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149화 (149/530)

< 초승달 >

'물론 천하를 이 동아시아로 한정하였을 경우의 이야기지만.'

이형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한성근을 비롯한 현 대한제국 절대다수의 시야로 보았을 때는 여전히 극동 아시아야말로 세상 전부였으니 멋대로 천하의 중심은 한국이 되었다고 자부한 것뿐, 세계 전체를 천하라고 본다면 한국은 여전히 세계의 변두리였다. 고작 해봐야 세계의 변두리에 지나지 않는 동아시아의 우두머리가 된 수준을 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던가. 산업혁명 이후로도 한동안 여전히 세계 경제에서 절대 지분을 차지했던 동아시아가 아니던가. 아편 전쟁 때까지도 여전히 청나라는 그 대영제국과 경제 규모에서 맞먹는 수준이었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병들고 썩어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럼 단순히 규모만 거대한 수준을 넘어서 질적인 향상까지 달성한다면, 얼마든지 동아시아 세계는 천하의 중심으로 돌아갈 수 있다.

여전히 동아시아의 전체 인구는 인도를 제외한 나머지 세계 전부를 압도하고 있고, 인구가 곧 국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나 많은 인구는 그 자체로서 성장 잠재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열강들의 세력이 많이 축소될 앞으로의 세계에서 동아시아를 발아래에 두는 것은 그 자체로서 세계의 패권을 논할 첫걸음을 디디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직은 고작 해봐야 지역의 패권을 거머쥔 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내 세대에 최소한 국제질서를 형성하는 하나의 축으로서 인정받는데 성공한다면, 내 다음 세대에는 구대륙의 패권을 논할 수 있을 테고 그다음 세대에는 세계의 패권을 논할 수 있게 된다. 후사를 이을 장남도 얻었어. 그렇다면 이제 멀리 봐야겠지.'

이형은 그의 시야 멀리에서 펄럭이고 있는 삼족오의 깃발을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본래는 봉황으로 하려다, 그럼 봉황의 색깔에 맞추어 찬란한 붉은색의 군복을 입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난리를 칠 것이 뻔해서 일부러 눈에 잘 띄지 않는 흑갈색 제복에 맞추어 국조도 삼족오로 정했었다. 그런 뒷배경이 있는 만큼, 대단한 자부심이나 자긍심을 느낄 수는 없었다. 다만, 무거운 책임감만은 느낄 수 있었다.

현시점에서 대한제국을 상대로 체급 면에서 확실하게 뒤처지는 주변국은 대만과 유구 왕국뿐이다. 현 대한제국의 인구만 해도 북독일 연방과 맞먹는 수준이라지만, 막상 바로 옆 나라 일본만 해도 프랑스와 맞먹는 수준이다. 중원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만주고 몽골이고 티베트, 위구르, 대만 전부를 잃은 지금의 중원이라도 하나로 합쳐져 충분한 투자를 받으며 내부개혁을 거친다면 금세 대영제국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형이 구태여 중원의 천명을 거머쥐고서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대신 천명 그 자체를 파괴하여 본래 하나였던 중화제국을 복수의 왕국으로 쪼개려는 까닭이었다. 이런 식으로 쪼개놓지 않는다면, 한국의 동아시아 패권은 후세에라도 다시 하나가 된 중국에 노려질 테니까.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하다못해 인종도 다르던 중원이다. 기회가 오면 흩어지려 했던 것도 당연한 수순이지. 그런데도 한자라는 공통된 문자를 제외하면 공통점 그 자체가 드문 이들이 한족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흩어지면 다시 합쳐지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두 가지. 우리들이야말로 천하의 중심이라는 자긍심과 그 자긍심을 뒷받침해주던 찬란한 문화, 그리고 흩어질 때마다 반복된 난세.'

전자의 경우는 어쩔 도리가 없다. 실제로 반만년 간 황하 문명이 천하의 중심이라 자부할만한 자격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천문학적인 부와 인구를 독점한 초대형 제국이 천명 교체기의 혼란상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혼란 없이 수백 년씩 몇 번씩이고 이어졌으니 당연한 노릇이다. 앞으로 한국이 천하의 중심으로서 이를 능가하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하지만 후자의 해결책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금 당장 이형조차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천하가 여럿으로 나누어질 때마다 혼란이 일어난 까닭에 분열을 두려워한다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혼란이란 무엇인가. 질서가 없기에 발생하는 것이 혼란이 아니던가. 그럼 혼란을 잠재우려면 질서를 만든다면 그만이다.

"결국 난세는 질서가 없으니까 난세이지. 질서를 유지해줄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면 더 이상 난세는 난세가 아니다. 사소한 분쟁은 힘에 짓눌려 무마되거나 교정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해결책은 간단하지. 힘을 손에 넣은 이 몸 어르신께서 바로 그 질서가 되어준다면 그만이야."

이형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황하의 강 바람을 받아 나란히 나부끼는 삼족오의 깃발과 태극기를 등진 채, 이형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자신만만할 수 밖에는 없었다. 그는 이처럼 강력한 힘이 곧 질서가 되어 마침내 안정된 세상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다는 표현조차 부족했다. 지금은 본디 그런 세상이었으니까.

벨 에포크, 그 좋았던 시대. 19세기 후반 유럽의 평화기를 말하는 단어였다. 통칭 비스마르크 체제라고도 불리는 평화기였다. 유럽은 로마 제국 붕괴 이후 최초로 근 반백 년 가까이 열강 간의 정면충돌 없이 평화로웠고, 모든 전쟁은 유럽 바깥의 세상에서 식민지 쟁탈전 도중에 이뤄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영제국이 압도적인 힘을 손에 넣은 와중, 비스마르크의 독일 제국이 이에 협력하여 유럽의 질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벨 에포크의 파괴는 독일제국이 영국의 힘을 빌린 질서를 넘어서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고 했을 때 발생했다. 두 질서가 상충하면서 다시 난세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말은 2차례의 세계대전이었고, 그 끝에 독일이 세계패권에 도전할 여력을 상실하고 영국 또한 세계패권을 유지할 국력을 상실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대립 구도인 냉전이 형성되었다.

그러니 대단할 것도 없었다. 비스마르크 체제를 고스란히 동아시아에 이식하면 그만이었다. 그 좋았던 시대를, 자그마치 반백 년 간에 걸쳐 어떠한 전쟁도 없었던 평화기를 한국의 힘으로 실현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번 전쟁의 승리로 한국은 이를 실현하는 데에 필요한 힘을 손에 넣었다. 힘이 손안에 들어온 이상, 이형이 해야 할 일은 그저 비스마르크를 대신하여 한국이 주도하는 질서를 구축하는 것뿐이었다.

"그걸 위한 범아시아 조약기구다. 그걸 위한 국제협력기구들이야. 중원의 천명은 내 손으로 파괴하였고, 이 동아시아 전역을 제멋대로 쥐락펴락할 힘도 내 손안에 들어왔으니, 남은 것은 그저 나의 힘으로 나의 질서를 이 천하에 강요하는 것뿐이다!"

이형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한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저녁노을이었다. 그것은 곧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였다. 지금, 이 순간, 이형은 마침내 자신의 손안에 천하가 들어왔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먹은 것도 없이 배가 절로 그득해지는 듯했다. 그야 배가 부를 수밖에 없었다. 천하를 통째로 집어삼키고서도 배가 부르지 않으면 그게 어디 사람이던가?

그러니 배가 부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배가 부르다면 끝이던가. 아니다. 밥그릇을 손에 넣었다면 이제 철밥통을 지킬 궁리도 해야 했다. 그리고 이형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그에게는 반면교사들도 넘치도록 많았으며 참조할만한 훌륭한 선례들도 많았다.

'국제연맹 체제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대영제국이 더 이상 단독으로 세계의 패권을 유지할 수도, 그렇다고 영국을 도와 세계패권을 유지할 대체재를 찾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국제연합 체제가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영국을 대체하여 세계의 패권을 거머쥔 미국이 영국이라는 자신의 세계패권을 도울 협력자를 발견했기 때문이고.

일제의 대동아 공영권이 실패로 돌아간 까닭은 크게 세 가지. 하나는 식민 해방의 기치를 세우고서는 막상 점령지의 현지 주민들을 식민지로서 대우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외교관들 대신 군인들을 내세워 침략자라는 인상을 준 것, 마지막은 대동아 공영권에 가입해봤자 그 이익은 일본만 독식했지 회원국들에는 어떠한 대가도 돌아가지 않아 조약기구에 남아 있도록 힘으로 찍어누르지 않는 한 일본과 계속 손을 잡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 '

그렇다면 현시점에서 한국에 필요한 것은 크게 4가지였다. 하나는 한국이 자신의 힘만으로 지속해서 패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힘을 기르는 동시에 한국을 도와 질서를 유지 시켜줄 협력자를 찾는 것. 힘을 길러주는 것은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고, 협력국이라면 일본이 유력했으나 일본의 경우 언제든 한국의 수중에서 벗어나려들 위험이 있었으므로 확정 지을 필요는 없었다.

두 번째는 범아시아 조약기구라는 제도적 장치를 준비한 시점에서 해소된 셈이었다. 굳이 식민지나 자치령, 보호국 따위의 알기 쉽고 직접적인 통치수단을 동원할 필요 없이 회원국이라는 형태로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덕분이다. 범아시아 조약기구의 이름을 빌려 각국의 지지를 받아 인권 침해나 평화 유지 등의 명분을 들어 간섭한다면 각국으로서는 이를 뿌리칠 방법이 마땅치 않을뿐더러 상대적인 거부감도 옅어질 수밖에 없다.

세 번째는 문민 통제의 문제였다. 군인들이 국방의 의무를 넘어서 본격적으로 정치에 간섭할 때 발생하는 폐단이었다. 이 문제는 사실 이형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연이은 승전과 근대화로 군인들의 지위가 높아졌을지언정 조선은 여전히 문관들의 나라였고 유자들의 나라였다. 이형 또한 그것을 구태여 바꿀 생각도 없었다. 민족주의의 힘을 등에 업은 정치군인들의 등장은 당장 황권과 황실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것이 분명한 이상 이제부터는 군인들의 폭주를 억누를 문관들의 존재가 절실했다.

네 번째는-.

"밥 먹고 사는 문제지, 뭐."

이형은 허겁지겁 밥을 먹어치우고 있는 중국군 포로들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족히 백만여 명의 밥을 한꺼번에 짓다 보니 저 멀리까지 밥 짓는 냄새가 모락모락 풍겨서 도망쳤던 포로들이 밥 냄새를 맡고서는 무기를 버리고 돌아와 항복해버리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고 있었다. 이번 전쟁이 벌어진 원인은 결국 밥 먹고 사는 문제였던 만큼, 이는 필연적이라 할 수 있으리라.

결국 인간 또한 동물인 이상 먹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가 될 수밖에는 없었다. 중화제국은 내부로부터의 부패와 외부로부터의 간섭으로 이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무너진 셈이었다. 사람이 사는 문제는, 곧 경제는 언제나 국가를 지탱하는 가장 두터운 주춧돌이었다.

그리고 이 경제 문제는 이형으로서도 문외한에 가까운 분야였다. 그저 막연하게 어떤 식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방향은 제시할 수 있어도, 구체적인 과정은 제시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만은 알았다.

"무턱대고 쥐어짜면 우리는 잘살지 몰라도 저 녀석들은 당장 경제가 파탄 날 테고, 그럼 쟤들은 모든 걸 수탈해가는 우리들을 원망할 테지. 물론 가장 많은 이익을 보는 건 우리가 되어야겠지만, 쟤들도 뭔가 얻는 게 있어야 계속 우리와 거래할 생각이 들지 않겠남. 그걸 위한 범아시아 조약기구고. 그런데…우라질, 이것도 결국 방향성이지 구체적인 방법은 아니군.

어디 믿고서 쓸만한 놈 없나? 카네기 그 녀석은 솔직히 제 잇속만 챙길게 뻔해서 믿을만한 놈이 못 되는데. 아니 솔직히 말해서 이 시대 자본가 놈들치고서 인성이 제대로 박힌 놈이 한 놈도 없잖아. 재벌 오너들 불러와도 카네기 패거리들보다는 선량할 걸. 하나같이 참된 혐성의 개자식들뿐인데 함부로 신뢰할 수가 있겠나."

이형은 입술을 비죽 내밀고서 투덜거렸다. 유학자들은 관료나 맡겨야지 함부로 경제에 손을 대게 만드는 순간 지난 수천 년간 이어져 온 향촌 사회를 그대로 유지하려 할게 뻔하고, 그렇다고 함부로 이 시대의 기업가들을 초빙해왔다가는 경제 주권을 빼앗기거나 수탈의 반작용으로 공산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서구의 이름난 경제학자들을 초빙해오려고 하니 그들이 구태여 범아시아 조약기구를 택할 이유가 없으며, 열강들의 손을 빌린다면 그건 한국 주도의 질서가 될 수 없다.

군인들에게 맡기는 건 처음부터 논외고, 한국의 상인들에게 맡겼다가는 이들도 당장 아는 게 없고 근대적 무역 경험이 일천하여 도움이 되기 어렵다. 이형으로서는 한숨만 절로 나오는 듯했다.

"알아서 잘 먹고 알아서 잘 커 주면 좀 좋아."

이형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미 해는 저물고, 저 지평선 너머에서 천천히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앞으로 채워야할 것만 가득한 초승달이었다.

***

한편, 그와 같은 시기.

솔즈베리 후작 로버트 게스코인세실은 그 무렵 전권대사로서의 순방을 마치고 막 영국에 돌아온 참이었다. 그로서는 썩 뒷맛이 좋지 않은 순방 일정이었다. 장차 영국의 패권에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잠재요소를 만나게 된 까닭이었다.

'그나마 어떻게 손 쓸 도리조차 없이 성장하기 전에 그 싹수를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인가. 불행 중 다행으로, 늦지 않을 수 있겠군.'

그렇게 한숨을 내쉬며, 로버트는 영국에 도착한 그 즉시 벤저민 디즈레일리 보수당 당수를 마주하러 갔다. 그 무렵에는 조기 총선도 예정되었던 대로 보수당의 압승으로 마무리된 다음인지라, 디즈레일리에 의한 보수당 내각이 들어선 다음이었다.

"그래, 돌아왔군! 정말로 잘 해주었네. 덕분에 일이 뜻대로 풀릴 수 있었어! 그리고 마침 또 자네가 필요하던 참이라네. 자, 어서 자리에 앉으시게. 하고 싶은 말들이 정말로 많다네!"

디즈레일리 수상은 영국에 돌아온 로버트를 성심성의껏 환대하였다. 이미 로버트가 영국에 도착하기 전 대한제국과의 밀약에 대하여 기록된 밀서가 디즈레일리에게 전달되었던 덕분이었다. 물론 해당 밀서에는 어디까지나 이형의 발상이 아니라 로버트가 주도적으로 거래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디즈레일리로서는 극동 순방 일정 동안 보수당의 조기총선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해준 로버트의 술수를 경계하는 그 이상으로 진하게 볼에 키스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러한 디즈레일리의 환대는 로버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 또한 정치인으로서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입을 다무는 것이 그의 향후 정치 인생에 더욱 도움이 될 것이라는 건 알았지만, 당장 한국에서 목격하게 된 장차 대영제국의 세계패권을 위협할 불안 요소에 대하여 말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결국 로버트는 참지 못하고서 진실을 이야기하려 했다.

"각하, 거기에 대하여 드릴 말씀이-."

"어허, 잠시 기다리시게 이 사람아. 지금은 내 쪽이 더 볼일이 급할 테니까. 아무래도 자네가 또 수고해줘야 할 일이 생겼어."

그러나 디즈레일리는 로버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로버트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디즈레일리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그의 입을 틀어막을 정도로, 중대한 사태가 벌어졌다는 암시였다.

땅이 꺼져라 깊이 한숨을 내쉬고서는, 디즈레일리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할 거라 생각하나?"

"…표정이 심상치 않으시군요. 설마하니, 바게트가 벨기에를 침공하였습니까? 혹은 빈이 함락되기라도 한 겁니까? 그도 아니면 이미 베를린이 함락되어 전쟁이 끝나려고 하고 있습니까?"

"그거라면 자네가 이미 이곳까지 오는 동안 신문을 통해서라도 알게 되었겠지. 이건 당분간 대외적으로 공표될 수 없는 사안이야. 밀라노가 함락되었고, 롬바르디아의 철관이 합스부르크의 손에 들어갔네.

베네치아 임시정부와 프로이센, 바이에른이 오스트리아의 주최로 부다페스트에서 비밀회담을 가졌던 것이 목격 되었어. 조만간 프랑크푸르트에서 합스부르크의 대관식이 이뤄질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왔고, 교황령 반환을 명분 삼아 대립 교황 후보를 물색 중이라더군."

로버트는 한순간 할 말을 잃었다. 디즈레일리가 차분하게 나열하는 일련의 상황은 한가지 정황을 암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버트의 동요에 아랑곳하지 않고서, 디즈레일리는 말을 마무리 지었다.

"본인은 대영제국의 수상으로서 라인란트의 독립 인정 및 보오전쟁 이전으로의 회귀를 조건으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평화를 주관할 작정이네. 만일 프랑스가 라인란트를 완충지대로 삼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기어이 프로이센을 멸망시키려 한다면 프랑스와의 전쟁도 각오하지.

프로이센이 쇠락한 이상, 프랑스의 독주를 막으려면 우리 영국과 프랑스, 오스트리아 3개국이 각각의 축으로서 유럽 대륙의 균형을 유지하는 수밖에 없어. 물론 겸사겸사 러시아의 발칸진출은 당연히 저지해야겠지. 만일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의 협력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들 또한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따끔한 맛을 볼 각오를 해야 할 걸세."

로버트는 아릿한 현기증에 한순간 균형을 잃고서 휘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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