불가능한 대함대를 모든 국력을 동원하여 육성해야 할 운명에 처했다. 육군에 손을 댈 여력조차 남기지 않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