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이라는 이름의 탄환 >
루이는 경험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작금의 시대는 무조건 공격자가 불리한 시대라는 걸 말이다. 이제 더 이상 조러전쟁 이야기를 꺼낼 것도 없이, 자신이 직접 파리에서 민병을 이끌면서 프로이센의 주력군을 상대로 수월히 방어해낸 경험이 있던 것이다.
명예에 집착하던 프랑스 군부가 어떻게든 루이를 숙청하려 억지를 쥐어짜 내는 동안 이미 프로이센에서는 시민들을 동원하여 참호선 건설에 나선 다음이었고, 안 그래도 열차 선로도 듬성듬성 했을뿐더러 그나마 열차 선로조차 프로이센군이 사용할 수 없도록 파괴한 프랑스군에게 신속한 공세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건 곧 이제 와서 프랑스군이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공세에 나설 경우 파리로 집결한 프랑스 주력군이 국경지대에 도달할 즈음이면 이미 프로이센은 참호선을 구축한 다음일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고작 해봤자 20만의 예비전력이 백수십 킬로미터의 국경지대를 지키는 꼴이니 병사들을 일점집중하면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 자체는 문제없겠지만…."
루이는 이미 한차례 파리에서 글자 그대로 병사들의 목숨을 탄환과도 같이 소모하며 격정적인 공세를 펼쳐온 프로이센군의 모습을 목도한 직후였다. 그건 루이로서는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경지였다. 미래의 전장에서 인간의 생명은 고작 해봐야 탄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해도, 그걸 실제로 실현할 수 있는 정신력은 별개의 문제다.
더더군더나 자신까지 몸소 생명이라는 이름의 탄환 한 발로서 결사적인 돌격에 참여하는 건 더더욱이. 적어도 루이가 알기로, 인간의 생명을 하나의 탄환으로써 간주하고 또 실제로 자신 또한 그 탄환 중 하나로서 참호선에 돌격한 자는 지금은 프랑스의 포로로 붙잡힌 프로이센군 참모총장 몰트케가 유일했다.
"나는 맹세했다. 우리 프랑스 청년들의 생명을 고작 해봐야 탄환 한 발로 값싸게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단 말이다. 그렇게 맹세한 지가 1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나를 믿고 있을 병사들의 앞에서 생명을 탄환으로 써달라고 명령할 수는 없단 말이다."
루이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만일 파리 방위전이 끝난 그 직후에 곧바로 프랑스군이 반격에 나섰다면 이럴 일도 없었을 터였다. 만일 그랬다면 루이 또한 이렇게 고뇌할 필요 없이 그저 파리 방위전의 전쟁영웅으로서 남았을 것이고, 전후 무리 없이 프랑스군에게 그가 고안한 새로운 보병 전술과 전략전술을 이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개혁을 경멸한 귀족적인 장성들에 의하여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전장의 명예 따위를 뒤쫓는 낭만주의자들이 간단하게 끝났을 전쟁을 장기화시키고 무고한 청년들의 생명을 참호에 밀어 넣도록 만들었다. 겉으로는 그 명분으로서 명예를 떠들고 있었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걸 루이는 알고 있었다.
"그저 퇴물이 될까 두려운 것뿐이겠지.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 될까 봐. 극동이나 정겨운 조국 고향 땅이나 인간은 어느 곳이나 비슷하군."
루이는 문득 지난 5년여간 곁에서 섬겨온 이형과 조선에서의 나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자신이 퇴물이 될까 두려워하던 이들로부터의 방해는 어느 나라나 같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한국의 황제인 이형은 그런 자들이 뭐라 떠들어대건 자신의 권위와 권력으로 짓뭉개고서 자신의 신념을 강요했지만, 고작 해봤자 일개 장성인 루이에게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결국, 루이로서는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할 수밖에는 없었다.
루이는 침통한 기분으로 그 무렵 그랑 트리아농 궁에 포로 신분으로 가택연금 되어 있던 헬무트 폰 몰트케를 찾아갔다. 최후까지 프로이센의 융커답게 용맹하게 저항하고, 휘하 참모들의 안위를 위하여 불명예를 감수하고서 기사답게 항복한 그의 행보는 적국이었던 프랑스에서도 깊은 인상을 남겨 포로로 잡힌 이후에도 한 사람의 귀족으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대우받고 있었다.
"맙소사. 이렇게 젊은 장군이었을 줄이야. 진정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 프로이센의 패망을 바라고 계셨단 말인가?"
루이의 모습을 확인한 몰트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가 파리에서 봐야만 했던 그 경이롭기 그지없던 3중 참호선이 이런 젊은 장군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니 전율스러울 따름이었다. 유럽 제일의 명장을 자칭하던 무수한 노장들도 예측하지 못하였고, 생각해내지 못한 것을 눈앞의 젊은 프랑스인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그제야 프로이센에 승산은 없었구나 싶어 허탈하기도 하였다.
그런 몰트케에게 루이는 정중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정했다.
"저 혼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 프랑스의 이름난 학자들의 지혜를 빌렸고, 이름 없는 시민들의 힘을 빌렸으며, 한국의 황제에게 가르침을 받아 완성한 것이지요."
"한국의 황제라."
몰트케는 그런 루이의 말에 문득 불과 몇 년 전 극동에서 펼쳐졌던 조선과 러시아의 전쟁에 대하여 흥미가 동했으나,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자신의 지금 신분이 그런 소소한 개인적 흥미를 채우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는 걸 자각하고 있던 탓이었다. 그는 포로가 된 이후에도 프로이센의 융커로서 시종일관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였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노장의 풍모에 루이는 인간적인 호의를 느꼈다.
루이는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으로서, 그리고 군인으로서 최대한의 존중과 존경을 담아 몰트케에게 말했다.
"프로이센은 명예롭게 싸웠으며, 당신은 프로이센의 군인으로서 그 의무와 책임을 다했습니다. 이제 프로이센에 남아있는 것은 고작 해봐야 어린 생도들과 늙고 병든 부사관들이 이끄는 오합지졸들의 군세일 뿐입니다. 이미 우리 프랑스의 승리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프로이센군의 참모총장으로서 프로이센에 항복을 제의해주십시오."
루이가 한 말은 냉정하게 말하여 현실이었다. 루이 또한 단지 프랑스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하여 굳이 이런 수고를 감수하고 있는 것뿐이지, 당장 얼마나 큰 피해가 나건 상관하지 않고 공세를 지속한다면 프로이센의 최종방위선 정도야 가볍게 짓밟을 수 있었다.
고작 해봤자 수십 킬로미터 길이의 참호선을 16만 명으로 메웠던 파리 방위전과 백수십 킬로미터를 19만 명으로 메워야 하는 프로이센 국토방위전은 근본적으로 병력 밀집도부터가 다르다. 화망 또한 촘촘하지 못하고 듬성듬성할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파리에서 프랑스군에게는 곧 원군이 도착한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프로이센은 지금 라인란트에 모인 것이 사실상 최후의 병력이다.
그러나 몰트케는 루이의 제의에 냉소하며 답했다.
"그렇소. 나는 분명 프로이센의 군인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했지. 나와 나의 참모부는 이미 항복하였고, 우리 병사들과 존귀하신 우리 프로이센의 국왕 폐하 또한 종전을 바라고 계실 것이오. 그러나, 감히 묻건대. 우리 프로이센이 바라는 종전을 과연 그대들 프랑스인들 또한 바라고 있소?"
루이는 그에 답할 수 없었다. 프로이센의 이름을 유럽에서 지워버리겠다며 분노에 미쳐 날뛰고 있던 프랑스의 정계였다. 설령 프로이센이 항복한다고 해도, 프랑스가 패자 프로이센에 일말의 자비를 베풀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멸망을 원한다. 제아무리 프로이센이 패배를 인정하고 종전을 바라더라도, 나라가 멸망하라고 하면 거기에 순순히 따를 리는 없다. 프랑스의 정계에서 프로이센의 멸망을 바라고 있는 이상,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인 루이에게 전쟁을 끝낼 방법은 베를린을 함락시켜 확실하게 프로이센을 멸망시키는 것 이외에 길은 없었다.
"그대의 어린 황제에게 말해주시오. 만일 우리 프로이센이 어떤 형태로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만 해준다면 나 또한 기꺼이 국왕 폐하께 항복을 진언해볼 것이라고. 그러나 우리 프로이센의 생존조차 보장하지 않겠다면, 그때에는 베를린까지 와서 우리 프로이센의 목을 직접 베는 수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알겠습니다."
루이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뒤돌아서야만 했다. 그는 그 즉시 그의 어린 황제를 찾아가 몰트케의 전언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전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4세의 답변은 그러하였다.
"베를린까지 와서 직접 베어가라, 라. 그거 반가운 소리구려. 그렇게도 멸망을 바란다면 기꺼이 멸망시켜 주어야겠지. 무엇을 망설이고 있소, 장군? 당장 병사들에게 돌격을 명하시오. 저 지푸라기 더미와 같은 독일인들의 마지막 보루를 걷어차 버리란 말이오."
아직 사춘기가 한창이던 어린 황제였다. 사춘기가 한창이어야 할 나이에 필요 이상으로 명석한 모습을 보여준 한국의 황제가 이상한 것이지, 사춘기가 한창인 나이에 아버지를 프로이센에 잃은 황제가 시민 여론이 모두 황제의 복수를 외치며 눈이 돌아간 와중에 이미 다 이긴 것이나 다름없던 전쟁에서 패자에게 자비를 베풀려 할 리가 없었다.
결국 루이는 최악의 현실을 직면해야만 했다. 자신이 바라건 바라지 않건, 이제 프랑스군에게 남은 길은 오로지 젊은 청년들의 생명을 한발의 탄환으로써 소모하며 조금씩 진군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소신의 청을 들어주소서."
루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프로이센의 청년들이 그가 만들어낸 참호에 가축과도 다를 바 없이 죽어가던 것을 똑똑히 지켜보아야 했던 루이였다. 그리고 이제 그는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으로서 프로이센의 청년들이 그러했듯이 프랑스의 청년들에게도 그러한 비극을 강요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유럽 전역에서 젊은 청년들이 개돼지와 같이 죽어 나갈 것이다. 식탁에 오르기 위하여 도축 당하는 가축들조차 그보다는 나은 죽음을 맞이할 테지만, 이제 유럽의 청년들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지구상에서 가장 끔찍한 죽음을 강요당하고 있다.
"청이라. 좋소. 그것이 우리 프랑스의 승리를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다면 기꺼이 들어주리다. 그대의 소원은 무엇이오?"
'죽어서 지옥으로 가고 싶다.'
루이는 필사적으로 말을 삼켰다. 그것은 사후의 재판에서 그의 하나뿐인 주의 앞에 섰을 때 부탁하여야 하는 것이지 눈앞의 어린 황제에게 부탁하여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하나뿐인 주라면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를 지옥으로 보내줄 것이라 루이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루이는 지금 이 현실에서 어떻게든 도망치고 싶었다. 인간의 생명을 탄환처럼 소모해야 한다는 것이 싫었고, 인간의 생명을 탄환처럼 소모하는 일에 점점 익숙해져 갈 미래의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그리고 그 끝에 프랑스의 전쟁 영웅으로서 추앙받을 머나먼 미래의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무엇보다도 끔찍했던 것은.
"미국에서 개틀링 포대를 도입해주시고, 산탄총과 흉갑을 재정이 허락하는 대로 전선의 병사들에게 보급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경멸하고 수치스러워하면서도 인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도축하는 방법을 머릿속으로 끝없이 고안하고 또 도입하고자 하는 현재의 루이 자신이었다.
나폴레옹 4세는 루이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프랑스군은 거국적인 참호전 준비에 돌입했다.
***
한편, 이 무렵 러시아는 난처한 상황에 부닥쳐있었다. 그동안은 일단 당장 한국에 보복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여 프랑스가 프로이센과 전쟁을 시작한 틈을 타 몽골 내전을 일으켰지만,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이 점차 어찌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고 있던 것이다.
무엇보다 프랑스가 눈이 돌아가면서 정말로 프로이센이 멸망할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을 가능성이 발생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영국은 이미 프로이센의 전쟁 국채를 되는대로 구입하며 프로이센이 조금이라도 프랑스를 상대로 오래 버틸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고, 이탈리아는 어떻게든 프랑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하여 교황령을 두고서 프랑스와의 교섭 의사를 타진하고 있었다.
여기에 지난 보오전쟁에서 프로이센의 관대한 종전 협상 제의로 사실상 전력을 고스란히 온전한 오스트리아에서 슬슬 국경지대에 병사들을 집결시키는 등 프로이센을 침공했을 시 프로이센이 얼마나 신속하게 반응할 수 있을지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거기에 대응해 프로이센도 일단 되는대로 병사들을 징집해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선에 모아두었지만, 별다른 도움이 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이는 러시아에 있어서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태였다. 오스트리아가 독일을 통일하여 세력이 크게 늘어난다는 건 곧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작아진다는 것이었고, 그럼 러시아가 지중해로 나아갈 길이 영영 틀어막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프로이센은 폴란드 독립문제와 관련하여 러시아와 의견이 일치하고 있던 중요한 우방이었다.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서로를 보완해가며 폴란드인들의 독립의사를 짓밟고 있던 작금의 정세 속에서, 프로이센이 정말로 프랑스에 멸망하기라도 한다면 폴란드가 프로이센으로부터 독립하고 연달아서 러시아 영내의 폴란드인들까지 봉기하는 최악의 사태가 발발할 수 있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노랑 원숭이들에게 예의범절을 교육하는 일은 조금 설령 10년이 걸린다고 하여도 절대 늦지 않다. 지금은 우선 유럽의 정세를 논해야 할 때가 온 것 같구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문무백관들은 이를 논하도록 하라."
러시아 기병사단의 전멸이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 한국에 대한 복수를 외치며 이성을 잃어버렸던 차르조차 사태가 여기까지 악화하자 분노를 억누르고 어떻게든 서둘러 프로이센을 지원하거나 오스트리아를 견제하거나 둘 중 하나를 해야 한다는 암시를 주었다.
그러면서도 한국에 대한 복수는 언젠가는 끝마쳐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지만, 유럽의 정세가 안정되기 전까지 한국에 대한 복수는 잠정적으로 중단될 수밖에 없다는 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관료들은 알고 있었다. 아무튼, 러시아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은 유럽이었지 극동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언젠가 복수를 끝마치겠다는 발언 또한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위신과 체면 때문에 덧붙인 말이지 먼 훗날에라도 그것이 실현되기는 어려웠다. 당장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후원자가 되어주어야 했을 독일의 신세가 엉망인데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언제쯤 완공될지도 까마득하기만 했다.
"몽골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야…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몽골인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은 유럽의 일이 더 급하지 않습니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 또한 후일을 기약해야겠지요."
그 무렵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관료들은 이미 몽골 내전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전제로 향후 정세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몽골 내전에서 20만에 달하는 의용군이 북상하면서 러시아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던 실정이었다. 하나하나의 전력은 별거 없어도 숫자가 원체 많다 보니 감당이 안 되던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아무런 명분도 없이 무턱대고 물러나기에는 체면과 위신이 걱정이었다는 것. 몽골이라면 별문제 없지만, 한국에 있는 대로 성미를 박박 긁히고서 먼저 꼬리를 내리자니 영 모양새가 살지 않았다.
"저…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응? 무슨 일 있었나?"
"네, 한국에서 먼저 휴전을 제의해왔습니다. 아무래도 중국에서 영국인들이 뭔가 일을 터뜨린 모양인지라…."
그리고 때마침 도착한 한국으로부터의 휴전 제의는 그런 러시아의 국내 사정에 적합한 것이었다. 러시아가 아니라 한국에서 먼저 제의한 모양새가 되었으니 러시아는 이를 두고 승전이라 자축할 수 있었고, 휴전협정에 담긴 내용은 내몽골이 외몽골을 합병하는 대신 한국 또한 러시아가 위구르를 합병하는 걸 용인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요컨대 당시 러시아가 당장 필요하던 모든 것을 양보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한국에서도 당장에 강남에서의 사태로 러시아와 다툴 여력이 남지 않게 되었으니만큼, 러시아에서 이 휴전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양국 모두가 그럭저럭 나름의 성과를 거두는 결말로 마무리되었을 공산이 컸다.
다만, 이형이 한가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면.
"그래? 그럼 힘들게 이기려고 할 필요 없이 버티고만 있어도 이길 수 있겠군!"
하다못해 독일인들이나 프랑스인, 영국인을 상대로라면 모를까 러시아가 그런 냉철하고 합리적인 결단을 내려줄 것이라 기대한 것 자체가 잘못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