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140화 (140/530)

< 사면초가 >

"저게 도대체 무슨…!"

한순간 이홍장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껌뻑거렸다. 왜 느닷없이 폭죽이 터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황하가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대포알이 연달아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 전투가 벌어지려는 참이 아니던가. 만일 소문대로 한국의 황제가 지금 청에 들어선 상황이라면, 한국군 또한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다짜고짜 대포를 쏘는 것도 아니고 당장 강 하나를 두고 양군이 대치하고 있는 와중 갑자기 폭죽이 터진다?

'함정인가? 무언가 신호를 주려는 건가? 도대체 어디의 누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지? 수공인가? …아니, 그럴 리가. 그 황하를 틀어막을 둑을 쌓는다는 게 하루 이틀 정도로 가능할 턱이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퍼퍼펑-.

이홍장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저 폭죽의 의미를 해석하려 했다. 그 와중에도 폭죽은 계속되었다. 그 무렵에는 폭죽 소리를 대포소리라 착각하고 혼란에 빠져 이리저리 흩어지던 병사들도 하늘을 수놓는 총천연색의 화려한 폭죽에 놀라 제자리에 멈춰서 멍하니 하늘과 폭죽이 연달아 솟아오르고 있는 강 건너편만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로서도 하필이면 이 상황에서 폭죽놀이가 시작될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던 것이다. 물론 지금이 가을이며, 한창 추수기가 다가와 각지에서 제각각 축제가 한창일 무렵이기는 하지만, 지금이 어디 속 편하게 축제나 할 상황이던가. 당장 전쟁이 임박한 무렵에 느닷없이 폭죽이 터지기 시작하니, 무지렁이 농민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던 병사들조차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쩐 영문이냐! 모두 아는 대로 고하라. 간자들로부터 무언가 이를 암시하는 정보는 없었는가!"

"소, 송구합니다, 폐하. 소신 또한 그저 오랑캐 대칸이 전선에 나와 병사들을 고무시키고 있다고만 들었지 이와 같은 사달에 대해서는 전혀…!"

~♬

뒤늦게 지휘부에서 이 사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갑론을박이 시작되려 할 무렵, 폭죽이 조금씩 잦아들며 흥겨운 음악 소리가 강 건너편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전장에 어울릴법한 장엄 하고 위풍당당한 가락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장송곡을 연상케 하는 우중충하고 누군가를 추모하는 듯한 음침한 가락도 아니었다. 240만의 중화제국군 또한 귀에 익을 대로 익은, 풍년을 축하하는 축제의 흥겨운 가락이었다.

"당했다…!"

그리고 그제야 이홍장은 무엇이 시작된 것인지 뒤늦게 눈치챘다. 저들이 무슨 의도로 이런 짓을 꾸민 것인지, 앞으로 무엇이 시작될지, 훤히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이 늦은 다음이었다. 이제 와서 가락 소리가 두려워 병사들을 뒤로 물린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는 날에는 이홍장은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시시각각 상황은 이홍장이 예상했던 대로 진행되어갔다. 곧 강 위로 수만 개의 연등이 둥실둥실 흘러가기 시작했고, 용 문양으로 선체를 빼곡히 장식한 축제용 목재 유람선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며 횃불로 황하를 화려하게 밝혔다. 배 위는 춤을 추는 무용수와 악사들로 가득 차, 강 건너에서도 혹여나 배의 용도를 착각하지 않도록 분명히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더 늦기 전에 병사들을 어서 재워야 한다! 지금 이 수에 넘어갔다가는…! 아니, 아니지. 당장 강 건너에서 폭죽을 터뜨리고 풍악을 울려대는데 잠을 자려고 해도 선잠을 잘 수밖에 없다. 이제 와서 억지로 재우려고 해봤자 역효과야. 지금은-.'

"…군량미를 있는 대로 풀어라! 병사들을 지금 당장 배불리 먹여야 한다! 모두 취사를 준비하라. 어서 서둘러라!"

"네? 하오나 폐하, 이미 석식이라면 병사들에게 배불리 먹였…."

"그렇다면 야식이라도 먹여라! 짐의 말에 거역할 셈이더냐? 어서 서둘러라! 더 늦기 전에 병사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어리둥절해 하는 무관들을 윽박질러가며, 이홍장은 그들에게 야식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밤바람을 타고서 강 건너에서 지독한 기름 냄새가 풍기기 시작한 것이다. 절로 코가 벌름거리고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고기 기름 냄새였다. 당장 곡기를 채우는 것이 고작인 빈약한 식단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중화제국군으로서는 눈알이 절로 까뒤집히는 듯했다.

어디 코를 틀어막으려면 틀어막아 보라는 듯이, 밤공기를 타고서 건너온 고기 기름 냄새에는 팔각과 커민 등의 지독한 향신료의 향까지 뒤섞여 있었다. 아예 처음부터 향신료를 집어넣고서 고기 기름을 우려내 끓이는 것 같기도 했다. 공기마저 달게 느껴지는 달콤한 향기, 무언가를 튀기는 듯한 고소한 향기, 시고 맵고 짠 내. 무엇 하나 후각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 모든 향과 맛이 뒤섞여 밤바람을 타고 건너오니 뱃속에 대충 욱여넣은 짬밥 따위는 순식간에 소화되어 사라져 버렸다. 침이 절로 꼴꼴 넘어가고 위에서는 뭐 먹은 것도 없이 위산만 콸콸 나오니 속만 쓰렸다. 이홍장으로서는 미치고 팔작 뛸 노릇이었다.

"서둘러라! 당장 병사들에게 야식을 먹여야 한다! 먹일 것이 없다면 하다못해 물이라도 가득 먹여서 배를 채우도록 해야 한다. 어서!"

이홍장이 재차 고함을 지르자,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무관들이 서둘러 취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쌀을 씻어 밥을 지을 준비를 하고, 우선 되는 대로 채소나 이미 몇 차례고 우려낸 뼈 따위를 넣어 국을 끓였다. 하지만 그래 봐야 근본적으로 질적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240만에 달하는 정병들이었다. 그들 전부를 배불리 먹이려면 우선 식사의 질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축제로 병사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목적보다는 강 건너편의 중화제국군을 동요하게 할 작정으로 일부러 냄새가 지독하게 풍기는 생선 기름이나 향신료, 누린내가 나는 돼지기름 따위를 가지고 와서 냄새를 풍겨대고 있는 강 건너편의 한청 연합군이었다. 제아무리 호화스럽게 야식을 준비해도, 고작 해봐야 건더기 하나 없는 희멀건 기름국과 잡곡밥이 고작인 중화제국군으로서는 따라갈 도리가 없었다.

이미 농사를 망친 장강 이남과는 다르게 추수가 한창인지라 얼마든지 먹을 것을 구해다 병사들을 먹일 수 있는 한청 연합군과 당장 식량이 부족해서 화북을 침공해야 하는 중화제국군은 근본적인 조건부터가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가 났다. 결국 중화제국군은 아무리 야식으로 배를 채워도 괜한 침만 넘어가고 위액만 나오는 처지에 놓일 수밖에는 없었다.

"저, 저 오랑캐 놈들이 누구를 놀려! 누군 좁쌀이나 먹고 있는데 누구는 아주 그냥 황하에 배 띄워놓고서…!"

"참게, 참으시게나 이 사람아! 그런다고 어찌할 건가? 이 밤 중에 배도 없이 황하를 건너볼 텐가? 그러다가 물귀신 밖에 더 되겠나.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명령이 내려올 테니 그때까지 참으시게!"

그러자 당연히 중화제국군으로서는 절로 악에 받쳤다. 야식을 먹어도 배가 고프고 물을 마셔도 배가 고팠다. 한번 밤공기를 타고서 강을 건너와 진지에 무겁게 내려앉은 지독한 기름 냄새는 쉽게 지워지지도 않았다. 냄새를 무시하고서 억지로 코를 틀어막고 눈을 감고 잠을 자려고 해도, 배 위에서 무용수들과 악사들이 연주하는 신명나는 가락 소리가 신경을 벅벅 긁었다.

귀마저 틀어막고서 잠을 청하려고 하면, 이따금 폭죽이 터지면서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고는 했다. 가끔 폭죽이 아니라 황하를 순찰하는 군함들이 발사한 진짜 대포소리인 경우도 있었던지라 중화제국으로서는 무턱대고 귀를 틀어막을 수도 없어졌다.

"쏴라, 쏴라, 쏴! 저 개 같은 오랑캐 놈들에게 대포알을 두둑이 먹여주자! 어디 이걸 처먹고도 계속할 수 있나 보자, 이 개자식들아!"

퍼퍼펑-.

결국 참다못해 중화제국군에서 황하 위의 배들을 향해 대포를 쏘며 응사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래 봐야 실제로 대포가 유효사를 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날이 어두워 거리 가늠도 되지 않고 탄착을 보고서 포각을 수정하려 해도 강물 위에 퐁당퐁당 떨어지다 보니 탄흔도 남지 않았다. 쓸데없이 화약만 낭비하는 꼴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대포는 대포라, 대포소리에 놀라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았다기보다는 그저 위에서 시켜서 동원되었을 뿐인 무용수들이나 악사들이 위축되면서 가락 소리가 크게 잦아들었다. 결국 황하 위를 화려하게 수놓던 축제용 유람선들이 하나둘씩 횃불을 끄고서 어둠 속에 잠적하면서, 가락 소리도 함께 끊겼다.

"인제야 한숨 돌렸나. 저 찢어 죽여 마땅할 오랑캐 놈들. 하다 하다 이제는 이런 비겁한 수까지 쓰다니…!"

이홍장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번 일이 무슨 작정으로 걸어온 모략인지를 훤히 알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중화제국의 병사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역이용해서 악에 받치게 만들어, 군율을 무너뜨리고 수백만의 도적 떼로 전락시키려는 수작임이 분명했다. 당장 황하를 건너 건너면 전투를 서두르기보다는 약탈을 벌이도록 유도하면서 말이다.

그럼 중화제국은 그 순간부터 단순한 기근에 시달려 봉기한 농민 반군으로 전락한다. 말이 좋아서 농민 반군이지, 실상은 도적 떼다. 당장 청나라의 농민들부터가 애써 경작한 그해의 농작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중화제국에 맞서 적극적으로 저항할 것이다. 민심이 완전히 중화제국을 등지게 되는 것이다.

"폐하, 일선 병사들의 동요가 심상치 않습니다. 내일 새벽 날이 밝는 대로 다소 준비가 미흡하더라도 도하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는지요."

중화제국군 지휘부는 침통한 모습이었다. 이런 정신공격이 오늘 밤이 끝일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만큼 더욱더 그러했다. 물론 한청연합군 또한 물자가 무한하지는 않으니 그리 오랫동안 유지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240만 대군의 군량미가 떨어지는 것보다는 오래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장기전으로 갈수록 불리한 것은 당장 기근 직후라 모든 물자가 부족한 중화제국일 수밖에는 없었다.

이홍장은 이를 갈았다. 이래서야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절반 정도 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일 황하를 건너는 데에 성공한다면 당연히 이런 정신공격도 마무리되겠으나, 그러자면 병사들의 피해가 어마할 것은 둘째치고 강을 건너도 이미 눈이 돌아간 병사들이 대대적으로 약탈을 벌여 민심이 돌아설게 뻔히 예상되었다. 조기 승전조차 능사는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반군 출신 부대들에 배식을 줄이고, 그들을 전면에 내세워 우선 먹는 입부터 줄인다. 정예병들은 뒷줄로 돌리고, 그들만큼은 최대한 든든하게 먹여라. 설령 사고를 치더라도 어디까지나 되먹지 못한 반군 놈들이 저지른 일이 되어야지, 우리 중화제국에서 저지른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넷!"""

이홍장의 명령에 무관들은 군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 또한 이홍장의 계책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이홍장은 쓸쓸하게 웃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군말 없이 따라준다면 좀 좋았을까, 하고 자조하면서.

***

"생각했던 것보다는 대응이 빠르구먼. 이쪽에서 기름 졸이기 시작하자마자 연기부터 올라가는 거 보면 역시 저놈도 보통은 아니야."

망원경으로 황하 건너편을 구경하던 이형은 쓰게 웃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생각한 것 이상으로 대처가 빨랐다. 빈속에 기름 냄새만 한 15분에서 30분 정도 맡게 뒀으면 지금쯤 오밤중에 몰래 탈영해서 강을 건너오는 탈영병들로 가득했을 텐데, 병사들의 불만과 짜증이 폭발하기 전에 일단 뭐라도 배에 집어넣게 해주면서 당장 위기는 넘겼다.

물론 그래 봐야 효과가 어느 정도 줄었다뿐이지 전혀 동요가 없을 수는 없다. 첫날은 무난히 넘어갔지만, 둘째 날부터는 군량미를 걱정해서라도 조금씩 배식을 줄일 것이고 배식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탈영병들도 늘어날 수밖에는 없다. 결국 조금씩 내부로부터 무너져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형이 노리는 바이기도 했다.

240만에 이르는 대군 전부를 죽이기보다는, 알아서 흩어지거나 항복하도록 유도하여 인명피해를 줄이는 방법이었다.

"참으로 지독하십니다."

그런 이형의 모습에 질렸다는 듯이 공친왕은 혀를 찼다. 그로서는 점점 회한에 찰 수밖에는 없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수까지 쓰는가. 악에 받칠 대로 받친 도적 떼를 화북에 풀어놓으면 무고한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받을지 뻔히 알면서도 이런 수를 쓰는가.

물론 이로서 조기에 중화제국의 민낯을 내보이면서 조기 종전을 끌어낼 수 있을 테고, 궁극적으로 인명피해는 크게 줄어들게 되겠지만 결국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격이다. 그 잘려져 나가는 소의 백성들을 지켜야 하는 위정자로서, 제아무리 당장 청조가 위태롭다고는 하지만 이런 전략을 긍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조금씩 뒤로 물러날 준비를 하면 되겠군요. 그래서, 어디까지 내주실 생각입니까. 이대로 베이징까지 물러날까요? 허베이 평야가 활활 타오르겠습니다. 참으로 요순의 태평성세에 버금갈 지옥도가 아닐 수 없군요."

자연스럽게 공친왕으로서는 험한 말이 나올 수밖에는 없었다. 그로서는 이번 일로 이형에 대한 적의를 굳힌 뒤였다. 기실 중원에서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유자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중원의 백성들을 편하게 해주려고 하기는커녕 멋대로 이용하고 죽음에 내몰고 있는데 도대체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결국 조선도 양이 들보다 더하거나 못할 것 없는 금수의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요순의 태평성세에 버금간다는 것은 과찬이구려. 그러나, 짐은 황하를 지킬 것이라오."

이형은 그런 공친왕을 향해 태연하게 답했다. 공친왕으로서는 코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제 와서 성인군자 노릇을 해봐야 누가 속겠는가.

"꽤 거짓말에 능숙해지셨군요. 만주의 칸을 거두어 가겠다고 하셨을 때만 해도 거짓말은 체질이 아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글쎄, 기억나지 않는구려. 하지만 진심이라오. 짐은 이곳을 지킬 것이외다."

이형은 망원경을 내려놓으며 공친왕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이형으로서는 진심이었다. 딱히 성인군자 노릇을 할 생각도, 백성들을 사랑하는 애민 정신 지극한 성군 노릇을 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물러나서는 곤란했다.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한다. 말이야 좋지. 결국 어쩔 수 없이 소를 잘라내야 할 때도 있을 테고. 그 소가 어디까지 커지느냐가 문제일 뿐.'

소수민족, 장애인, 고아나 과부들, 서민층, 부유층, 지식인, 특정 지역, 특정 종교, 특정 정당과 그 지지세력.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나 사회에서 잘라내야 할 소수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이 19세기와 20세기의 시대적 광기였다. 공산혁명, 군사혁명이라는 대의 아래 살해당하고 함께 살아서 추모하지 못하고 죽어서 추모 당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무고한 이들의 시산혈해로 더럽혀진 시대.

그 선례를 만들어서야 곤란했다. 앞으로 어떤 정치세력이 아시아에서 유행할지도 뻔히 아는 상황에서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라지만 무고한 백성을 승리의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선례를 만드는 순간, 극단주의자들에게 얼마든지 소수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는 대의명분을 안겨다 주는 격이다. 전쟁을 위하여 십수만 명 정도의 민간인 희생도 괜찮았는데 인민 모두의 지상낙원을 위하여, 조국과 민족의 순수성을 위하여 수십만 명 수백만 명 쯤 죽이는 게 대수겠는가?

"범아시아 조약기구라는 국제기구를 세워 아시아를 품에 안겠다 하였다면 적어도 같은 아시아인은 마지막까지 지킬 각오로 버텨야지, 그럴 각오도 없었으면 처음부터 식민지나 세워서 고혈이나 쪽쪽 빨면 그만이잖소. 포기한다면 버티고 버티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가 되어야지, 처음부터 물러날 작정으로 싸울 생각은 없소이다. 짐은 가능한 한 마지막까지 이곳을 지킬 거요."

"말씀은 그럴듯합니다만.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 240만을 상대로 고작 70만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이형의 말에 공친왕은 냉소했다. 결국 말뿐이라고 여긴 탓이었다. 그러나 이형은 불편해하는 기색도 없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내일은 종일 노래나 해볼까 하오만."

"…노래입니까?"

"그렇소. 노래요. 혹, 초나라 가락을 들어본 적 있소?"

이형은 입꼬리를 뒤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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