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한 편이 내 편 >
"이보게, 그 소식 들었는가? 아니, 글쎄 황하에서…."
"허허, 아니 이 사람아. 이미 진작에 다들 알고서 그 이야기만 하고 있던 참이네. 정말이지 뒷북치는 걸로는 일가견이 있는 친구야, 그래! 자, 어서 앉으시게나. 마침 우리들도 할 이야기가 많았으니."
"결국 이렇게 되는구먼. 에잉, 역시 지금의 천하는 오랑캐들의 세상인가 봐. 또다시 몽골 놈들의 세상이 왔구먼 그래, 쯧쯧쯧."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했던가? 전투의 결과는 삽시간에 온 천하에 퍼져나갔다. 여전히 전통적인 세계관에 익숙하던 절대다수의 동아시아인들이기에 오히려 누구보다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황하에서의 전투가 어느 쪽의 승리로 마무리 되느냐에 따라서 향후 누가 천하의 주인이 되느냐가 갈리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적법한 대칸은 있었으되, 적법한 천자는 없었던 천하였다. 유자라면 누구나 난세라고 한탄할 수밖에는 없었다. 베이징을 떠나 도망친 천자는 더 이상 천자라고 불러줄 수 없고, 난징의 황제는 천하 통일의 의무를 포기하고서 베이징을 목전에 두고서 회군한 바 있었으며 현시점에서 가장 적법한 천자에 근접했던 한성의 황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스스로 천자가 되기를 고사하고 있었다.
혹자는 그것을 그의 장인어른인 공친왕은 천자로 추대하기 위함이라고 추측했다. 실제로 그것은 제법 현실성이 있었으며 또 타당한 추측이었다. 이후 자신이 선양을 받아 정식으로 천자가 되건 아니면 그대로 애신각라 황조의 중원 통치를 인정하건, 이형의 장인 되는 공친왕 혁흔이 먼저 제위에 오르게 되면 이후 이형으로서는 정당한 명분을 얻으면서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
따라서 이형이 마침내 이홍장을 꺾고서 그의 목을 베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중원의 한족들은 체념하건 기대를 품건 간에 공친왕의 제위 즉위 내지 이형의 제위 즉위를 당연한 수순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형의 선택은 달랐다.
"황관이 제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사람의 머리는 하나뿐이니 결국 하나면 족할진대, 두 개를 써봐야 그저 천하에 자랑할 뿐일지라. 짐은 이미 대칸으로서 제위를 손에 넣었거늘, 이제 와서 천자의 제위가 대관절 무슨 소용이리오? 그러니 결국 짐에게 있어서 천자의 면류관은 쓸모가 없는 황관이니. 하나, 황제는 천하에 한 사람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천하에 황제가 둘이 있어봐야 공연히 천하를 둘로 나누어 서로 다투고 시기하게 할 뿐일 저. 짐이 선언하건대, 천하에 더 이상 중원의 천자는 없으며 오로지 대초원의 대칸만이 유일할지어다. 따라서 대초원과 중원의 구분은 이 순간 의미를 잃었으니, 천하의 황제는 오로지 짐만이 유일하며 오로지 우리 대한만이 천하의 정당한 주인이라 할 수 있으리라.
짐은 천자를 폐하고, 천하를 9개로 쪼개어 번왕들로 하여금 이를 다스리도록 하겠노라. 한때 낙양이 그러했으며 후일 장안이 그러했고 오늘날 북경이 그러했듯이 장차 천하의 중심은 한양이 되리라."
황하에서 승리를 거둔 직후, 이형이 내린 포고문이었다. 이는 중원 전체에 크나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홍장을 꺾고서 마침내 태산에 오를 정당한 권리를 획득하고서도, 태산에 오르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천자가 될 힘과 명분을 손에 넣고서도 자신이 면류관을 쓰지도 다른 누군가를 추대하지도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뿐일까. 그러면서도 황제는 자신만이 유일하다고 선언하면서 다른 누군가가 황제를 참칭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한때 몽골 제국이 그러했듯이 중원 전역을 발아래에 두고서 통치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천하를 나누고 번왕들로 하여금 이를 다스리게 하겠다고 했다.
다시 말하여, 천자라는 직위 그 자체를 파괴하고서 천하를 다시 하나로 합쳐 통치하지도 않을 것이며 도리어 나누어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요컨대 분열을 고착화해버리겠다는 것이었고, 이는 천하의 유자들을 경악시켰다. 천명을 이어받아 자신에게 도전할 만한 힘을 기른 도전자들을 모조리 꺾은 제왕이 천하를 평안하게 만들기는커녕 난세를 만들겠다고 떠벌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설마 작금의 난세를 즐기고 계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그렇다면 진정으로 폭군이라는 말조차 부족할 것입니다! 정 우리 청조가 다시 천하를 통일하는 것을 보지 못하시겠다면 이럴 바에야 차라리 우리 청조를 멸해 주십시오. 그리고 폐하께서 제위에 올라 천하를 통치하여 주소서! 이따위 난세가 몇 년이고 몇십 년이고 계속 이어지는 꼴을 볼 바에야, 차라리 그편이 나을 것입니다! "
"워워, 뭘 그렇게 흥분하고 있는 게요? 내가 언제 난세를 계속 유지 시키겠다고 말했소? 짐은 그저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것뿐이라오."
"새로운 질서라. 그렇지요. 끝없는 난세와 분열과 전쟁으로 쌓아 올린 죄 없는 백성들의 피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해골 옥좌의 공포 또한 질서겠지요! 누구 하나 그 힘에 감히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할 테니까 말입니다! 공포 위의 질서라니, 정녕 그것이 폐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까? 폐하께서는 그저 이 땅의 백성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어서 제왕이 되신 겁니까!"
청군은 황하 이북에 남겨두고서 난징으로 남하할 채비를 하던 이형에게 얼굴을 붉힌 공친왕이 달려온 것은 거의 포고문을 발표한 직후의 일이었다. 한눈에 봐도 이성을 잃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만큼 이형의 선언은 충격적이었고, 불길한 미래 암시를 내포하고 있었다. 공친왕은 당장 경비병들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대도라도 뽑아 들고서 이형의 막사에 뛰어들 기세였다.
그러나 이형은 어디까지나 태연했다. 당연히 이처럼 반발할 것이라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접한 한국의 유자들이야 어째서 굳이 일부러 천자가 될 기회를 포기하고서 천하를 나누는 이형의 결정에 의아함과 아쉬움을 느낄지언정 어차피 중원은 남의 나라 일이니 조용하겠지만, 공친왕은 이형이 현재로서 접할 수 있는 중원의 대표적인 유자였다.
분열과 난세가 계속될 때마다 수십, 수백만 명의 백성들이 죽어 나가던 무수한 선례를 기억하는 중원의 유자들에 분열을 장기화시키고 고착화하겠다는 이형의 발상은 결코 수용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는 없었다. 굳이 평화를 거부하고서 난세를 택하는 꼴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그들로서는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호전광 마귀가 전쟁을 즐기면서 죄 없는 백성들을 희생시키려 든다고 여길 수밖에는 없었다.
"난세는 이제 곧 끝날 거요. 내 장담하리다. 천하는 새로운 질서에 순응하게 될 것이고, 오히려 나뉘고 난 다음이 더 평화로운 천하가 찾아올 수도 있을 거요."
"도대체 어떻게 말입니까? 제왕이 되고자 하는 자들이 어디 천하에 한둘인 줄 아십니까? 폐하께서도 사서를 읽으셨다면 아시잖습니까. 분열은 반드시 난세로 이어졌다는 걸 말입니다. 아니, 난세이기에 분열되었는지도 모르지요. 천하를 평화롭게 만들 힘과 기회를 손에 넣고서, 어찌 구태여 난세를 택하십니까!"
"그렇지. 제왕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겠소? 그러나, 그대 또한 양이들과의 전쟁에서 청군이 얼마나 무력했는지도 보았을 거요. 그때 양이들의 군대는 소수였지만, 청군은 결국 베이징을 내주고서 퇴각해야만 했소. 그리고 그대는 또한 이번 전쟁에서 우리 한국군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을 테지. 자, 감히 말하리다.
그대가 생각하기에, 우리 한국군이 양이들과 같은 경지에 다다르기까지 몇 년이나 필요할 것 같소? 양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십만의 강군을 상대로 진정으로 그깟 야심가 나부랭이들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소?"
이형의 태연한 언사에, 공친왕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한마디로, 자신에게 도전하는 모든 야심가를 힘으로 때려눕히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가능할 것이라는 걸 공친왕은 이번 전쟁을 통해 똑똑히 목격했다. 사실상 우방인 청군이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조차, 한국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를 앞세워 밀고 들어오던 중화제국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나마 동아시아에서 한국군 다음으로 근대화되어있었던 이홍장의 친위군조차 끄끝내는 이형이 이끄는 흉갑기병대의 말발굽 아래 무릎 꿇고 말았다. 그리고 장차 새롭게 봉기하게 될 소위 야심가들은 지금의 이홍장보다 약체일 수밖에는 없다. 그들에게는 이홍장만큼의 재력도 세력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군이 패할 까닭이 없다. 이형은 그렇게 믿고서 자신만만하게 선언한 것이다. 자신이 주도하는 새로운 질서에 감히 도전하고자 하는 이들은, 힘으로 때려눕히면 그만인 것이라고.
"경은 지금껏 짐이 무엇을 해왔는지 기억하시오?"
"…무엇을 말씀입니까?"
이형은 대뜸 뜬구름을 잡았다. 공친왕은 경계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형을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그동안은 단지 양이들이 하는 것 마냥 청을 이용하여 제 잇속만 챙기려 한다고 여겼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 아예 중원을 통치할 생각도 없으면서 이리저리 간섭하고 제멋대로 주물럭거리려 한다는 것이 분명해진 까닭이었다.
청의 섭정왕이기 이전에 그 또한 중원의 위정자로서, 공친왕은 결코 이형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공친왕의 경계를 읽고서, 이형은 코웃음을 쳤다.
"범아시아 조약기구 말이오. 짐이 그것을 통해 무엇을 이루려고 했으며 무엇을 이루었는지 알고 있소?"
"의무를 방폐하고서 천자의 힘만을 휘두르셨지요. 다릅니까?"
"비슷하지만, 다르오. 그리고 그것뿐이 아니지."
이형은 콧노래를 부르듯 가볍게 말했다. 공친왕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공친왕을 향해 이형은 태연하게 답했다.
"그대도 알다시피 천하의 농업을 다룰 기구를 만들어 한양에 설치했지. 여전히 농업이 국가 경제의 절대 지분을 차지하는 작금의 천하에서 이들의 권한은 곧 각국의 경제를 조율하는 것이나 다름없소. 학술교류와 문화교류를 담당할 기구를 만들어 또한 한양에 설치했으며, 이들은 장차 각국의 교육 정책을 조율하며 천하에 우리 조선말을 가르치고 조선 문화를 퍼뜨릴 것이며 신식학문을 익혀 장차 나라에서 중히 쓰일 인재들에게 조선인 스승을 두도록 만들겠지.
또 통합군을 설치하여 각국이 독자적으로 군사력을 행사할 재량을 빼앗았으며, 투자은행을 설치하여 각국이 우리 한국에 돈을 꾸도록 하여 독자적으로 산업화를 시도할 여지를 거세했소. 분쟁 해결기구는 각국의 무역분쟁을 공정하게 판결해주는 역할인데, 분쟁이 원만하게 해결된다는 것은 체제가 안정된다는 것이고 체제가 안정되면 한번 강해진 자는 계속 강해지고 약한 자는 계속 약한 형국이 될 수밖에는 없소."
이형은 한마디 한마디, 노래하듯이 말했다. 그리고 이 한마디가 한마디가 흘러나올 때마다, 시시각각 공친왕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갔다. 그제야 이형의 노림수를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늦은 다음이었다. 장차 10년만 지나도 이와 같은 체제는 그대로 새로운 질서로서 굳어질 것이고, 지금 중원은 향후 10년 안에 한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도전할 여력을 상실했다.
"대초원과 중원의 구분을 없애고 천하를 하나로 합치겠다고 하였지. 그것이 단지 허풍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오. 짐은 진심이외다. 곧 온 천하가 우리 한국을 중심으로 뭉치게 될 것이오. 시대가 변하였고, 그럼 천하를 지배하는 질서도 달라질 때가 온 거지. 더 이상 중원의 천자는 없소. 중원 또한 없지. 그러나 안심하시오. 난세는 끝났소. 굳이 힘들여서 다시 하나로 합치려 애쓸 필요도 없을 거요. "
이형은 입꼬리를 뒤틀었다. 공친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둑하니 선 공친왕을 내버려 두고서, 이형은 황하를 건넜다. 저항은 없었다. 한때 이홍장의 휘하에 있던 군벌들이 일제히 9명의 번왕 중 혹시 자신이 들어갈 수 있을까 하여 다투어 이형에게 무릎 꿇은 덕분이었다. 물론 그들이 정말로 이형에게 충성을 바치려고 무릎을 꿇었을 리는 없었다. 그들 모두 장차 중원의 천자가 되기 위하여 하나의 통과점 정도로 밖에는 여기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형은 그들의 착각을 굳이 정정해주지 않았다. 정정해줄 필요도 없었다.
그들 모두는 후일 이형에게 10년이라는 시간을 준 것을 후회하게 될 터였다.
***
"대한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으, 으하하…! 정말로 대단하신 분이야. 우리 대한에서 대단하신 분이 나왔어! 아니, 몸소 전장에 나서 직접 역도의 목을 베다니! 이게 관성제군께서 되살아나신 게 아니라면 무엇이겠나!"
"아이고, 아이고 맙소사! 나는 아직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도 가지를 않아. 아니, 우리 조선이 언제부터 이런…. 어허허!"
한편, 그 무렵.
대한제국은 축제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이형이 봉건제를 시행하여 중원을 9개로 나누겠다고 한 것에 투덜거리는 선비들조차, 어디까지나 중원을 통치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것에 대해 아쉬움에 불평하는 것이지 이번 승리에 부족함을 느껴 불평하는 것은 아니었다.
거리에서 사람이 모이면 만세 소리가 당연하다는 듯이 터져 나왔고, 매일 같이 흥에 겨워 잔치가 벌어지는 통에 거리에는 술이 남아나지를 않았다. 학생 신문들은 매일 같이 승리를 축하하는 애국주의적 기조의 기사들을 쏟아냈고, 이번만큼은 대한일보도 결코 이에 뒤지지 않는 용비어천가를 보여주었다.
오히려 전근대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구시대적인 인물일수록 이번 승리에 열광했다. 천명대전에서 정정당당하게 승리했다는 것이야말로 천운이 한국과 이형에게 따르고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하늘의 상제가 천하를 다스릴 재목으로서 다름 아닌 조선의 왕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로서는 열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즐거워하는 건가요?"
"보면 모르느냐? 우리 대한이 천하를 발아래에 두게 되었으니 그러는 거지! 으흐흐, 정말이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아암, 오래 살고 볼 일이지! 살다 보니 정말 별의별 일이 다 생기는구나!"
그러나 이에 어울리지 못하고서 어리둥절해 하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그의 아버지가 왜 저렇게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는지, 거리에 사람들이 왜 매일 같이 잔치를 벌이면서 축하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좋은 일이라는 건 알아도, 소년은 저들의 기쁨에 공감할 수 없었다.
"『승리, 또다시 승리! 아, 황제 폐하! 세계로 뻗어 나가는 우리 위대한 한민족을 이끌어 주소서! 민족과 겨레를 위하시는 그 헌신에 목매여….』"
'이상한 사람들이야. 나라가 잘된다고 자기들 신세가 바뀌는 것도 아닐 텐데.'
땅에 떨어진 신문을 주우면서,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근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호외라면서 뿌리고 간 흔하디 흔한 애국주의적 민족 신문이었다. 소년이 가장 먼저 한 생각은 허술하다는 것이었다. 대충 롤러로 문댄 탓에 글자들이 이중으로 겹 인쇄된 것은 물론이오, 눈에 확 들어오도록 큼지막하게 인쇄된 기사 제목과는 정반대로 내용은 똑같은 어구만 반복되는 주제에 글자는 쓸데없이 작고 문단 구분도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서술한 탓에 읽기도 난해했다.
아직 중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소년이 봐도 엉망진창인 글이었다. 도대체 어째서 이런 찌라시에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소년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공연히 종이가 낭비될 뿐이 아닌가.
하지만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소년에게 소소한 것이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한가지,
'이용할 수 있겠어.'
소년은 히죽 웃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나라가 지금 상승세를 탔으며 지금 이 나라에 가장 흥하고 있는 건 애국이고 민족주의자라는 것만은 알게 되었다. 그럼 이용하면 그만이다.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멍청이들이 넘쳐나는 지금의 세상은, 소년의 눈으로 보기에 당장이라도 이용해달라고 다 같이 아우성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민족을 위해서 나라에 돈도 바치고 목숨도 바치려고 했지. 그럼 저 멍청이들을 속여서 나라 대신 나에게 돈과 목숨을 바치게 할 수도 있겠네. 지금부터라도 연습하면 나중에 출사한 다음 두고두고 쓸 수 있겠어."
"음? 뭐라고 했느냐, 완용아."
"아뇨, 아무것도요."
소년, 이완용은 해맑게 웃어 보였다.