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118화 (118/530)

< 명예로운 군인 >

"『풍년 중에 기근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금수의 나라 영길리!』"

"『백성들을 굶주려 도적 떼가 되고 천하에 난민이 들끓는데 중화제국의 천자란 작자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러고도 천명을 이어받은 황제임을 자칭하는가!』"

이형이 예상했다시피, 언론통제 시도는 실패했다. 최익현이 편집장으로 있던 대한일보에서 소식을 접하는 그 즉시 대서특필하여 버린 것이다. 그날 모든 신문 기사는 이형에게 올리는 상소의 형식이 아니라 사대부들에게 널리 퍼뜨려 읽히게 하기 위한 호외의 형식으로 서술되었고, 이 대한일보를 받아 읽은 유림은 그날로 눈을 까뒤집었다.

곳곳에서 금수의 나라 영길리와 수교를 끊으라는 상소가 올라왔고, 한성까지 상경하여 궁 앞에서 시위하는 사대부들도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이형이 제위에 오른 이래로 한 번도 일어난 적 없었던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혼란은 프랑스에 요청하여 강남에서 구휼을 실시하고 조만간 한성에서 열릴 범아시아 조약기구의 설립식에서 강남의 구휼을 다루겠다고 이형이 몸소 공표한 다음에야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적개심은 가라앉지 않아, 한국에 들어와 있던 영국인들과 영국에 유학을 다녀온 유학생들은 졸지에 미국인인체하거나 프랑스에서 유학을 다녀온 체를 해야 했다.

그만큼 쌀농사를 천하의 근간이라고 여기던 유교문화권에서 이번 사태는 더없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던 것이다. 대한일보가 순수 한문으로 적혀진 탓에 민간에서의 파급력은 작았으나, 이미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영길리란 금수의 나라요, 구휼에 나선 불란서는 군자의 나라라는 인식이 박힌 다음이었다.

이는 지상에 강림한 현인신과 다를 바 없던 이형의 권위로도 어찌할 수 없어, 이형은 다만 국가헌병대 내에서도 가려 뽑은 정예 중대에 호위를 맡겨 영국 공사관을 철통수비하도록 시켰다.

"끔찍하군요."

그리고 이러한 소식은 화북에서 난민들을 징병하여 한창 몽골 내전에 투입 중이던 대한제국군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한성근 준장의 부름을 받아 베이징으로 상경한 김옥균 예비 소위는 건네받은 대한일보의 기사를 읽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풍년 중 기근. 전통적인 향촌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초유의 사태였다. 일찌감치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닫고서 누구보다 앞서 신식문물을 접하기 위해 사관학교에 자원한 김옥균조차 처음에는 무언가 잘못된 정보는 아닌가 의심했을 지경이었다. 누구보다 트인 시야와 깨인 머리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던 그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작금의 정세는 비상식적이었다.

상식적으로 들판에 알알이 찬 햅쌀이 가득한데 사람이 굶주린다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건가. 온 천하에 도적 떼가 들끓어도 어쩔 수 없다고 김옥균은 납득했다. 그건 백성들을 다스려야 할 목민관이 무언가 끔찍하게 일을 잘못했다는 것이었으니까.

민생을 파탄 낸 목민관은 목이 잘려 장대 위에 내거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 끔찍하지. 황상께서는 이번 강남에서의 기근에 크게 슬퍼하시며 한사람이라도 많은 백성을 구하고자 구휼을 명하실걸세. 그건 즉 우리군도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겠지."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결의에 찬 김옥균의 모습에, 한성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학년 수석다운 모습이었다. 이런 김옥균이었기에 그가 일부러 편지를 보내 이야기를 전하는 대신 일부러 베이징까지 다시 불러들였던 것이기도 하였다. 믿을 수 있으며, 또래 중 가장 유능할뿐더러, 심지 또한 곧았으니까.

'역적의 피붙이라는 것이 조금 걸리기는 하나….'

황제는 설령 역적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죄인의 가족들에게까지 그 죄를 묻지는 않겠다 했다. 그것이 정녕 옳은 선택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황제의 뜻이 굳건한 이상에야 올바른 선택이었기를 빌며 황명에 순종할 따름이었다.

한성근은 목소리를 착 가라앉히고서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이번 난민 중에서 이상할 정도로 지주들이나 거상들의 빈도가 높네. 어째서라고 생각하나?"

"그야 물론 그들이 이번 사태를 일으켰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한성근의 질문에 김옥균은 태연하게 답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문제였다. 들판에는 햅쌀이 가득한데 막상 소작농들이 먹을 쌀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소작농들이 가장 먼저 분노를 터뜨릴 대상은 당연히 눈앞에 마름이며, 지주이다. 그 뒤에도 도저히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다면 그다음이 지주에게서 쌀을 사들이던 상인들이고, 더 나아가 도시의 거상이며, 최종적으로 영길리다.

그것은 즉 영길리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백성들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는 이야기였다. 한때 지방에서 나름 마름이고 지주이며 명가라고 목을 뻣뻣이 세우던 집안에서 비상금조차 챙기지 못하고 몸만 남은 채로 화북으로 도망치고 있는 게 실정인 것이다. 아직 홍건적 같은 본격적이고 전국적인 도적단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이형은 외국인 조계지와 홍콩이 불타오르기까지 1년에서 2년이 걸릴 것이라 하였지만, 현장에서 파악하기로는 늦어도 반년 안에 외국인 조계지에 대한 대규모 침공이 있을 것이라 예측하였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지주와 거상 출신의 빈도가 지나치게 높아. 그것이 어째서이겠나?"

"그거야 물론…."

김옥균으로서는 순간 말하고서도 아차 싶었다. 대규모 도적단이 없는데도 지주나 상인과 결탁한 지방군이 힘에서 밀려서 지주나 거상조차 맨몸으로 화북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백성들의 분노가 거세도 그건 이상하다. 맨몸으로 달려들 소작농들과 부족하게나마 훈련을 받았고 제대로 된 무장을 하고있는 지방군이 아닌가.

요컨대, 소작쟁의의 성공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지방 관료들이 몸소 분노한 백성들을 이끌고서 궐기하면 몰라도, 일개 소작농들 따위로 구성된 민병이 지방군조직을 산산이 부수면서 삽시간에 중화제국의 내륙 지대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김옥균은 그리 어렵지 않게 그 원인을 유추할 수 있었다.

"…태평천국, 또 그 사교도들의 짓입니까."

"황상께서는 그렇게 짐작하고 계신 듯하더군. 직접 쓰촨성의 총본산에서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 건 아닐 거라 하셨네. 그러기에는 확산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고 말일세. 아마도, 무고한 양민을 가장하고서 숨어든 사교도들의 잔당이 일제히 봉기한 것으로 추측하시더군."

한성근은 김옥균의 추측을 긍정했다. 비록 그 지배는 짧았으되, 그 짧은 지배 기간 동안 토지개혁을 하고 외국인 조계지를 침공하는 등 강남의 민중들에게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 태평천국이었다. 그들 모두가 여전히 태평천국에 충성을 바치고 있지는 않겠으나, 이미 한번 중화제국군과 싸웠던 이들이 두 번이라고 못 싸울까.

때마침 풍년에 의한 기근으로 각지에서 소작쟁의가 벌어지고 소작농들이 봉기하니 숨겨둔 무기를 들고서 뛰쳐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태평천국군으로 참전했던 경험을 살려 소작농을 이끌기 시작하니 수적 우세를 앞세워 중화제국 지방군과도 싸워 이길 수 있었고, 그렇게 지방군을 꺾은 다음에는 스스로 장군이나 두목 따위를 자칭하며 무지렁이 소작농들을 이끌고서 옆 마을을 습격해 그곳의 병력마저 격파하고 남은 세력은 흡수한다.

그렇게 한번 세력을 불리기 시작하면 주변에서 충성을 맹세하러 오는 군소세력이나 마을들까지 나타나고, 그럼 중원 전역을 휩쓸 초대형 도적단의 기반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이 태평천국 시절의 경험을 살려 극단적인 외국인 혐오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내세워 본격적으로 백성들을 선동하기 시작하면 그 끝은 뻔하다.

강남의 공중분해가 문제가 아니라, 여차하면 대한제국이 관리하는 화북까지 통째로 날아갈 판국이다.

"제가 황상과 겨레를 위하여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자네에게 선택권을 주겠네. 하나는 화북에 숨어들었을지 모르는 사교의 세작을 찾는 일이고, 하나는 국정원과 협력하여 강남에서 유력한 인물이 될 기미가 보이는 이들을 암살하거나 회유하는 일이지. 자네는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한성근은 차분한 어조로 김옥균에게 검지와 중지를 차례로 펴 보였다. 전자는 안전하지만, 그 공적이 인정받기가 어려웠고, 후자는 위험하지만 살아 돌아오기만 하면 확실한 출셋길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한성근은 눈앞의 청년 장교가 필시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빠르지만, 위험한 길을 서두르는 청년들을 익히 봐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답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화북에 숨어들었을지도 모르는 세작들을 색출하는 일을 맡고 싶습니다."

"호오, 의외로군. 혹시 뭔가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

간단합니다, 라고 답하고서는 김옥균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

"황상과 겨레를 위한 제 공적을 국정원의 덕택이라고 폄하 받고 싶지 않습니다."

한성근은 그 대답에 파안대소했다.

한성근은 그 자리에서 김옥균을 예비 소위가 아니라 정식으로 소위로 임명하였고, 그 무렵 막 황명으로 창설되었던 대한제국군 군사정보국에 전입시켰다.

군사정보국에 전입한 첫날, 김옥균이 제안한 세작을 색출하는 방법은 이러했다.

"사교도들은 이미 죽은 사교 교주 홍수전을 상제나 어버이와 같이 섬긴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번거롭게 일일이 찾아다닐 것 없이 곳곳에 그를 욕보이는 벽보를 붙이고서 이를 훼손하려 하는 이들을 사로잡으면 적지 않은 수를 걸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날로 대한제국군 군사정보국은 그들의 황제에게 홍수전을 욕보이는 글을 내려달라 부탁하였다.

이를 이형이 흔쾌히 받아들여 홍수전은 애미가 들개와 교접하여 낳은 자식으로 수시로 지 애비와 교접하는 색골이라는 내용의 글을 내리니, 그 효과는 실로 탁월했다.

***

한편, 철퇴를 포기한 프로이센군의 결사적인 돌격이 실패로 돌아가고 파리 방위전이 프랑스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을 무렵.

이 무렵 프랑스 군부는 대혼란 상태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피해가 커서가 아니라, 되려 예상했던 것보다 피해가 작아서 말이다.

그들로서는 루이가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파리 시가전을 벌이며 무수한 시민들이 죽거나 다치고 천문학적인 재산피해를 보게 된 책임을 뒤집어씌운 다음 거기에 더하여 장군으로서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오명을 추궁하여 두 번 다시는 중책을 맡을 수 없도록 적당히 가봉 같은 아프리카 식민지 군으로 보내버릴 작정이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루이가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어 버린 것이다.

파리에서의 승전에 열광하던 시민들과는 정반대로, 프랑스의 고위 무관들은 파리의 성공적인 방위 성공에 기뻐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곧 루이의 공로를 인정하는 꼴이 되며, 거기에 시민들의 지지와 파리 방위 전에서의 승전이라는 공로가 합쳐지면 루이가 파리 방위 전에서 보여준 군인으로서 불명예스러웠던 행보야말로 옳았다는 걸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군인의 명예와 영광스러운 전쟁이라는 낭만에 심취해있던 프랑스의 장성들에게는 절대 달갑지 않은 사태였다. 그들로서는 항상 청결을 유지해야 마땅할 신성한 제복을 진흙탕으로 더럽히고 천박한 싸움방식으로 프랑스군의 명예를 더럽힌 루이를 치워버리고 싶어 했다.

"루이 소장은 한국의 창녀다! 그는 한국의 괴팍한 황제에게 심취한 나머지 고귀한 장교로서의 본분을 저버리고 명예로웠던 유럽의 전장을 아시아 대륙의 야만스러운 전장으로 덧칠하려 하고 있다!"

"참호 따위에 몸을 숨기고서 비겁하게 고개만 빼꼼 내미는 저 비열하기 짝이 없는 겁쟁이들을 보라! 저 추악한 겁쟁이들에게 어찌 우리 명예로운 프랑스군이라 불릴 자격이 있겠는가! 프랑스의 군인이라면 마땅히 몸소 용감무쌍한 기사들을 이끌고서 명예롭게 싸우다 전사한 선제를 본받아 용감무쌍하게 적에게 돌격하여 정면에서 당당하게 맞서 싸워야 한다!"

그 결과 프랑스군은 파리의 시민들이 파리의 영웅 루이의 이름을 외치는 동안 온갖 흑색선전을 퍼부으며 그의 공로를 깎아내리려 했다. 진흙탕 루이, 한국의 창녀, 유사 황인종, 파리의 비겁자 등 온갖 질 나쁜 별명들이 덕지덕지 들러붙었고, 여기에 퇴역 장성들까지 나서 그를 성토하는 글을 신문에 올리는 등 전방위에서 공세가 시작되었다.

여기에 영광스러운 프랑스군과 명예로운 총검 돌격이라는 환상에 심취해 있던 낭만주의적 시민들 또한 적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들은 영광스러운 프랑스군이 더럽혀졌다는 군인들의 비난에 심정적으로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고, 루이의 공로에 대하여서도 물론 파리를 성공적으로 수호한 것은 사실이나 거기까지 해야 했는가? 에 대하여는 의문을 품는 모습을 보였다.

1주일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수십만에 이르는 프로이센군이 결사적인 돌격을 반복하면서 가축만도 못한 꼴로 죽어가는 모습을 육안으로 지켜본 반작용이었다. 아무리 침략자라지만 굳이 거기까지 해야 했냐는 목소리가 나오게 만든 것이다. 거기에 파리 방위전 동안 시민들을 동원하여 강제노동을 시켰던 것도 문제가 되었다.

"우리 프랑스 대 육군의 명예를 더럽히고 참호 따위로 명예로운 전장을 더럽힌 루이 베르그송 소장을 군사재판에 세워야 한다!"

"아니, 군사재판이라니.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 프랑스에서는 전투에서 승리한 장군을 벌주는 법이 생겼단 말인가? 도대체 그대들은 우리 프랑스의 군법 중 몇조 몇항에 근거하여 파리의 영웅을 처벌하려 하는가!"

이렇게 일부 시민들로부터도 호응을 얻게 되자 더욱 고무된 군부에서는 여기에 더 나아가 헌병대를 동원해 루이를 체포시켰다. 그러나 이는 곧 역풍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태가 현역 파리 방위사령관이 헌병대에 체포되는 수준까지 확대되자 문민 통제를 우려한 섭정 의회에서 목소리를 내고, 또 파리 방위에서 적극적으로 민중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은 의용군을 비롯한 파리 시민들이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루이 소장을 파리 방위사령관에 임명한 것은 다름 아닌 짐이니라. 군부에서는 지금 도대체 무슨 명분으로 짐의 장군을 체포하고자 하는가? 그대들이 정녕 프랑스의 군인인가!"

무엇보다 군부의 섣부른 행동은 아직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라 권력 기반이 불안했던 나폴레옹 4세의 심기를 벅벅 긁은 꼴이 되어버렸다. 황제가 손수 임명한 수도방위사령관조차 손도 못 쓰고 헌병에 잡혀 신변을 구속당하는 판국인데, 그런 군부를 믿고서 어떻게 전쟁을 치르란 말인가.

결국 나폴레옹 4세까지 나서서 압박을 가하자 그제야 군부는 압력에 굴복하여 루이 소장을 풀어주었다. 루이는 나폴레옹 4세에 의하여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아직 어린 나폴레옹 4세를 대신하여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지휘할 총사령관으로 임명받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프랑스 군부의 폭주로 좌충우돌하는 동안, 파리에서 살아 돌아온 일부 병력을 수습하는 데 성공한 프로이센은 이미 19만의 예비전력을 긴급하게 징병하여 라인란트 지방에 배치하고, 8만 명을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지대에 배치하는 등 당장 프랑스의 침공에 대비하여 독일을 수호할 최소한의 밑준비를 끝 마친 다음이었다.

프로이센군이 파리에서 돌아온 극소수 참모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라인란트 지방에서 시민들을 동원해 긴급하게 참호선을 세우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은 루이는 투덜거렸다.

"우라질, 꼬냑에 모르핀이라도 해야 하는건가?"

물론 그래봤자 시체 하나 추가하는 격이었다.

루이는 졸지에 자신이 만들어낸 참호를 흉내 내 프로이센군이 만들어낼 참호를 뚫어야 한다는 난관에 직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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