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J.R >
"…거기에 답변해드릴 의무는 없는 것 같군요."
한참을 침묵하던 로버트 대사의 답변은 회피였다. 그 또한 대답해 줄 수 없다는 대답. 그리고 이형은 그것이 한국에 일부러 숨기려고 하는 것보다도, 당장 영국 내에서도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눈치챘다.
지금의 영국은 글래드스턴 자유당 내각의 도덕 외교가 한창이던 무렵이다. 그러니 평소라면 진작에 병사들을 동원하여 중국인들을 힘으로 찍어누르려 했을 것을 정부 차원에서 구휼할 식량을 풀고, 중화제국의 치안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등 평소의 영국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유화적인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일부러 전권대사를 파견하여 대한제국과 진지하게 사태수습을 위한 이야기를 나누려 했던 것도 그렇다. 극동의 신생 지역 강국 따위에게 전권대사를 파견하여 진지한 대화를 시도 했다는 건 현재 런던의 내각에서는 어떻게든 식민정부와 현지상인들이 일으킨 이 초대형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발로 뛰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 광저우에 지금쯤 도착했을 화물 선단에 실려있는 건 단지 군수물자만이 아닐 것이다. 당장 지금의 대영제국이 여력을 쥐어짜 내서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었던 식량과 의료물자 또한 함께 실려있을 것이 분명하다. 영국의 글래드스턴 내각은 전쟁과 같은 초대형 유혈사태를 회피하려고 그들이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유화책은 그냥 우유부단한 행보일 뿐이지.'
이형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유화책으로 사태를 마무리하려고 해봤자 열강 제1위의 국력 수준으로는 부족하다. 차라리 이럴 시간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대한제국과 함께 전쟁을 획책하여 중화제국을 멸망시키고 중화제국을 3분할 하는 것이 훨씬 평소의 영국다울뿐더러, 지금의 대영제국의 국력으로도 수월하게 작금의 사태를 수습하는 길이다.
그러나 글래드스턴 내각은 굶주린 중국 빈민들을 향한 잔혹한 학살전이 예고되어있는 전쟁 대신 인도적인 구호정책을 선택했다. 이번 사태를 일으킨 도덕적 책임을 통감하며, 이번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뜻은 분명 숭고하지만, 작금의 사태에 올바른 대처법은 아니다.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게 된 지금의 세계에, 전쟁을 망설이며 도덕적이고 온건한 정책을 펼치는 정부는 하등 쓸모가 없다.
"그러한가. 알겠소. 오늘의 만남은 이만 마무리 짓도록 합시다. 이 제멋대로인 놈에게 어울려주느라 수고하셨소."
이형은 악수를 주고받은 다음 가벼운 묵례와 함께 로버트 대사 일행을 배웅했다. 그들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차분하고 예의 바른 행동거지를 보여주는 이형을 한참을 바라보다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들이 자리를 떠난 것이 확인된 그 즉시 이형은 제 자리에 풀썩하고 주저앉았다. 현기증으로 머리는 핑핑 돌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리는데, 다리조차 도통 뜻대로 움직여주지를 않았다.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았는데 지나친 숙취로 때아닌 오한이라도 찾아온 듯했다.
"영국은 세계대전의 참전을 망설인다, 라."
이형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로버트 대사 일행과의 대화로, 한 가지 확실해진 것이 있었다. 지금 영국은 전쟁을 바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강남에서의 사태는 식민정부의 폭주에 런던의 중앙정부까지 끌려 들어온 격에 가깝고, 너무나 멀어서 그 뜻을 알기 어려운 런던의 내각은 도덕적이고 유화적인 행보를 고수하고 있다.
영국이 유럽에서의 대전쟁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지원에 전념하게 된다면, 영국으로서는 유럽의 세계대전에도 불구하고 극동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여분의 국력을 확보할 수 있다. 그것은 극동에서 영국의 개입 또한 장기화한다는 것.
영국은 프랑스에 대항하여 프로이센을 지원하는 걸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영국은 중화제국 내에서 창궐하는 도적 떼들의 토벌을 위하여 중화제국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천하의 대영제국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이상, 당장 식량 기근 자체는 완화될 것이고 지방에 창궐하던 도적단은 머지않아 진압될 것이다.
상정했던 최악의 사태다.
"치안 혼란이 장기화한다면 사람들이 지치면서 흐지부지될 수도 있었다. 기근이 계속된다면 당장 전쟁을 일으킬 잉여물자가 남지를 않고. 혹은 아예 정말로 저들 모두가 펑펑 쓰고도 남을 천문학적인 물자를 풀 수만 있다면 생활 수준이 단번에 개선되면서 알아서 진정되었겠지. 하지만…."
딱 굶어 죽지만 않을 정도의 식량. 당장 병들어 죽지만 않을 정도의 구호물자. 딱 당장 누군가에게 살해당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수준의 치안 상태.
중화제국의 연착륙이 예고되었다. 중화제국이 산산이 공중분해 되는 형태의 초대형 혁명의 가능성은 소거되었다. 이제 중화제국의 상층부가 살아남기 위하여, 그리고 중화제국이라는 나라가 존속하기 위하여 선택할 길은 딱 한 가지.
민족의 대의 아래, 청과 전쟁을 시작하는 것뿐.
"세계대전, 세계대전이라."
이형은 끅끅하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 꼴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해 지켜보기에 우습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이형은 그런 저 자신을 자각하지도 못하고서 계속 끅끅거리며 머리를 감싸 쥘 따름이었다.
물론 지금껏 그가 전제했던 세계대전은 하나의 전제조건이 필수적이다. 바로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이 장기화하여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프로이센의 영내까지 진입할 시간적 여유가 발생하는 것. 만에 하나라도 프랑스가 러시아나 오스트리아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에 프로이센을 패배시키고 베를린을 점령한다면 세계대전은 무산되고 보불전쟁은 프랑스의 완승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이형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지금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이 루이이며, 보불전쟁은 전에 없던 참호전의 양상을 띠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유럽의 신문들을 통해 전해 들은 다음이기 때문이다.
"루이, 그 녀석은 인간을 한낱 탄환으로 소모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야. 시간이 더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조금이나마 병사들이 덜 죽는 길이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택하겠지. 쓸데없이 감수성 넘치던 그 녀석이라면 당연히 그럴 거야."
나쁘게 말하면 무른 것이고, 좋게 말하면 인간성이 있는 것이다. 이형에게 미래의 전장을 엿보고 그 자신과 주변인의 힘을 빌려 미래의 전장을 완성한 루이에게는 두말할 것 없는 결점이다. 인간의 생명을 총알 한 발로 사용해야 하는 전장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정작 그 총알을 사용하기를 망설이는 꼴인데, 그럼 방어전이면 몰라도 침공 전에서는 소극적으로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인간성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에 이번 전쟁에 개입할 시간을 줄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생존을 위하여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끌어들여 프랑스를 압박하고자 하겠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프랑스가 그 정도로 멈추어 설 리가 없다. 이런 와중 영국은 전쟁을 망설이고, 별수 없이 비스마르크는 더욱 오스트리아, 러시아 양국과 협력을 강화해야만 한다.
그럼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적국들을 끌어올 수 있게 된다. 이탈리아 왕국과 오스만 튀르크. 오스만 튀르크는 앞선 크림 전쟁에서 프랑스에 빚을 진 바 있으며, 이탈리아는 프랑스에 한차례 배신당한 전적이 있지만 그런데도 통일 전쟁 그 자체에 적대적이던 오스트리아보다는 국민감정이 유화적인 편이다.
전쟁이 여기까지 확대되면 러시아는 어떤 식으로건 중화제국과 연계하여 프랑스 식민제국의 핵심이권 지대라고 할 수 있는 극동을 불바다로 만들어 프랑스의 국력을 유럽에서 어느 정도 빼돌리려 할 것이고, 전쟁이 거기까지 확대되면 영국도 뒤늦게나마 편을 골라 이 세계대전에 참전할 것이다.
그때 영국이 프랑스의 견제를 위해 러시아와 프로이센을 지원하는가, 아니면 러시아의 견제를 위해 프랑스와 대한제국을 지원하는가.
"답변해 줄 의무는 없다고 했었지."
아직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다고도 해석 가능한 답변이었다. 적어도 현 내각은 아직 전쟁을 시작할 생각도, 그럴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
그건 곧 지금부터 로비를 시작하면 어떤 식으로건 영국의 결정에 영향을 주는 것 또한 가능하다는 것.
"…미국."
이형은 무심코 자신의 입 밖으로 새어 나온 나라의 이름을 차분히 곱씹었다. 만일 그에게 미래의 지식이 없었다면 지금 그 이름이 왜 나오냐고 자신도 어이없어했을 이름. 아직은 고작 해봐야 열강조무사, 고작 해봤자 북미대륙의 지역 강국 수준을 크게 넘지 않는 나라.
군사력으로는 영국령 아메리카 하나 제대로 이기기 버겁고, 전통문화라고 할 만한 건 없으며, 특별히 역사가 긴 것도, 대단한 문화유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경제력만큼은 이미 여타 열강에도 뒤처지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필요한 이형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다. 영국의 정계를 움직이기에 충분한 돈. 영국의 정계가 망설이지 않고서 프로이센을 포기하고 대한제국을 선택할 정도의, 천문학적인 돈.
"금 모으기 운동 따위로는 어림도 없어."
명색이 그 대영제국이다. 세계 1위의 열강이다. 고작 해봐야 대한제국 따위의 나라가 금 모으기 운동으로 극동 전역의 금을 박박 긁어모은다고 해도 영국의 정계를 움직이기란 어렵고, 실제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금을 모았을 즈음에는 모든 것이 결판난 다음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라면, 월 스트리트라면 가능하다. 아직은 미약하기 그지없는 월가라도, 지금쯤 유럽 대륙에서의 전쟁에 당장 참전하자며 여론을 선동하고 있을 디즈레일리의 보수당을 지원해 영국이 강남에서의 식민 이권 사수를 우선시하여 세계대전에 참전하도록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
"지금 대통령이 율리시스 그랜트. 소위 말하는 대재벌, 트러스트들의 손아귀에서 농락당하던 전쟁 영웅이지."
그건 곧 트러스트를 움직일 수 있게 되는 순간 미국 정부 또한 움직일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리고 미국 정부와 트러스트가 동시에 지원하기 시작한다면, 디즈레일리의 보수당은 충분히 민족주의의 광풍이 불고 있을 영국 정계를 뒤집고도 남는다.
굳이 트러스트나 미국 정부를 손안에 넣고서 쥐락펴락하는 수준의 대단한 영향력은 필요 없다. 이번 한 번에 그나마 트러스트나 미국 정부와 닿아 있었던 인맥과 영향력 전부를 소모하게 된다고 해도 어떻게 해서든 영국만 움직이는 데 성공한다면 잭팟이다.
문제가 있다면 다만 한가지, 도대체 무슨 수로 그 트러스트를 움직이게 할 것인가. 아메리카 대륙의 지역 패권국으로서 손에 넣은 지위와 이권들만으로 만족하여 빈둥거리고 있는 살이 뒤룩뒤룩한 자본주의의 돼지들을 무슨 수로 움직이게 할 것인가.
이형은 입꼬리를 뒤틀었다.
***
"아, 조국 고향 땅이 그립구나. 삼천리 금수강산이 그리워! 도대체 이 지긋지긋한 미리견 생활은 언제쯤이면 끝이 날꼬?"
이 무렵, 박규수마저 떠나고서 미국의 공사관에 홀로 남은 주미공사 민치상은 지루하고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여전히 푹신푹신한 침대는 허리를 아프게 만들 따름이었고, 차갑기 그지없는 목재 바닥은 새벽녘에 무심코 맨발로 바닥을 밟을 때마다 그 지독한 냉기로 한 번에 새벽잠을 달아나게 했다. 음식들은 하나같이 기름지기 그지없었고, 그도 아니면 너무나도 짜거나 달았다.
그나마 미국으로 온 이래로 처음 접하게 된 시가만이 하루하루 향수병에 병들어가던 마음의 안식처였다.
"함께 고향 땅으로 돌아가자던 동지들은 이미 모두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갔는데, 나만 혼자 이 미리견 땅에 남아 하루하루 병들어가고 있구나."
한국으로 돌아가면 곧바로 귀국할 수 있도록 청탁을 넣어보겠다던 박규수는 한국으로 돌아간 이래로 소식이 툭 끊기고, 함께 서역으로 건너왔던 김병학 김병국 형제는 진작에 한국으로 돌아가 중임을 받았는데 민치상 만큼은 여전히 기별이 없었다.
민치상은 힘없이 그날의 신문을 펼쳤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대표단, 프랑크푸르트에서 극적인 타협! 합스부르크의 독일 연방이 재건되다! 신성로마제국의 부활인가? 침통한 얼굴의 프로이센 대표단!』
『동맹국 프로이센과 유럽의 평화를 위하여! 러시아군, 동프로이센 진주! 또 다른 대전쟁의 서막인가?』
『이탈리아의 일부가 될 것인가? 독립 국가로서 남을 것인가? 교황령의 운명은? 제네바에서 만난 이탈리아-프랑스 대표단!』
『브뤼셀에 모습을 드러낸 글래드스턴 영국 총리! "대영제국은 유럽대륙의 평화회복을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작심 발언!』
『반년 간의 격전, 마침내 라인란트 방위선 붕괴! 프로이센 영내로 진군하는 프랑스군! 나폴레옹 4세, "프랑스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겁박에 굴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를 위한 장엄한 복수전!』
"정말이지 난세구먼."
민치상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황제가 말했다시피, 지금은 난세였다. 거기에 의문을 품고서 황제에게 뒤돌아섰던 건 어디까지나 민치상 그 자신의 선택이었고, 지금은 그 업보를 치르고 있는 격이었다. 민치상의 한숨 소리는 끊일 줄을 몰랐다.
미국의 신문들은 나날이 격화되어가는 유럽 대륙의 정세를 재미있는 연극이나 오페라 따위를 보는 듯한 태도로 서술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 대륙에서 전쟁이 일어나건 말건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전쟁이 확전될 가능성이 없는 이상 미국인들에게는 단지 가벼운 흥밋거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민치상은 미국의 소위 돈깨나 있다는 작자들이 연회장에서 가벼운 담화를 나누며 이번 유럽 대전에서 어떤 나라가 승리하게 될 것이며 또 어떤 나라가 패배하게 될 것인지를 두고서 내기 따위를 걸던 걸 질리도록 볼 수 있었다. 민치상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천박한 풍습이었다.
이웃 나라끼리 전쟁을 벌이는 걸 두고서 내기를 둔다니, 민치상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똑똑.
"음? 무슨 일인가?"
그때였다. 하릴없이 신문이나 읽던 민치상의 평안을 깨는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은. 민 치상으로서는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가 매일 이 무렵이면 홀로 신문을 읽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힌다는 걸 이 공사관에 근무하는 직원치고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구태여 그의 몇 안 되는 마음의 안식을 방해하니, 기분이 좋을 리가 만무했다.
"각하, 황상께서-."
"그거 당장 이리 내게!"
그러나 그런 불쾌함은 공사관의 직원이 내민 밀서 한 장에 뒤집혔다. 민치상은 그의 황제에게서 밀서가 도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희희낙락하며 자리에서 뛰쳐 일어나 밀서를 받아 챙겼다. 보나 마나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내용의 명령서라고 생각한 것이다.
'흐흐흐, 그래. 그렇지! 지금까지 너무 오랫동안이 미리견 땅에서 썩어왔어! 이제 드디어 그리운 조국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구나! 지긋지긋했던 미리견이여, 안녕이다! 돌아간다면, 나는 죽는 날까지 조선 8도에 뿌리 박고서 어디도 가지 않을 테다!'
기대감과 행복함을 담아, 민치상은 황명이 담긴 밀서를 받았을 때에 마땅한 절차나 예법조차 잊고서 다짜고짜 밀서를 개봉하고 그 안에 담겨진 황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거기에 담겨 있던 것은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것이 아니었다.
"아, 아니 이 무슨…!"
실망할 새도 없이, 민치상은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 안에 담긴 황명은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고, 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명령을 내리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 내용을 품고 있었다.
"도대체 황상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건가! 아니, 이게 지금 말이나 된다는 말인가! 이, 이걸 도대체 어찌 나보고…!"
민치상은 흥분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린 다음이었고, 손을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첫 번째로 그 밀서에 담긴 황명의 내용에 당황했고, 이것을 자신이 실행해야 한다는 사실에 공포에 질렸으며, 마지막으로 이 황명을 실행함으로써 모든 분노를 뒤집어쓰게 될 인물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에 절망했다.
밀서에는 미국에서 영국 보수당의 최종해법을 지지하지 않을 경우, 대한제국 정부는 현 범아시아 조약기구 내 모든 미국계 기업들이 부설한 철도와 산업시설들을 국유화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