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106화 (106/530)

< 형제의 나라 >

그날 대한제국과 일본국은 크게 3가지의 사안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하나는 안보에 관한 문제였고, 하나는 유구 왕국의 처우에 관한 문제였으며, 나머지 하나는 양국 간의 경제 교류에 관한 문제였다.

무엇 하나 이형의 향후 한국 주도의 패권 구상에 필수적이지 않은 사안이 없었다. 안보는 말할 것도 없으며, 유구 왕국의 일이 수월히 풀리지 않는다면 한국은 해외 무역에 지장이 발생할 테고, 일본과의 경제교류가 수월히 이뤄지지 않는다면 한국의 산업화에 지장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이형은 그 나름대로 마음의 각오를 한 상태였다. 일본 측에서 순순히 이형의 의사를 따라주지 않는다면 영길리의 뜻이라는 명분을 내세워서라도 힘으로 억지로 관철 시킬 작정이었다. 실제로 일본이 끝까지 서명하는 걸 거부하고서 버틴다면 영국 또한 기꺼이 개입하고자 할 것이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으로 프랑스의 목소리가 축소된 바로 지금 일본과 담판을 지어두지 않는다면 전후 극동으로 돌아온 프랑스와 외교적 충돌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경우 영국의 힘을 빌린 이상 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급해야겠지만.

'그런데….'

협상장으로 돌아온 이형은 내심 어처구니가 없다는 심정을 담아 내대신 요시노부와 그 수행원들을 흘겨보았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일본측이 적극적으로 이번 협정에 협력해온 것이다. 이형으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궁극적으로 보면 현 상황에서 일본이 식민지화되거나 보호국 화가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지만, 그거야 서구의 외교방식을 잘 알고 있는 이형이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설령 경제적으로 종속되더라도 공동의 적과 공투하는 동안에는 적어도 서로를 배신하기 어렵게 되니 말이다.

당장 겉으로만 보면 이번 협정에 조인하게 되면 일본은 한국과 무관세 자유 무역을 강제당하며, 일본군은 교전권조차 한국군에게 내주고서 한국군의 허락이 없다면 그 어떤 나라와도 교전을 벌일 권리마저 박탈당한다. 전근대적인 기준으로 봐도 굴욕적이라고 치를 떨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요시노부는 이형이 협상내역을 알려주자마자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면서 만세를 불렀다. 이형에게 은혜를 받았다면서 말이다. 그건 곧 협상의 내역을 들은 것만으로 일본이 비록 한국의 속국이나 다를 바 없는 신세로 전락하더라도 반대로 말하자면 러시아에 대한 견제 역만 충실히 해도 그보다 아래로 추락할 걱정은 없다는 걸 간파했다는 이야기였다.

'허, 고놈 참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일세. 처음에는 미쳤나 했더니만, 상정했던 것 이상으로 머리가 깨인 놈이야. 주의해둬야겠어.'

이형은 작게 혀를 찼다. 한반도에서 만주, 몽골과 그 너머의 대초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금의 대한제국이 오키나와조차 없는 일본을 상대로 휘둘릴 걱정은 없었지만, 여차하면 양국의 상하관계가 대등한 수준까지 격상되는 가능성이야 충분했다. 아무튼 지금의 대한제국은 영토로는 이미 일본과 비교할 바가 못 되지만 인구로는 일본의 2분의 1가량이었으니 말이다.

더더군더나 지금이야 영국의 지지라는 뒷배가 있지만, 앞으로 열강들의 영향력은 극동에서 계속하여 축소될 수 밖에 없다는 걸 이형은 알고 있었다. 프랑스는 사실상 보불전쟁 이후로 탈락할 테고, 영국은 보어전쟁을 계기로 탈락할 것이며, 미국은 미서전쟁이 마무리되고 필리핀만 확보하고 나면 더 이상 확장 행보를 보이지 않을테니까. 오히려 새롭게 끼어 들어올 독일제국이 거슬릴 뿐.

1890년대에서 1900년대까지의 힘의 공백기 동안 최대한 많은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은 한국 패권의 부속품이라는 형태로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손안에 넣어두어야 했다.

'…험. 역시나 경계 당하고 있나.'

이형으로부터 경계의 시선을 읽어낸 요시노부는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지금 일본이 가지게 된 위치만 유지하여도 일본으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토막파와의 내전으로 규슈와 칸사이 일대가 초토화 된 지금의 일본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사실상 한국이 연이어 3차례의 전쟁을 치른 대가로서 손에 넣게 된 극동 유일의 문명국이자 극동의 조정자라는 배에 한국에 굴복하는 대가로 올라타게 된 형국이었다. 요시노부로서는 숙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계속하여 일본이 한국에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이는 동안, 한국은 일본에 최소한 목을 축일 만큼의 물이라도 내려줄 테니까.

"뭐, 일단 이것만 먼저 말해두리다. 짐은 이번 기회에 귀국 일본국, 그리고 몽골국과 청국을 끌어들여 범아시아 조약기구라는 걸 만들어둘 작정이오."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이형이었다. 언제나처럼, 그건 대한제국의 관료들조차 난생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러나 거기에 놀라거나 당황하는 각료들은 누구 한 사람 없었다. 이형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서 황명을 어떻게 현실에 구현할지를 고민할 뿐, 그들은 이형이 내린 황명 그 자체에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그것은 일본에서 온 요시노부와 그 수행원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낯설고 놀라운 풍경이었다. 한 사람의 인간에게 이토록 많은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니.

'대한제국의 관료들이란 이 젊은 황제의 황명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하여 존재할 뿐이란 말인가?'

요시노부는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범아시아 조약기구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가맹국들의 공동안보와 경제협력, 정치적 논의와 문화적 교류, 인적 교류, 학술적 교류를 위한 곳이오. 알기 쉽게 말하자면, 하다못해 우리 아시아인들끼리만이라도 서로 도우며 살자는 것이지. 노서아라는 공동의 적을 앞두고서 어찌 같은 아시아인들끼리 서로 다투고 미워한단 말이오? 지금이야말로 온 천하의 힘을 하나로 합칠 때가 아닌가, 싶소."

"오오, 과연!"

"참으로 명안이옵니다! 온 천하가 힘을 합칠 수 있다면 어찌 노서아 따위가 적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형의 설명에, 한국과 일본 양측의 관료들은 일제히 경탄을 터뜨렸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이치에 맞는 일이라고 느낀 것이다. 노서아라는 공동의 적을 앞두고서 천하 만민이 힘을 합치는 것이 어찌 이상할 것이 있겠는가? 그리고 비단 그 공동의 적이 노서아 뿐일리가 없지 않던가? 지금은 난세였고, 서역 오랑캐들이 천하를 호시탐탐 노리는 세상이었다.

이형의 설명을 들은 한국과 일본의 관료들은 이형이 비록 겉으로는 천자임을 부정하였으되, 사실상 천조 질서를 근대적으로 부활시키려고 하고 있다 여겼다. 다만, 오직 한 사람 요시노부만은 내심 헛웃음을 흘렸다.

'과연 범인은 아니라, 이건가. 우리 일본을 살리는 대신으로서 이 아시아 전역의 민심을 품으려 들다니. 결코 보통이 아니다.'

지금의 정국에서 안보, 경제, 문화, 학문 등 모든 면에서 교류하게 된다면 가장 이익을 보게 되는 것은 어디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한국이다. 현 극동의 유일무이한 열강이자 문명국이라는 지위는 절대 가볍지 않다. 열강들은 사실상 이를 두고서 한국이 자신의 세력권을 국제기구로써 확고히 정해둔 것이라 여길 테고, 번거롭게 다른 군소 비문명국과 거래하기보다는 한국과 교류창구를 한정 지을 것이다.

그뿐일까. 한국은 현 극동에서 열강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유일무이한 나라이다. 열강의 처지에서 보았을 때 범아시아 조약기구가 곧 한국의 세력권이라면, 이에 가맹한 나라들이 보았을 때 범아시아 조약기구란 한국이 황제국으로서 여기에 속한 나라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는 맹세이다.

그것은 곧 한국이 안보를 이유로 각국에서 경제적 이권을 받아 챙기고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행보를 보인다고 해도 한국이 외부세력들로부터 조약기구에 가맹한 가맹국들을 굳건히 지켜주는 한 한국을 상국으로서 인정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요시노부가 보기에 이 젊은 황제는 고작 해봐야 천조 질서의 복원 따위를 노리는 것이 아니었다.

이 젊은 황제는 진심으로 아시아 대륙 전역을 자신의 발아래에 두려고 하고 있던 것이다.

"오늘의 만남은 그를 위한 초석이 될 것이오. 장차 짐은 각국의 대표를 초청하여 범아시아 조약기구를 완성할 것이며, 그 본부를 이 한성 땅에 두어 천하만민이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하겠소. 난세는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라고 말이오."

'유구와 대만은 빼뒀다. 그러니까 영국도 약속을 어겼다고 불평하지는 못할 테지. 프랑스는 당분간 극동에서 얼씬도 못할 테고. 미국은 경제영토가 확장되는 격이니 찬성할 테고. 러시아는 어차피 적국인데 신경 쓸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이제 내 세상이지.'

그런 요시노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서, 이형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이형은 내심 확신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목소리가 사실상 사라지고, 러시아와 적대하고, 극동에서 신경 써야 할 열강이 영국 하나로 축소된 지금. 바로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말이다.

보불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는 이제 다시 프랑스를 신경 써야 할 테고, 그보다 조금 더 지나고 나면 독일까지 신경 써야 할 터였다. 그럼 그때부터는 더 이상 한국이 자신의 세력권을 국제기구로써 확정 지어둘 기회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뿐이었다.

이토록 선명하게 기회를 잡으라 동아줄이 내려왔는데, 그것을 잡아끌지 않을 이유를 이형은 알지 못했다.

'감히 이 몸의 그릇을 네놈들 따위가 시험하려 한 것이 실패 원인이라 깨닫거라, 이 우라질 홍차 놈들.'

이형은 입꼬리를 뒤틀었다. 한국의 관료들은 언제 나와 같은 황제의 비열한 미소에 무심코 시선을 돌렸고, 요시노부와 일본의 관료들은 소름이 절로 끼치는 것을 느꼈다. 과연 저 젊은 황제가 어째서 폭군이라 불리는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 그럼 시작해보도록 합시다. 우선 한가지 확인해두겠지만, 이번 조약은 이미 영길리와 사전에 논의가 끝난 것이며 따라서 그대들이 어떤 명분을 들어 항의하건 무의미하며 반대로 짐이 그들과 논의한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할 수도 없소. 지금 실정이 그러하니, 이번 조약은 짐이 뜻대로 마무리 짓고자 하오. 어떻겠소?"

이형은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물론 그 안에 내포된 바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영국과 이미 일본을 어떻게 처우할 것인지에 대하여 논의가 끝났으니 영국과 사전에 약조한 바와 같이 일본을 마음껏 요리하겠다는 선언이었으니 말이다.

두말할 것 없는 외교적 무례였다. 당장 역관들로부터 이형의 말을 전해 들은 일본측 관료들은 하나 같이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하며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시노부는 그들이 뭐라 항의의 말을 내뱉기 전에 오른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이형이 사실상 지금의 일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조건으로서 영국을 상대로 대신 교섭해주었던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영국을 상대로 그보다 나은 조건으로 교섭할 자신이 없다면, 지금은 한국의 조건을 수용하는 수 밖에 없었다.

"뜻하신대로 하소서."

요시노부는 잠자코 고개를 숙였고, 이형은 입꼬리를 뒤틀었다. 모든 것이 그의 예정대로 풀려가고 있었다.

그날 일본과 한국은 크게 3가지의 조약서에 서명하였다. 하나는 한일우호 통상조약이었고, 하나는 한일자유무역협정이었으며, 마지막 하나는 한일상호방위조약이었다.

한일우호 통상조약은 그 무렵 일본이 열강들과 체결한 조약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다만 한가지, 유구 왕국의 처우에 대한 사항이 들어간 것이 달랐을 뿐이었다. 이에 따라 유구 왕국은 양국의 공동 보호국으로 전락하였고, 유구 왕국의 외교와 안보 또한 한일 양국에서 논의하게 되었다. 다만 세수권을 비롯한 행정권에 대하여는 손을 대지 않아, 잠정적으로 자치를 허용하는 격이 되었다.

한일자유무역협정은 글자 그대로 한일 양국 간의 경제적 협력을 보다 확대하기 위한 협정이었다. 이를 위하여 양국은 모든 상업항구를 서로에게 1년 안에 개항하게 되었으며, 수출입관세과 시장점유율 제한 등의 무역장벽을 제거하기로 합의하였다. 또 양국의 무역을 증진하기 위하여 범아시아 경제협력기구 본부를 동래부 부산항에 설치하여, 향후 극동에서의 무역 중흥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한일상호방위조약은 러시아의 남하를 겨냥한 것으로, 이에 따라 양국은 각각 육군은 장춘, 해군은 원산에 참모본부를 두고 통합참모본부를 한성에 두어 지휘권을 일원화하고 모든 군수 물자들을 규격화하고 납품체계를 일원화할 것을 협의하였다. 이에 따라 양군은 통합참모본부의 허가가 있을 때만 특정 국가에 선제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 가능해졌는데, 이 통합참모본부가 한성에 있었으므로 실상 한국이 일본의 군권을 회수한 격이 되었다.

이러한 조약들은 유럽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강도 높은 협력조약들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냉전기에 자유 진영에서 상호 간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생각해낸 협력조약들을 이형이 19세기 말에 꺼내든 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형은 이번 조약으로 일본이 한국으로부터의 경제침탈을 방어하기 위한 모든 방어막을 강제 해체했고, 일본군이 독자적인 권력 주체로서 활동할 여지를 거세했으며, 일본이 한국을 배제하고 독자적 외교 주체가 될 가능성을 파괴했다. 물론 가드를 내린 건 한국 경제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내전을 겪은 직후의 일본 경제와 화북에 빨대를 꽂은 한국 경제가 서로 가드를 내리고서 난투전에 들어간다면야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그러나 열강들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며 어느 정도 근대적 조약에 익숙해져 있던 일본 측 관료들은 물론이고, 한국 측 관료들조차 그냥 이형이 말하고 지시하는 바를 외교적 수사로 번역하여 받아적은 것뿐 그들이 무엇을 체결하고자 하고 있으며 어떤 효과를 가지게 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들로서는 이것이 어떤 결말을 불러올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이는 요시노부조차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은 그래도 이형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며, 무엇을 노리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저 이형이 일본의 경제와 군권을 탐내고 있다는 정도만 알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형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설명하지 않았고, 그저 받아적으라고만 하였다.

이형을 제외한 모두가 어안이 벙벙했던 순간이었다.

"자, 이것으로 되었소. 이것으로 양국은 형제와 같아졌소. 이것이 곧 온 천하 만민이 힘을 하나로 모아 저 간악한 적들과 싸우는 첫걸음이 될 터이니, 어찌 기쁜 일이 아닐 수 있겠소? 모두 오늘을 축하하도록 합시다! 건배!"

'아암, 형제와 같아졌고말고. 아니, 형제일 뿐이랴. 이걸로 너희들은 죽어도 우리랑 같이 죽는 거고 살아도 우리랑 같이 사는 거다. 으흐흐…!'

모두가 어리둥절해 하는 가운데, 오로지 이형만이 잔을 치켜들면서 자신의 외교적 성과를 자축하였을 따름이었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는 그저 어리둥절해 하며 함께 잔을 들었다.

"""건배!"""

요시노부와 그 수행원들은 알지 못했다.

어쩌면 주권을 빼앗기는 것보다 오늘의 이 거래를 허용한 것이 더 뼈아팠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