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130화 (130/530)

< 민족주의자 >

격동의 시대였다.

글 하나 읽지 못하는 무지렁이 백성들이라도 그것 하나만은 깨닫고 있었다. 그동안 알아 왔던 모든 상식과 세계관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상식과 세계관이 끝없이 어딘가에서부터 나타나 이식되고 있었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 불편한지도 몰랐던 것들이 하나둘씩 편리하고 낯선 것들로 대체 되고,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것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졌다.

새로운 나라님의 즉위가 시작이었다. 나라를 좀 먹고 갖은 핑계를 대며 세금을 거두어 제 잇속만 챙기던 세도 가문 일가가 줄줄이 목이 잘렸고, 기적처럼 전쟁에서 이겨 병인년 아래로 언제나 이를 갈아왔던 야인 오랑캐들을 당당히 무릎 꿇렸다. 오랑캐 우두머리에게 군신의 예를 다하겠노라 맹세해야 했던 조선이, 이제는 당당하게 오랑캐들을 발아래에 무릎 꿇리고 천하의 주인이노라 자칭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손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거둘 수 있는 땅이 생겼다. 나라에서 글공부를 시켜주게 되었다. 조선 8도 어디에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었던 호랑이에게 물려가 죽었다는 사람이 어느새인가 확 줄었다. 한성까지 가려면 1달 넘게 산을 타야 했던 것이, 증기기관차라는 시끄러운 기물에 타면 불과 1주 안에 조선 8도 어디나 갈 수 있게 되었다.

언제나 젠체하고 다니던 양반 어르신네 귀한 자식들이 이제는 어디 개똥이 소똥이 병장님 밑에서 군 생활을 하고, 언제나 산속에 숨어 지내던 스님들이 도시까지 내려와 불공을 올리고 시주를 받으러 다니게 되었다. 천자문이나 경전 따위를 달달 외며 기를 죽이던 양반 어르신들도 알파벳 하나 읽지 못하면 꼼짝없이 머리를 짧게 자르고 색목인처럼 양장을 걸친 소위 모던보이들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했다.

"마침내 새 세상이 온 거야! 계룡산 정도령이니 뭐니 하는 도사 나부랭이가 웬 말이더냐? 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아암, 알았고말고! 넌 참으로 복 받은 게다. 이제 기울던 우리 가세도 다시 일어날 거고, 너는 그저 아무 걱정 말고 공부나 하려무나!"

언젠가부터 아버지께서 웃으시는 일이 크게 늘었다. 고작 해봐야 논 세 마지기. 일가족이 먹고살기에는 너무나도 비좁았던 땅덩어리. 그 세 마지기의 논마저 팔아치워 색목인들의 두꺼운 백과사전을 사들이고서는 머리까지 자르고 도시의 모던 보이들처럼 양장까지 어디에서 구해 입으셨을 적에는 어머니께서 눈을 까뒤집고 게거품을 물으셨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우리 가족을 구한 결정이 되었다.

그 무렵에는 나라에서 큰돈을 들여 전국 곳곳에 학당을 세우고 있었다. 나라님께서 온 나라의 백성들에게 글공부를 시켜주시려 결심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라님께서 어디서 그렇게 많은 돈이 나신건지, 도시에는 돌무더기와 매끈한 목판으로 족히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학당이 들어섰다고 들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말이다. 특별히 세금이 오르거나 하지도 않았을 텐데, 이 나라 조선이 언제부터 이렇게 부자 나라가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건 도시의 이야기고, 우리 마을처럼 그저 그런 농촌의 경우에는 보통 기존에 서당으로 쓰던 건물을 나라에서 인수해 많아야 30명 정도의 아이들이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개수하는 수준에 그쳤다. 도시에는 신식교육을 받은 모던보이들이 적어도 한둘씩은 배치되었다고 들었지만, 우리 같은 농촌에는 그런 것도 없었다.

나라에서 알아서 보고 익히라면서 교과서를 나눠주면 어제까지 하늘천 땅 지하며 천자문을 외던 훈장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서는 교과서의 내용을 익혀나가야 했다. 그리고 이 부분은 훈장 선생님을 하고 계시던 우리 아버지 또한 다르지 않았다.

"황송하옵게도 황상께서 이 비루한 몸뚱어리를 이 나라 대한의 주춧돌로 삼아주셨으니 이 황은에 어찌 보은하면 좋을고? 그저 분골쇄신하여 후학들을 가르치는 것만이 이 하해와도 같은 황은에 보답하는 길인가 하노라!"

관청에서 교육부에서 만들었다는 교과서를 나눠주던 날, 아버지께서는 황상께서 계시는 한성을 향하여 몇 번이고 절을 올리셨다. 여전히 짧게 자른 머리와 도시의 모던 보이들이나 입고 다닌다는 색목인들의 양장을 입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낯설었지만, 한성에 정중히 절을 올리는 그 모습만큼은 언제 나와 같은 아버지의 모습이라서 안심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께서 다른 점이 있었다면 바로 각오와 노력에 있었을 것이다. 나도 도시까지 나가본 적은 없으니 이 조선 땅에서 제일이라던가 하는 허풍은 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아버지께서는 우리 마을에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식학문을 익혔다. 나라에서 녹봉을 내리고 비록 말단이라지만 교사라는 벼슬까지 내려가며 후학을 양성하는 중임을 맡겼는데 소홀히 할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어린 학생들보다도 정열적으로 잠까지 줄여가며 신식학문을 익히신 아버지의 노력은 금세 큰 성취를 이뤘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마을뿐 아니라 이 근방에서 가장 신식 학문에 해박한 분이 되셨고, 소문이 퍼지면서 옆 마을에서까지 학생들이 모여들기도 하였다.

"듣자 하니 논 마지기까지 팔아가며 도시에서 백과사전을 사들이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군. 그 열정을 높이 사 내 추천서를 한 장 써주겠네. 어떤가? 전주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아볼 생각은 없나?"

"이 보잘것없는 서생 나부랭이를 나라에서 중히 써주시겠다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시기와 장소를 잘 만나 분수에 넘치는 복을 얻었으니, 이 모든 것이 그저 황상의 하해와도 은덕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노력은 보답받았다. 여전히 적지 않은 사대부들이 신식 학문에 적대적이던 와중, 얼마 안 되는 자산까지 털어가며 신식 학문을 익히고 나라에서 맡긴 소임을 다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교육부의 고관들이 눈독을 들인 것이다. 그날로 우리 가족들은 전주로 옮겨 살게 되었다.

나라에서는 우리 가족들이 살 집까지 내주면서 아버지께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도왔고, 아버지께서는 학당을 통틀어서 30명 정도가 고작이던 학생들이 한 반에만 60명이 넘는 도시의 커다란 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시멘트라는 난생처음 듣는 기묘한 돌무더기로 만든, 한 번에 수백 명을 수용 가능한 웅장한 학교였다. 처음 전주로 상경하던 날, 그 웅장한 모습에 아버지께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논 세 마지기와 다 무너져가던 초가집이 가진 것의 전부이던 가난한 농촌의 서생이 이제는 나라의 녹을 받으며 나라에서 큰돈을 들여 세운 커다란 학당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중임을 맡게 된 것이다. 아직 약관의 나이가 되지 않은 나조차 그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깨닫고서 가슴이 쿵쾅거려 진정할수가 없었는데, 하물며 한평생 가난한 서생으로 삶을 마치는 줄만 알고서 살아오셨을 아버지께서 느끼셨을 감동은 헤아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저 혼자서 이 많은 교과목을 전부 가르치라니요! 마을에서처럼 어디 또래 아이가 열댓 명이 고작인 것도 아니고, 예순 명이 넘는 아이들을 저 혼자서 전부 가르치라는 게 어디 말이나 됩니까! 하다못해 저 같은 교사 한 명이라도 더 붙여주십시오!"

"무리한 부탁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네. 그러나, 어쩔 수 없어. 나라에 신식학문이라는 걸 익힌 사람이 거의 없단 말일세. 대신 그만큼 추가수당을 주도록 내 이야기해둠세. 이 모든 일이 나라와 겨레를 위하는 길이요, 황상을 위하는 길이야. 이렇게 고개 숙여 부탁하겠네. 부디 황상께 힘을 보태어주세나."

하지만 그런 감동이 막막함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웅장한 학교와 예순 명이 넘는 학생들에 좋아하시던 아버지께서는, 곧 그 예순 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신식학문과 천자문, 경전까지 모든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현실 앞에서 좌절하셨다.

도시의 학교에서는 원칙상 국어, 수학, 과학, 사회, 영어 등 여러 과목을 각각의 교사들이 맡아야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그것이 지켜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도시의 학교라도 해외 유학을 하였건 대학을 졸업하였건 제대로 된 교육과정을 거친 모던보이들은 학교마다 한둘씩 있는 게 고작이었기 때문이었다.

교육부의 고관이 말하기를 실제로 그렇게 과목별로 교사들이 배치된 건 한성에서도 종로에 있는 학교들밖에는 없다고 했다. 나머지는 그나마 신식학문에 능한 교사들이 한 반씩 맡아서 신식학문을 통틀어 넓고 얕게 가르치는 것이 고작이란다. 그리고 종로의 학교들조차 정말로 신식학문을 깊이 있게 익혀 제대로 된 가르침을 내려줄 수 있는 선생들은 극히 드물어, 본인이 깊이 있게 신식학문을 익히고자 한다면 차라리 사관학교에 입교하는 것이 빠르다고 한다.

"너무 실망할 것 없다. 이게 다 아직 결실이 여물지 못해서 그런 거야. 두고 보아라. 앞으로 10년, 아니 5년만 지나도 이 나라는 크게 달라질 테니까. 서생 취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잔반 나부랭이가 나라의 녹을 받으며 후학을 가르치는 중임을 맡게 될 수 있었으니, 이 어찌 좋은 시대가 아닐 수 있겠느냐? 함께 배우고 익혀 어서 빨리 황상께 힘을 보태어 드리자꾸나."

전주의 커다란 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는 사실에 들떠 가슴 벅차 하던 아버지께서는 겉만 그럴싸할 뿐 아직 텅텅 빈 것이나 다름없는 교육 현장의 현실에 큰 충격을 받으신 듯 보였다. 그날 아버지께서는 도시 구경에 여념이 없던 나를 크게 꾸짖으시며 학업에 더욱 열중하자고 나를 다독이셨다. 사실, 그건 나를 다독이는 말이라기보다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다독이시는 혼잣말에 더 가까웠다.

교육부에 속한 고관의 약속대로 녹봉에 더하여 추가수당을 받게 된 아버지 덕택에 기울어 가던 가세는 피게 되었지만, 그 추가수당은 교사 몇 사람 분의 일을 홀로 맡게 된 아버지의 노력과 고생에 비하면 그리 변변치 못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서 어머니와 몇 차례 다투기도 하셨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자신은 격무에 시달리며 매일 밤 내일 수업을 준비하느라 밤잠을 설치면서도 아버지께서는 내가 도울 필요는 없다며, 너는 그저 네 공부에 전념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저 공부하는 길이 아버지의 마음고생을 덜어주는 길이라면서 말이다.

"민족과 겨레를 위하는 길이다. 이 한 몸 분골쇄신하여 황상께서 조금이라도 근심을 덜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느냐? 그러니 너무 심려 말고. 이 나라 조선이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나는 가슴이 벅차서 잠들 수가 없구나!"

아버지께서는 조금은 몸을 돌봐달라는 내 걱정 어린 청도 뿌리치셨다. 이 모든 일이 민족과 겨레를 위하는 길이라면서 말이다. 그 무렵 모던 보이들을 중심으로 민족주의자라는 어휘가 막 유행하기 시작했으니, 우리 아버지께서 딱 그러셨다고 할 수 있겠다. 아버지께서는 민족주의자셨다. 민족과 겨레를 위하면 죽어도 좋다고 진심으로 생각하시고, 이 나라 대한이 날로 번창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는 황상께 몸과 마음을 바치시는, 민족주의자셨다.

아버지께서는 자신이 민족주의자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셨고, 아버지께서 가르치시던 학생들 또한 아버지와 같은 민족주의자가 될 수 있도록 열정을 아끼지 않으셨다. 학생들은 잘 배우고 익혀 장차 이 나라의 주춧돌이 되어야 한다며 매일 같이 열변을 토하시고, 우리 민족과 이 나라를 위해서라도 황상께 조금이라도 더 힘을 보태어 드려야 한다는 아버지의 열정은 금방 널리 퍼져 아버지를 전주 일대의 명사로 만들어주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일까. 교편을 잡으신 아버지의 덕택으로 도시의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 나 또한 왜소한 키와 그리 잘난 것 없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학생회장역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그 무렵에는 교육부에서도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을 지원하던 것도 있어서, 황실에서 발간하는 대한일보를 흉내 내 학생신문을 만들어 돌리거나 방학 중에 농촌으로 내려가 농촌 근대화 운동을 돕는 등의 이런저런 학생운동을 지휘하는 분수에 넘치는 역할을 맡아보기도 했다.

"『짐은 우리 스스로 지킬 준비를 하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대안도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이 나라는 지금 곤경에 빠졌으며, 이는 전적으로 짐의 불찰이다. 그러나 수치를 무릅 쓰고 감히 요청하건대, 이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이번 난관을 극복하는 데에 그대들의 힘을 빌려주었으면 한다. 우리의 길을 가로막고 선 저 벽은 비록 높지만, 이 나라의 하나 된 힘으로 넘을 수 없을 만큼 높지는 않으며 우리 민족에게는 이번 난관을 타파할 지혜가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이 나라가 그대들을 원하고 있다. 부디 힘을 보태어주었으면 한다.』"

황상께서 손수 적으셨다는 대자보가 게시판마다 나붙은 것은 햇볕이 화창하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순수 언문으로 적혀져 있던 탓에 읽기에도 편리했고, 무엇보다 황상께서 손수 적으셨다는 것이 큰 화제가 되어 글귀의 내용은 곳곳에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나라에 어떤 위기가 닥친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였지만, 그를 극복하는 데에 힘을 모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는 크게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와 함께 관청에서 금 모으기 운동을 시작하고, 건장한 청년들의 자원입대를 받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호응은 곧 직접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기꺼이 집 안에 숨겨두고 있던 금붙이나 돈이 될만한 귀중품들을 들고나왔고, 저잣거리에서 뽐내던 모던보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관청에 찾아가 자진하여 입대했다.

나와 학우들은 이 일에 크게 감명을 받아 금 모으기 운동에 대한 호응과 나이가 찬 졸업반 학생들의 자원입대를 권장하는 학생운동을 계획했다. 학생회장으로서 내가 가장 먼저 모범을 보이기로 하였고, 나와 함께 각 학급에서 임원을 맡고 있던 반장들 또한 함께 머리를 깎고서 자원입대하여 급우들에게 모범을 보이기로 했다.

자원입대를 앞두고서, 우리들은 방과 후 빈교실에 모여 함께 전장에 나서 민족과 겨레를 위하여 용맹이 싸우는 우리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전장에 나가 전쟁영웅이 되어 고향에 돌아오는 상상, 치마폭에서 벗어나 어엿한 사내대장부가 된 미래의 자신,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친 애국 청년이라고 떠받들어지는 상상. 무엇 하나 즐겁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무엇 하나 들뜨지 않는 일이 없었다.

짜악-.

"아, 아버지…!"

"이 학생이라는 놈들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어림도 없다! 절대로 못 보낸다. 절대로 보내지 않을 거다! 그곳이 어떤 곳인 줄 알고 어린놈들이 전장에 나선단 말이더냐? 학생의 본분은 공부하는 일이다. 아직 공부를 마무리 짓지도 않고서 가기는 어디를 간단 말이더냐? 황상께서 나 같은 서생 나부랭이에게 이런 중임을 맡기신 것이 얼굴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을 전쟁터에 보내려고 그러신 것 같으냐!"

그렇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 전주 제일의 민족주의자로 이름을 날리시던 아버지께서 내 뺨을 때리시며 절대로 안 된다며 엄포를 놓으신 것이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민족과 겨레가 위험에 빠져 이 위기를 극복하려 이 한목숨 바치려 한 것뿐인데, 어째서 꾸중을 들어야 하는 것인가.

"어째서 안된단 말씀입니까? 민족과 겨레를 위하여 이 한 몸 바치겠다며 평소 언제나 자랑스럽게 떠벌리시던 아버지가 아니셨습니까! 아버지는 되시고 저는 안된다는 말입니까? 저 또한 민족과 겨레를 위하여 이 한목숨 바칠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놈이 그래도!"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우리 부자는 끄끝내 이견조율에 실패했다. 나는 그날 밤 몰래 집을 나왔고, 관청 앞에서 노숙하며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는 대로 자원입대하기 위함이었다. 혹시라도 얼굴을 아는 사람과 만날 때를 대비해 뺨에 진흙을 덕지덕지 발랐고, 징병서류 상의 나이도 스무 살로 속였다.

또래 중에서도 유별나게 작은 키 탓에 들킬 뻔하기도 하였지만, 그 모든 노력 끝에 나의 가출 계획은 성공할 수 있었다.

"나이 스무 살…으음,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그래,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전봉준입니다! 꼭 가고 싶습니다!"

나는 내 앞에 펼쳐질 새로운 세상을 향한 기대로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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