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148화 (148/530)

< 천하의 중심 >

"거 담담하게도 가셨군그래."

목이 잘려 머리만 남은 이홍장의 머리채를 붙잡아 들어 올리며, 이형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공포에 질려서 운다던가 반대로 역정을 낸다든가 하는 뭔가 격정적인 반응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보는 입장에서 당황할 지경으로 공허하고 무미건조한 얼굴로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니 되려 찝찝하기만 했다.

다양한 생각이 이형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별로 기분 좋은 생각들은 아니었다. 이형으로서는 이홍장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기도 했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하여 신세를 망친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역사에 왕조교체기에 흔히 나타나는 역적 중 한 명 정도로 취급당할 걸 알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졸지에 극악무도한 악인의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 격이다. 그의 본래 행보를 아는 입장으로서, 특별히 인간상이 바뀐 것도 아닐 텐데 그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형은 고개를 저어 그런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결국 이 또한 패자의 숙명이었다. 힘이 부족하여 대업을 이루지 못한 채 누명을 쓰고 쓰러져간 영웅호걸들 따위, 지난 반만년 간의 역사 중에 어디 한두 사람이던가.

"역적 이홍장은 죽었다! 당장 항복하라!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머릿속에서 지우고서, 이형은 하늘 높이 주인 잃은 머리를 들어 올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패배하여 누명을 쓰고 사라지는 것 또한 숙명이라면, 패자가 사라진 후의 천하를 온전히 수습하여 흘러야만 할 피의 양을 조금이라도 줄이려 노력하는 것은 승자의 의무였다. 다른 말들보다 배 이상 커다란 바둑이의 등 위에 올라 하늘 높이 머리를 치켜든 이형의 모습은 단숨에 병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와아앗! 폐하께서 역도를 베셨다! 대한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폐, 폐하! 폐하께서 쓰러지셨다! 저, 저 오랑캐 놈들이 기어이…!"

연합군은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고, 중화제국군은 비탄에 빠졌다. 그때까지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서 항전을 계속하던 중화제국군 병사들은 그제야 모든 희망을 잃고서 무기를 손에서 놓아버리고 말았다. 병사들은 일제히 공황에 빠져 망연자실했고, 일부는 울음을 터뜨리고 일부는 비명을 지르는 와중 지천을 울리는 함성만이 전장을 가득 메웠다.

중화제국군은 마침내 모든 항전 시도를 포기하고서 패주하기 시작했고, 중기병대는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더욱 날뛰며 혼란을 가중했다. 조직적인 후퇴 시도는 중기병대의 적극적인 방해로 좌절로 돌아갔고, 느슨하게나마 하나의 군으로서 존립하던 중화제국군은 공포에 사로잡혀 무질서하게 도주하는 수백만 명의 군중으로 전락했다.

중기병대는 포로를 잡으려 하지 않았다. 단지 큰소리를 내고 아무렇게나 총기를 난사하면서 혼란을 한층 가중했을 뿐이었다. 일부러 위협적인 소리를 내지르거나,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총을 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그들의 역할은 충분했다. 중화제국군의 행동 양상은 이 시점에서 제자리에 엎드려 자비를 구걸하거나 등을 보이고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로 귀결되었다.

"아까운 탄약을 낭비할 필요도 없다.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무기를 버리고 제 자리에 엎드려라! 그렇다면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마!"

"사, 살려주십시오! 그저 배가 고파서 그랬습니다! 배가 고파서 그랬어요! 제, 제발 목숨만…!"

"알겠으니까 무기를 버리고 엎드려!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교전 의사라고 간주하겠다! 당장 무기를 버리고 엎드려라, 이 자식들아!"

한성근의 지휘에 따라 전장에서 질서정연하게 후퇴하던 한국군이 돌연 반전하여 전장에 복귀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가장 먼저 좌우로 산개한 경기병대가 퇴각하던 중화제국군의 진로를 가로막았고, 뒤따라 오던 보병들은 전장에서 달아나려 하던 중화제국군 보병들에게 총구를 겨누며 항복을 강권했다. 포병들은 직접 포탄을 퍼붓기보다는 공포탄을 터뜨리며 전장에 혼란을 퍼뜨리는 데에 일조했다. 이미 전의를 잃고 도주하는 병사들에게 포격을 퍼붓는 것은 뒷말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무기를 버리고 제 자리에 엎드리는 이들은 가만히 내버려 두었지만, 반대로 끝까지 무기를 버리지 않으려 하거나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면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이러한 대처법은 얼핏 잔학해 보였으나, 결과적으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면 살 수 있고 무기를 버리지 않으면 죽는다는 인식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그 즉시 우두머리를 잃은 중화제국군은 무기를 버리고서 투항하기 시작했다. 반쯤 억지로 끌려온 것이나 다름없었던 병사들은 물론이었고, 그들 나름의 소명 의식과 책임감, 야망 등으로 무장하고 있던 무관들도 더 이상 항전해봐야 희망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서 망연자실하여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엎드려! 움직이지마, 이 자식아! 일어나서 도망치려고 하면 쏘겠다! 살고 싶으면 일단 닥치고 엎드려!"

"가, 가진 건 이 곡괭이밖에는 없어요! 제,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이거 잊어버리면 집에 어떻게 돌아가서 처자식들을 만난단 말입니까…?"

"제기랄! 이 짱꼴라 새끼는 도대체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거야? 못 알아듣겠으니까 일단 무기를 버리고 엎드리라고! 옆에 놈들 하는 거 안보이냐!"

"제발!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제발!"

그러고 나면 전열을 이루고 보병들이 진군하여 무기를 수거했다. 어디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수갑을 채우거나 밧줄로 묶는 등의 절차는 생략되었다. 족히 수배에 달하는 포로들 하나하나를 관리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한국군의 목표는 일단 무기를 포기하게 하여 무장해제 시키는 것이었지, 그들 전부를 도망칠 수 없도록 포로로 사로잡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무기를 버리고서 자리에 엎드렸다가 한국군이 지나쳐가면 빼꼼 고개를 들고서 주위를 살피다가 한국군이 돌아오기 전에 뒤도 보지 않고서 도망쳐 버리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한국군 또한 이런 이들은 따로 추격하려 하지도 않았다. 다시 무기를 들고서 도망치려 하면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겼지만, 무기를 포기하고서 몸만 남은 채로 도망치는 정도는 보지 못한체했다.

물론 그런데도 여전히 무기를 들고서 도망치려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는 이들이 챙겨온 무기가 단지 무기가 아니라 농기구인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농부들에게 얼마 안 되는 철제 농기구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산이었고, 이들은 한국군에게 노려지는 위험을 무릎 쓰고서라도 농기구를 수거하여 도망치려 했다.

"에라이, 십헐! 진짜 아침부터 종일 뭐 빠지게 뛰어다니고 있구먼! 야그들아, 어서 빨리 해치우고 잠이나 자러 가자! 술이고 밥이고 그게 뭐 대수더냐. 그저 이럴 때는 잠이 최고의 포상 아니겠냐! 끼랴앗!"

"""휘릭, 휘릭 끼요오옷!"""

"으, 으아악! 가, 가까이 오지마! 이, 이 오랑캐 놈들아…!"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의 경우 전장을 배회하던 경기병들의 추격을 받게 되었다. 다만, 이들의 추격 또한 완벽하지는 못했다. 당장 최후에 최후까지 아껴두고 있었던 중기병들과는 다르게 경기병들은 전장의 소방수로서 종일 전선 이곳저곳을 뛰어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말이 다리가 풀려서 바닥을 나뒹굴거나 탈진하여 게거품을 물고 주저앉는 일들이 왕왕 벌어지던 마당에 사람이라고 그리 멀쩡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 이들 또한 계속 한 사람만 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당장 사방팔방으로 아무렇게나 패잔병들이 흩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누구는 무기를 들고 있고 누구는 무기를 들고 있지 않은지 확인하면서 최대한 많은 패잔병을 사살해야 했는데, 사람도 기진맥진하여 머리 위로 소금이 서리고 말은 게거품을 물던 와중에 그게 말처럼 쉬울 리가 없었다.

결국 경기병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절대 적지 않은 수의 패잔병들이 무기를 들고서 전장에 이탈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매우 높은 확률로 장차 화북의 치안 불안 요소로 작용하게 될 터였다. 청으로서는 당장 수백만의 중화제국군에게 나라가 망하거나 화북 전체가 초토화되는 것은 피했으되, 십수만 명의 잠재적인 도적 떼를 수용하게 된 격이었다.

가까스로 전장이 수습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강 너머에서 아직 건너지 못했거나 도하 중이던 중국군은 그대로 뱃머리를 돌려 황하 이남으로 도망치고, 이미 강 너머로 건넌 병사들만 수습했는데도 그러했다. 종일 좌우로 수십 킬로미터를 넘는 전장을 왕복하면서 전선의 소방수로 뛰고 또 패잔병들을 수습하던 경기병대는 기절하듯이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렸고, 후퇴하는 채 하였다가 다시 또 전장에 복귀하면서 수 킬로미터를 행군해야 했던 보병대도 탈진해버렸다.

실로 기나긴 하루였다. 그러나 여전히 할 일은 끝나지 않았다.

"보고드립니다. 총원 25만 6천여 명 중 중 전사자 2천, 부상자 2만 6천, 행방불명자 8천여 명으로 현재 행방불명자들의 신원은 파악 중입니다!"

"아마 저 시체 더미 밑에서 기절해 있거나 알지도 못할 곳에서 죽어있겠군, 쯧. 전사자들은 어쩔 수 없으되, 부상자들은 최대한 빨리 구조하여 후방으로 이송해라. 지금은 한 사람이 아까운 상황이니."

"넷!"

한성근의 보고에, 이형은 작게 혀를 찼다.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행방불명자 대부분은 이미 전사했음이 분명했다. 설령 목숨이 붙어 있었다고 해도 전투 중에 방치되면서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온몸으로 뒤집어썼을 텐데, 당장 의식이 나갈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입은 와중 그런 냉기는 생명 유지에 더 없이 치명적이었다. 전투 중에는 목숨이 붙어있었더라도 지금은 이미 숨이 끊어진 다음일 것이다.

자그마치 하루에 3만 명이 훌쩍 넘는 병사들을 손실한 셈이었다. 노련한 이홍장에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하여 정말로 패색이 짙을 무렵을 골라 후퇴해야 했던 탓이었다. 이형으로서는 입맛이 썼다.

"헌데, 청군의 피해는 어떻지? 멀리서 보아도 꼴이 말이 아닌 것 같던데."

"어림잡아서 10만 명 넘게 잃은 모양입니다. 정확한 피해는 아직 파악 중입니다만, 전투가 끝난 이후에도 부대에 복귀하지 않고서 탈영한 이들도 적지 않아 집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허, 참. …뭐, 하기야 오늘 싸우는 꼬락서니를 봤으면 지긋지긋해서라도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도 하지."

이형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한성근 또한 그런 이형의 심정에 공감하듯,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동맹군이라는 자들이 도움이 되기는커녕 발목만 잡는 꼴이었다. 오늘 전투의 경우 청군이 정말로 패퇴해버리는 바람에 역으로 이홍장에게 의심 받지 않고서 일시적으로 퇴각하였다가 의표를 찌를 수 있었지만, 이래서야 도대체 어떻게 한 전선을 믿고 맡길 수 있겠는가.

그저 함께 싸우면서 청군의 전투 양상을 관찰하면서 청군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만이 소기의 성과였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졸전을 반복하는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을 때와는 달리, 이제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대충 감이 잡히는 듯했다.

'단일군을 포기하고서 다시 만주족 귀족들로 이뤄진 친위군과 한족으로 이뤄진 육군으로 나누던가, 아니면 아예 신분제를 타파하고서 만주족들과 한족들을 대등하게 대우하는 것밖에 없나. 전자는 민족주의에 기름을 붓는 격이고, 후자는 동화를 거부하는 만주족들의 반발을 사겠군. …어느 쪽이건 장인어른 모가지가 성할 수가 없겠는걸. 이거 함부로 손댔다가는 청나라가 망해버리겠어.'

이형으로서도 난처하기 그지없는 문제였다. 만주를 빼앗긴 청이 살아남으려면 이제 완전한 한족 국가로서 변모하는 수밖에 없는데, 막상 화북에 이주한 만주족들이 한족들에게 동화되기를 거부하면서 신분적 우위를 근거로 저항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이번 전쟁에서 청군은 대수술을 거칠 필요가 있음을 온몸으로 증명했다. 눈앞의 적보다 족속이 어디냐를 두고서 아군끼리 다투고 있는데 그런 군대가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함부로 손을 댔다가는 어느 한 편을 들어 다른 한편을 탄압한다는 인상을 주어 한족과 만주족 둘 중 하나는 확실하게 적으로 돌리게 된다. 양측 모두를 만족하게 할 수 있는 타협안이 없는 이상, 근시일 내에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기란 불가능했다. 이형은 결국 이 문제의 해결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포로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침 추수기라 군량미가 넉넉해도 저 많은 포로를 언제까지고 먹여 살릴 수는 없습니다만…."

"그야 물론 둔전을 만들어 봄부터는 지들이 농사지으면서 먹고 살게 해야겠지. 한 이틀 정도 휴식을 취했다가 황하를 건너 화중 땅으로 가세나. 그곳에 포로들, 아니. 이제는 백성들인가. 그래, 백성들을 정착시키고 밭을 갈게 시켜야겠지. 기근으로 빈 농지는 썩어 넘칠 테고, 아직 추수되지도 못하고서 알알이 익은 농작물도 많겠지. 이제 재앙은 끝났어. 그럼 누군가는 저들을 일상으로 돌려보내 줘야겠지."

이형의 대답에, 한성근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또한 유자로서 이형의 대답은 실로 타당했고, 정론에 가까웠다. 앞선 기근에 의한 난민사태로 이미 청나라는 포화상태나 다름없었고, 거기에 수십만 명의 포로들을 추가로 밀어 넣는 것은 수용 가능한 인구를 능가하는 난민들을 밀어 넣는 격이었다. 체제 붕괴로 청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 이상에야 포로들을 정착시킨다면 최선은 장강 이남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고, 그나마 차선은 가까운 화중 땅에 정착시키는 것이었다.

"난징 상륙전은 이제 항복을 받으러 방문하는 꼴이 되어 버렸군.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그 쯔음이면 이미 진작에 강남까지도 소식이 전해 졌을 테니. 아무튼 이걸로 마침내 손에 넣었어."

"네? 무엇을 말씀입니까?"

"보면 모르겠나?"

낄낄거리며 웃음 짓는 이형의 모습에, 한성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짚이는 구석이 전혀 없었다기보다는, 짚이는 구석이 너무 많아서 그중에서 무엇을 손에 넣었다는 것인지 맞장구를 쳐줄 수가 없던 것이다.

그러나 이형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한성근이 생각하고 있던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물론, 이 중원의 천명을 말이지."

"아하, 과연. 참으로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이제 곧 태산에 올라-."

"그래, 축하해야 할 일이지. 마침내 이 중원의 천자를 천조 질서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고작 해봐야 국가원수로 격하 시키는 데에 성공했어.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나?"

"…네?"

예상치도 못했던 대답에, 한성근은 눈을 껌뻑거렸다. 하지만 이형은 여전히 태연한 모습이었다. 말을 실수한 것도, 표현을 잘못 고른 것도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제야 그 말의 속뜻을 깨닫고서, 한성근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온 천하가 대칸의 권위 아래 무릎 꿇었다. 천조 질서는 그대로 빼앗아오되, 더 이상 중원의 천자는 천조 질서의 수장이 아니지. 그저 일개 번국의 우두머리일 뿐이다. 아니, 그전에 천자라는 것조차 이제 불필요하겠군.

그래, 한 준장. 원하는 나라라도 있는가? 그대라면 내 기꺼이 초왕 정도는 봉해줄 수 있다네. 아니면 제왕이나 조왕은 어떤가? 그대가 원한다면 저까짓 사교도 놈들을 쓸어버리고서 진왕에 봉해줄 수도 있네만."

"폐, 폐하.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소신으로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전혀…."

"보이는 대로고, 말하는 대로지. 이로써 중원의 천명은 이 손안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그 천명을 어떻게 사용할지 또한 짐의 자유겠지. 다른가?"

이형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소금에 절인 이홍장의 수급을 발 아래에 두고서, 그의 등 뒤로는 황룡의 깃발이 타오르고 있었다.

황하를 배경으로, 황룡이 불타 사라지고 있었다.

"더는 중원의 천자는 천하 만민의 어버이가 아니요, 대초원의 대칸이야말로 천하 만민의 어버이일지니. 이제부터는 우리 대한이야말로 천하의 중심일지라."

이형은 입꼬리를 뒤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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