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명은 없다 >
그리고 이날 두 세력의 만남은 고스란히 한국에게도 감지되었다. 서로 어떤 내용의 담화를 나누었는가 하는 세세한 정보나 여기에 참가한 고관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까지는 역시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청두에서 태평천국의 천왕이 몸소 중화제국에서 온 대표단을 몸소 접객하였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해산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전해졌다.
이미 장강 이남에서 날뛰는 도적단들과 차후 군벌로 성장할 가능성이 보이는 세력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또 위험분자들을 암살하고 주요거점들을 파괴하는 등의 사보타주를 실행하던 와중의 국정원이었다. 물론 여전히 첩보 조직 운영에 서투르다 보니 그리 거시적인 성과는 없었지만, 최소한 당장 한국에 필요한 정보들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주고 있었다.
중화제국과 태평천국이 비밀리에 만났다는 정보는 그 즉시 국정원 통신원들의 전보를 거쳐 한양까지 전해졌고, 곧바로 이형에게까지 보고되었다. 산통이 찾아온 황후의 무사 출산을 기다리고 있던 이형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영 시기가 좋지 않은 이야기였다.
"무슨 국공합작이더냐? 아니, 국공내전이라고 하면 장개석에 대한 실례던가. 아무튼 성가시게 되었어."
이형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중화제국과 태평천국의 공투 가능성 자체는 예상했다. 지금은 민족주의라는 시대정신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이번 강남 기근은 한족 민족주의를 탄생시켰고, 이러한 한족 민족주의는 외세에 대한 거부와 혐오, 적대로서 발현되고 있었다. 다른 어떤 무엇에 대한 증오보다도 외세를 향한 증오가 우선시 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중화제국과 태평천국은 아무튼 같은 한족 집단이다. 그동안은 중화제국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세의 도움이 필수적이었으므로 반외세를 선동하는 태평천국과의 협력은 논외가 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중화제국조차 외세에 대한 혐오와 거부를 기조로 한 한족 민족주의에 올라타 버린 이상 양세력이 서로를 적대에 해야만 하는 이유의 절반 정도는 사라졌다.
이런 와중 영국이 오보 사건으로 중화제국에 대한 지원을 끊어버렸다. 사실상 영국의 괴뢰정권이나 다름없던 중화제국으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다. 더 이상 반군 토벌과 폭도 진압 따위에 시간과 물자를 낭비할 여유가 없어진 것이다. 정권을 유지하려면 반군들을 적대하기보다는 그들과 타협해야 했고, 그걸 위하여 반군들의 배후세력이나 다름없는 태평천국과도 동맹을 맺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전쟁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은 것은 그저 어느 진영에서 먼저 선공을 하느냐의 문제일 뿐. 중화제국이 자국 국내의 반군과 그들의 뒤를 봐주던 태평천국과 타협을 택한 이상, 반대로 청과 중화제국이 타협할 여지는 소멸한 셈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중화제국이 먼저 태평천국에 손을 내밀 거라고는 예상했다. 일단 청과 전쟁을 시작하려면 최소한 태평천국과는 불가침조약 내지 동맹을 맺어둬야 당장 국내에 들끓는 반군들을 억제하거나 우군으로 끌어 들일 테니까. 오히려 놀라운 건…태평천국 놈들이 자기들 임시수도인 청두까지 끌어들여 천왕이 몸소 접객에 나서는 등 중화제국 놈들을 후하게 대접했다는 것.'
그건 분명 의아한 일이었다. 태평천국에 있어서 그들의 교주격인 천왕은 곧 신이다. 하늘의 상제-곧 야훼가 홍수전의 아버지이고 홍수전은 예수의 하나뿐인 동생이며 따라서 홍수전은 신이고 그의 자식들 또한 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일종의 현인 신이라는 교리를 진지하게 신봉하던 것이 태평천국의 신자들이었다.
본래의 역사에서는 홍수전이 죽고 태평천국이 패망하며 그 신앙도 공중분해 되었지만, 청이 휘청이는 동안 태평천국은 수차례 패망하였다가 부활하면서 도리어 태평천국에는 진실로 상제의 가호가 함께하고 있으며 이는 곧 홍수전이 상제의 아들이자 야소의 하나뿐인 동생인 덕분이라면 더욱 믿음을 굳건히 하여 중앙집권에 성공했다.
이제 더 이상 태평천국 내에서 홍수전과 그의 아들인 2대 천왕 홍천귀복이 신의 자식이라는 데에 이견을 품는 자는 없다. 하물며 태평천국의 광신적인 모습에 환멸하여 교단을 등진 한때의 신자들조차 홍수전을 타락한 악신이라고 부를지언정 그와 그의 자식들이 신의 핏줄을 이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딱히 태평천국을 믿은 적이 없더라도 홍수전이 신에 준하는 신통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믿고 있는 무지렁이 농민들도 흔하디흔하다.
그런 현세에 강림한 신이 몸소 중화제국의 고관들 '따위'를 접객한 것이다. 당연히 그 내용이 범상치 않을 것이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태평천국과 중화제국 사이에 체결된 밀약은 중화제국이 태평천국에 굴종하거나 그에 준하는 수준의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중화제국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조약을 먼저 제의했을 리는 없다. 그럼 태평천국에서 중화제국을 협상 도중에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는 무언가 비장의 수 하나쯤은 이미 마련한 상태에서 협상에 임했을 가능성이 높겠지. 그런데 쓰촨성에 처박힌 종교 군벌이 그만한 패를 마련하려면….'
가능성은 두 가지. 양귀비를 재배하여 부를 축적하며 밀무역과 암거래로 중원 전역에 걸쳐 자신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된 범죄망을 구축한 상태이거나, 아니면 중화제국조차 함부로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후원자들과 손을 잡았거나.
이형은 전자의 경우는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판단했다. 물론 아편이야 당연히 재배 했을 테고, 아편을 이용해 어느 정도의 범죄 망을 구축한 상태겠지만, 그것이 중화제국까지 위협을 느끼는 수준의 규모가 되기는 어렵다. 이번 강남 기근 사태를 계기로 폭발적인 세력확장을 했더라도 이건 무리수가 많은 가정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편은 영국 홍차 놈들이 시장 공급 과잉 수준으로 팍팍 풀고 있었는데 뭘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태평천국 놈들이 뒤늦게 아편 밀무역에 뛰어들어봤자 이미 구석구석에서 재배할 놈들은 계속 재배하고 있을 테고 필 놈들은 계속 피고 있을 텐데 지금 태평천국처럼 상인들이랑 척진 놈들이 날고 기어봤자 이미 생산자도 유통망도 소비자도 확고해진 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내면 양쯔강의 기적이지.'
본의 아니게 영국의 아편 무역이 도움이 된 셈이었지만, 이형은 그렇다고 딱히 영국의 도움에 고맙거나 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중원 전역에 걸쳐 아편이 유행하여 태평천국 정도쯤 되는 세력 가지고서는 시장에 영향을 주기 어려울 정도로 마약 범죄가 흔해지게 된 근본 원인이 영국이었으니까.
'그럼 결국 용의자 놈들은 하나뿐이구먼. 우라질 러시아 놈들 같으니라고. 없는 살림을 쪼개서 어떻게든 판을 뒤집어 보겠다고 열심이군. 어차피 태평천국 놈들이 외국인 조계지 습격해봤자 죽어 나가는 건 러시아인은 아니다 이거냐.'
"「으아아!」"
"「마마! 정신 차리십시오, 마마! 거의 다 되었습니다! 마마!」"
참으로 심란하기 그지없는 날이었다. 이형으로서는 지끈거려오는 머리와 울렁거리는 가슴 중 어느 것부터 진정시켜야 할지 분간조차 가지 않았다. 산통이 한창인 황후는 문 너머에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데, 또 한편으로는 세계대전을 치를 궁리까지 해야 한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난산이었다. 수 시간째 비명만 들려올 뿐 응애응애 하는 울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그조차도 아직 알 수 없었다. 이형은 문득 얼마 전 세상을 등진 허계를 떠올렸다가, 애써 고개를 저어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형은 자신이 프랑스에 선전한 대로 독실한 천주교도였다면 하늘의 신이라는 존재가 지금 그를 도와주었을까 하는 생각을 불현듯 떠올렸다.
'그럴 리가.'
이형은 냉소했다. 전생에서와 달리, 환생이라는 초현실적인 경험을 한 이래로 신의 존재를 의심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믿게 된 것과 별개로 이형은 신이 정말로 종교에서 말하는 대로 선량한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독실한 신자들이 기도한다고 해서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현실은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은 모습일 터였다.
'그렇지만 뭐….'
"「흐, 흐으윽…으으으, 으아아-!」"
"…우라질,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나? 걍 지금부터라도 기름 부음 받고 성당이나 다녀? 아니, 이미 늦었나?"
이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가 머리 위에서 짓누르는 듯한 무력감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무력해 할 시간은 없었다. 당장 태평천국과 러시아, 중화제국이 협력하고 있다는 정황이 확실해진 이상 그 대처법을 짜내야만 했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가슴은 울렁거렸다.
정말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이었다.
"괜찮으십니까? 혹, 정 심란하시다면 당분간 국정은 관료들에게 미뤄두시는 것은 어떨는지…."
그런 이형에게 박규수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한눈에 봐도 이형은 그리 안색이 좋지 않았다. 박규수로서도 영원히 술과 약에 취해 날뛸 것만 같던 괴팍한 황제가 건강을 해치지는 않을까 난생처음으로 심려될 지경이었다.
"아니, 됐다. 이건 내 일이야. 당장 나라가 어지러운데 이 몸 어르신까지 주저앉아 버리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될 테지. 짐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야겠네."
이형은 손을 휘휘 저었다. 냉정한 현실 인식이었다. 이형에게 집중된 막강한 황권은 이형이 움직이지 않으면 대한제국 그 자체가 정지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좋건 싫건, 이형은 쉴 새 없이 대한제국이 나아갈 방향을 계속해서 제시해야만 할 의무와 책임을 지게 되었다.
박규수 또한 그걸 알고 있었기에, 차마 이형에게 더 이상 휴식을 권고하지는 못했다. 박규수는 눈을 질끔 감고서 깊이 한숨을 내쉬고서는, 화제를 돌렸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정했던 대로 청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황하 일대에 방위선을 구축합니까?"
"아니, 황하 방위선에 백성들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지금부터 백성들을 동원하여 급하게 방위선을 구축해봐야 별다른 도움도 안될 거야. 차라리 뤼순의 불란서 함대에 협력을 요청하여 군함들을 되는대로 배치해라. 적들의 도하를 완벽히 막아줄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지연시키는 정도는 충분히 해줄 테니까. 그 외에는 예정대로 진행하도록."
박규수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하 방위선을 사수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기나긴 황하강을 따라 백성들까지 동원하여 방위선을 구축해봤자 공사의 완성도는 현저하게 낮을 것이 분명하고, 괜히 백성들의 원망만 사게 될 뿐이었다. 차라리 황하는 함대를 동원하여 봉쇄한 다음 병사들을 배치해 상륙 교두 부를 준비하는 중화제국군을 방해하고 이따금 교두부를 포위하여 격멸하는 수준이면 족했다.
'그래봤자 최소로 잡아도 2, 300만 명은 뽑아낼 중화제국 놈들이 황하를 넘어 북진하는 것 자체를 막아내기는 어렵겠지. 우라질, 하다못해 철갑선 한 척만 있었더라면 황하 도하는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을 텐데.'
이형은 입맛을 다셨다. 물론 그간 여력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해군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했던 것이 부메랑처럼 돌아오고 있었다. 판옥선이나 구식 전열함 따위의 목제 범선들은 못해도 수백만의 육상병력과 가공할 포병전력이 동원될 황하 도하 전에서 격파되기 쉬운 표적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본격적인 기선들이나 신형 전투함들은 치고 빠지는 식으로 견제는 가능해도 그들 또한 강 건너편에서 퍼부을 가공할 화력에 노출된다면 그리 오래 견딜 수는 없을 게 분명했다.
황하는 분명 거대한 강이었지만, 바다가 아니었다. 강에 기름을 한가득 풀고서 불을 붙여 화공을 시도한다던가, 가공할 화약 소모를 각오하고 포격을 퍼붓다 보면 언젠가는 길이 뚫리게 되어 있었다. 열강에서 건조한 본격적인 철갑선들이라면 이런 공격에도 대수롭지 않게 견딜 수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범아시아 조약기구가 보유하고 있는 철갑선은 없었고 극동에 배치되어있던 열강의 철갑선들은 세계대전의 여파로 모두 철퇴한 다음이다.
"예비군들까지 소집하면 어림잡아 40만 정도는 모을 수 있겠지. 2만 정도는 연해주 쪽 대 러시아 국경선에 돌리고, 10만 명 정도는 만주에 주둔하면서 러시아 놈들이 남하할 경우나 최악 요하에서 최종 방위선을 구축할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청에도 적어도 25만 명은 몰아넣어야겠지. 다만 웬만하면 곳에는 청나라 놈들을 밀어 넣는 게 좋아. 청나라 놈들이 불평하겠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안봐도 되는 피해까지 감수할 필요는 없어.
대신 우리 한국군은 당장 방위선이 돌파될 염려가 있는 격전지를 전담한다. 피해가 늘더라도 2차 베이징 방위선만큼은 결사 사수 해야 해. 만주의 10만 명은 최후의 예비전력이야. 그 녀석들까지 실전에 투입되는 상황이 온다면 중화제국의 요구사항에 따라 중화제국과는 타협하고 노서아와의 전쟁에 전념하는 선택지도 고려한다. 만에 하나, 천에 하나라도 청나라를 잃게 된다면 하다못해 노서아와 계속 적대하면서 영미의 지원이라도 계속 받아야 해."
이형은 처음으로 패전의 가능성을 입에 담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최악의 가능성이었다. 이형은 중화제국이 제아무리 백성들을 쥐어짜며 전쟁을 준비해도 영국으로부터의 지원이 끊겨버린 이상 길어야 2개월 안에 공세한계점에 도달하리라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이면 미국의 증시시장도 안정되면서 한국의 전시 국채가 불티나게 팔려나갈 테고, 영국 또한 총선의 결과가 극동까지 반영 될 테니 본격적인 반격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설령 최악의 가능성이라고 해도 가능성은 가능성이었다. 전선의 병사들에게까지 알게 할 필요는 없더라도, 최소한 이형과 박규수 두 사람만큼은 이 최악의 가능성 또한 고려할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그 무게에, 박규수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알겠습니다. 그럼 3만 정도의 여유가 남습니다만,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건-."
"「응애! 응애! 응애-!」"
이형은 말을 다 마치지도 않고서 조건반사적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느닷없는 등장에 놀란 궁인들의 목소리나 모습은 이형의 시야 한켠도 차지하지 못했다. 아이를 낳고서 의식을 잃은 듯, 황후는 곤히 잠들어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형은 잠시 황후를 흘긋 바라보았다가, 곧장 아직 탯줄도 떨어지지 않은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아들이었다.
"똥구녕은 잘 뚫려있나?"
이형은 곧장 산파에게 질문을 던졌다. 또 이 괴팍한 황제가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구나-라고 만면으로 표현한 산파는, 깊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네에, 아무렴 그렇고 말고요."
그 대답이면 족했다. 이형은 무심코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아서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곁에서 황자의 출생을 축하하는 궁인들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하고서, 이형은 웃었다.
"「응애, 응애-!」"
아기는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저 자신이 전쟁의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기라도 한 듯, 아기는 이형의 품 안에서 울고 또 울었다.
그러나, 아기는 전쟁을 모르고 자라나리라.
그의 아버지가 다짐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