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124화 (124/530)

< 미래를 안다는 것 >

"출세했군."

영국 여왕의 특명전권대사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이형의 첫마디는 이러했다. 물론, 반쯤은 비꼬는 말이었다. 이미 이형으로서도 손 쓸 도리가 없이 모든 게 걷잡을 수 없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던 참이었다. 인제야 전권대사를 보내왔다고 해봤자 이형으로서는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한국을 존중해 주려고 마음을 고쳐먹은 것은 고맙지만, 하다못해 반년만 더 일찍 찾아 왔을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랬다면 최소한 홍콩 정도는 남겼을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중화제국을 혁명으로 붕괴 시키면서 적어도 10년 정도는 시간을 벌 수 있었을 텐데.

"들라 하여라."

이형은 고개를 까딱여 명했다. 그리고 방 안에서 들어온 영국의 대사는 한눈에 봐도 고위 귀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인물이었다. 언제나 오만하던 그 토마스 공사가 일개 통역관 신분으로 동석한 것만 봐도 그러했다. 고풍스러운 옷차림에 절도있는 몸짓, 자신만만한 시선 처리까지. 무엇 하나 이형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재수 없는 놈.'

이미 이형의 마음속 호감지수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대영제국 특명전권대사 솔즈베리 후작 로버트 게스코인세실이라고 합니다. 우선 오늘의 이 만남을 주선해주신 하늘에 계신 하나뿐인 주께 감사드리는 바이며…."

"집어치우고 빨리 본제나 들어갑시다. 그쪽도 지금 그렇게 질질 시간이 나 끌 때가 아니지 않소?"

장황한 이야기에 어울려줄 생각이 없던 이형은 로버트 대사의 말을 도중에 끊고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로버트 대사는 한쪽 눈을 치켜뜨고, 토마스 공사 또한 얼굴이 붉게 물들었지만, 이형은 상관도 하지 않았다. 지금 급한 건 영국이지 한국이 아니었으니까.

'목마른 놈이 우물 파는 거지 당장 홍콩이랑 외국인 조계지 깡그리 날아가기 직전인 판국에 내가 너희들이랑 말장난하게 생겼냐. 엎드려서 빌어도 생각해 볼까 말까인데.'

물론 사실 엎드려서 빌어도 이형으로서는 괜히 끼어들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외국인 조계지와 홍콩을 영국 대신 방어해주려면 지금 대한제국군 전부가 강남으로 건너가도 가능할까 말까인 판국이었으니.

"…듣던 대로 무례하시군요."

"그대들이 그런 상황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소? 자, 어서 자리에 앉기나 하시오. 중국인들이 모든 것을 불태우기까지의 시간제한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이형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자리에 앉으라며 의자를 내주었다. 영국 대사 일행은 그런 이형의 태도에 불쾌해했지만, 이를 두고서 길게 불평하거나 이형을 힐난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비상사태임에 틀림없었고, 런던에서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어떻게든 한국의 협력을 받아 이번 사태를 원만히 해결하는 것이지 한국마저 뒤돌아서면서 영국의 극동 영향력이 소멸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로버트 대사는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고서는 입을 열었다.

"이번 장강 이남에서의 소요사태의 사태 해결을 위하여, 우리 대영제국은 귀국 대한제국과 범아시아 조약기구에 대하여 전폭적인 협력을 아끼지 않도록 결의하였습니다."

이형으로서는 반가우면서도, 역시나 코웃음만 나오는 일이었다. 시골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수준이면 몰라도 이제 해안가 도시들까지 간헐적인 폭동에 시달리는 판국에 와서야 독자적인 움직임을 포기하고 전면 협력인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마음을 고쳐먹어 주었다면 수습도 빨랐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수습을 논할 시간은 지났다.

지금은 더 이상 수습이 아니라 당장 코앞까지 다가온 전쟁에 대비할 시간이다.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구려."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영제국은 이번 사태수습을 통한 이권 사수를 위하여 노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을 심산입니다. 바라시는 지원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말씀만 해주십시오. 기꺼이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이형의 무례한 태도에도 개의치 않고서, 로버트 대사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그것은 곧 영국이 이번 사태 수습에 얼마나 사활을 걸었는지에 대한 방증이기도 했다. 영국으로서도 지난 아편전쟁과 조청전쟁 이래로 지배적인 이권을 행사하던 강남은 결코 그렇게 간단히 잃어버릴 수 없는 잠재적 식민영토였다.

강남을 계속하여 영국의 영향력 아래에 두면서 영국이 얻게 될 이익은 영국령 인도에 필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토도 영토고 인구도 인구지만, 재화부터가 무궁무진하다. 지난 수백 년간 다이칭 구룬의 재정을 지탱해왔던 강남은 장차 대영제국의 새로운 지갑이자 핵심이권 지대로서 계속하여 남아있어야만 했다.

설령 지금 이 자리에서 이형이 로버트 대사를 발로 걷어차고 욕지거리를 퍼붓는다고 해도 영국은 그 모든 모욕을 인내하고서라도 강남을 결사 사수할 각오를 굳힌 다음이었다. 강남에는, 중원에게는, 그 모든 치욕을 감수하고서라도 영향력을 결사 사수할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제공이라…."

이형은 굳이 따분한 심정을 숨기지 않고서 그런 로버트 대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서는, 그는 탁상을 검지로 두드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1만명 정도가 향후 3년간 사용할 수 있는 밀과 생활필수품, 1만 명 남짓한 난민을 수용 가능한 난민 수용지구, 그 외 잡다한 사치품과 기초적인 수준의 의료시설."

"밀, 생활필수품, 난민 수용지구, 사치품, 의료시설입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나…그것으로 진정 충분합니까? 제 짧은 식견으로 생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집니다만…."

로버트 대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상식으로 생각하기에, 고작 해봤자 그 정도의 지원으로 족히 수억의 인간이 주거하고 있는 강남에 대한 전면적인 구호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물론 그만큼 대한제국과 범아시아 조약기구의 물자가 풍족하다고 과시하는 것일지도 모르니, 함부로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그리고 그런 로버트 대사를 향하여 이형은 코웃음을 치며 답변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이건 우리 대한제국에서 귀국 대영제국의 피난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구호물자들이오. 이미 늦었소. 빨리 중원 땅에서 도망쳐 나올 궁리나 하셔야지, 언제까지고 거기에 남아있으려고 해봤자 무고한 백성들의 생명만 잃게 될 거요."

이형의 대답은 사실상 현시점에서 영국이 어떤 수단을 동원하건 간에 영향력을 사수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더 이상 영국이 대한제국을 지원해야 할 정국이 아니라, 대한제국에서 강남 내 영국인들이 무사히 대피하기 위한 지원을 각오해야 할 정국이라는 것이다.

로버트 대사는 이형의 대답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대영제국에서는 이번 강남에서의 소요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귀국과 범아시아 조약기구에 지원을 아끼지 않기로 결의하였습니다. 혹시 무언가 착각이 있으신 것 같아 말씀드리자면, 이번 결정은 대영제국의 여왕 폐하께 인가를 받은 사항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즉-."

"우리 대한제국에서 영국령 인도의 무궁무진한 자원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겠지. 알고 있소. 그러나 그 정도로는 부족하오. 고작 해봤자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단 말이오. 혹 강남을 위하여 인도를 굶길 각오라도 하고 있소? 아니면 강남을 위해 인도에서의 영향력이 흔들리는 한이 있더라도 인도인들을 징병해 전장에 투입할 각오는?

그대들 대영제국은 인도와 중화제국을 등가 교환할 작정으로 이 협상장에 왔소? 아니잖소. 중화제국과 영국령 인도 둘 모두를 지키려 이 협상장에 온 거잖소. 그럼 더 이상 짐으로서도 할 말이 없구려."

이형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대영제국은 분명 강대한 나라다. 부동의 열강 제1위이며, 인도 아대륙 전역에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 인도로부터 얻은 막대한 자원으로 전 세계에 그들의 영향력을 투사하고 있을뿐더러 산업혁명의 발산 지로서 인류 문명의 기계산업과 과학기술의 중심지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이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열강 1위의 강대국이 아니라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선 초강대국이다. 정진 정명한 지구의 지배자이자, 외교, 군사, 정치, 경제, 학문, 문화 모든 면에서 정점을 달리는 현대 인류 문명 그 자체이자 혼자만의 힘으로 나머지 세계 전체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지구 전체의 패권 국가다.

그건 항상 프랑스를 의식하면서 유럽 대륙에서조차 패권을 거머쥐지 못한 대영제국으로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이다. 이형은 그 경지에 실제로 다다른 대국을 알고 있었고, 그 대국은 지금 한낱 열강조무사로 지역 강국 노릇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럼 이번 일을 완만하게 해결하는 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았다.

"아니오, 제가 생각하기에 폐하께서는 아직 우리 대영제국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계신듯합니다. 우리 대영제국에서 한번 마음먹어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지금부터 그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로버트 대사는 그런 이형을 보면서 냉소했다. 역시나 그나마 식견이 있다고 하지만 한 번도 유럽에 가보지 못한 비유럽권 군주의 짧은 식견이라면서 말이다. 한국에 협력을 받지 못할 것이 확인된 이상, 더 이상 로버트가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천천히 극동의 황제를 향해 고개 숙여 예를 표하고서는, 그대로 천천히 자리에서 돌아서 자리를 떠나고자 하였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이오?"

오른팔로 턱을 괸 채로, 이형은 질문을 던졌다. 단순한 흥미이기 이전에, 적어도 영국이 향후 극동에서 어떻게 움직일지 정도는 알아둬야 그에 대한 대비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중화제국을 지원하고자 합니다. 그래야지만 우선 치안을 회복할 수 있겠지요. 치안을 회복한 다음에야 우선 정권이 안정되지 않겠습니까. 중화제국에 충분한 무기를 지원한다면 변변찮은 무기 따위로 날뛰는 도적단 정도야 단숨에 사라지겠지요."

로버트 대사 또한 태연하게 답하였다. 이번 사태의 협력을 얻는 것을 불가능하게 되었을지라도, 여전히 한국은 극동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영국의 중요한 협력국 중 하나였다. 적어도 향후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한 예고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대답에 이형은 단숨에 피가 차갑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듯하오만."

이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국을 만류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영국이 중화제국에 치안안정을 위하여 도적단을 토벌할 전쟁물자를 풀기 시작한다? 그 끝이 변변치 않으리라는 것 정도는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귀국을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중화제국군은 대영제국의 완벽한 통제 아래에 놓여있으며, 현 중화제국의 내각 또한 그러합니다. 이번 물자지원은 어디까지나 치안안정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 이상의 소요사태는 없을 것이라 약속드리겠습니다. 우리 대영제국 시민들의 생명을 걱정해주신 귀국의 배려에는 감사드립니다만, 그런 사태는 결단코 없을 것이라 단언해드리겠습니다.

중화제국은 이번 위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것이며, 중화제국과 대영제국의 우호 관계는 영원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 대영제국의 여왕 폐하와 총리 각하의 뜻이기도 합니다."

"완벽한 통제 아래에 놓여있다, 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오?"

"불안해하시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안심하십시오. 자세히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 우리 대영제국에서도 이번 사안에 있어서 충분히 심사숙고하며 섬세한 조율을 거치고 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이번 극동 순방 일정이 더 없이 촉박한지라."

로버트 대사의 어조는 더 없이 차분했고, 사무적이었다. 그러나 이형은 차분할 수 없었다. 특명전권대사의 극동 순방이라, 21세기라면 몰라도 19세기에는 그야말로 전례가 없다고 할 만한 대사건이다.

그건 지금의 대영제국이 얼마나 진지한 태도로 사태수습에 임하고 있는지를 짐작케 했다. 그런 대영제국이, 한국에서 비협조적이라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도 한국이 경계하고 있는 중화제국을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당당하게 밝혔다, 라는 건.

이형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한 가지만 더 확인하겠소."

"설령 누설한다고 하여도 대영제국의 국익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라면 얼마든지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나지막하게, 이형은 입을 열었다. 로버트 대사는 여유로운 태도로 대꾸하였고, 그런 여유로운 전권대사의 모습을 보면서 이형은 강렬하고 불길한 예감이 점점 구체화 되어가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형은 작게 한숨을 몰아쉬었다가, 다시 들이쉬고서는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주시오. …그 물자지원은 이미 시작된 다음이 아니오?"

"생각했던 것보다는 식견이 넓으시군요. 좋습니다. 우리 대영제국의 핵심 협력국에 굳이 숨길 필요는 없겠지요. 네, 이미 한 달여 전에 첫 번째 화물 선단이 인도를 경유하여 광저우를 향하고 있습니다."

로버트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서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을 이야기하는 양 가볍게 대답했다.

이형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혈향이 입안 가득히 퍼져, 코끝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중화제국의 군비증강이라. 그래, 프로이센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물론 지원해야겠지요."

"이탈리아인들이 불완전한 통일에 불만족하고 있을 텐데. 달마티아와 코르시카, 둘 중 어느 쪽이라고 보시오?"

"그건 답변해드릴 수 없겠군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프로이센 호엔촐레른에게 굴종을 명하고 있겠지. 그리고 프로이센의 수상 비스마르크는 양면 전선을 자처하여 나라를 멸망시킬 만큼 어리석지 않아. 그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대신 합스부르크에 고개를 숙이고 프랑스에 대항하려고 하겠지. 다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식견이 넓으시군요. 그러나, 거기에 답변해드릴 의무는 없습니다."

"이대로 가면 대독일 완성이 코앞인데, 전쟁에서 이기기라도하면 합스부르크에서 나폴레옹에게 더럽혀진 신성로마제국의 낡은 황관을 꺼내들겠군."

"…실례하지만,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넓은 식견을 손에 넣으셨습니까?"

"신성로마제국의 부활이 눈앞에 어른거려. 내 알기로 네덜란드나 벨기에에 신성로마제국을 그리워하는 독일계 범게르만주의자도 절대 적지 않은 걸로 알고 있소만. 적어도 전쟁의 명분으로 삼기에는 딱 적당한 수준으로 말이오. 다르오?"

"…맙소사."

로버트 대사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역관 자격으로 대동한 토마스 공사도 도중에 말을 더듬더듬 거릴 뿐 차마 말을 잇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형은 이미 그들에게 전혀 신경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 못하고 있었다. 한자어 표기법을 때려치우고서 대놓고 유럽국가들의 국명을 나열하고 있는 것조차 이형은 자각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으로는 이미 모든 정세가 짜 맞춰가고 있었다.

"프로이센은 생존을 위하여 오스트리아에 굴종. 러시아는 프로이센의 흡수합병을 막기 위해서라도 프로이센의 동맹국으로서 프랑스와 맞선다는 명분으로 독일에 진군할 테고, 오스트리아도 프랑스와 싸우면서 러시아와 적대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 대독일을 용인하는 대가로 러시아의 발칸 반도 진출을 어느 정도 눈감는 선에서 타협하려 하겠지.

이대로 전쟁이 끝난다면 이탈리아는 베네치아 일대를 중유럽의 패자로서 부활한 오스트리아에 다시 할양해야할테고, 그걸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탈리아는 교황령 문제에서 양보를 받는 대가로 프랑스의 아군으로 전향할 가능성이 높겠군. 프랑스는 프로이센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전쟁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테고 뭐든지 하겠지.

유감스럽게도 이미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한 우리 한국에게는 처음부터 편을 고를 선택의 여지가 없구려. 그래서, 다시 확인하건대."

이형은 한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그는 영락없이 피로에 찌든 폐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했다. 작금의 정세가 가리키고 있는 종착점은, 딱 한 가지 뿐이었으니까.

"친러파 대독일 신성로마제국의 부활과 독일의 공중분해를 통한 나폴레옹 체제 부활. 그대들 영국은 둘 중 어떤 유럽을 위하여 이번 세계대전에 참전하시겠소?"

세계가 불타오르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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