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반을 다지다 >
이 무렵 이형은 또 한 사람과의 이별을 마주하게 되었다. 바로 지난 5년여간 대한제국군을 극동 제일의 정병으로 훈련하는 데에 큰 공헌을 했던 루이 베르그송 대령이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임박하면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아니, 조금만 더 있다 가시지 벌써 돌아가려 하시오?"
송환식 당일, 이형은 루이 대령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형으로서는 루이 대령이 앞으로 적어도 2년 동안은 한국에 더 남아있기를 바랬다. 한국에 그만큼 루이 대령이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야 이 등신아, 너 지금 프랑스로 돌아가 봐야 프로이센 놈들에게 죽거나 포로가 된 다음 풀려나 파리에서 코뮌 놈들 때려잡는 것밖에 못 한다고!'
…라는, 그래도 지난 몇 년간 한국과 이형을 위하여 봉사해온 인물을 향한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동정 탓이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황제 폐하의 지엄하신 황명이 있었습니다. 그간 실례가 많았습니다. 안심해주십시오. 곧 저를 대신하여 한국군을 잘 조련해줄 능력 있는 군관들이 도착할 것입니다."
'그럴 리가. 앞으로 한 5년간은 프랑스 놈들 중환자실에서 꼼짝없이 골골거리고 있을 텐데?'
루이 대령은 그것이 이형이 작별에 아쉬워하는 것이라 여기고서 역으로 이형을 안심시키려 했다. 이형으로서는 답답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런데도 단호하게 돌아가지 말라고 붙잡지 않았던 것은 결국 언제가 되었건 루이 대령 또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입장이었고 프랑스가 한동안 극동에서 힘을 쓰지 못하게 되는 일이 한국의 국익에도 부합하기 때문이었다.
"그럼 강녕히 계십시오, 폐하. 돌아가면 간간이 편지 드리겠습니다. 잠시간이었지만 폐하처럼 위대하신 천재를 섬길 수 있어 참으로 영광이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루이 대령은 뤼순에서 마중 온 프랑스 해군의 군함을 타고서 인천항을 떠나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와 한국 모두에게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루이 대령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승전으로 이끈 전공(?)과 한국과 우호 관계를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공으로 프랑스에 귀국함과 동시에 준장으로 승진하고 또 재차 소장으로 특진이 예정되어 모두 2계급 특진이 예정되어있었으며, 한국은 프랑스 군사고문단에서 유럽식 군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형은 오로지 한국 혼자만의 해피엔딩이 될 것이라는 알고 있었다.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하려면 우선 나폴레옹 3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지휘권을 잡아야 할 텐데, 극동의 나폴레옹이라며 이형이 실컷 날뛴 덕분에라도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대제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스스로 프랑스군을 이끌려고 들 테니까.
"…에라, 알게 뭐라느냐. 프랑스 놈들은 또 지들이 알아서 하겠지. 나는 그냥 내 일이나 해야긋다."
이형의 선택은 무시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그가 개입한다고 해서 어떻게 바뀔 수 있는 일도 아니었던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루이 대령도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고 나면 장군이 될 테니 명색이 장군이라는 사람이 전사할 걱정도 크게 없었다. 이형은 이 일을 크게 마음에 두지 않기로 했다.
요시노부와 일본에서 온 사절단을 돌려보내고 난 후 이형이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의 경제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다만, 본격적인 공업화에 손을 댄 것은 아니었다. 아직 포항 제철소가 완공되기 이전이었던 만큼, 산업의 쌀이라는 강철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여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아직 국내에서 캐낸 철광석을 수출하여 강철을 수입해와야 하는 대한제국의 실정에서 중공업의 개발은 시기상조였다. 이형은 지금 당장 대한제국에서 손을 댈 수 있는 사업부터 시작하기로 하였다.
"이럴 때 가장 만만한 게 농업과 경공업이지, 뭘."
특히 농업의 개발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었다. 아직 텅텅 빈 만주를 화북과 강남에서 건너온 한족들로 가득 채울 작정이 아니라면 지금부터 인구증산에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한반도에서 벗어나 대륙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한 이상 혈통적으로 이리저리 섞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한족들이 만주를 가득 채울 때까지 공업화 에나 목매달고 있다가는 중화 대한제국이라는 혼종이 탄생할 판이었다.
인구증산계획은 필수적이었고, 그를 위한 위생 환경 개선과 농업의 근대화는 향후 100년을 위하는 일이었다. 만다린의 대한제국을 만들 작정이 없다면 말이다.
이형은 그 즉시 박규수를 불러 대책을 물었다. 박규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포항 제철소는 아직이지만, 개성에 세워진 시멘트 공장이라면 슬슬 시멘트 공급이 시작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를 이용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무렵에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주도로 이루어진 종두법 접종 또한 마무리되고, 굳이 가톨릭 선교회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근대식 병원들이 개업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형이 일찌감치 종교의 자유화를 공인하면서 그동안 한국에 눈독을 들이던 선교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병원을 세우거나 학교를 세우거나 보육원을 세우거나 하며 선교 활동에 전념하고 있던 것이다.
아직 한국에서 자체적인 의료자원으로 의료환경을 개선하기에는 무리수가 많았던 만큼, 그보다는 시멘트를 사용한 대대적인 공사로 도시와 농촌을 재개발할 것을 제안했다. 이형은 이를 수용하였다.
"거 나쁘지 않군. 그럼 한성부터 재개발하도록 하지. 미리견에서 이름난 건축가 몇 사람만 불러오시게나. 이번 기회에 대대적으로 뜯어고치도록 해야겠어. 도시 미관은 다소 덜 떨어져도 상관없으니까 상하수도 공사와 공중보건을 최우선시하도록 하게."
"또 미리견입니까. 알겠습니다. 이거 중원과의 무역 수입이 없었다면 진작에 재화가 동났을지도 모르겠군요. 미리견인들과는 저도 연줄이 조금 있으니, 믿을만한 인물을 소개받을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박규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게 모르게 미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심화 되어가던 대한제국이었다. 그리고 이는 나날이 늘었으면 늘었지 절대 줄지는 않고 있었다. 이형이 군부에 철도의 군사적 활용법을 연구해보라고 주문하고 육군사관학교에서도 생도들에게 철도의 군사적 활용에 대한 논문을 제출할 것을 주문하는 등 전국적인 철도 붐이 일고 있던 와중이었다.
여기에 만주에서의 철도 독점권을 거머쥔 앤드루 카네기가 미국에서 J.P. 모건의 자본까지 끌어와 무산 노천 철광산을 사들여 그 일대에 새로운 제철소를 세우려 공사를 시작하고 카네기의 성공을 본 미국인 사업가들이 하나둘씩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이러한 미국 자본의 유입은 날로 늘어만 가고 있는 것이 실정이었다.
만일 미국과의 통상조약 개정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이대로 미국의 경제적 식민지로서 수탈당했을 공산이 컸다. 그것이 수탈이 아니라 투자로 끝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대한제국이 극동의 유일한 문명국으로서 인정받은 덕분이었다. 정부에서 시장에 개입하여 자국 산업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번에 한성을 재개발하는 김에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섬유 공업단지나 세우도록 하세나. 적어도 우리가 입을 옷 정도는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겠지. 참, 그리고 상공부에 부탁하여 요식업과 주류, 담배, 가구산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해보라고 하시게. 적어도 실생활에 필요한 물품이라면 모두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괜찮겠습니까? 현장 관료들의 부담이 극심해질 것 같습니다만."
"그거야 그 치들이 혼자서 다 하려고 그러니까 그런거고. 함부로 괜히 개입하여서 일 키우지 말고 양키들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보호만 적절히 해주면서 상인들이 알아서 사업을 키우게 내버려 두게. 우리가 할 일은 기반을 세우고 너무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균형을 잡아주는 일이지 상인들에게 낚시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네."
박규수의 걱정 어린 되물음에 이형은 시큰둥하게 답했다. 아무래도 현 대한제국에서는 개화파라고 해도 여전히 유교적 사고관이 강하다 보니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상인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것이 바로 이형이 군납품 전부를 국산제품을 사용하도록 하는 등 국산품 애용정책 정도를 제외하면 경제정책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상인들이 상인들 나름대로 서역인들을 접하고 대처법을 배우며 노하우와 인맥을 축적할 새도 없이 옆에서 이건 하면 안 된다 저거 해라 계속 간섭하려고 들고 있던 것이다. 그야 상인들이 이익에 눈이 멀어 국익에 해가 되는 일을 하려고 한다거나 하면 당연히 응징이 있어야겠지만, 이건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아예 상인들의 두손 두발을 묶으려 드는 꼴이었다. 조선 시절의 농본주의 경제정책에 대한 기억이 그대로 남아있다 보니 중상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지를 못하고 있던 것이다. 이형은 내심 혀를 찼다.
'황제가 일일이 나서서 하나하나 간섭하지 못하게 막아둬야 비로소 시장경제가 돌아가는 꼴이니. 인구증산도 일단 당장 시장에 도는 부의 총량이 늘어야 감당이 되는 법인데, 이래서야 원 인구만 늘고 공업화는 저 뒤로 밀리는 거 아닌가?'
이형은 묘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 또한 아주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고, 유교는 농본주의 경제체제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농본주의 경제체제는 인구증산에 최적화되어있으니 말이다. 현장 관료들부터가 유교적 사고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마당에 한성이 재개발되면서 공중위생이 개선되고 유아 사망률이 급락한다면 감당할 수 없이 인구만 늘어나는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럼 만다린 대한제국을 피하려다 맬서스 트랩에 직격탄을 맞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이형은 범아시아 조약기구 구상을 하루빨리 현실화할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그런데, 농촌의 재개발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거야 뭐, 새마을 운동해야지."
조선의 행정관료들이 유교적 농본주의 정책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건 곧 농업정책에 한해서는 믿고 의지해도 문제없다는 이야기였다.
이형은 개성산 시멘트를 한성 재개발과 농촌 재개발에 우선적으로 돌리라 명하였다.
***
이형이 본격적인 산업화에 손을 대기 시작했을 무렵.
한일 양국의 정상회담과 이에 관한 소식은 그 즉시 극동에 이권을 두고 있는 모든 열강들에게도 전달되었다. 사실, 한국이 일본을 안보적, 경제적으로 집어삼켰다는 소식은 별다른 이야기 소재가 되지는 못하였다. 극동 유일의 문명국인 한국이 바로 이웃해 있는 이상, 일본은 잠정적으로 한국의 영향력 아래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 자명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히려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 과정에서 이형이 이야기를 꺼냈던 범아시아 조약기구에 관한 것이었다. 이는 곧 한국이 본격적으로 열강의 일각으로서 자신들의 세력권을 구축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기에, 열강들로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는 우리 러시아 제국을 겨냥한 한국인들이 간악하고 비열한 선전포고다! 우리 러시아 제국은 결코 한국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저 원숭이들은 곧 정의로운 승리란 올바른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만이 깃드는 법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가장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러시아 제국이었다. 이 범아시아 조약기구 구상이 실현된다면 가장 직접적으로 충돌하게 될 것이 자명했던 이상, 이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러시아 제국은 아직 구상 단계에 지나지 않는 범아시아 조약기구에 대하여 굳이 적의를 숨기지 않았으며, 이를 자신들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다고까지 표현하며 반발했다.
프랑스 제국은 침묵을 지켰다. 프로이센과 전쟁 중에 극동까지 외교력을 투사할 여지가 없던 만큼 이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다만, 그들은 극동에서 러시아와 국교 회복 움직임을 보이며 그리 심기가 편치 않다는 의사를 분명히 보였다.
"아시아인들의 운명은 마땅히 아시아인들의 손에 맡겨 두어야 합니다. 신대륙의 운명이 마땅히 자유로운 신대륙 인들의 손에 달려있듯이, 아시아인들 또한 그와 같을 권리가 있습니다. 미합중국은 아시아의 자유와 신대륙과의 평화 공존을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 반면 미국은 가장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뉴욕 타임스에서는 이 범아시아 조약기구 구상을 두고 '칭기즈칸 독트린'이라고까지 표현하며 자신들의 먼로 독트린과 동일 선상에 놓고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고, 미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가 몸소 지지연설을 하는 등 그 뜻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는 이 무렵 대한제국이 미국으로부터 적극적인 투자를 유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극동에서 한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은 곧 미국의 경제영토 확장과 직결되는 일이었고, 미국 사업가들이 활동할 무대가 더욱 넓어짐을 의미했다. 한국이 본격적으로 세력을 구축하여 아시아 전역에 영향력을 투사하기 시작한다면 미국 또한 한국을 통해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범아시아 조약기구의 기저에 내포된 아시아주의가 미국인들로부터 동질감을 느끼게 하기 쉬웠던 것도 컸다. 아직 필리핀과 쿠바에 대한 식민통치가 시작되지 않았던 이 무렵의 미국은 자신들을 신대륙 식민지 출신 신생 독립국들의 맏형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고, 이러한 인식은 한국이 아시아 대륙의 맏형으로서 나서겠다는 행보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우리 대영제국은 우방국 대한제국에 의한 극동에서의 관세동맹 구상안에 대하여 찬동하는 바입니다. 극동의 평화를 위협하는 공적 러시아 제국에 공동대응하기 위한 대한제국의 용기 있는 판단에 찬사를 보내고 싶군요…."
그렇다면 영국은 어떠했는가. 영국은 범아시아 조약기구를 본질적으로 관세동맹이라 해석하였다. 프로이센이 독일 일대에서 관세동맹을 구축하여 세를 모았듯이, 한국 또한 극동 일대에서 관세동맹을 구축하여 세를 모으려 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아주 완벽히 틀린 해석은 아니었다. 궁극적으로 자국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려는 것이 목적이라는 점에서 프로이센의 관세동맹과 한국의 범아시아 조약기구 구상은 일치하고 있었다.
다만 프로이센이 궁극적으로 노리고 있는 바가 독일의 통일이라면, 한국이 궁극적으로 노리고 있는 바는 패권 행사를 위한 국제기구 그 자체라는 것이 달랐다. 물론 영국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설령 안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이해할 수도 없을 터였다. 현시점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궁극적으로 어떤 힘을 가질지를 알고 있는 건 미래를 아는 이형 한사람뿐이었으니까.
이에 따라 영국은 우선 러시아의 견제를 위하여 한국의 범아시아 조약기구 구상에 동조하면서도, 내심 경계하였다. 점차 프로이센이 영국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듯이 한국 또한 언젠가 통제를 벗어나지는 않을까 우려한 것이다. 그러나 영국으로서는 이에 개입할 명분이 마땅히 없었다.
한국은 일찌감치 영국에게 자신들은 바다로 나오지 않고서 대륙에만 충실할 것이라 확언 해두었으며, 또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대만과 유구를 범아시아 조약기구 구상에서 제외했다. 안 그래도 이형이 어떤 인물인가 파악하기 위하여 성질을 벅벅 긁은 지금과 같은 시기에, 무턱대고 어깃장을 놓았다가는 대한제국 그 자체가 영국의 세계전략에서 이탈할 공산이 컸다.
"극동의 평화와 번영을 위하여 부탁드립니다. 총리 각하, 한국의 범아시아 조약기구에 동참하여 저희의 눈과 귀가 되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허허허."
영국은 대만국 총리대신 이하응에게 부탁하여 자신들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대만을 사자 몸속 벌레로 심어두기로 했다.
물론,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나 다를 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