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122화 (122/530)

< 잘 살아보세 >

1871년 1월 1일은 대한제국에 있어서 뜻깊은 날이었다. 연호를 폐하고 서력을 도입하고 음력을 폐하고 양력을 도입하는 등의 개혁조치 또한 그러했지만, 마침내 황후에게서 태기가 있어 황태자를 기대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황제가 무슨 개혁을 한다고 나서건 그들의 생업에만 별다른 영향이 없다면 조정에서 무엇을 하건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일 하며 살아가는 것이 몸에 익어있던 조선의 백성들에게 당연히 더욱 기뻤던 것은 황후에게 태기가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거 참 경사 났네, 경사 났어! 후궁을 두지 않으시겠다 하셨을 적에는 어찌 될까 걱정도 했네만, 허허! 이걸로 내 속이 다 시원하구먼!!"

"아니 별 웃기는 놈을 다 보겠네 그려! 후사는 나라님께서 얻으셨거늘 거 씨 없는 놈이 무슨 속이 다 시원하다는 말이더냐? 거 부정 타게 시리!"

"에라, 이놈아! 그건 또 무슨 상관이더냐? 아니, 그리고 내가 어찌 고자라는 말이더냐? 내 이놈을 그냥!"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대한제국의 백성들에게는 이형이 황제가 된 이래로 겹경사가 끊이지를 않는 격이었다. 불과 1달여 전에는 한성 땅에서 온 천하의 충성맹세를 받더니, 이번에는 황후에게 태기가 있어 당장 황실의 대가 끊길 걱정을 덜게 된 것이다.

물론 그것도 황후가 무사히 황자를 출산할 경우에 이야기였다. 황후에게 태기를 얻었다는 소식이 퍼지기가 무섭게 조선 팔도 곳곳의 사찰, 사당, 교회 등지에서는 황자를 기원하는 제사와 기도를 올렸다.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며 유림에 밀려 기를 펴지 못하던 종교계에서 전면에 나설 수 있도록 안배해준 황제였다.

혹시나 그런 황제가 요절하거나 대가 끊기기라도 하는 순간 언제 다시 핍박이 시작될지 모르니, 그들로서는 더더욱 간절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어린양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옵소서. .이 못난 어미의 소원을 이뤄주려 천하를 등진 둘도 없을 효자이고, 참된 주님의 어린양이옵니다. 부디 대를 이을 황자를 내려주시옵소서…."

"자매님의 기도가 이토록 간절하시니 필시 주님께서도 자매님의 기도를 외면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성모시여, 이 새로운 생명이 무사히 탄생의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소서."

"이번에는 저를 두고 또 어디로 가실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황상이십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황상께서 조금은 옥체를 돌보시게 하여주시고,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보살펴주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허허허, 황상께서도 어찌 나쁜 뜻이 있으셔서 그러하시겠습니까. 그저 모두 이 나라와 백성들만을 위하시느라 옥체를 돌볼 여력이 없으신 것뿐이 아니겠습니까. 필시 황상께서도 머지않아 마마의 뜻을 알아주실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계의 기원은 황실의 여성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 이형의 친모이자 이하응의 정처인 민씨 부인은 파리 외방전교회의 사제들을 불러들여 미사를 올렸고, 황후는 조계종의 승려들을 불러들여 법회를 열었다. 민씨 부인이 천주교도이듯이, 티베트 불교의 수호자를 자청하던 아이신기오로 황실에서 나고 자란 황후는 독실한 불교도였다.

여기에 더 나아가 이형이 베르뇌 대주교에게 한글과 한국어에 대한 체계적이고 근대적인 연구를 대가로서 명동에 대성당을 세우도록 하였듯이, 황후는 황자를 내려줄 것을 빌며 종로 땅에 대사찰을 세우도록 하였다. 이는 필연적으로 유림의 반발을 일으켰다. 조선 왕실에서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빌며 법회를 여는 일이야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으나, 도성 안에 사찰을 세우겠다고 나서니 기함을 하고 일어선 것이다.

이형이 공식적으로 세례를 받고서 개종을 하지는 않았으나 색목인들의 눈에는 사실상 천주교도로 간주하고 있었고, 그 탓에 기독교 사제들이 도성 안을 활보하는 것까지는 억지로 참았지만, 이제는 평소 깔보고 짓뭉개던 승려들까지 도성 안을 활보하는 것을 넘어서 도성 안에 사찰을 세우려고 드니 유림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삼가 아뢰옵니다. 전조 고려가 쇠락하였던 것은 곧 그릇된 불자들이 나라를….』"

"흠? 그러고 보니 짐이 따로 포고하지 않았구려. 이제부터 도성 안에 불공을 올려도 좋고, 법회를 올려도 좋으며, 사찰을 세우는 것도 마음대로 해도 좋다. 당연히 출입도 마음대로 해라. 다만 출가한다고 해서 군대를 빼먹거나 하지만 말도록."

그리고 이형은 편집장 최익현을 필두로 대한일보에서 이를 성토하는 기사를 써 올리자마자 그날의 신문을 읽고서는 그 자리에서 불교계 신앙의 자유를 자신의 입으로 공언해 버렸다.

이는 유림에게 있어서도 당혹스러운 일이었지만 이 무렵 한국에 들어와 있던 선교사들에게도 당혹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동안 막연하게 독실한 기독교인이라 여기던 이형이 느닷없이 그에 어긋나는 행보를 보이자 의아함을 느낀 것이다.

"왜? 종교의 자유라고 일전에 말했지 않소? 짐이 언제 종교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 본 적 있소? 별 시답잖은 일로 소란 떨지 말고 물러들 가시오."

물론 이형은 언제나처럼 손을 휘휘 저으며 이 일에 관하여 이형의 뜻을 알아보려 하거나 반대의 목소리를 키우는 이들을 내쫓아버렸다. 당연히 이를 두고 어처구니없어하는 이들은 많았으나, 이형이 언제는 뭐 이유를 따로 설명해주고서 일을 진행했던가.

유림과 선교사들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억지로 납득하고서 꾹 눌러 참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저 눌러 참았을 뿐이었다. 선교사들이야 어차피 남의 나랏일이니 알바 없었지만, 유림의 분노는 나날이 쌓여가기만 할 뿐 해소되지는 않은 채였다.

"야소에 이어 이제는 석가입니까. 황상께서 불씨잡변에 지대한 관심이 있으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박규수조차 이번 일을 두고서는 굳이 불편한 기색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천주교야 프랑스에서 두둔하고 있으며, 또 프랑스에서 이리저리 조선을 도운 적이 많다 보니 요 몇 년간 그나마 거부감이 덜해져 있었으나 불교의 경우에는 달랐다. 이렇다 할 인식이 바뀔만한 계기도 없었을뿐더러 그들을 보호하는 열강도 없었다.

거기에 고려가 망한 것을 두고서 전부 불교의 탓이라고 여기던 조선의 유학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불교가 부흥하는 건 곧 나라가 망하는 지름길이었다. 임진년의 왜란 이후로 그나마 사회적 인식과 대우도 나아진 편이라고 해도, 여전히 조선의 유림은 그들에게 적대적이기 그지없었다.

"백성들이 그릇된 가르침에 혹하여 그릇된 길을 갈 것 같으면 그전에 백성들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베풀면 그만일 것 아니오. 짐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나랏돈을 탈탈 털어 이 조선 8도에 몇이나 되는 학교를 세웠다고 생각하는 거요? 선비라는 작자들이 나라에서 돈을 들여 이토록 많은 학교를 세워주었는데도 불자들의 그릇된 가르침 하나 고치지 못하면 차라리 붓을 꺾는 게 어떻겠소?"

그에 대한 이형의 반응은 전에 없이 신랄했고, 냉소적이었다. 딱 그가 생각해왔던 수준의 저항이었고, 딱 그가 예측해왔던 부분에서의 반발이었다. 그러니 이형 또한 제 나름대로 유림의 고집을 꺾을 말 정도는 하나쯤 생각해두고 있던 것이다.

박규수로서는 어안이 벙벙한 일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기쁜 일이기도 했다. 이형이 황제가 된 이래로 처음으로 박규수에게 일방적으로 황명을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제법 긴 말과 논리를 들어서 설득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충분히 숫자는 늘었으되 그 역할에 대하여는 낯설기만 했던 학교의 쓰임새에 대하여 유림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일이기도 했다.

사실 이는 따지고 보면 위정자라면 당연하다면 당연한 하급자들에게 자신의 정책을 설명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기술이었지만, 그런 재능도 그렇다고 그럴 역량을 키울 노력도 병폐하고 있던 이형을 모시다 보니 박규수 또한 별것 아닌 일에도 감격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황상께서 그토록 깊은 뜻을 품고 계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명심하겠나이다. 결코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쟤는 또 갑자기 왜 저래?'

이형은 박규수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로서는 이참에 종교의 자유를 확실하게 뿌리내릴 작정으로 한마디 했을 뿐인데 알아서 의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고민해봤자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고, 아무튼 의욕을 보인다는 일 자체는 긍정적인 일이었던 만큼 이형은 대수롭지 않게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황상께서 뜻이 굳건하시니 걱정이구나. 괜한 수고를 끼친 게 아닐까 후회스럽도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마마. 황상께서도 마마를 아끼시니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무 괘념치 마소서."

"…그러한가. 그렇다면 더욱 건강한 황자를 낳을 수 있도록 하여야겠구나."

이날의 일을 두고 황후는 이형이 그녀의 돌출행동을 감싸려다 괜한 자들까지 적으로 돌렸다고 여겼고, 불교계에서는 유림의 반발을 무릅쓰고서 자신들을 보살펴주는 황제의 행보에 크게 감격하여 충성을 맹세하였다. 이는 곧 실질적으로 백성들이 심정적으로 기대고 있던 사찰에서 황제와 황제가 시행하는 정책에 호의적인 언사를 쏟아내기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형의 뜻은 곧 조선 불교계 전체에 널리 퍼져, 불교계로부터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냈다.

"지금 황상께서 지혜로우시며 또한 대자대비하시니 지금 이 기회를 놓친다면 언제 또 지난 반 천년 간 모진 핍박에 신음해온 우리가 산을 나올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 황상을 위하여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어주세나!"

"실로 그러합니다. 황상께서 심려가 깊으시고 대자대비하시어 그 은덕이 천하 만민에 미치고 있으니 황상이시야말로 마땅히 이 조선 땅에 내려오신 생불이 아니신가 합니다. 우리 모두 조금만 더 힘냅시다! 황상께서 뜻이 굳건하신데, 어서 우리라도 황상께 힘을 보태어드려야 새 세상이 오지 않겠습니까!"

비록 정식으로 천주교도로서 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었으나 사실상 천주교도나 다르지 않다는 소문이 돌던 황제였다. 조선의 불교계와 천주교가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에 기대를 걸고서 마침 태기를 얻은 만주인 황후를 부추겨 도성에 사찰을 세울 부지를 마련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막상 유림에서 반발하기 시작하자 일이 어찌 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던 차였다.

그런 와중 황제가 뜻을 굳건히 세우며 유림의 반발을 무마시킨 것이다. 불교계로서는 도박이 통하였다는 뜻이었으니 반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일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던 조계종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사찰들은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산에서 내려와 도성과 시내에 사찰을 세우기 위한 부지를 마련하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동자승들까지 거리로 나와 허드렛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자자, 모두 조금만 더 힘냅시다! 옆 마을에게 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이 황상께 힘을 보태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고, 스님! 손이 다 까지시고 이를 어째요!"

"허허, 괜찮습니다. 자, 모두 조금만 더 힘 내봅시다! 폐하를 위하는 길이 곧 나라를 위하는 길이고, 곧 불공을 닦는 일이기도 하지 않겠습니까? "

이러한 승려들의 적극적인 사회참여에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것은 이 무렵 한창 진행되고 있던 농촌 근대화 사업이었다. 향촌 사회의 농민들이 심정적으로 기대고 있던 승려들이 적극적으로 하산하여 시멘트 포대를 나르고 저수지 보수 공사를 비롯한 크고 작은 공사들에 동참하니, 자연스럽게 동기 부여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본디 이런저런 공사들이나 잡다한 것을 만들어 공납하던 승려들이 적극적으로 이형이 추구하고 있던 경공업 육성정책에 합류하면서 본의 아니게 숙련공들이 대거 유입된 효과를 일으키기도 했다. 어차피 본격적인 기계식 공업이 아직이라 수공업 위주가 될 수밖에 없던 한국의 실정에서 이러한 숙련공들의 유입은 자연스러운 품질 향상과 생산량 증가라는 결과를 낳았다.

정작 이형이 의도한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당연히 이 일에 대하여 유림으로부터 불평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이형의 입에서 튀어나왔다는 말 한마디에 그만 눈이 까뒤집혔다.

"『선비라는 작자들이 나라에서 돈을 들여 이토록 많은 학교를 세워주었는데도 불자들의 그릇된 가르침 하나 고치지 못하면 차라리 붓을 꺾는 게 어떻겠소?』…라. 진정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인가?'

"이, 이…! …좋소! 그런 말까지 듣고서 참는다면 어찌 조선의 선비라 할 수 있겠는가. 황상께서 뜻이 정녕 그러하시다면 우리 조선 선비의 의기를 보여드려야 하지 않겠나!"

"뭣들하고 있는 건가? 어서 붓과 먹을 챙기세! 황상께서 부르시는 데 가만히 잠자코 있으면서 어찌 사대부라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살겠는가! 당장 가시게나!"

말이 좋아서 부름이지 실상은 유림 전부에 대한 도발이었다. 조선이 지난 500년간 백성들을 유교적 이념에 근거하여 올바르게 교화하고 일깨우는 것을 국시로 삼아왔던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했다. 한낮 불자들 따위에게조차 밀리면서 무슨 낯으로 선비를 자칭하고 다니냐는 소리나 다름없던 것이다.

이형이 추구하던 개화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건 부정적으로 평가하건 이런 소리까지 듣고서 가만히 있다면 조선의 사대부가 아니었다. 유림은 이형의 도전장을 받아들였고, 백성들을 가르치겠다며 나서기 시작했다.

생각이 제법 깨어 있던 이들은 먼저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여 신식 학문부터 익히기 시작했고, 자금적으로 여유가 있던 이들은 사립학교를 세우겠다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일부는 대한일보를 따라 하여 신문사를 세워 자신들의 여론을 알리려 들었고, 일부는 이 무렵 대한제국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유학생들을 모으던 것에 착안하여 이에 지원하기도 하였다.

"저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괜찮겠습니까? 아직도 구닥다리와 같은 낡은 시대관을 버리지 못한 작자들입니다. 중히 쓰면 필히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하여 너와 같은 뜻있는 관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더냐. 이는 곧 폐하께서 모처럼 뜻 있는 선비들에게 의기를 불어 넣어주신 것이다. 심려하는 것은 알겠으나, 심려할 시간에 어찌하면 저들을 고쳐 쓸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거라."

그간 한성의 조정을 외면하던 유림이 돌연 태세를 전환하여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일에 김홍집이 우려를 표하였으나, 박규수는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다. 이형에게 무언가 숨겨진 뜻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보다도, 이번 일을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돌아온 유학생들에게 실무경험을 쌓도록 하려 한것이다.

이에 따라 박규수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돌아오는 유학생들을 우선적으로 교육부에 배치하여 그들로 하여금 근대적인 교육 정책을 이끌도록 시켰다. 이는 곧 이형의 뜻이기도 했다. 우선적으로 근대적 지식을 충분히 축적한 신진 학자 계층을 대거 확보해야 수월히 산업화를 마무리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심산이었다.

이에 따라 뜻 있고 의기있는 젊은 관료들이 우선적으로 교육부에 배치되게 되니, 자연스럽게 교육부는 곧 출세가도를 걷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거쳐야할 정부기관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이는 신진학문을 공부하여 조정에 출사하기를 원하는 많은 청년들이 교사를 비롯하여 교육부에 속한 공무원을 지망하는 동기가 되니, 자연스럽게 대한제국 내각에서 가장 근대화에 적극적인 부서가 되었다.

이들 모두 각각의 방법은 달랐으나, 각자 이들이 그리는 정치적 이상을 위하여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았던 셈이다.

"""잘살아 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 표어를 들을 수 있었던 시대였다.

악에 받쳐서건, 희망에 부풀어서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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